●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10906i | 김병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4_0405_금요일
기획 / 세지화랑
관람시간 10:00am~06:00pm 점심시간_ 01:00pm~02:00pm 월요일 휴관
세지화랑 SEJI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4길 27 B1 Tel. 070.4242.7905 @sejigallery
Face-to-come ● 김병진 작가의 신작 「MAKING FACES」 작품 시리즈는 만들어지는 얼굴을 보여준다. 켜켜이 겹쳐진 면들이 모종의 얼굴 표정을 만들어내고 한마디로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형태는 그나마 분명한 색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얼굴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에 약간의 힌트를 줄 뿐이다. 김병진 작가의 새로운 작품은 그동안 선 작업이 주를 이루었던 그의 작업 방식과는 다르게 다층적 면으로 구성되었다. 예전 작업에서 무수한 선이 복잡한 수수께끼 같은 느낌을 주었다면, 이제는 좀 더 간결한 형태만큼 더 많은 설명을 거두어 버렸다. 이전에 작가의 작품을 볼 때 많은 이야기 속에 비밀이 하나를 찾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예쁜 색의 종이 한 장을 건네받고 그 위에 글을 써야 하는 숙제가 놓여진 듯 보는 이를 더 어렵게 한다.
도래할 모습을 환대하기 ● 필자가 글의 제목을 'Face-to-come'이라 한 이유도 이런 의미이다. 'to-come'은 본래 자크 데리다가 환대를 이야기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환대는 지금 이미 있지만, 언제나 아직 아닌 형태로 도래하는 것이라 말한다. 데리다는 타자인 손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를 할 때에 우리는 그 손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한다는 것은 알지 못함의 영역을 끊임없이 열어두며 타자 고유의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언젠가 도래할 모습으로만 존재하기에 영원히 알 수 없는 그 찝찝하고 불안정한 상황을 계속 참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없음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미 있지만, 언제나 아직 아닌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 이런 타자의 존재는 만나는 것은 마치 김병진 작가의 만들어지고 있는 얼굴을 보며 느끼는 우리의 감정과 비슷하다. 타자의 얼굴을 보며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그 얼굴을 가진 대상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그 불확실함과 불분명함 속에 느껴지는 불편함은 애써 컬러풀한 색으로부터 받은 느낌과 인상으로 위안된다. 누구나 살면서 느껴봤을 타자라는 존재는 김병진의 만들어지고 있는 얼굴처럼 이미 내 눈앞에 있지만 아직 모르는 미지의 도래할 모습으로 공백의 빈공간만을 선물할 뿐이다.
의미의 주체화 ● 김병진 작가의 「MAKING FACES」는 마치 어린 시절 구름을 보고 얼굴 모양을 짐작했던것과 같은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를 경험하게 한다. 불분명한 형태를 자신의 방식으로 식별하고 파악하고자 하는 유사성에 대한 확인이자 알 수 없음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잠재우는 심리적 위안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인간 주체는 자신이 판단하고 의미를 확정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얼굴은 어떠한 사람을 파악할 때 가장 먼저 가장 확실한 정보를 준다. 그 얼굴의 표정은 보이는 것으로 그 얼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는 것으로 제공되는 의미화 될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최초이자 강력한 정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만나는 수 많은 타자들은 나의 판단과는 항상 어긋나며 그 속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고통을 느낀다. ● 사람들은 마치 연극에서 사용된 가면(persona)를 통해 개인(personal)이 되는 단어의 유사성과 같이 얼굴은 정보의 집합체이면서 동시에 개인을 보여주는 장이 된다. 질 들뢰즈도 말한 것처럼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얼굴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 기능으로서의 유기체적 신체인 얼굴이 아니라 표정을 가지고 의미의 기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얼굴은 미적인 판단의 요소가 되기도 하고 눈, 코, 입의 조화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보는 이에게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언어라는 기호 체계와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언어적 체계에 사람들은 얼굴의 표정을 작동시키며 코드화 된 인간이 된다. 이것은 공간에서는 코드를 통해 주체와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특징을 질 들뢰즈의 언어로 치환하자면 '안면성/얼굴성(visagéité)'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어 진다. 머리를 가진 동물과 다른 특징이 바로 인간에게는 언어적이고 사회적이고 의미화와 주체화를 만들어내는 얼굴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에게 얼굴을 신체의 하나의 일부로서가 아닌 그 이상의 함의를 만들어내고 있는 탈영토화된 공간이라고 말한다.
암호적 표면 공간 ● 김병진 작가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여러 레이어의 면들은 우리에게 이해가능한 여러 면을 제공하는 암호같은 것이다. 시시각각 달라지고 만들어지는 얼굴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여러 면을 가진 인간을 해석하고 타자를 마주하는 공간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미술의 긴 역사 속에서 무수한 인물화와 인물사진은 대부분 대상의 얼굴에 주목해왔던가. 사람을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얼굴, 미적인 기준에 적용되는 얼굴의 생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큰 지점인 얼굴 이 모든 얼굴의 요소들이 신체 중 얼굴에 부여되는 의미이다. 주체의 자발적 표현인 표정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게 하는 여러 정보를 담은 공간이자 하나의 기호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신체 내부 장기처럼 자신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드러내는 표피로서, 발화의 근원으로서의 얼굴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라봐지기도 하지만 내가 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을 가장 많이 의식하게 만드는 것도 얼굴이고 타인에게 가장 먼저 빨리 노출되는 것도 얼굴이다. ● 그런데 김병진 작가의 「MAKING FACES」라는 이름의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 이 얼굴을 가만 보고 있자니 완성되어 가는 만들어짐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에 대한 이해의 완성을 계속 유예하게 하게 하는 만들어짐이라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코드화 된 의미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코드를 계속해서 해체한다. 이 작품을 처음에 봤을 때 우리에게 주는 듯한 정보는 이내 켜켜이 쌓인 면들로 인해 교란된다. 그리고 이 면들은 이중적인 면들을 계속 생산해내며 우리의 결정과 판단을 유예시킨다. 모든 의미화의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행위는 의미의 생성을 막는다.
그 누구도 아닌 ● 이분법적 얼굴의 구분은 여자와 남자, 백인과 유색인 등을 나누고 차이를 통해 유형화하는 폭력적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앞서 필자가 의심했던 결정불가능성을 동반한 김병진 작가의 얼굴 만들기는 이러한 얼굴을 구분하고 유형화 하는 행위에 반대하는 듯하다.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은 한편으로 비의미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인데 처음에 바라보았던 김병진 작가의 만들어지고 있는 얼굴은 생성의 얼굴인 동시에 의미화를 거부하는 해체적 얼굴임을 이내 깨닫게 된다. 이것이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내내 알 수 없는 불분명한 어떤 느낌을 주는 이유였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타자를 환대하며 이야기했던 도래할 어떤 공간이자 해소되지 않은 미지의 공간으로 남는다. 어쩌면 김병진 작가는 사회의 체계에 은근한 도발을 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의미화의 저편에 남겨진 폭력에 대항하며 작업을 통해 소심한 반란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아무 말도 없는 얼굴 표정으로 말이다. ■ 김주옥
Vol.20240403e | 김병진展 / KIMBYUNGJIN / 金炳眞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