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뉴스프링프로젝트 기획 / 채민진(전시 기획자/ 퍼스펙트럼 아트 어드바이저리 디렉터)
관람시간 화요일_11:00am~06:00pm 수~일요일_11:00am~07:00pm 월,공휴일 휴관
뉴스프링프로젝트 New Spring Project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45길 22 (한남동 745-6번지) Tel. 070.5057.0222 @newspringproject
추상회화의 몸짓 ● 19세기말 미술사가 독립적인 학문이 된 이래로 미술사 서술에서 추상미술은 젠더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정통한 학자들에 의해 서술된 추상미술의 역사는 주/조연이 명확한데 이때 여성 작가들은 거의 조연의 역사에 머물러 있다. 공식화된 추상미술의 시조 또한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와 같은 남성 작가들이다. 이후의 드라마에서도 남성 작가들이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다시 100년쯤 지나면 그때는 미술사 서술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겠지만, 추상회화는 그간 숱한 이슈들을 겪어 왔고, 계속 해서 새로운 도전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기에 앞으로 주/조연은 충분히 뒤섞일 것이고 역사는 더욱 흥미로워질 것임은 확실하다. ● 일찍이 추상은 종언을 맞은 바 있다. '최후의 회화'를 선언한 예술가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단색조의 추상회화를 최후의 회화로 제시했다. 1921년에 러시아 구축주의자 알렉산드르 로드첸코는 빨강, 파랑, 노랑 세 가지 색으로 그린 세 폭의 모노크롬 회화를 발표하면서 이를 회화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추상과의 이별을 고하였다: "단언하건대 모든 것이 끝났다. 원색이다. 모든 평면은 하나의 평면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재현도 없을 것이다."(데이비드 조슬릿, 로잘린드 크라우스 외 지음, 배수희, 신정훈 외 옮김, 『1900년 이후의 미술사』, 제 3판(서울: 세미콜론, 2016), pp.202-203.) 1960년대 초중반 애드 라인하르트는 그리드의 경계가 매우 희미한 검정색 모노크롬 회화를 발표하면서 절대회화라고 칭하였고, 일체의 환영을 거부하는 자기 지시의 회화, 즉 미술 이외의 다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회화를 그리고자 하였다.(위의 책, pp.460-461.) 그러나 추상회화는 재현을 거부하는 모더니즘의 꽃으로서 잠시 미술의 순수성을 증거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순수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어떤 작가들은 정처 없는 제스처들만으로도 캔버스를 충만하게 채울 수 있었고, 또 어떤 작가들은 시공간에 대한 관념을 캔버스로 한없이 확장하여 그것을 차원의 문제로든, 무의식이나 정체성의 문제로든 자유롭게 투사시켰다. 신체, 충동, 무의식과 같은 정신분석학적 요소들도 한때 순수주의자들에 의해 배제되었으나 다시 회화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산업화나 대중문화의 영향, 페미니즘의 대두, 스펙터클이라는 장치 또한 회화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최후의 회화라는 선언이 무색할 정도로 회화는 여전히 거듭되고 있으며, 더이상 하나의 사조나 매체가 미술을 주도하지 않는 시대에도 회화는 진지하면서도 자유롭다. ● 뉴스프링프로젝트가 개최하는 『Abstract Gestures from Female Painters』전은 일곱 명의 여성 추상 작가들이 참여한다. 이 전시는 기본적으로 추상회화의 가치를 순수 조형 요소의 자유로운 구성에 의해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참여 작가 전원이 여성 작가로 구성되어 이들의 감각과 태도를 바탕으로 탄생한 추상회화의 특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갤러리는 강렬하고 대담한 조형 언어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친 최욱경(1940-1985)부터, 자신만의 확고한 추상적 제스처를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 중인 중견 작가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하였다. 참여 작가들의 활동시기는 1960-70년대부터 2024년 현재까지 반 세기가 넘는 시간에 걸쳐 있고, 출품작 일부는 60여년이라는 시차가 있지만, 작품에 담긴 자유로우면서도 단호한 제스처만큼은 격세지감 없이 모두 생동감 있게 느껴진다. ● 참여 작가들 중에서 최욱경은 한국의 1세대 여성 추상화가로서 이 전시의 중추가 되었다. 그는 1963년 미국 유학을 떠나 1978년까지 15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작업하였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미술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간 시기에 격변의 현장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유학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추상을 그린 최욱경은 드로잉, 콜라주, 페인팅, 도자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시도하였고, 추상표현주의나 네오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당시 미국은 사회적으로 반전운동과 인종차별 반대운동이 중요한 이슈였고, 주디 시카고와 같은 1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운동과 교육도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 모든 상황을 가까이에서 목도하고 경험하면서 여성작가로서의 자기인식을 정립해나갔다. 여성작가로서 최욱경의 자기인식은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사고를 지양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경험과 개성을 살리는 작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그가 남긴 글들로 확인할 수 있다.( 전유신,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과천: 국립현대미술관, 2021), p.21.) ● "여자이자 화가로서의 나의 경험은 내 창의력의 원천이 되었다. 내 작품에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은 내 삶의 성장이고, 내 감정을 시각 언어로 풀어놓은 것이다. 내 작품들이 나의 삶에 대한 것이기는 하나, 이를 통해 단지 이야기만 들려주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순간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나의 작품을 보는 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하며, 공감하기를 바란다."(최욱경, "콜라주 된 시간", 『뉴 멕시코의 인상』전 서문, 1978. "최욱경, 예술이 된 삶", 『WOOK-KYUNGCHOI』(서울: 국제갤러리), 2020, p.13에서 재인용.)
최욱경은 여성으로서의 주관뿐만 아니라 자신의 회화가 개인의 감정과 경험이라는 자전적인 내용을 시각언어로 풀어놓은 것이라는 확고한 미술관을 표명하였다. 그는 1960년대 말 미국 사회의 대형 이슈였던 베트남전이나 인종차별 문제를 작품에 때때로 반영하기도 하였지만, 좀 더 내밀한 표현이 가능했던 드로잉 작업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단어, 구절, 문장을 표현하였고, 드로잉 재료를 연필이나 목탄 외에도 먹이나 잉크를 이용해 작업함으로써 서예와 같은 동북아시아적 문화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콜라주 작업에서는 팝아트나 라우센버그의 컴바인 페인팅의 영향이 감지되기도 하며, 회화 작업에서는 자유로운 필치뿐만 아니라 선명한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강렬한 화면도 특징적이었다. 그는 당대 미국미술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매체 실험을 행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양식을 구축해나갔다.("최욱경, 예술이 된 삶", 『WOOK-KYUNG CHOI』(서울: 국제갤러리), 2020, pp.14-15.) 그러나 최욱경의 작업에 대한 당대 평가는 개인적인 범위로 의미를 한정하거나 대체로 여성 화가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의 시각이 투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은영, "낯설은 얼굴처럼: 최욱경의 미국 시기",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과천: 국립현대미술관, 2021), p.185.) 사실 미술사에서 여성 작가들의 위치를 자리매김 하는 일은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도 여전히 과제로 진행 중인 문제다. 2021년 퐁피두 센터는 『Women in Abstraction』전을 개최하면서 백 여명이 넘는 여성 작가들의 추상을 소개하였는데 최욱경의 작품도 세 점 포함되었다. 이 전시의 목표는 추상의 역사에서 여성 작가들의 기여도를 확고히 하는데 있었는데,(빅토리아 성, "색채의 정치: 1960-1970년대 최욱경의 미국 시기 회화",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과천: 국립현대미술관, 2021), p.187.) 21세기에도 남성 작가 위주로 서술된 미술사가 여전히 얼마나 견고한지 그 적나라한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하물며 서구 미술사가 그럴진대 한국의 사정 또한 다르지 않다. 한국의 추상미술사에서도 여성 작가는 남성 작가들 위주의 계보에서 소외되거나 개별적으로 언급되는 실정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번에 뉴스프링 프로젝트 갤러리는 최욱경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확고한 추상적 제스처를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 제여란(1960-), 도윤희(1961-), 박형지(1977-), 구지윤(1982-), 김미영(1984-), 김지영(1987-)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펼쳐 보임으로써 여러 세대에 걸쳐 있는 여성 작가들의 시각적 탐구를 한꺼번에 개괄할 수 있게 하였다. 제여란과 도윤희는 40년 넘게 추상회화에 천착한 모범적인 중견 작가들이며, 박형지, 구지윤, 김미영, 김지영도 10-20년간 자신들의 화업을 성실하게 구축해온 작가들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시도와 성취를 해오던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상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해서 동시대 여성 추상 작가들의 가족유사성뿐만 아니라 독자성을 확인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화업의 특징과 의의가 몇 개의 문장과 단락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겠지만, 각각의 출품작들은 작가들마다 정초하고 있는 회화관과 현재진행형의 관심사가 동시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참여 작가들과 그들의 작업에 대해서 개괄해보겠다.
제여란은 지난 40년간 「어디든 어디도 아닌(usquam nusquam)」이라는 제목으로 회화 작업을 진행해왔다. 평면에 대한 탐색에서 시작된 그의 회화는 눕혀 놓은 캔버스 위에서 스퀴지를 이용해 물감을 밀고 당긴다. 제여란은 활동 초기에 판화 작업에 먼저 심취했던 터라 스퀴지는 친숙한 도구였고 붓과 비교했을 때 작가의 신체가 완전히 통제하기 힘든 저항의 도구다. 그러나 스퀴지는 끊임없이 화면에 우발적 요소를 만들어내며 작가로 하여금 불가항력적 영역과 대면케 하는데 이 과정들이 반복되어 그의 회화가 완성된다. 제여란의 회화는 강렬한 색과 마티에르로 우리의 시선을 압도하여, "거칠게 돌아가는 곡선과 급격한 멈춤을 화면 어딘가에서 지속하고 있으리라는 기대가 마음에 자리하면, 마치 현실과 괴리된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김성희, 『제여란: 그리기에 관하여』(파주: 미메시스, 2017), p.24.) 또 "민첩한 감정으로 색의 경계와 공간을 구체화하며, 색의 경계와 물감 덩어리로 운율과 구도, 구조와 형태를 구성"한다.(황두, 『제여란: 그리기에 관하여』(파주: 미메시스, 2017), p.15.) 작가는 "수직방향만이 능동적이며 정신적인 의미를 지닌다 .인체에 있어서 척추는 내향적인 수직선 같은 것"이라고 한 바 있다.(제여란, 「작가노트」 중에서 인용.) 자연에서 수직방향은 중력이자 무게를 의미한다. 그의 회화는 물질 그 자체로서 중력을 상대하고 마찰에 저항하며 형상을 세우고 색을 밀어 올린다. 격정적인 화면을 추동한 힘은 수직에 대한 능동적이며 정신적인 저항의 힘인 것이다.
도윤희는 "나의 작업은 현상 배후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비가시적이지만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집중해왔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에는 인간, 사물, 자연, 그리고 이들의 관계에 있어서 공존에 대한 윤리적인 함의가 깔려 있다. 초기작들은 섬세한 선묘와 물감 드리핑이 특징적이었고, 최근작들은 빛과 어둠으로 사유하는 세계, 이에 대한 사색을 보여주면서 작가가 기존에 사용하던 도구인 연필과 붓을 버리고 대신 손을 이용하여 색채를 적극적으로 담고 있다. 그는 회화에 대해서 정신이 물질을 만든다고 비유하였는데, 즉 자신의 추상 작업은 머리로 생각해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그냥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반응을 위해서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며, 따라서 그가 현상 배후에서 찾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윤리적인 차원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회화는 몸의 흔적과 에너지가 축적된 감각적인 화면이다. 화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작가의 손의 바쁜 움직임과 힘은 물감의 색과 질감을 촉각적으로 느끼게 만들고 관람자의 시지각에 공감각적인 환영을 불러 일으킨다. 비가시적인 것을 감각할 수 있게끔 하는 작가의 몸짓이자 회화적 언어인 것이다.
박형지는 자신의 회화를 선택과 결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사건들이 축적된 결과물로 인식한다. 이 회화적 결정은 연쇄적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와 망치기는 비생산적인 시간 소모가 아니라 작업을 끌고 가는 동력이자 풍성함을 부여한다. 그는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회화적 제스처로 변환시키는데, 이를 쌓고 망치고 지우고 덮어버리고 다시 그리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그의 캔버스는 불규칙하고 홈리(homely)한 회화의 표면이 된다. 가벼운 소재를 긴 호흡을 가진 회화로 완성하고자 하며, 이때 소재가 가진 무게감보다 회화 작업의 프로세스가 더 중요하다. 또, 그가 말하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사건, 인터넷에서 본 것, 날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은 사연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 중에서도 휘발성이 강하고,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그의 회화의 주된 소재가 된다. 작업실 벽에 붙은 메모들은 그때 그때 그림으로 그리면 재밌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적어 둔 것이고 이중에는 몇 년 씩 묵은 것도 있다.
구지윤은 그간 구축과 해체의 풍경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도시 공간에서 개인이 갖게 되는 은밀한 욕망과 불안을 회화로 표현해왔다. 최근 작가의 시선은 고층 건물의 높이만큼 자라 무성해진 나무들과 그 아래에 형성된 생태계로 이동하였고, 이들의 다양한 공존 방식에 대한 호기심으로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인간에 의해 통제된 환경에서 생태계는 야생성과 포용성, 그리고 때로는 더 기이한 모습으로 적응하고 삶을 이어간다. 작가는 이 양면적이면서도 기이한 모습을 도시의 은유적 표현으로서 포착하여 회색의 병치와 대비를 통해 화면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본격적인 회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진행한 드로잉은 사소하고도 내밀한 기록인데, 작가가 작업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 이미지로 번역할 때 오는 어긋남과, 매번 붓질을 하는 순간 찾아오는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을 구체적으로 해석하게끔 도와주며, 보다 과감하고 자유로운 그리기로 이끌어준다.
김미영의 회화는 특유의 촉촉한 질감을 가진 올오버 페인팅이 대표적이다. 그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다른 물감을 덧바르는 식으로 물감과 붓질을 빠르게 중첩시켜서 화면에 역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곤 한다. 또 물감의 농도, 붓의 두께와 스트로크, 캔버스의 방향 등을 조절하여 화면을 수많은 회화적 사건이 벌어지는 장으로 만든다. 「스노우 볼」 시리즈는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가 중력에 의해 가속도가 붙으면서 크게 불어나는 현상을 평면 위에 회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는 눈덩이의 형성 과정 자체보다는 자신의 붓질의 운동성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의 운동처럼 그의 붓질은 원의 궤도를 끊임 없이 반복하며 힘이 실리는 지점의 무게중심을 살리며 움직였고, 결과적으로 화면에 강한 운동성과 시간성을 동시에 구축하였다.
김지영이 그리는 대상은 형체가 없는, 빛이자 온도이자 태양이자 촛불이자, 외상의 징후다. 서양미술사에서 추상회화는 전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역사적 실체를 괄호 치고 이로부터 멀어지며 순수해지려는, 곧 추상화 하려한 양상과도 관련이 깊다. 김지영의 추상회화도 비극의 외상을 촛불의 빛과 온도를 통해서 마주한다. 때로는 화염의 가장자리에서 서서히, 때로는 화염의 한가운데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비극적 기억과 고통을, 작가는 캔버스 위에 화염의 빛과 온도로 표상하는 것이다. 규정할 수 없는 빛과 온도의 형체는 빛이 지닌 여러 가지 양상의 시간을 작가가 캔버스에 담담하게 중첩시킴으로써 형상화 된다. 그의 캔버스는 희미하게 일렁이는 빛의 가장자리를 관조하고 있을 때도 있고, 때로는 단호하고 견고한 색면으로 생명과 죽음 사이의 어느 지점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추상에 대한 그의 태도는 숭고나 공허와는 거리를 두는 것 같다. 그의 회화의 온도가 차가움보다는 따뜻함의 색채를 지녔다는 측면에서, 외상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 의지가 차분히 후생의 안녕을 기원하는 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상기한 작가들의 작업은 모두 정체해 있는 것이 아니라 회화에 대한 꾸준한 탐구와 변모 가능성을 향하고 있다. 작가들은 그들이 평생의 업으로 삼은 회화가 끊임없이 회화 자신을 부정하고 갱신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 매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더 이상 새로운 회화가 없을 것 같으면서도 회화는 끊임없이 회화 자신에 의해서 갱신된다. 우리에게 최후의 회화란 없는 것이다. 미술사에 기록된 대단한 회화들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모순을 감행하면서 회화에 대한 담론을 지속시킨 선례들이다. 마찬가지로 미술사 역시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정하고 갱신해야 한다. 그것이 미술사의 숙명이자 본질이며, 이 전시를 추동시킨 힘이다. ■ 이성휘
사진에 관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Image provided by New Spring Project, Courtesy of the artist, Photo by Euirock Lee
Vol.20240121a | Abstract Gestures from Female Painter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