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16th Artists-in-Residence of Yeongcheon Art Studio Relay Solo Exhibition - Open Studio
오픈스튜디오 / 2024_1025 ▶ 2024_1027
전영현展 / 2024_0320 ▶ 2024_0331 장영준_박건展 / 2024_1023 ▶ 2024_1027 박재현_신도성展 / 2024_1030 ▶ 2024_1103 우단비_김정호展 / 2024_1113 ▶ 2024_1117 손세임_이승욱展 / 2024_1204 ▶ 2024_1208
주최,주관 / 영천시_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YEONGCHEON ART STUDIO 경북 영천시 왕평길 38 (교촌동 298-9번지) 전시실1,2 Tel. +82.(0)54.330.6062 www.yc.go.kr/toursub/ycarts/main.do
□ 전영현: 부정확한 인체 에디토리얼 사피엔스 Editorial Sapiens ● 1. 오늘을 표현하는 말 중에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사회'라는 관용어구가 있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재미있게도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미완의, 작성이 덜 된 것과 같은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진화하는 모든 것은 완전하지 못하며 완벽한 것은 이데아의 세계에만 있다는 아주 먼 옛날의 플라톤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인류는 고대에서부터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넘어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지금의 시대로 넘어오기까지 끊임없이 이데아라는 영역을 탐구하였고, 그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2. 불완전한 자아와 불완전한 신체를 가진 상태로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지점에 전영현 작가의 작업 서사가 놓여져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피규어'는 이러한 주제를 직접적으로 관통하는 매체이다. 전영현 작가는 이 피규어에 성별과 감정 그리고 인격을 갖춘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객체로 취급함으로써 인간성을 박탈하여 그저 사물로써 존재하게 한다. 때문에 이들은 개별적인 인간이라기보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상징한다. 이로써 모종의 사물이 된 피규어는 인간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구성함과 동시에 감정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 영상은 여러 요소를 통해 관객의 시선을 가둬둔다. 인간의 형상을 한 피규어의 사이코틱한 행위, 화면을 가득 채우는 무채색과 이를 압도하는 붉은 색, 심장 박동과 유사한 속도로 기묘하게 반복되는 모션,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되는 신체 등의 이미지들은 불완전함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이야기를 드러낸다. 인간이 살아내며 수용할 수밖에 없는 각종 제약들,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공존, 주체와 객체 간의 공생과 각자도생 등과 같이 각각의 영상은 저마다 다른 소재로 인간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불완전함을 토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세계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더 다양한 서사로 불완전함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접근 방식은 불완전함을 포용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해체와 재구성(조립)을 토대로 하는 작업 방식에서 찾을 수 있는데, 즉 편집(수정)하는 것으로부터 연유한다.
3. 현대 사회에서 '편집하다'라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인류가 성장해온 과정을 들여다보면 가설과 증명, 새롭게 등장하는 또 다른 가설과 같이 변증법적 구조로 발전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류는 누구나 어떠한 정보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으며, 그 정보를 편집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풀어내자면 편집 가능성은 다양한 의견과 관점을 수용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전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나타낸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절대적인 진리나 완벽한 지식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편집 가능성을 통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자연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세잔이 보여주었듯이 전통과 규범을 해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한 뒤샹이 보여주었듯이 편집, 다시 말해 해체와 재구성은 어쩌면 예술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 유의미한 요소일 것이다. 전영현 작가가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 방식이 어쩌면 무의미할지라도 작가가 취하는 태도는 그가 예술가임을 그리고 예술이 해야할 역할을 증명하고자 한다. 예술이 늘 무의미한 위치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이어온 것처럼. ■ 박천
□ 장영준: Come, Sweet Father 압착한 쾌락 원칙 ● 형형색색의 도상과 기호가 작품 안에 있습니다.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추념하는 물증이 굳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나 영어로나 어렵기는 매한가지인 응축(condensation)의 시간이 작품을 지배합니다. 본질적으로 회화는 그리는 것이 사건이든 대상이든 착상이든 완성하려고 손을 대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됩니다. 장영준 작가의 그림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과거를 짚습니다. 화가는 과거에 묶여있는 처지임에도 "자, 내 감각이 엄청 첨단이지?"라며 자신을 뒤틀린 시간 위에 놓습니다. ● 시간 교란은 이 글에도 있습니다.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장영준 작가는 예술창작스튜디오에서 레지던시 결과 보고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많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그러한데, 글 쓰는 사람들은 해당 전시에 맞춰 텍스트를 제공합니다. 이때 상황은 필자들에게 일종의 연기가 요구합니다. 그건 마치 펼친 전시를 다 보고 뒤따라 들어온 관람자들에게 설명하는 척합니다. 그래도 이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비평가는 논지를 작가론으로 돌립니다. 이때도 글쓴이는 연기자가 됩니다. 뭔가 하면, 한 작가를 오래도록 지켜봤고, 그간 벌인 작업을 훤히 꿰고 있는 관찰자인 척하는 태도입니다. 세상에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서로를 잘 아는 창작자와 평론가 관계도 많습니다. 허나 저는 아닙니다. ● 적당히 아는 건 완전 무식보다 다를 바 없이, 사실을 증명 못 해 실패한 탐구 코드입니다. 대신에 그건 여러 가설을 세울 기회입니다. 사실 이 단계가 연구자에게는 가장 재미있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 재미의 원천은 당연히 예술 작품입니다. 덧붙여, 장영준 작가에게는 작업 설명글도 포함됩니다. 이때 비평가는 작가의 그림과 글이 가진 상보성을 통해, 그가 드러내길 원하는 부분과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을 밝히면 됩니다. ● 한 세대 전이니까 지성계에서 한물 지난 표현을 쓴다면, 장영준의 예술은 자기성찰 아니면 자기반영적 작업입니다. 예술의 자기성찰성은 창작 결과를 판단하는 수단인 비평이 작업 안에 이미 들어가 있는 태도입니다. 장영준 작가는 미술사나 예술철학을 전공한 관찰자들이 작품을 왈가왈부(曰可曰否)하기 전에 먼저 많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보면, 그는 비평이 필요 없는 작가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산출물은 이론서를 서핑하고 자기 동굴 안에서 깨달아 검증 안 된 진리는 아닙니다. 그래서 개념미술입니다. 그는 미리 짠 개념의 캐스팅 안에 재료를 부어 주조하듯 수작업을 완성합니다. 최소한도의 붓질 이외에 손으로 할 수 있는 온갖 회화적 동작이 벌어집니다. ● 작가가 쓰기 좋아하는 낱말 가운데 지층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계 지질학계가 인류세를 정식 연대순 개념에 넣지 않겠다고 결정했다고 하죠. 현대의 욕망 찌꺼기가 드러내는 현상은 과거와 확실하게 구분되는 가시성의 지층을 이루지만, 해당 과학의 기준을 못 채우는 관계로 그 명칭은 자격 미달입니다. 결국 인문학자와 예술가의 호들갑으로만 둥둥 떠다니는 인류세는 그런데도 하나의 뚜렷한 사실입니다. 두 지성 진영 간의 견해차가 벌어질수록 인류세는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인식의 현상이라는 역설입니다. 장영준 작가가 말로 비유하는 지층 개념은 자기 작품의 완성 과정을 가리키지만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끈적한 체액도 그렇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추억을 딱딱하게 응축하다니요. 그 같은 모순은 늘 새로운 재료와 오브제 실험을 부릅니다. ● 최근에 작가가 집중하는 과거는 본인 생애 내적 거리입니다. 아무래도 본인의 경험을 세대 내 취향으로 확대해 보여주는 일은 하위문화적 요소로 기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스마트폰과 인터넷 사이트, 편의점, 모바일 게임, 팝과 가요 같은 세대의 보편적인 상징 요소보다 과녁이 더 좁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대중 취향에 비교할 때 훨씬 괴팍하거나 고상해서 몇몇만 즐기던 서브컬처일 수 있습니다. 그걸 원전으로 삼는 예술 작업은 일차적으로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또 그것은 하나의 예술이 다른 창작물을 매개로 삼아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예술에 자기 예술을 복속시키는 자기비하적 결과로도 나타납니다. 딕 헵디지(Dick Hebdige)는 특정한 끼리끼리의 문화에서 곧잘 드러나는 특징을 콜라주라고 했습니다. 작가 작업이 예컨대 리처드 해밀턴 작품과는 딴판이지만, 그렇다고 콜라주가 아니라는 근거 또한 없습니다. ● 제 생각으로, 콜라주와 대비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자이크입니다. 그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입니다. 반면에 콜라주는 멀쩡하거나 너무 많은 것 중에 일부를 가져다가 조합하는 방식입니다. 고고학과 역사학은 흔히 모자이크에 비유되곤 합니다. 장영준 작가는 비교적 지근 거리에 손이 닿는 문화 요소를 선별합니다. 아직 역사책이나 박물관에 들어갈 수 없는 그 시간의 상징을 작업은 납작하게 일체화합니다. ● 납작한 시간과 두툼한 시간 같은 개념 용어가 있나요? 앞서 말했듯이, 시간의 기록으로서 회화는 너무나 당연하니까 그런 말이 필요 없겠죠. 없으니까, 제가 쓰겠습니다. 장영준 작가의 재현 작업은 납작한 시간으로 향합니다. 현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옛날도 아닌, 막 지나온 과거는 아직 평가와 서술의 압력이 덜 가해져 울퉁불퉁한 잡동사니입니다. 이 질서 없는 표면은 작가의 인식에 따라 예술품으로 재 진입(re-entry)하며 평탄화됩니다. ● 제게는 장영준 작가의 미술을 접한 첫인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림에서 올리비아 뉴턴 존과 E.L.O가 1980년에 내놓았던 노래 재나두(Xanadu)를 연상했습니다. 사장조(G major)로 버금딸림 디미니쉬 코드를 연결하는 악상은 현재를 지난날의 아련한 행복에 겹치는 주제에 일치합니다. 같은 제목의 곡을 밴드 러쉬(Rush)도 비슷한 시기에 발표했는데요. 다들 알다시피 재나두는 몽골 제국의 원나라 여름철 수도 이름이던 게 아득한 이상향으로 쓰이는 서양 말입니다. ● 순전히 제 감각 기준으로 장영준 회화는 재나두를 거쳐 롤러스케이트장, 파스텔 색조의 네온 불빛, 하얗고 알싸한 암바싸와 밀키스 음료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대구 앞산공원, 서울 남산공원, 광주 사직공원, 부산 용두산공원을 꾸며놨던 조악한 네온의 밤 풍경도 빠질 수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이 미술은 한 세대 전의 습속을 찬미합니다. 그것들은 몇 년씩의 시차를 둡니다만, 재너두가 그 기억 모두를 납작하게 만들어 준 셈입니다. ● 근 과거가 남긴 물건을 모으는 일은 기증받기, 돌아다니며 줍기, 중고나 재고품 사들이기, 인터넷에서 이미지 포착하기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 유무형의 대부분은 이 글 초반에 쓴 표현인 우리의 지난 욕망 찌꺼기입니다. 쾌락의 부산물을 구하러 다니는 게 한편으론 구차한 일입니다. 저는 지금 도시 기층 직종 중에서도 가장 사회 약자에 몰린 존재가 폐지 줍는 노인들 같습니다. 과거에는 넝마주이가 있었죠. 그 일은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발터 벤야민 사이에 오갔던 단골 논쟁이었습니다. 넝마주이는 때때로 경찰이나 탐정보다 먼저 사건 현장의 단서를 찾고, 마지막 뒤처리까지 맡습니다. 줍는 사람들은 물건이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난 채 사용가치가 다 된 상황을 재빨리 알고, 분류하는 일종의 편집자들이었습니다. 장영준 작가가 재 인용한 조형과 메시지의 단락은 새로운 이미지 구현의 야심이자 지나간 시대에 대한 애도입니다. ■ 윤규홍
□ 박건: 꾸며지기 이전의 그림자 기술과 마술, 그리고 미술 ● 박건의 작품은 울긋불긋하지만 그가 선택한 상징적 재료는 정신성이 충만하다. 물론 투명한 계몽의 빛은 아니고 주변화되곤 했던 무속같은 전통이다. 노란 색감을 내는 열매인 괴화나무는 붉은 경면주사와 더불어 부정한 것을 쫒는다고 믿어졌다. 배경과 형태를 이루는 주요 색들은 오방색에 속한다. 색과 재료에 내재한 전래의 상징주의에도 불구하고, 내용물을 채우는 것은 공학적 설계도나 컴퓨터 회로도 등을 떠올린다. 수직 수평의 축을 따라 배열된 형태들은 단편적 도상들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지 않다. 완성에 시간이 많이 들었을 섬세한 작품들이 그토록 많이 생산되었다는 것은 그가 작업에 깊이 몰두했음을 알려준다. 몰입은 합리적 과정에 의해 진행되는 노동과 달리 도약과 비약의 계기가 있다. 작가는 작업할 때 '난 샤먼이다'라고 주술을 건다. 스스로 'SF Shamanism'이라고 정의하는 박건의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인식 한계 밖 너머의 외부적이면서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을 가시화'한다. 엘리아데의 [샤머니즘]에 의하면, 접신하는 샤먼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하늘로 오르거나 지하세계로 내려가며, 죽음, 질병, 기근, 재난 등 암흑의 세계와 맞서서 생명, 건강, 풍요, 광명의 세계를 지키는 존재이다. ● 박건에게 과학기술-주술-예술은 몰입이라는 공통적 과정으로 모순 없이 연결된다. 그것이 엑스터시이든 탈혼망아(脫魂忘我)이든 더 큰 자신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과정은 마찬가지다. 주역과 통계학, 양자역학의 관계를 말하는 이가 있듯이, 박건 또한 주사위 놀이같은 세상의 법칙을 표현한다. 장기판이나 바둑판처럼 단순한 격자도 수많은 게임의 수가 가능하듯,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질 배치는 무궁무진하다. 그 사이사이에 낀 인체의 부분들은 인간과 기계의 만남을 암시한다. 인체의 해부도나 MRI, 그리고 한의학에서 맥과 기를 집는 듯한 모양새, 관상 등 동서양의 의학적, 기술적 자료들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박건은 도면 이미지에 대해 '과학기술자에게 회로도는 기계를 움직이게 해주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부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종교나 예술 또한 그렇다. 박건의 작품에서 뇌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인공지능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반영한다. 17세기 고전주의 시대부터 인간기계론 등이 심심치 않게 나왔지만, 그때 기계의 모델은 시계에 불과 했다. ● 누가 그 시계에 태엽을 최초로 감았는지는 여전히 비밀이다. 합리주의를 둘러싼 비합리주의의 역설이며, 그것은 AI같은 첨단 과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시계처럼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우주의 질서는 고전 과학의 대표자 뉴튼이 제시한 것으로, 이후 자동인형이나 로봇 등의 모델이 되었다.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 21세기의 기계의 모델은 시계를 넘어선다. 디지털 코드는 정보를 복제하는 속도가 엄청나서 질적인 전환을 이루고, 기계는 인간 몸의 확장을 넘어서 정신의 확장이 되었다. 작가는 한 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은 정확도를 가져야 할 엄격한 회로도 이미지와 주술적 분위기를 결합한다. 아직 그 전모가 드러니지 않은 인공지능은 그에게 경이로움을 안겨 주었고, '정교하게 짜여진 놀라운 격자의 구조 사이를 느낄 때면 나의 영혼이 충만해져 감을' 느끼게 했다. 그의 작품은 최신의 인공지능 이미지가 고풍스러운 매체에 실리는데, 그것은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에도 인공지능 있었다'는 믿음의 발로다. 박건에게 'AI는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인공지능에 서사를 부여하고자 한다. ■ 이선영
□ 박재현: TRIGGER : Faint existence 어떤 죽음을 먹는다: 실존적 존재성을 잃은 생명을 사유하며 ● 무엇을 먹느냐가 우리를 만든다. 사실상 우리는 죽음을 먹는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죽음을 먹는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박재현은 우리가 먹는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한다. 그의 작업은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출발한다. 전통시장에서 도살 직전 도망친 개와 눈을 마주쳤던 충격적인 경험, 그리고 2018년 구제역으로 인한 대규모 살처분 장면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이때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충격적 장면은 「그날의 기억」(2024)과 「짙은, 마음의 무게」(2023)로 작품화됐다.) 이 기억과 경험은 그에게 생명 윤리와 공장식 축산업에 대해 사유하게 했고, 작업으로 발화하게 했다.
살풍경(殺風景): 고통의 반복성과 실존적 존재성 ● 박재현의 작업이 단순한 고통의 재현을 넘어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존재조차 희미해지고 있는 동물들의 실존적 고통을 드러내고자 한다. 인간의 공장식 축산 시스템과 자본주의 사회는 생명의 존엄을 무시하고, 동물들을 생명이 아닌, 그저 식자재 정도로 취급한다. 박재현은 이러한 현실을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하며, 동물들이 어떻게 착취당하고 희생되는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그의 대형 회화 작품 「Cycle」(2024)과 「Endless」(2023), 그리고 30호 크기의 「시장」(2024)은 동물들이 자본주의적 시스템 안에서 단순한 소비재로 전락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Cycle」은 원형의 축산 구조물 속에서 소들은 그저 인간의 소비를 위한 제품처럼 사육되고 있으며, 원형의 형상은 이 시스템이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왼편에 살갗이 벗겨진 정육점의 소를 연상시키는 표현은 살아 있음에도 이미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는 동물의 상황을 시사한다. 이와 유사하게 「Endless」는 공장식 계류장 시스템에서 생명 경시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이동하는, 기계 부품처럼 다뤄지는 병아리들과, 컨베이어 벨트 주위로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는, 빽빽하게 들어찬 닭들의 모습은 이들의 생명이 단지 소비를 위한 대상일 뿐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축산 시스템을 충격적인 이미지로 폭로한 작업이 「시장」이다. 도살된 돼지의 머리들이 마치 생산 라인의 제품처럼 매달려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 인간의 잔인함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 박재현의 작품 속 동물들은 단순히 대상화된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억압적 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실존적 존재로 드러난다. 「모돈(母豚)」(2023)에서 작가는 출산 기계로 전락한 어미 돼지의 모습을 통해 모성애라는 본능마저 착취하는 공장식 축산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잔인한 속성을 암시한다. 우리의 식탁과 공장식 축산 시스템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인식은 흐릿하다. 이러한 흐릿한 인식은 「smog」(2023)을 통해 표현된다. 돼지들이 엉켜 있는 장면이 안개 낀 듯 희미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공장식 축산 시스템 속에서 고통받는 동물들의 실존적 존재가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희미하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주체가 없는/없어지는 현실은 「PIPE」(2024)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도살장의 쇠 파이프 울타리를 미니멀한 구성적 형태로 표현한 이 작품은, 오직 파이프만 세련되게 보여줌으로써, 현대적 시스템이 동물들을 구조적으로 억압하면서도 그것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애도(哀悼): 기억해야 할 연약한 존재들 ● 박재현은 이 존재들의 연약함과 희미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함을 설치 작품 「초상(初喪)」(2024)을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작품을 구성하는 PVC 파이프와 급수기는 동물들이 자본주의적 생산 시스템에 종속된 채 생명을 연명하는 현실을 상징하고, 무채색의 반투명한 비단은 그들의 희미하고 연약한 존재감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작가는 에칭 판화로 이 희미하고 연약한 존재를 반복적으로 찍어냄으로써, 그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반복된 시각적 표출은 동물들의 고통이 은폐되어 있지만, 그 고통이 여전히 현실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 소형 회화 작업은 박재현이 대형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Piglet」 연작에서는 비인간적인 도살장의 잔혹한 상황을 강렬한 붉은색과 물감의 흘러내림, 그리고 클로즈업된 화면을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monster」는 도로에서 죽어 방치된 동물의 잔해가 기형적이고 괴물처럼 왜곡된 형체로 변모함을 드러냄으로써, 생명의 소멸 순간과 고통의 흔적을 시각화한다. 반면, 「닿을 수 없는」(2023)은 포근하고 따뜻하게 표현되어 있어 평화롭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표현 대상이 공장식 계류장 시스템을 떠오르게 하는 병아리라는 사실과, 이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있음에도 (제목에 의하면) 결코 닿을 수 없는 상황을 통해, 행복과 구원의 불가능성을 느끼게 한다. ● 박재현의 예술은 동물이 단순한 소비재로서 취급하는 경제 구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로까지 연장되어 있다. 그의 작업을 확장하면 인간이 자연과 비인간 동물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에 대한 철학적 문제와 인간이 실현해야 할 새로운 윤리적 실천의 촉구까지 닿는다. 그의 예술적 여정은 단순한 사회 비판을 넘어, 우리 사회에 감정적 울림과 변화를 불러일으킬 실천적 예술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 안진국
□ 신도성: 현실이라고 부르는 환상의 에피소드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경쟁과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를 몰아붙인다.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압박,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주체)를 찾으라는 끝없는 요구는 개인에게 심리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그 결과 내면의 공허와 불안은 더욱 깊어진다. 이러한 불안과 공허는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만들어내는 필연적 반응이다. 신도성 작가의 작업은 그가 겪은 사회 구조 속 불안을 통해 현대인의 심리 상태를 투영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현실과 환상, 꿈과 일상이 교차하는 장면들을 통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의 작업은 일상 속에서 느끼는 심리적 긴장을 포착하고, 그 안에 숨겨진 불안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현실이라 부르는 환상의 에피소드"라는 작가노트의 첫 구절은 작가가 경험한 현실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나타내는 단서로 작용한다. ● 신도성 작가의 작업은 그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공황장애와 그로 비롯된 불안과 공허함에서 출발한다. 극심한 불안 속에서 그는 종종 현실 도피의 충동을 느꼈고, 이는 그의 예술적 탐구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가 설명한 것처럼, 불안을 인간이 맞닥뜨리는 존재의 근본적 조건으로 이해하고, 이를 예술적 탐구의 동력으로 삼았다. 불안은 그에게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마주해야 할(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방식이었으며, 그의 작업의 기초가 되었다. 작가가 꿈과 몰입의 세계를 통해 불안을 표현하려는 방식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말한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서 그 불안정한 감정을 깊이 탐구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겠다. 작가가 그려내고자 하는 현실과 꿈이 교차하는 지점은 자신의 존재를 사유함과 동시에 그 경계에서 오는 공허감을 존재의 불확실성과 불안을 내비치는 과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 교차된 지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구름, 자연물, 일상의 오브제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의 불안과 공허를 표현하는 메타포로 작동한다. 먼저 구름은 신도성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 불완과 존재의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주된 상징물이었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부재와 존재의 모호함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그러나 최근 작업에서는 구름보다는 동물들(사슴, 고라니, 부엉이 등)과 일상적 오브제가 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작가가 경험한 현실(실제)에서의 환상을 반영하고 있다. 모종의 이유로 시골 생활 중에 마주한 자연에서 사유하며 구성된 이야기들이다. 이렇듯 작가는 상징적 이미지들을 통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다시 긋는다. 이는 꿈(사유)속에서 떠오른 형상들이 현실에서도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저에 깔아두었기에 시도할 수 있는 것이겠다. ● 이 가능성을 그려내는 방식은 침묵과 적막의 표현을 통해 구현된다. 작가는 특정한 서사나 감정을 명확히 밝히기 보다는 반복된 상징물과 절제된 색채로 감정이 유리된 공간을 형성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논의한 '존재가 시간 속에서 드러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상기하게 하는데, 작가의 감정적 긴장감을 여백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만들어 존재의 불안정함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하이데거의 그것과 맞닿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색채의 절제이다. 작가는 감정이 과도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색을 절제하고, 구성을 간결하게 유지한다. 절제된 표현 방식을 통해 인간이 자유 속에서 느끼는 부담감과 그로 인해 마주하게 되는 공허함의 형용은 하이데거에 이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가 실존적 공허와의 사유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가 텍스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더욱 진솔하게 만든다. ● 절제와 제한하는 표현 방식을 통해 나타나는 서사는 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된다. 색채와 감정의 절제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모호한 경계가 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작업에서 존재와 부재의 모호함이 시각적으로 노출되는 지점인데, 이러한 경계는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 말한 상상계와 실재계의 충돌과 유사하게, 현실과 환상이 흐릿해지는 지점으로 드러난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상징화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속에 자리한 '실재(Real)'는 완전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이로 인해 불안이 발생한다. 신도성 작가의 작품에서도 이와 같이 불안은 기시감과 함께 나타난다. 일상에서 경험한 장면들이 왜곡되거나 반복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심리적 불안과 경계의 모호함이 형성된다. ● 이러한 신도성 작가의 작업은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불안과 공허를 시각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표출하는 데에서 출발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단절과 긴장을 그만의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인이 겪는 불안과 공허, 그리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감정적 균열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
□ 우단비: 불안을 던진 손 흔들리며 변화하는 삶 ● 우단비의 작품은 풍경 속에 홀로 있는 모습같은 구체적 형상도 등장하지만, 삼각형, 물방울 등을 떠올리는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감, 세찬 흐름이 공통적이다. 추상화되어 있지만 풍경적 요소가 강한 화면에서 급격한 원근감 속에 배치된 전경과 후경 사이에도 속도감 있는 돌진이나 물러남이 느껴진다. 불타오르는 듯한 선의 흐름이 동적이다. 동감은 정지된 매체인 회화의 한계를 보정 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삶의 불안을 상징한다. 바람이 부는 날 작가는 산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았고, 살아있음 자체가 흔들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wave] 시리즈에도 나타난바, 자연의 '살아있는 움직임'은 작가의 '내면을 요동치게 했다.' 상승과 하강, 전진과 후퇴는 풍경과 인간 모두에 해당된다. 작가가 설정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는 생애주기에서의 기복, 감정의 기복 등을 떠올린다. 우단비의 작품에서 색은 화려하지만, 그 또한 어두운 불안을 감추는 과도한 밝음이다. ● 화면에는 변화하는 물질, 격차에 의해 발생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것은 풍경은 주체의 기쁨과 슬픔과 공조한다. 공조가 강해지면 고통은 희열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 안에서의 성스러운 교감과 이를 언어화할 수 있다면 말이다. 자연으로부터 온 색들은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곤 한다. 산은 붉고, 물방울은 녹색이고, 하늘 또한 푸른 계열이 아닌 작품이 많다. 물론 자연의 거대한 캔버스인 하늘은 결코 하나의 '하늘색'으로 고정될 수 없지만 말이다. 오염 때문에 녹조로 걸쭉해진 물도 녹색일 수 있고, 산은 단풍으로 가득 물들 수도 있다. 녹색 물방울 형태는 나무와도 겹치고, 작가에게 산은 '지질학적으로는 불'이다. 우주를 이룬다고 믿어지는 4원소를 바탕으로 한 '물질적 상상력'(바슐라르)처럼, 물이나 불같은 근본적 요소는 다가(多價)의 상징이다. 조합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서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이 마음의 풍경이라면, 화면에 가득한 물방울 형태는 눈물로도 보인다. ● 눈물은 다른 체액과 마찬가지로 경계를 넘어 흘러넘친다. 붉게 타는 산은 불에 의한 정화일 수도 있다. 이때의 물과 불은 재난과 동시에 해방이다. 우단비의 작품은 굳이 하나의 형태와 색깔을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지시대상으로부터 의미는 자유롭지만, 자연은 인간과 예술의 영원한 그리고 풍부한 원천임이 부정될 수 없다. 자연과의 끈을 놓은 예술은 실재감을 상실한다. 이미지가 편재하는 시대에 그림은 실재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유력한 통로임을 직감하고 확신하는 이가 바로 화가이다. 화면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듯한 삼각형은 산을 상징하는 기호로, 작가의 부친과의 관계가 펼쳐지는 장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삶을 꿈꾸듯 그렇게 아빠는 산으로 갔다'고 한다. 홀로 산으로 간 부친과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던 작가는 모르긴 몰라도 편치만은 않은 관계였을 것이다. 작가는 '풀리지 않는 감정의 매듭'이 있는 부친과 '산의 깊이만큼 거리가 있다'고 토로한다. ● 가족 로망스에 기반한 정신분석학은 집이나 가족처럼 가장 친밀한 곳이 기괴함과 상처의 원천임을 주장했다. 작품의 주무대가 자연이라고 해서 작가가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우단비의 '자연'은 거리를 두고 음미할만한 칸트적인 의미의 '무관심적인'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다. 작품 [Desire]처럼 중립이나 적정 수준이란 없다. 자연은 대개 부친을 만나러 가는 길과 관련된다. 자연을 상징하는 산, 나무 등의 요소는 불이 붙거나 눈물이 나거나 하는 등의 강렬한 심리적 사건들을 증언한다. 조그만 불이나 눈물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기도 한 화면을 가득 채운다. 19세기 말에 20세기의 표현주의를 열었던 미술사적 흐름을 상기시키는 심리화된 풍경이다. 색과 형태가 강렬하지만 균형감은 있다. 기하학적 선과 유기체적 곡선, 불과 물, 상승/하강하는 움직임. 대칭/비대칭, 짝을 이루는 장면 등이 공존하고 교차한다. 물론 균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가까스로 찾아진 균형은 또 다른 불균형으로 인해 흔들릴 것이다. 작가는 실존주의 철학자 카뮈의 [시지푸스의 신화]의 예를 들면서, 불안을 인간의 보편적 조건으로 간주한다. 영원히 돌을 굴리는 인간은 부조리한 벌을 받은 것인가. 작가는 이 신화에서 인간은 '그 불행한 운명에 대해 자살이 아닌 반항으로 대응하며, 이는 행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작업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문학이나 신화만큼이나 자연은 영감의 근원이 된다. 늘 깨어있어야 하는 존재인 작가에게 불안은 변수가 아니라 항수이다. 이러한 불안에 반응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작가의 방식은 불안을 연료로 삼는 것이다. '나무는 타오르듯 흔들거렸다. 검푸른 나무숲은 다양한 색으로 움직인다. 나는 불안을 태워 빛을 낸다.'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해왔고 잘 해나가고 있던 일, 즉 작업에 몰두하며 살기 힘든 세상이 바로 부조리의 핵심이다. 작가는 삼각형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산을 그릴 때 선의 흐름은 하강과 상승을 반복함을 상기시킨다. ● 산이나 나무나 모두 땅에 뿌리를 박으며 하늘을 향한다. 직립하는 인간 또한 비슷하지만, 자연만큼 토대가 단단하지 않다. 작가는 인간이 자연과 다른 점으로 토대의 부재, 즉 불안을 의식한다. 하지만 불안한 시선에 의해 걸러진 자연은 불과 물이라는, 경계를 넘는 원소적 요소에 의해 변형된다. 불안 또한 주체의 경계가 모호함을 말한다. 우단비의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두려움을 주는 대상은 없다. 주체와 대상은 연동되어 이해되는 관계적 관념이다. 우단비의 작품은 이러한 상호 침투적 관계 속에서 요동친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에서 불안에는 애매모호하고 대상이 없다고 하면서, 불안이 대상을 찾아내면 두려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신경증적 불안은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대한 것이다. 불안은 한편으로는 트라우마에 대한 예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그 트라우마의 반복이다.' (프로이트) ■ 이선영
□ 김정호: 안:숲 아름드리나무를 껴안듯이: 김정호의 회화와 숲 ● 자연을 감각하는 일은 아름드리나무를 보고 느끼는 것과 같다. 벌린 두 팔보다 훨씬 크고 넘치는 자연이지만, 어린아이도 어른도 모두 자연에 닿고 싶어 한다. 시냇물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딱딱한 나무를 손으로 더듬어본다. 우리의 키보다 훨씬 크고 장악하기 어려운 자연 속에서 우리는 만져보기도, 피부로 느껴보기도, 누운 채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손을 뻗어 자연을 보고 느낄 때, 우리는 그토록 넘치는 힘에 닿고 싶어 한다. 어떤 물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만져보는 것과 달리, 자연은 통째로 지각할 수 없다. 자연이 몸에 닿는 감각은 부분적이고 순간적이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숲도 그렇다. 숲이 유년기의 기억과도 자연스럽게 연동된다면, 그 이유는 자연이 어린아이가 더 큰 세계를 직면하고 느끼는 진입구와도 같기 때문이다. 여전히 큰 세계인 자연은 내 키와 능력을 넘어선 곳에 있으면서도 말을 걸듯이 다가와 인간을 매료시킨다. ● 김정호는 그동안 자연물의 모습을 회화로 표현해 왔다. 「산」, 「섬」, 「풀숲」을 보면 우리는 제목 그대로 회화를 보게 된다. 작가는 같은 대상을 여러 번, 다년간에 걸쳐 그리기도 하는데, 작업마다 표현 차이가 있다. 동일한 구도를 시리즈처럼 형식적으로 변주하지도 않고, 같은 제목을 지은 회화이지만 장면이 다르게 그려진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작품에는 제목이 가리키는 것 이상의 것이 그려져 있다. 특히 「나무」라는 제목이 지어진 일련의 회화가 그런데 어떤 작품은 분홍빛 열매가 맺힌 나무로 그려져 있고, 다른 「나무」에는 목탄으로 그린 나무 앞에 목탄도 같이 놓인 작업이 있다. 김정호의 작품에서 「나무」는 나무이지만, 나무이기만 하지 않는다. 열매가 열리고, 목탄이 되어 표현 대상과 그리는 도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한다. 김정호는 우리가 시각적으로 떠올리는 나무의 형상을 넘어선 나무를 본다. 크고, 열매를 맺고, 태워진 나무가 목탄이 되어, 시각 작업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삶—과 죽음, 변이—의 순환성이 「나무」를 통해서 펼쳐진다. ● 김정호가 나무를 보고 회화로 그릴 때, 자연물의 형상만 모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 개인의 서사가 담긴 장면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나무와 숲, 그 자연의 크나큼을 마주한 과거를, 그 경험을 그리고자 하는 태도라 이해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와 숲은 특정 장소처럼 보이는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로 보인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김정호라는 한 사람의 역사에 결부시켜 생각해 보기도 한다. 유년기를 자연 속에서 자란 작가가 보아 온 풍경으로 이해하듯 말이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한 나무를 보고서도 다른 곳에서 획득된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김정호가 그리는 나무는 바로 그 사이에 놓여 있다. 자연은 한 개인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 세계에 들어설 자리를 모두에게 마련한다. 우리의 발걸음은 숲과 같이 크나큰 세계 앞에서 무모하기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크나큼에 부분적으로 접근하여 그 힘을 느끼며, 그 힘을 가진 세계 속에서 본인의 위치를 다시금 알게 된다. 김정호의, 또는 우리가 자연과 맺던 기억은 자연 속의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큰 세계를 마주하게 하는 진입구가 된다. ● 이 크나큼은 기억 속에서 내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전환된다. 올해 시드스페이스에서 『내밀한 풍경』이 열렸다. 전시명의 '내밀한 풍경'은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대신 자연물 형상에 내밀함을 담는다. 「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등신대 크기로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감은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세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오히려 그 안에서 자연과 어울리며 살던 경험을 잘 알고 있어, 나만 아는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본 것이라고. 비밀은 자연 속에 있다가, 자연과 어우러지면서 내면의, 나만의 비밀이 된다. 김정호가 그리는 나무와 숲은 내가 함께했던 자연과의 추억과 기억으로 보살핌을 받게 된다. 세계의 진입구로 여겼던 크나큼은 이제 회상의 대상이 되었다. 큰 나무와 숲이 이제는 크다고 여겨지지 않고 심지어 없어졌다고 했을 때,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내밀함의 시선을 소유하게 된다. 김정호의 회화를 보면서 우리는 나무 한 그루를, 그 숲과 산속에서 경험한 기억과 함께 보살피듯이 자연을 껴안게 된다. 그가 회화로 보여주는 나무들 사이, 그리고 숲속에 우리가 있을 때, 자연을 경외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마치 아름드리나무를 껴안듯이 바라본다. ■ 콘노 유키
□ 손세임: 친애하는 당신에게 저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 "추신: 파란 대문집 달력이 일월에서 이월로 넘어갔습니다. 지금은 구월입니다. 모자란 아들의 시간관념을 저는 모릅니다. 완벽하지 않은 저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손세임, 「친애하는 당신에게」, '이천이십사년 구월 십일, 영천'의 기록 중에서) ● 발화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 손세임이 손으로 그리고 써내려가는 것은 그런 것이다. 가슴에 묵은 체증으로 남아 짙은 얼룩이 되어 버린 것. 그 얼룩에 잠식되어 응어리 진 세계를 그녀는 스스로 걸어가고 증언한다. 세밀한 필선의 무수한 겹침이 만든 흑암의 드로잉, 수성 흑연을 칠하고 지웠다 말린 먹먹한 느낌의 그림, 자꾸만 써내려간 숱한 메모와 일기, 그 모두를 통해. ● 손세임은 또한 애도한다. 젊은 날, 생을 등지고 떠난 언니와 그 죽음이 초래한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자신과 부모님을 함께 생각한다. 끊어져 버린 연대와 남아있는 관계 사이에서 손세임은 매일 마주하는 일상과 일과를 지켜내는 작업을 한다. 이것이 마침, 오늘날 미술의 형식에 맞닿아 있어 우리는 그녀를 전시를 통해 이해하곤 하였다.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의 후원으로 열린 첫 개인전 『애도일기49+49-49-49』(2014, 아트포러스)가 그랬고, 텀블벅 후원으로 발행된 독립출판 『당진에는 당진이 없다』(2020)도 그랬다. 그 밖의 몇몇 소형 갤러리 전시, 적은 부수로 펴낸 드로잉북 몇 권이 이력으로 남아 작가 손세임을 만들고 그 이름을 미술의 범주 안에 있게 했다. ● 그러나 손세임의 행적과 그것이 상징하는 바들을 오로지 미술로 다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다. 장르 질서에 닿아있지만 바깥으로 미끄러지는 바들이 손세임이 수행해온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언어는 보편의 규범 안에는 있으나 중심 밖에 소외된 채로 자신의 외로운 상념을 홀로 품을 뿐이다. 2024년 제작한 드로잉 연작 「떠돌고 있다」의 제목 활자가 표상하는 것처럼, 그녀는 우리 곁에 맴돌지만 겉도는 삶을 살았다. 매일의 사건과 감상을 적은 수기를 쓰고, 쌓인 방대한 양을 모아 공중에 공유했음에도 손세임의 진실은 개인의 은밀한 영역 속에 여전히 있다. ● 손세임이 첫 레지던시 경험으로 머물게 된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에서의 일기이자 한 해 동안 이어지는 작가노트 격인 「친애하는 당신에게」(2024)만 해도 그렇다. 100쪽이 넘는 분량의 이 기록은 매번 '당신'이라는 호칭의 상대를 설정하며 서간체의 친절을 베풀고 있지만, 사실 어디에도 명확한 주체의 청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랑했던 연인, 혹은 꿈속의 인격이거나 작가의 이상화된 대상 등이 후보로 떠오르지만 그 어떤 것도 선명한 답이 되어주지 못한다. 손세임은 부재하는 것만 같은 대상을 반복적으로 되뇌며 자전적 말을 단지 쏟아낼 뿐이다. 그녀의 스튜디오 책상 위에 있는 『횔덜린 서한집』 1) 이 본 작업의 방법론에 관한 약간의 단서가 되어주는 정도인데, 낭만주의 시인과 정신착란의 광인 경계에 있던 횔덜린의 서사가 어떤 추론을 얼마나 간명하게 이끌 수 있을까. ● 스튜디오 책상 위 서적 『횔덜린 서한집』이 손세임의 구조화된 언어 한 자리를 지킨다면, 비언어적 생산으로서 어떤 얼룩의 하나는 손세임의 책상 위쪽 벽면에 항시 붙어있다. 그것은 과거 손세임이 언니와 나누었던 교환일기의 마지막 페이지다. 응축된 감정과 시간의 집결체, 언어라는 형언 가능한 수준을 뛰어넘어 이미지가 된 형상이다. 손세임은 그것을 간직하고 근 이십 년 간 매일의 숙명처럼 바라보아 왔다. 단짝 친구 같던 자매이자, 자신보다 먼저 생계 전선에 뛰어들고 남몰래 예술가의 꿈을 꿨던 이의 존재감을 자기암시로 애써 더 지켜내 왔다. 2) 교환일기의 대상은 이제 '당신'이라는 이름의 망령이자 상상 속 관객이 되어 손세임의 의식 곁에 머문다. 손수 펜으로 눌러썼던 당시 교환일기의 방식은 숱한 필선의 드로잉과 그림으로, 그리고 강박처럼 써가는 노트 따위로 손세임에게 변형돼 쌓여간다. 아주 가는 촉의 볼펜을 종이에 일일이 그어 정밀하게 묘사한 「자화상 펜 드로잉 시리즈」(2013~), 「봉천동 거리에서 만난 의자(의자의 꿈)」(2015-2023)외 앞서 언급한 텍스트 작업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 영천에서 만든 신작 「검은 공 밑에 가시가 있다」는 그 연장선으로 이어진다. 손세임은 '감정적으로 적은 메모들, 힘을 낭비한 종이, 금호강 3) 강물, 제본풀'로 그 작업의 재료를 설명하는데 이는 여러 지류 쪼가리 위에 적은 사변적 글귀, 그리고 둥글게 집적된 종이 덩어리가 이루는 가변설치작이다. 낱개로 뭉쳐진 그들 작은 입체물의 진회색 외관은 손세임이 어떤 인물화를 그릴 때 중심 종이 바깥의 여분 종이로 뻗었던 무량한 필선을 출처로 한다. 4) 그런가 하면 「흘러가는 것이 있다」는 연필로 쓴 텍스트와 흑연 가루, 자연물이 이룬 자국이 만든 10미터에 달하는 종이 위 거대 드로잉으로, 5) 비, 바람, 돌, 벌레 등의 자연물과 행인을 만나고 순간을 함께 보낸 작가의 시간성이 반영된 것이다. 『횔덜린 서한집』부분을 500장의 포스트잇 낱장에 필사한 신작 「한자리에 있다」까지, 손세임의 작업은 모두 고행을 자처한 흔적이 역력하게 있다. 전작부터 지속된 자학에 가까운 그들 과정은 실제 림프 순환계 장애와 같은 병증으로 나타나 손세임을 오래 괴롭히기도 했다. 「자화상 펜 드로잉 시리즈」(2013~)을 비롯해 「회복탄력성을 위한 드로잉」(2018-2019), 「누워있고 맞고 있고 쓰러졌다 일어났다」(2024)와 같이 자기 모습이 투영된 드로잉·회화에는 작가가 겪은 병리적 상황도 더불어 암시된다. ● 그러나 우리는 손세임이 상실과 아픔 밖의 세계로, 또한 부단히 접촉하는 광경도 함께 볼 수 있다. 스튜디오 바깥으로 난 창을 통해 손세임이 하루하루 모양을 관찰했던 충혼탑 공원 풍경화 「충혼탑 나무가 서있다(1월 5월~6월에 그리다)」(2024), 스튜디오 인근 지역을 매일 산책하며 자연과 교감하고 새로운 작업의 동력을 모색한 것과 등위인 다작의 파스텔화 「무엇인가 있다」(2024)를 그 증거로 들 수 있다. 특유의 부단한 수행론은 계속 유지하면서도 이전의 작업이 내재한 감정적 결과는 차별화를 이룬 것으로 평할 만한 것들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고통도, 치유도 다루는 손세임의 내밀한 힘을 믿을 수 있게 된다. ● "그림을 그릴수록 제 어깨에 힘이 빠지고 손도 한결 자유롭습니다. 제 몸동작은 바람과 물결, 시원한 공기, 조깅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 어둠 속 불빛에 반응하여 움직입니다. 그런 움직임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강가에 머무른 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그림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그리 중요한 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흔적을 남기는 것뿐입니다." (손세임, 「친애하는 당신에게」, '이천이십사년 칠월 삼십일일, 영천'의 기록 중에서) ■ 오정은
* 각주 1) 프리드리히 횔덜린, 『횔덜린 서한집』, 읻다, 2022. 2) 이 교환일기의 마지막 페이지는 손세임 개인전 『애도일기49+49-49-49』(2014)에 맞춰 펴낸 동명의 책 머리말로도 인쇄되었다. 3) 영천을 흐르는 강의 이름. 4) 손세임은 인물화를 많이 그려왔다. 2024년에는 「친애하는 당신에게」라는 제목의 연작 내에서 인물화를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 속에서 작가의 자화상 같기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환영 같기도 한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5) 손세임은 작업의 크기를 키우고 매체를 변주하는 시도를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입주 기간 중 시도하고 있다.
□ 이승욱: 해방의 첫걸음 자기 긍정의 출발 ● 그가 지금껏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저는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어져 온 여러 사건이 지금 그림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원망 가득한 정서가 작업의 동력입니다. 화가 이승욱은 자신이 받았던 상흔을 그림에 옮깁니다. 그 부분을 도려내어 회화에 봉인하면, 떼어낸 자리는 말끔해야 합니다. 허나 그러질 못합니다. 쉼 없는 창작욕이야말로 여전히 올라오는 지난 일의 자국입니다. 그가 작업에 임하는 태도는 통각을 건드리는 심지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우리가 가늠하는 정황입니다. ● 특별한 작업 동기로 인하여, 이승욱의 회화는 모순의 상자에 감금되었습니다. 작가의 작품을 완성해 가며 과거를 떨치려고 합니다. 그림 그리기는 자기 치유 기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렇지 않은 예술가를 찾는 게 힘들 만큼 뻔한 말입니다. 작가의 공식 언술은 작업이 과거사를 털어 버리는 데 맞춰졌다고 하지만, 되려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틀린 관측은 아닙니다. 물론 이 또한 극복의 단계로 수렴하는 적극적 과정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대뇌 번연계에 남은 심리 외상은 당사자가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되돌아 직시하는 요법이 인정받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컨대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미디어 아트 가운데, 전쟁터에서 트라우마를 얻은 미군을 심리 치료 목적의 시뮬레이션 화면을 차용한 작품이 있지요. 화가들의 그리기는 상황에 관한 적극적인 재현입니다. 이승욱 작가 그림이 보여주는 세밀한 대상 묘사도 그런 사실의 예시입니다. ● 그림 대부분은 조도가 낮습니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암실에서 조명을 써서 찍은 사진을 옮긴 것처럼 보이고, 정물화는 심신이 망가졌던 물증을 현장에서 기록한 효과를 나타냅니다. 사실 이런 연출은 금세기 초반 한 무리의 한국화가들이 그린 장지 채색화의 정서를 닮았습니다. 이승욱 작가가 그들을 참조했을 가능성은 작습니다. 작가 경력이나 상황으로 볼 때 최근 회화 경향을 작가가 흠뻑 빨아들일 여유가 없었을 테니까요. 이승욱 회화에 쓰인 서양 고전의 스푸마토 기법은 동시대 한국화가들이 미세한 색 번짐 효과로써 소외 정서 표현법을 획득한 이후에 역수입한 결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어디까지나 저 같은 관람자 쪽 시각이고, 당사자는 그걸 헤아리기 힘들었을 겁니다. ● 어찌 되었든 이번 전시는 작가에게 개인전 제목 그대로 해방의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화가가 그간 넘어온 문턱은 이 전시가 처음이 아닙니다. 첫걸음이 아니라 두세 걸음이라 해도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작가는 일련의 숙제 결과물을 하나로 묶어 처음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겸손함을 존중합니다. 올해는 그가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 시작한 원년입니다. 증언대 위에 선 이상, 작가는 서사의 도입부를 되풀이해서 소개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겠죠. 왜냐,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하리라는 맥락 설명이 있어야 관객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걸음은 곧 시작이고, 시작이 반입니다. 절반의 수확은 작가 존재와 작업 동기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도달할 수 있습니다. ●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저는 그가 그린 정물화와 인물화 중에 후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그림마다 한 명씩 담은 초상은 미적 보정이 없는 있는 그대로를 담고자 애쓴 흔적이 많습니다. 물론 대상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환영적 특성을 작품에 섞는 모순은 미술을 공부한 이들은 누구나 압니다. 그림으로 옮긴 구도는 스스로 촬영한 사진 프레임이 아닙니다. 가장 보편적인 인물 이미지가 셀카가 된 건 제법 된 일입니다. 셀피 카메라의 본질은 남이 찍어준 척하는 유사 대상화이고, 셀카의 효능은 딴 사람이 찍은 사진에도 응용되는 시대가 요즘입니다. 이승욱 작가의 초상은 그런 흔함과 거리를 둡니다. 특별한 이벤트 성격은 작가 자신이 소재가 된 상황 재현극 분위기에서 절정을 띱니다. ● 별다른 배경 없이 한 인물만 묘사한 관점은 정물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람자들 더러 한눈팔지 말고 그림 속 단일 존재를 집중하라는 뜻이 화면을 지배합니다. 확실히, 그림 속 인물과 사물들은 요즘 회화 속 객체들에 비해 존중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괜찮았냐고요? 글쎄요. 다 좋은데 그림 보는 우리가 마냥 편할 순 없게 만드는 점이 있습니다. 일단 그림에 얼굴을 내민 사람들이 누구며, 무슨 사정으로 그린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정물화로부터 다가오는 섬뜩함과 음울함이 있고, 그들 면면이 이 상황을 벌어지게끔 한 당사자 같다는 심증이 자연스레 생깁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 그림 속 인물들은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작가에게 손을 내민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소수는 작가와 피를 나눈 게마인샤프트 안 사람도 있고, 미술의 게젤샤프트에 있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 선량함의 화신 중 몇몇은 저도 아는 사람인 터라 공감할 수 있습니다. 허나 아무 정보 없이 걸린 그림만 보고선 이들이 악당인지 아닌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이 선악을 알아맞히기 게임은 큰 재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관람자는 꽤 묵직한 감정의 동요를 경험하게 됩니다. ● 결국 이 전시가 기댄 미술의 기능은 적당히 제한적이고 은근히 파급력 있는 고발의 성격입니다. 이 같은 이중의 언로를 동시대 미술은 훨씬 기발하게 표현할 부분이 넘쳐납니다. 언뜻 생각난 게 화폭의 주인공들을 머그샷 같은 형식 안에 두는 설정입니다. 아니면 지명수배 전단처럼 배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건 분위기를 가려가며 꺼내야 할 변칙의 제안입니다. 작가가 느꼈을 아픔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지요. 우울함으로 치달을 수 있는 전시인데, 꾀죄죄한 인상은 들지 않습니다. 그림의 엄청난 지시성이 억지로라도 존엄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가운데 본인이 있습니다. 자기긍정성 덕인가요. 그림 속 작가 모습이 훤칠해 보입니다. ■ 윤규홍
Vol.20240320h | 2024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6기 입주작가 릴레이 개인展 & 오픈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