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30515c | 최순민展으로 갑니다.
최순민 블로그_blog.naver.com/csm627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최순민 초대展 2024_0401 ▶ 2024_0531 관람시간 / 10:00am~11:00pm
갤러리카페 봄 GALLERY CAFE BOM 경기도 과천시 가일로 15-3 (갈현동 354-3번지) 1층 Tel. +82.(0)2.502.0606 @gallerycafebom_official
MERAKI 2 초대展 2024_0514 ▶ 2024_0519 관람시간 / 11:00am~06:00pm
아트로직 스페이스 ARTLOGIC SPACE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28(안국동 63-1번지) 1층 Tel. +82.(0)2.735.7955 www.artlogicspace.com
최순민의 조형세계 - 조형의 변주를 이끌어가는 오각형의 이미지 그리고 '아버지의 집' ● 현대미술의 가장 큰 공로는 재료를 개방시켰다는 데 있지 않을까. 캔버스 위에 그 무엇을 부착하더라도 하등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수백 년 동안 캔버스를 채워온 기름 물감, 즉 유채의 영역에서 벗어나 마침내 세상의 그 어떤 물질도 용인하게 된 건 현대미술의 가장 큰 성과이지 싶다. 재료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을 때 작가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고 무한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게 된다. 현대미술이 세상을 장악하게 된 건 창의성을 부추기는, 다양한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 최순민의 작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흔한 표현으로 재료의 백화점이라는 표현이 억지스럽지 않다. 유채 물감이야 그렇다 치고, 아크릴 물감은 물론이요, 오일파스텔, 돌가루, 물감의 원료인 안료, 레진, 그 밖의 오브제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판화용 동판을 부착하고, 잡지를 절단한 자잘한 종이 파편들로 콜라지 하는 일도 적지 않다. 여기에다 작업 도구는 붓 이외에도 여러 가지 동판화 도구와 커터 칼을 사용한다.
그러고 보니 이들 재료 및 도구 가운데 그림 외적인 용도로 쓰이는 것들이 많다. 그리기, 즉 묘사기법과는 다른 결과물을 얻기 위해 선택된 도구들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그리기라는 드로잉 또는 묘사중심의 그림과는 접근방식이 다른 것이다. 재현적인 그림에서 마치 실제처럼 보이도록 착각하게 만드는 일루전은 실상을 빙자하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게 된 이후 그림은 일루전의 오랜 습속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표현기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 그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유채 물감 이외의 다른 재료를 이용했을 때 단지 새로운 재료의 개입만으로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니 현대회화는 부단히 새로운 재료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는지 모른다. 기존의 작품과 다른 조형세계를 추구하는, 창작의 윤리성을 신봉하는 현대회화는 마치 거대한 용광로와 같다. 무슨 재료든지 새로운 표현이라는 전제 아래 제한 없이 흡수하고 작품을 토해낸다. 따라서 캔버스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그 결과물을 제한 없이 용인하게 됐다. 그리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짐짓 화려하고 거대한 현대미학의 탑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재료를 조건 없이 수용하는 현대미학에 매료되어 새로운 재료의 탐색에 나섬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늘과 같은 작업과 조우하게 되었다. 오브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형태의 공업생산품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회화에 적합한 형태로 재가공하는 방식으로 캔버스에 풍부한 표정을 곁들였다. 파쇄기로 자잘하게 자른 잡지와 같은 종이 파편을 캔버스에 나열하는 방식으로 빼곡히 채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판화용 동판을 바느질하듯 꿰매어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캔버스는 물감과 오브제가 뒤섞이면서 그림이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복잡하면서도 두텁게 보이는 화면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 재료는 조형적인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무슨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물성에 맞는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이 모색되기 마련이다. 오브제를 도입하고 다양한 표현기법을 응용하는 과정에서도 한가지 놓치지 않은 점은 회화적인 공간이었다. 그 어떤 재료를 이용하고 방법적인 새로움을 가져오더라고 궁극적으로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으로 귀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켰다. 그러기에 어떤 재료를 이용하더라도 회화로서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회화로서는 당연시할 일이지만, 이를 망각한 그림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일까. 그는 재현적인 그림과는 다른 방식으로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한다. 유채물감이나 아크릴물감과 같은 회화적인 재료와 함께 오브제를 이용하는가 하면, 새로운 재료의 고유한 물성을 표현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데 아이디어를 집중시켰다. 물감 이외에 돌가루나 안료, 그리고 레진과 같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표현적인 가치로 바꾸어 놓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구조적으로 견고한 화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 그에게 캔버스는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촉매일 뿐이고, 온갖 재료를 사용하여 캔버스가 지닌 본래의 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유채물감만을 허용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남으로써 캔버스에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형태의 그림이나 형식과 내용이 공존하지만, 그의 그림에 담기는 내용은 시각적인 이미지 외에 여러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서의 특성, 즉 물성과 관련한 이야기들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작품에는 마치 오래된 흙벽이나 시멘트 건물과 같은 질감이 드러난다. 손끝으로 만져도 그 질감이 느껴질 만큼 도톰하게 올라온 화면은 유채물감과는 확연히 다른 물성으로서의 가치를 제시한다. 단지 질감만을 얻기 위한 게 아님을 말하려는 듯, 화면은 두터우면서도 부드러우며 곱게 보인다. 그렇다고 흙손으로 마무리한 듯싶은 매끄러운 질감은 아니다. 흙 또는 시멘트를 여러 차례 반복해 바르는 가운데 형성되는 질감의 견고함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 이러한 화면의 표정은 돌가루를 비롯하여 오일파스텔, 레진 등 화면에 물질을 쌓아 올리는 듯싶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흙벽을 바르듯 덧쌓는 방법으로 차근차근 덮기를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물질감과 함께 질감이라는 표정을 얻는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축적되고 손의 노고가 쌓이는가 하면 정신 및 감정의 깊이가 형성된다. 단순히 물질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작업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여러 감정 및 의식이 개재됨으로써 시각적으로만 인지하기 어려운 심도가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면에 불러들이는 것은 몽당연필 모양의 오각형 이미지이다. 마치 창문처럼 보이는 오각형의 이미지는 몽당연필의 이미지와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오두막과 같은 집이다. 집으로서의 모양을 극단적으로 압축하고 단순화한, 끝이 뾰족한 오각형 모양의 집에는 그 하나하나에 적합한 이야기가 담긴다. 인물이 있고, 풍경이 있으며 기하학적인 이미지들이 기거한다. 그 이미지 대다수는 추억의 곳간에서 끄집어낸 것들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파편처럼 조합되면서 단편적인 이야기가 생긴다. 커다란 화면에 크거나 작게 그리고 다양하게 구성되면서 이야기의 공간은 더욱 확장된다. 복수의 오각형 집의 이미지는 저마다 다른 내용이 담기는 가운데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 그게 몇 개든지 비례 및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적인 아름다움과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오각형의 집은 개별적인 형식미를 결정하는 요건이면서도 내용을 불러들이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는 오각형의 이미지를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그 자신의 신앙생활과 연계되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아버지의'는 소유격이 아니라, '아버지를 만나는 곳'을 뜻한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으로 이해해도 좋다. '작은 집'은 '작은 교회'일 수 있으며, 착한 이를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공간'일 수 있다. 또한 이 작은 집은 '소망의 집'이 되기도 한다. 더불어 오각형의 작은 집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일 수 있고, 추억의 풀어내는 공간일 수가 있다. 그 자신의 아주 사적인 공간이면서 진정으로 '아버지'와 소통하는 장소이다. 이렇듯이 오각형의 자그만 집은 많은 상징성을 지닌다. '아버지의 집'의 형태적인 특징인 오각형의 이미지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오각형의 집 안에 들어가는 시각적인 이미지는 소박하고 순진하며 순수한 어린이의 감성을 소박파적인 형상으로 끌어낸다는 데 있다. 재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단순하고 간결하게 압축된 형상들은 어린이 그림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추억과 관련된 이미지는 개략적인 이미지만으로 충분히 전달되기 때문일까. 이러한 이미지로 채워지는 오각형의 집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다채로운 조형의 변주가 일어난다. 여러 개의 오각형 집을 일렬로 간결하게 나열하거나, 화면 전체를 일정한 간격으로 구성함으로써 구성적인 아름다움이 생성한다. ● 화면 바탕이 워낙 견고하고 심미적인 깊이를 가짐으로써 그 위에 어떤 식으로 배치하고 배열하더라도 독립적인 하나의 작품이 나온다. 이는 비례의 문제이다. 어쩌면 그의 작업은 아름다운 비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잘 가꾸어 놓은 바탕에다 어느 크기, 어느 위치, 몇 개의 오각형 집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작품 하나하나에 고유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는 조형의 변주이기도 하다. 특정의 조형언어를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조형의 변주로 답할 수밖에 없다.
구성 및 구도의 변주는 현대미학의 가장 큰 선물이다. 그 또한 조형의 변주를 방법론의 하나로 받아들임으로써 현대미학의 큰 수혜자가 되었다. 그의 경우 잘 다듬어지고 견고하게 다져진 질감 및 화면구조는 심미적인 깊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화면 위에 오각형의 집을 얹는, 단순한 작업 과정을 통해 많은 작품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조형의 변주라는 현대미학의 방법론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를 의미한다. 그는 변주의 미학을 방법론으로 채용함으로써 세련되고 아름다운 회화적인 조형공간을 무한히 확장해 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 신항섭
MERAKI ● 사람은 경험에 의해 각자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찾고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정하게 되는 것 같다. ● 나는 막강한 외압으로 인해 무기력을 경험했던 2000년 초부터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되었다.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일을 하고 지하철 손잡이를 간신히 잡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잠을 설친 듯 헝클어진 머리, 피곤해 보이지만 젖먹이 아이를 업고 있는 '어머니' 의 모습이 새삼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이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개개인의 땀의 수고들이 소중한 보물로 보여서, 2005년부터 집(Home)이라는 오각형의 창 안에 그 가치들을 담고 있다..
나의 작업이 지금의 스타일로 자리매김하게 된 동기는 1995년 동판화용 프레스기가 작업실의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큰 사이즈의 판화작업을 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하면 최대한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했고 불편한 환경은 나의 의지를 꺽지 못했다. 오히려 극복하고자 시도한 여러 과정 속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한 요소는 지금 작업의 대표적 조형 이미지로 진화되었고 결과물을 만들었다. 붓을 대신해서 자주 사용하는 동판화 도구인 스퀴지, 니들, 칼, 면천, 샌드페이퍼는 즐겨 사용하는 도구이고,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나 마모된 듯한 흔적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 재료의 거친 질감 표현에 돌가루를 사용하고 있다. 재료 선택에 있어 고정관념을 버리고 폐철, 부식한 동판, 절단한 잡지, 비즈, 레진, 아크릴 물감과 유화물감 등 다양한 재료를 작업에 접목 하고 있다. ● 내가 가진 능력과 경험의 토대 위에 수고의 과정을 거쳐 일기를 기록하듯이 작업을 하고 있다.
집을 그릴 때, 지난 흔적들을 마주칠 때면 두 손에 사탕을 움켜쥔 어린아이 같은 행복감에 젖곤 한다. 춤을 추기 시작하면 모든 걸 잊어버린다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 대사처럼 작업에 온 마음을 몰입하다보면 잡념은 사라지고 어느새 그림만 보인다. ● 어쩌면 나는 계산기 같은 세상이 싫어서 매일 조금씩 그림 안으로 도망 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보물 같은 수고로운 가치들이 외면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렇게 작업 속에서 나는 스스로 '섬' 이 되고, 그림은 나의 베프(best Friend)가 되었다. ■ 최순민
Vol.20240402h | 최순민展 / CHOISOONMIN / 崔淳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