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ror, 거울-지다 Glance back

이열展 / LEEYEUL / 李烈 / mixed media   2024_0301 ▶ 2024_0330 / 월요일 휴관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26×25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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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 홈페이지_leeyeul.com 인스타그램_leeyeul07

초대일시 / 2024_030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센터 자인 Artcenter Zain 서울 종로구 평창34길 27 Tel. +82.(0)2.3217.1293 artcenterzain.com @artcenterzain

이열의 거울 회화와 사물의 재창안 ● 이열의 예술은 기존 추상화 작업을 뒤로 하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색과 혁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고심하고 연구해왔던 거울 작업은 새로운 회화 문법, 즉 이미지 형태와 양태, 공간 형식과 시간에 대한 태도 등은 물론 더 멀리 예술의 기능에서도 하나의 당당한 회화 언어로 완성됐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오랜 기간 추상화 작업을 해왔다. 자신이 속한 아카데미의 영향과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당시 화단의 분위기를 자연스레 반영한 결과였다. 그 결과물은 그 나름으로 당대의 요청과 조건에 대응한 것이었기에 정당한 것이었다. 대부분 추상 화가에게 특유한 미적 경험이 있듯 그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의 추상화는 투명하지만 심연의 깊이를 암시하는 강 표면에 뜬 부유물의 부감시(俯瞰視) 장면과 그 미적 측면을 회화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이었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26×25cm_2022

추상화 작업을 이어가면서도 그의 내면엔 두 가지의 압력이 서서히 자리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예술 환경이나 조건을 담아내 회화 언어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예술적 강령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술가 대부분이 그렇듯 그 시대적 조건 아래 자신만의 예술 언어, 이른바 이열 스타일을 확립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그의 회화 혁신은 기존 회화의 내적 문법만이 아니라, 발화 방식, 의미 작용, 매체적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이뤄졌다. 나아가 이 작업은 시공간의 형식성과 이미지의 문법을 갱신하고 회화를 재창안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내외적 요구에 부응해 우연히 그의 눈과 마음에 들어온 사물이 2010년 동두천 벼룩 시장에서 본 거울이다. 이 사물은 다른 누구에게는 그저 빈티지 제품이었겠지만, 위의 미적, 예술적 문제를 안고 있던 이열의 눈에는 자신의 예술 작업의 미래를 열어줄 대상이었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43.5×39.5cm_2022

거울이 이열에게 그저 예술적 의도의 매개물에 그치는 사물이었다면, 그가 10년에 걸친 시간 동안 그것을 붙잡고 씨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물은 오랜 추상화 기간 서서히 느꼈던 예술적 갈증을 해소해 줄 것이라고 어렴풋이 약속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쉽게 허락할 대상은 아니었고, 이열과 어떻게 기술적, 예술적으로 동맹할 수 있을지의 문제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일상 사물의 의미는 단순히 발견된 오브제나 그들의 예술 의도나 내용을 표현하는 물리적 매개물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편에서 사물을 예술적으로 이용하기보다 오히려 사물의 편에서 사물 자체의 온갖 잠재력을 끌어내려 한다. 사물이 무엇인지가 '사물임thingness'이고, 사물임은 사물이 무엇을 할 수 있음이라면, 사물임 혹은 사물의 의미는 사물의 힘이다. 그 힘은 그 자체로는 감춰져 있지만, 다른 장소나 사물,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배치되는가가 바로 그 사물임과 힘을 규정한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46.5×36.5cm_2022

우리 시대는 대체로 사물이나 객체의 자율적 본질보다는 관계적 본질에 더 집중한다. 사물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 연결 배치됨으로써, 그리고 서로 타협함으로써 연결망을 형성하고 사물은 그 안에서 비로소 그것의 힘과 행위를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예술가들이 사물(AI나 로봇까지도)이나 물질(장소 등도)을 대하는 태도를 규정한다. 사물은 이제 단순히 예술가의 개념이나 의도를 드러내는 매개라기보다 그들이 동맹하고 타협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예술가는 오히려 그 타협과 동맹의 과정에서 그가 나아갈 방향을 찾아낸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의 문제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물이 인도해 주는 길이기도 하다. 과거 우리가 사물의 주인이었다면, 이제 사물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 것 그 이상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동두천 시장에서 처음 거울이 그에게 다가온 이후 이열에게 거울이라는 사물은 그런 대상이었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59×48cm_2022

그에게 거울은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그가 10년을 씨름해 가며 타협하고 모색한 가능성 그 자체이며, 동시에 여전히 이열에게나 관객에게 열려 있는 사물이다. 거울은 은막 바탕, 반영의 속성, 물리적 공간의 틈새와 폭, 프레임을 회화에게 내어줬고, 회화는 그런 바탕이나 공간에서 이미지의 출현이라는 본질적 규칙을 제공했다. 그것은 사물을 매개한 회화 매체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사물과 회화의 동맹이다. 이열에게 거울이 그저 오브제나 매체가 아니라, 그와 동행하는 사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거울을 전통적인 회화틀로 변형하지 않고, 수집한 빈티지 거울의 외적 포맷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요컨대, 이열의 작업은 거울이라는 사물을 회화 매체로 이용하기보다 거울 안에서, 거울과 함께 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매체의 재창안이면서 동시에 사물의 재창안이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49×41cm_2022

그를 회화의 혁신으로 이끈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린다는 일이 왜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것으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하나의 작품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것인가? 예술작품은 작가 주체의 표현인가?" (필자와의 인터뷰, 2023) 이 세 질문은 그 자체로 급진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문제와 해법이 동시대의 예술 환경에 응답하면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엔 구체적 매체로서 회화와 예술 일반의 문제가 섞여 있는데, 그는 자신의 매체인 회화를 재창안하는 과정에서 예술 일반의 문제에 접근한다. 이 점에서 이열의 작업은 한편에선 크라우스R. Krauss의 후기 매체론에 응답한다. 그가 크라우스를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회화적(이론적) 문제와 그 직관적(개념적) 해법이 자연스레 대응했다는 의미다. 오늘날 우리가 매체를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지 크라우스의 매체 특정성 비판이나 기술적 지지체로서 매체 개념, 매체의 재창안 논의 등이 많은 영감을 줬다면, 이열은 예술가의 직관에 따라 이 문제에 매달리면서 그의 언어를 새로운 문법으로 갱신해 왔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62×54cm_2023

첫 번째 물음에 응답한 그는 '그린다'는 회화적 행위를 기술적 사물인 캔버스나 물감의 물리적 속성에서 해방하는 한편, 평면 공간에서 이미지의 출현이라는 더 본질적인 규칙으로 곧장 육박한다. '평면에서 이미지의 출현'이라는 상위 문법 안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프레임과 배경에서 벗어나 더는 바르지 않으며, 반대로 거울 유리 뒷면의 은막을 긁어내 형태를 만든다. 어떻게 하건 결국 이미지는 출현한다. 문제는 이열이 어떤 이미지를 원하는가고 그 이미지가 다른 것과 무엇이 다른지다. 게다가 여기에 공간과 환영의 오랜 문제도 끼어든다. 캔버스에 발린 물감은 결국 물리적 막에 불과하지만, 오랫동안 회화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이미지여야 한다는 규범에 매여 이미지를 재현적 환영 공간의 틀 안에 가둬 왔다. 모더니즘 회화가 이 규범을 깨부수고 회화를 재현에서 벗어나게 한 후, 회화는 환영으로 남기보다 개념화, 기호화하거나 순전한 감각적, 미적 대상으로 존재해 왔다. 정보나 문제적 관점이 여전히 유효함에도, 최근 회화는 물질적 생동성을 부각하면서 이미지보다는 물질적 정동 감각으로 존재하려 한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65.5×37cm_2022

이열의 것은 환영으로서 이미지다. 그러나, 이 환영은 물질성을 희생한 환영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물질적인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환영이다. 그의 작업엔 크게 세 개의 물질적 층위가 존재한다. 세부적으로는 총 다섯 층위라고 해도 좋다. 첫 번째 층위는 관객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 거울층이고, 이 층은 물리적으로 앞면과 뒷면이 있으니, 두 개 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기본 형태는 뒷면의 은경막을 벗겨내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시각에는 언뜻 이미지가 맨 위층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뒷면에 있다. 두 번째 층위는 이 거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위치한 두 겹의 섬유층이다. 이 역시 두 겹 모두에 이미지가 있고, 전면의 유리층과 더불어 전체 이미지를 형성한다. 마지막 층은 가장 밑면의 거울층인데, 이것은 다시 위의 두 층을 반사해 깊이를 물리적으로 배가하고 전체의 구조적 환영을 생산한다. 특히 이 구조적 환영은 물리적 적층을 통해 형성된 물리적 공간 안에서 가상적으로 형성된 이미지이기에 고유한 공간 형식과 이미지 경험을 제공한다. 물리적 공간성은 마치 디오라마 연극 공간과 같은 느낌을 주고, 이미지는 마치 홀로그램처럼 그 안을 부유하는 것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이러한 독특한 공간성은 관객이 이미지의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 안으로 들어가 몰입하게 하는 핵심 기술적 지지체가 된다. 그의 작업은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회화면서도, 동시에 조각도, 연극도 포함하는 특정한 대상이 됐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50×65cm_2022

이 구조적 환영과 그 안의 가상 이미지는 물질 안료로 고정된 캔버스 표면의 재현 이미지와 달리 지각자의 관점이나 초점의 위치에 따라 형상이나 미적 포인트가 변화한다. 관객은 전체의 중층 공간이 만든 구조적 환영 이미지에 몰입할 수도, 맨 아래층의 거울에서 반영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작품과 겹쳐 보면서 자신이 작품 안에 포함되는 특유의 경험을 하거나, 투명, 투영, 반영의 삼중 속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가상 공간 그 자체에 매료될 수도 있다. 은막이 벗겨진 거울의 유리층은 투명하고, 그 밑의 섬유층은 그 자체로 반투명이면서 이미지를 투영하며, 마지막 거울은 자신 앞의 작업 형태나 작업 외부의 환경을 반영한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79.5×59.5cm_2022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열려 있다. 물리적으로는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공간이나 이미지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또 놓이는 장소나 조명, 빛 등 환경을 자신 안에 반영하고 포함할 수 있으며, 그런 한에서 관객에게도 열려 있다. 그저 의미나 해석으로 열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열려 있다. 이에 그의 작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작업이고자 구체적 환경과 관객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이렇게 두 번째 질문, 하나의 회화 작업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것인가라는 물음은 해소된다. 그의 작업은 어떤 면에서 물리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그 효과나 이미지는 전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관객의 신체, 관객의 시선과 움직임, 구체적인 외부 환경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83×51cm_2023

그는 세 번째 물음, '표현'이라는 오래된 족쇄에서도 벗어난다. 작품이 하나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품을 작가 주체나 그가 가진 미적 특권의 틀 안에 매어두는 효과적인 개념으로 기능해왔다. 하지만 작품이 표현이었던 적은 사실 예술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되지도, 또 현재 그리 유효한 개념도 아니다. 오늘날 예술은 이제 다른 콘텐츠와 같이 누군가에게 소비될 운명을 가지며, 다만 다른 콘텐츠와 달리 미적, 예술적 콘텐츠로 소비된다. 콘텐츠는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디 콘텐츠 소비자를 위한 것이다. 이열의 작업도 이런 콘텐츠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작업이 관객에게 열려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도 이미 그렇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90×65cm_2022

작업의 프레임을 형성하는 거울은 그가 국내나 국외 여행 중 벼룩시장에서 직접 구매한 빈티지 제품이며 대부분 몇십년에서 백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온 물건들이다. 그가 거울 안 형태의 베이스로 삼은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오래된 사진 속 익명의 인물이다. 그것들은 특정 역사적 맥락이나 의미를 공유하지 않는다. 반면 그가 빈티지 거울이나 오래된 사진 이미지를 선택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것들은 이열의 눈에 우연히 들어온 것이지만 명확한 하나의 감각에서 유래했다. 그는 오래된 물건이 주는 감각에 매혹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감각과 지각이 당면한 생존을 위해 '지금 여기'의 현재 감각에 집중하며 살 때, 그 감각에 균열을 내고 그 사물만이 홀로 과거에서 이어져 왔다는 느낌, 그래서 우리가 지금 현재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과거와 이어져 있다는 각별한 느낌을 주는 사물들이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지름 107cm_2023

그래서 우리는 이 감각 자체에 머물면 되며, 특정한 형태의 거울의 역사, 인물 이미지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비록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 작업에서 이열 자신을 볼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 작업이 이열과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경대 앞에서 단장하던 어머니의 기억, 어머니와 자신이 같은 거울 공간 안에 반영되면서 느꼈던 통합의 상상 이미지, 그의 유년기 속 놀이 공간 등은 그 자신의 기억과 무의식을 여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열과 그 이미지의 관계를 추측하는 일은 작가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그는 관객이 그저 자신의 작품 앞에서 온전히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찾길 바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기보다 관객 각자에게 소비될 하나의 미적 콘텐츠가 되길 바란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117.7×81.3cm_2023

그 대상이 주는 감각은 어떤 의미에서 알레고리 감각, 즉 과거와 현재의 차이와 간극에서 오는 감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가 우리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유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의 것이 오웬스(C. Owens)의 알레고리 해석이고, 이열의 것을 그렇게 본다고 해도 가능하겠지만, 그의 것은 후자의 느낌에 더 가깝다. 과거와 현재의 간격이나 사이에서 오는 차이의 느낌,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방식을 취하기보다 오히려 연결과 지속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그래서 그도 이미지를 흐릿하게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남겨뒀다. 그는 과거나 옛 사물이 언제나 우리의 삶을 위해 살아 있으며, 우리에게 지속해서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 우리가 현재와 과거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활성화하려 한다. 과거는 한낱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로 이어져 지속하고 있다. 이열의 작업은 이 점에서 표현이 아니라, 관객에게 어떤 미적 감각을 향유할 수 있게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122×85cm_2022

그의 거울 회화를 이끈 중요 질문이 알려주듯, 그의 작업의 핵심 가치는 작품 안 이미지의 내적 의미나 그것의 맥락보다 오히려 그가 갱신하는 회화의 문법, 즉, 이미지의 양태나 형식, 시공간 형식, 발화 모드에서 회화 매체 자체의 재해석과 재창안의 문제를 관통해 말해져야 한다. 실제로 그도 이미지의 내용보다 그의 매체 혁신에 대해 줄곧 강조해왔다. 하지만, 그의 거울 작업의 탁월성은 그가 어떤 회화적, 예술적 문제로 고민하고 그것을 해소하려 했는지에만 주어지지 않는다. 그 문제는 실제로 구체적인 미적, 형식적 성취로 이어져야 한다. 이열의 작업은 자신만의 매체와 언어를 확립하면서 동시에 미적 차원, 즉 미적 깊이의 차원을 획득했다. 고유한 물리적 속성들의 결합으로 구성된 몰입의 연극적 공간을 고안했고, 그 안에 홀로그램과 같은 구조적 환영을 창조했으며, 결과적으로 그 환영은 우리를 미적 깊이로 인도한다. 그것은 기억 속의 대상이 그 시간의 거리만큼 우리의 의식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그가 빈티지 사물과 이미지를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열의 작업은 그 미적 깊이를 안료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환영적 차원이 아니라, 물리적 구조에서 명확히 현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데 고유한 탁월성이 있다. 공간의 안에서부터 부유하듯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를 매개로 우리는 재현 너머 세계의 깊이, 우리 자신의 과거와 무의식의 깊이, 그 빈티지 사물의 시간과 공간의 깊이로 몰입한다. 그 깊이는 우리가 실재를 체험하고 사고하는 방식의 은유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128×88cm_2023

이열의 이 미감은 그가 물 위에 뜬 부유물에서 특유한 미적 경험을 한 후, 이를 미적 모티브로 한 추상화에서 발현됐고, 사실 최근의 거울 회화에까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이 근본 감각, 미적 이념 수준에 다다른 감각은 왜 거울이라는 사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예술가를 사로잡는 미적 감각은 결국 감각 세계 한가운데서 그 감각에서 은폐된 실재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현상에서 주어진다. 그 실재성은 우리 자신의 것일 수도, 한 사물이나 세계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예술작품이라는 사물이 주는 감각 안에서 우리는 이런 실재성의 깊이를 경험한다. 이열에게 이 감각은 투명함에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그 깊이와 맞닿지만 겨우 표면적으로만 그 깊이와 연결되는 표층의 이원 구조에 대한 감각이다. 투명한 것은 우리를 깊이로 끌어들이면서 심연의 깊이는 동시에 우리의 접근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심층과 표층 간의 연결과 분리의 이중성이면서 동시에 실재와 감각 간의 대립과 연결의 긴장에서 나타나는 미적 경험이 지니는 구조 자체의 은유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137×105cm_2023

이열은 우연히 발견한 구체적인 현상에서 이 구조를 보았고 감각적으로 매혹됐으며, 추상화에서 거울 회화까지 발전해 오면서 이 감각은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한 이념으로서 미감이 됐다. 그의 추상 회화에서는 표면의 감각에 집중했고, 심층은 표면의 감각 효과(이 감각을 위해 안료에 유리 알갱이를 혼합)에 의해 간접적으로 암시되었다면, 이제 거울 회화는 반대로 거울이라는 사물과 반투명 섬유의 물리적 특성을 중층화하면서, 투명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심층의 깊이와 가시적 표면의 이원 구조를 물리적으로 직접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와 연출 덕에 가상 공간과 구조적 환영 이미지는 미적 깊이를 탁월하게 성취했다. 이제 우리는 이 구조적 장치와 연출 덕분에 이 이원 구조의 긴장을 선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이열_거울형 회화_혼합재료_137×105cm_2023

요컨대, 그의 작업은 여러 면에서 더는 기존 회화의 물질적 조건이나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다른 매체의 특성을 흡수하면서 회화와 예술의 언어를 재창안하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회화와 그 규칙을 고안하고 발전시키며 독자적인 회화 언어로 확립하고 있다. 예술가에겐 언제나 자신의 언어를 정립하면서, 동시에 우리 시대의 언어를 혁신하라는 요청이 무의식적 강령으로 주어진다. 동시대 사람이 동시대의 작업을 하지 않으면 다른 누가 그것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예술가마다 그의 언어가 갱신하는 요소는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매체와 관련될 것일 수도, 시각성이나 발화 방식, 공간이나 시간 형식일 수도, 형식성 자체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회화나 예술의 가치는 여러 관점에서 말해질 수 있다. 경제적 가치나 사회, 역사적 가치가 그런 것일 테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미술사를 기술하려 할 때, 그것이 사회사가 아니라 미술사라면 첫째로 고려할 사항은 예술작품의 미적, 예술적 가치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은연중에 매체나 언어의 새로움과 그것의 동시대성에 주목한다.

이열은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사물에 대한 태도로 무장하고, 사물과 타협하고 동맹하면서 새로운 회화적 공간 형식과 이미지 양태를 제시하며 거울 회화라는 고유한 매체 언어를 잉태했다. 이 언어는 이열 자신의 근본 미감을 여과하면서 그 성취의 질은 배가됐고 탁월성을 얻었다. 그의 미적 성취는 마땅히 회화의 재창안이자, 사물의 재창안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그는 자주 거울이 자신의 작업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거울과 함께 한 예술 여정과 모험을 완료형이자 진행형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또 어떤 방식을 내놓을지는 예술환경은 물론 거울과 이열,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 달려 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예술에 내재한 미적, 예술적 가치, 그것이 회화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 조경진

Vol.20240302d | 이열展 / LEEYEUL / 李烈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