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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4_0321_목요일_04:00pm
2023 올해의 작가展
주최,주관 / (재)공주문화관광재단_아트센터 고마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아트센터 고마 ARTCENTER GOMA 충남 공주시 고마나루길 90 Tel. +82.(0)41.852.9806 www.gongjucf.or.kr www.facebook.com/gjcf2020 @gjcf_2020 www.youtube.com
먼 데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사람은 잊지 않은 것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잊지 않은 것은 '잊은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제 나무를 낳은 맨 처음의 나무를 잊었고 돌을 낳은 맨 처음의 돌을, 인간의 처음인 최초의 어머니를, 그 본래의 모습을 어느 날, 기억에서 지웠다. 태초의 그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신비의 아우라가 각각의 생명을 감싸고 춤추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사람은 눈을 감고 귀를 연다. 윤희수는 모래벌판에 홀로 서서 검푸른 바다를 응시하는 한 점, 수도사 같다. 수십억 년쯤 퇴적한 하늘에 맞닿은 바다. 새 한 마리도 범접하지 않은 침묵 앞에 서서 그가 귀 기울여 듣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하여 뭇 생명이 생명다웠던 시간의 원천이라고 짐작된다. 그는 묻는다. 의자는 더 이상 나무의 춤을 출 수 없는가? 돌멩이는 돌멩이일 뿐이고 그릇은 그저 그릇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내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무표정을 가장한 폐기 걸상들이 의심을 품고 작가를 본다. 의심하는 걸상들을 업고 작가는 언덕을 오른다. 산그림자 비친 호수에 발을 적시게도 하고 벚꽃이 흩날리는 고목 아래의 짧은 호사를 누리게도 한다. 걸상들은 힘차게 수액을 끌어올리던 뿌리의 기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들의 옹이에 귀를 대고 기다리는 작가를 천천히 신뢰하게 되었을 것이다.
윤희수에게 푸름은 '씨앗을 손에 쥐었던 색이며 씨앗을 꿈꾸게 한 색이고, 빛과 물을 고르게 한 지구상 최초의 색채'이다. 졸업생들이 버리고 간 미완성의 그림 위에 의자의 실루엣을 올리고 푸름을 덧칠하는 '지우기', 누군가 남긴 그림의 일부가 새로운 중첩으로 살아나는 '남기기', 지우기와 남기기는 폐기 직전의 물건을 구해 대상의 생명을 연장하는 차원을 넘어 존재의 온전함을 드러내려는 행위이다. 생명이 걸어온 흔적에 대한 예우가 푸른빛으로 넘실거린다. 이제 의자는 나무의 춤을 춘다. 사진이 되고 그림이 되고 영상이 되고 스스로 창작자가 된다. 어느 목소리로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음성으로 잎사귀와 새와 바람과 온갖 벌레를 키우던 땅과 하늘의 서사를 엮어간다.
윤희수는 열어야 하는 문을 그린다. 돌도 새도 그릇도, 혹한 속에서 살아남고자 도리어 햇살을 수피 깊숙이 품지 않는 북쪽의 자작나무도 문이다. 문을 열어야 길을 만난다.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 '바닷가의 수도사'를 보았을 때 윤희수를 닮았다고 생각한 것은 화면 안으로 다 들어오지 않은 길 때문이었다. 그림 밖에서 안으로 이어진 수도사의 오랜 걸음이 보였다. 그 길이 아니라면 자그마한 인간의 몸이 광활한 자연을 그렇듯 담담한 경외감으로 대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윤희수의 작업을 구도求道로 읽는다. 길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 이르는 것일까? 그렇게 묻는 이에게 일상은 날마다 만만치 않은 길을 펼쳐 보인다. 복무와 수행의 경계에서, 머뭇거림과 나아감의 사이에서 구도자는 끝없이 흔들리는 사람이다. 흔들림은 중심과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다. 없는 길을 걸어 새로운 길도 만들지만, 그 길 또한 수없이 지운다. 확신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다.
쓸모를 기준으로 일상에서 폐기되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더욱 섬세한 촉수를 깊게, 멀리, 뻗어나간다. 돌과 나무를 드로잉 한 연필 자국을 본다. 몇천 번, 몇만 번의 연필이 지나갔을까?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의 소란함과 번잡함을 멈추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이백만 년 동안 응집된 돌의 침묵을 한 켜 한 켜 떠내'는 작업이다. 그 주름과 질감을 매만지면서 작가가 그리는 것은 그들을 지나간 시간과 공간에 바치는 작가정신이자 질문과 추구를 멈추지 않는 예술가의 초상이다.
'바치다'는 이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 놓인 설치작품이다. '바치다'가 열어주는 다양한 상상 중에서 나는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읽는다. 붉은 실을 소복하게 담은 놋그릇에서 아들과 딸이 잊은, 어쩌면 어머니가 된 이들도 잊었을 태초의 '어머니'가 보인다. 신성한 어머니는 춤추는 나무였고 돌이었으며 비옥한 땅을 적시는 실핏줄이었다. 깊은 시간의 배꼽이었다. 나무가 걸상이 되고 돌이 건축과 토목의 일부가 되듯, 인류의 인식 속에서 어머니도 사람의 어미로 축소되었다. 부분이 전체가 된 것이다. 자식을 낳고 기르며 한평생 밥상을 책임지는 여성을 이야기하지 않고서 작가는 존재를 존재로 살려내기를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이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때까지 밥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고 놀라운 일이다. 그게 놀랍지 않다면 존재를 보지 않고 쓰임을 보는 것이다.
"몬드리안은 한 나무를 그리며 / 차가운 추상을 전개했는데 / 그가 그린 나무와 똑같은 농가의 뽕나무 / 돌무더기 틈에서 / 신들린 듯 춤추고 있다 // 엄마는 아이 손바닥만 한 / 뽕잎 몇 장 넣어 고슬고슬한 밥 짓고 / 새순 한 줌 따서 장아찌 만들어 놓고 가셨다" (윤희수, 「몬드리안과 나」) ● '성인은 피갈회옥(聖人,被褐懷玉)'이라는 노자老子의 말처럼, 세상의 어머니들이 초라한 옷깃 안에 품은 옥玉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만사의 중심으로 삼은 마음이다. 생명 앞에서 기꺼이 평범해지고 당연해진 것이다.
잊은 것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시간의 배꼽』展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뭔지 곰곰 되짚어보며 머뭇거리는 시간을 권한다. 삶의 결이 그 천천한 시간의 결을 닮아가노라면 밥하는 어머니 너머 생명의 탯줄인 어머니가, 여린 새를 품에 안은 신이 보일 것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나로 살 수 있지 않을까? 빛나는 내가 빛나는 당신과 더불어. ■ 최은숙
Vol.20240321e | 윤희수展 / YOONHEESU / 尹熙洙 / painting.coll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