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4_0112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일,월요일 휴관
아터테인 ARTERTAIN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63-4 2층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artertain_
나를 찾는 Mapping ● 한 시대를 설명하고 기록해 놓은 역사서는 전쟁이나 팬데믹 같은 인류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그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기록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시대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으로 인한 삶의 변화, 반대로 삶의 변화로 인한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기록해 놓은 정도였을 뿐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개인이 살아 온 삶의 역사는 담겨있지 않았다. 시대를 같이 공유했던 이들의 기억에는 남아 있겠지만, 그들의 삶은 온전히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바쳐진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김홍범 작가의 회화는, 거시적인 역사적 흐름 속에 과연 개인의 삶은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을까 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즉, 개인이 겪었던 실제적인 경험들은 거대 담론 속에 묻혀 전혀 다른 이야기로 기록되고,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사실과 다르다고 아무리 설명해 봐도 결국 동시대의 기억은 거대 담론에 귀결된다는 것으로부터 작가의 작업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역사와 같이 맞물리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화면에 공간과 비공간의 개념을 섞는다. 일종의 표현 기법으로서 말하자면, 핵폭발 시 나타나는 버섯구름과 같은 거대담론의 역사를 상징하는 요소들과 고사리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혼재되면서 그 상징적인 요소들이 서로의 공간을 성립하기도 하고 오히려 화면을 평면적으로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화면 곳곳에 드러나는 선이나 마름모와 같은 기호들이다. 선과 선들의 교차를 통해 그 상징들은 공간을 성립했다가 기호들과 함께 평면적인 요소로 치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의 화면 구성은, 개인의 시대적 감성과 그 감성들이 잇고 있는 지극히 미시적인 역사적 서사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화면은, 시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사건을 바탕으로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일상의 경험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작은 역사가 될 수 있기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당연,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감상의 순간 찾기에는 여전히 어려울 뿐 아니라 숙제처럼 남겠지만. ● 그래도 매 순간 겪는 우리의 작은 역사 속에서 과연 어떤 것이 진짜 나의 감정일까. 라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있는 지도(map)을 그려 놓은 것 같긴 하다. 적어도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도를. 그래서 그 지도를 따라 바라 본 나의 내면이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순간의 단서를 찾을 수 있게 말이다.
불안이 스며 번지는 가지들 ● 불안은 우리의 감성을 가장 원시적으로 만드는 감정이다. 불안은 언제나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안이 가증되면서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해 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육체적 불안은 좀 더 단순하게 몸이 불편한 상황을 물리적으로 정리하면 되겠지만, 정신적 불안은 그 불안이 아주 단순한 이유로 시작되었을지언정 그 상태는 풀 수 없이 단단히 얽혀버린 실타래보다 더 복잡하게 엮여있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적 차원을 넘어 시대는 체제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발전해 왔다. 결과적으로 시대의 발전은 그 시대의 불안을 해소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감정으로서 불안 역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 굳이 심리학적인 학문적 연구를 근거하지 않아도, 불안은 언제나 나와 외부와의 관계 설정에서부터 비롯된다. 서로 얼마나 안정적으로 접촉할 수 있느냐에 따라 불안의 척도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승연 작가의 나무들은, 줄기로부터 가지로 뻗어나가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작가가 그리고 있는 나무들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나무들이라는 것이다. 오직, 작가의 머릿속이나 자동기술법처럼 움직이는 작가의 손에 있는 기억과 관념으로부터 시각적 감상이 가능한 나무들인 것이다. 즉, 그의 나무는 무의식이 의식을 넘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의 표식들이기 하다. ● 도대체 언제 끝날 수 있을지 모를 사고의 연속들. 그리고 그렇게 꼬리를 무는 듯한 사고의 흐름들을 타고 반드시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은 따라 들어오기 마련이다. 작가는 이러한 불안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여러 합판에 그려진 나무들을 특정하지 않고 배열함으로써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생각들 혹은 불안의 요소들을 단절시킨다. ● 또한, 수 없이 많은 생각과 그 생각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불안들로 가득한 굵은 나무 줄기를 그린다. 그리고 그 굵은 기둥줄기로부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민과 불안처럼 끝도 없이 줄기와 가지로 뻗어 나가 종래에는 작가 자신만의 나무가 그려진다. 따라서 작가의 나무에는 감정의 동요를 대변하는 흔들리는 이파리가 필요 없다. 당장은, 계절과 상관없이 강력하게 불안했던 순간으로부터 점점 어딘가에 스미고 또, 어딘가로 번질 수 있는 판을 짜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감성과 사고의 범위를 단순히 작가의 관념으로부터 그려지는 나무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다는 것이 어쩌면 젊은 치기에 가까울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불안은 나뭇가지를 타고 또 타고 결국 가장 얇게 뻗은 나뭇가지로 흘러 가다가 그 끝에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 임대식
Vol.20240112c | Sprout: 움트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