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주최 / 갤러리 숨
관람료 / 3,000원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숨 Gallery SUM 대전시 유성구 문지로 282-36 (문지동 660-2번지) 제2전시관 Tel. +82.(0)10.5606.6651 gallerysum.modoo.at @_gallerysum_
침묵을 뚫는 파동의 언어 - 전형주 세필 회화의 진면목 ● 전형주의 작업은 엄청난 밀도로 보는 이를 단번에 압도한다. 이 압도감은 작가의 작품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기 이전에 행해진 수많은 붓질의 결과이자 완벽하게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 요란한 소음들로 가득한 일상의 감각 세계와 다른 세계에 대한 낯설음이다. 묵도에 가까운 작가의 처연한 반복 행위는 발설한 이미지 이전의 발설, 이미지의 진동(振動)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진동을 완성한다. 우리가 보는 전형주 회화의 속살은 이 강렬한 느낌의 퍼포먼스에 의해 선점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세필 회화의 진면목에 다가서려면 정적과 정지의 세계의 이면에 있는 고귀한 충동과 그 충동이 예술적으로 승화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 일정한 패턴과 간격 위를 수없이 지나간 세필들은 전형주 회화의 미감을 구축하는 물리적, 수행적, 감각적 기본 단위이다. 세필의 패턴은 붓과 물감을 빌리기에 물리적이며, 투명한 행위의 결과이기에 수행적이고, 그 자체로 색과 형태이기에 감각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결과를 잉태한 것은 이미지 이전에 완성된 그의 몸과 영혼의 진동일 것이다. 전형주의 손은 이 진동을 가늠하고 그것을 파악하는 통로로서 이미지의 출현이라는 형식을 빌려 영혼과 세계의 목소리를 전한다. 모든 '살아 있음'은 진동의 편차로 개별성을 갖는다. 영혼도 우리에게 진동의 전해짐, 즉 파동의 형태로 자신의 실존을 표현한다. 작가에게 세필의 반복적 행위는 드로잉이자 컬러링이고, 재현의 이미지이자 한 존재의 몸놀림인 것이다.
투명한 행위의 반복을 통한 밀도는 물감을 매개로 물리적 밀도로, 물리적 밀도는 숙련되고 정제된 기술에 의해 감각적 밀도로, 감각적 밀도는 패턴과 형식, 대상으로 채워진 지각적 공간의 밀도로, 다시 한치의 빈틈도 없이 채워진 이 지각적 밀도는 곧 심리적 밀도를 반영한다. 이 모든 밀도의 충일함은 사물과 세계의 충일함으로 되먹여지고 이는 마치 무한 루프처럼 다시 행위, 패턴, 감각이라는 회화의 일차적 요소로 회귀하며 보는 이를 회화에 밀착 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전형주의 회화에서 첫 번째로 감지하는 것은 뚜렷한 인지적 사물과 그것들의 공간적 배치라기보다 자신의 회화 언어를 이루는 원초적 요소들과 지각적 차원의 이중성이다. 즉 미시와 거시의 이중성 그 자체이다. 미시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일상적 지각은 대부분 거시적 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그의 회화엔 너무도 투명하고 원초적으로 지각되는 미시적 패턴과 마치 사물의 정지란 무엇인지를 시각적으로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동도 없이 공간 속에 정주한 사물들을 동시에 인지할 수밖에 없는 지각의 이중성이 있다. ● 점묘주의는 색점이라는 감각적 기초 단위들이 어떻게 하나의 지각적 대상으로 인지되는지에 관한 문제를 회화 안에서 직접 구현하면서 감각이 지각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각이 원초적인 감각에 종속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전형주의 회화는 하나의 지각이 어떻게 '있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더 무게를 두고, 감각의 근원지를 추적한다. 그의 작업에선 첫눈에 형태와 배경이라는 게슈탈트의 문법이 매우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고, 어떤 돌발흔적이나 세계의 동요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하나의 온전한 전체로 보여진다. 이를 두고 그의 그림을 정적과 침묵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이 거시적 세계에 우리의 의식을 빼앗기는 순간, 그의 회화를 이루는 결정적인 다른 측면들이 우리를 잡아끈다. 이상한 일이다. 그림이 전체로서, 대상의 굳건한 '있음'으로 인식되면 될수록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불충분'하다고 느껴지니 말이다. 여기엔 뭔가 빗발치는 아우성이 있다. 침묵의 풍경은 죽음을 메타포하지 않는 이상, 살아 있음을 보여줄테니 더욱 그렇다. 전형주의 회화는 이 점을 직시한다. 일상인이 아니라 직업적 화가라도 세필의 반복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며, 효율을 따진다면 최악의 일이다. 그 행위 하나 하나에서 실존적 만족과 충동을 도외시하면 그 행위는 단순히 하나의 기법이라고 말하기에도 너무도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는 작업이 너무 고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작업에 빠져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토록 전형주로 하여금 집요한 반복적 노동에 빠져들게 하는 것일까? 세필의 반복적 행위가 작가에겐 어떤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작가가 만든 침묵의 공간은 패턴과 공간 진동수(spatial frequency)의 일정함과 하모니에서 비롯되긴 하나, 그럼에도 그것들이 일차적으로 행위와 노동, 그리고 작은 진동들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그의 공간과 이미지는 보이는 차원에서 이해되기 이전에 몸과 무의식, 그리고 전형주 자신의 존재적 발현의 차원에서 이해할 때 더 충분한 미학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 때문에 그 행위가 전형주에게 어떤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추적해 들어가야 한다. 거기엔 심리적, 생리적 기제는 물론 회화적 동인이 숨어 있다. ● 거기엔 모종의 보상과 인간적, 예술적 승화의 기제가 있을 것이다. 그는 세상과 소리로 소통하는 데 장애를 갖고 있다. 중요한 신체 메커니즘 중 하나를 상실한 후고, 자신과 세계의 접촉의 느낌, 세계의 실재성, 그리고 그로부터 가능한 공존의 느낌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을지 모른다. 세계와 소통이 사라진다면, 단순히 세계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소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이 사라지는 것이며, 곧 자기도 사라진다. 세계와 소통하고 접촉하면서 비로소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시각도 본질적으로 진동이고 하나의 소통 행위지만 의식 안에서 그것은 세계와의 거리를 통해서만 비로소 작동한다. 이 '거리두기' 작용 때문에 시각은 직접적이고 육중하고 생생한 감각의 세계로부터 명징한 이미지를 추출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각의 이점은 반대로 생생한 세계의 진동과 접촉의 느낌을 희생한 결과이다. 시각이 정말로 시각뿐이라면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 세계의 껍데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시각이 오롯이 시각에 집중하기 위해 제거해 버린 것, 즉 사물의 은밀한 응시와 떨림을 세필이라는 회화적 행위와 세필의 패턴이 만드는 공간적 진동으로 포착해 낸다. 시각도 그 근원에서는 진동들이라는 것을 밝혀내듯 말이다. ● 그의 세필 행위의 근저에는 좀 더 근원적인 충동도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행위는 어떤 이미지가 허상인지 실상인지 알기 위해 손을 뻗어 보고 직접 만져보는 행위 같은 것이며, 사진으로만 본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충동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세필의 반복 행위를 통해 캔버스라는 물리적 대상과, 동시에 그 안에 그려질, 그려지고 있는 사물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껍데기 같은 세계, 정적과 고유의 세계에 그 스스로 실재성을 부여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세계와 실제적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결국 그에게 붓질은 세계와의 실제적 접촉을 회복하고자 하는 존재의 몸부림이자 생(生)의 간절함이다.
전형주의 회화 언어가 행위, 접촉의 감각, 공간 진동의 3중주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등가물의 체계라면 그의 81년 작인 <상념>에서 이미 그 언어의 싹은 태동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전형적인 아카데미즘 구상 회화처럼 보이지만, 회화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발생 동기는 근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 가지 조형적 요소가 발전 혹은 수정되어 가는 동안 작가가 세필과 반복적 행위로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을 40년 동안 한결같이 유지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인물, 잔디, 풀, 이끼, 갈대, 첨성대, 종묘의 지붕, 나무 등과 같이 매번 변하는 대상들이지만, 그의 세필 기법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각적 대상들이라기보다 바로 그 세필의 행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이유도 이 40년의 항상적인 증언에 담겨 있다. 그래서 그에게 세필 기법은 대상을 표현하는 한낱 기법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들이 세필 기법을 위해, 그의 근원적 충동을 위해 선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 진동은 존재의 떨림이며, 파동의 형태는 존재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바탕에 둔 그의 시각 언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상상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 감각과 지각의 험난한 공존 속에서 오랜 세월을 여과하여 획득된 존재의 목소리이다. 나아가 정연한 논리까지 갖추면서 이제 당당히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의 언어는 겉보기에 침묵과 정적의 편에 서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가 눈의 기술적 작용으로만 이해했을 때일 뿐이다. 정신과 연결된 눈, 다른 감각과 공유된 시각, 존재의 발생과 연결된 이미지로 그의 회화를 바라본다면, 한 작가가 오랜 시간동안 꿈꾸었을 사물의 소리들이 보일 것이다. 그 소리는 무엇이라도 좋다. 전형주에겐 보이는 것들의 안에 생명의 진동이 있으니 말이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했을텐데 우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림으로서, 음악으로서, 목소리로서, 하나의 강렬한 시적 은유로서 그의 예술은 침묵과 무관심에 익숙해진 우리의 무뎌진 감각을 꿰뚫고 참신한 세계를 만나라 한다. 생명의 시작부터 늘 함께 해 왔지만, 껍데기의 화려함에 감춰져 보이지 않던 생명의 진정한 약동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그림 앞에 서서, 전형주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들의 목록을 떠 올려 볼 때이다. ■ 조경진
나의 정원은 고요하다 ● 침묵의 세계로 읽히는 나의 노동집약적 집요한 정원은 침묵의 세계라는 개인사에서부터 출발하지만 어느덧 미술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지녔다. 매 순간 풍경 속에 영혼을 담고자 하였고 삶의 모순을 붓끝에서 극복하고자 혼신을 다한다. 나는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감각의 세상을 비현실적인 내면세계의 비전으로 제시한다. 내게 그림과 삶은 한 방향으로 일관된 삶의 여정 같은 것이다. ■ 전형주
Vol.20240311f | 전형주展 / JEONHYUNGJOO / 全炯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