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는 기도

류준화展 / RYUJUNHWA / 柳俊華 / painting   2023_1213 ▶ 2023_1226

류준화_Big tabl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60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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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호명과 애도, 그리고 환대의 『지치지 않는 기도』 ● 화면 좌우 촛대엔 촛불이 켜져 있고, 과일 담은 그릇, 책, 화분, 그리고 목각으로 만든 개가 있는 화면 하단 전면부. 그 뒷부분인 화면 상단으로 흑백의 기념사진이 병풍처럼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8명의 일상 한복을 입은 여성이 야유회나 소풍을 간 듯한 곳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배경은 봄인 듯 꽃이 만발했으나, 흑백인 관계로 그 화사함은 알기 어렵다. 오래되어 보이는 이 사진은 이들이 같은 학우거나 특정한 단체의 회원임을 추정할 수 있는 징표이다. 우정과 우애의 순수한 관계임도 그 표정들로 알 수 있다. 이 사진의 인물은 항일운동가 윤형숙 1) 과 그 제자들이다. 1900년생인 윤형숙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나와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한 시기에 찍은 것으로 유추되니, 대략 90~70여 년 전의 것쯤 되겠다. 류준화는 이 시간을 거슬러서 이 사진을 현재 그의 화면으로 소환했다. 「윤형숙과 제자들」이란 작품이다. 오래전에 타계한 타자의 기념사진을 쌍 촛대 켜진 제사상으로 불러들여서 몽타주로 결합한 이유는 무엇일까.

류준화_윤형숙과 제자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23

류준화 근작의 주 소재는 윤형숙과 제자를 비롯, 일제강점기 호남에서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을 했던 '소녀회 2)'다. 류준화가 집안일로 나주에서 보낸 몇 년 동안 호남지역 여성 독립운동사를 찾고 연구한 결과겠다. 류준화는 이들을 자신의 정원으로 초대해서 식사와 술과 차를 나누고 또 그 행위를 자신의 캔버스에 담았다. 물론 이는 상상에 의해서다. 우리 시대에 잊힌 여성 선배를 호명하고, 대화하고, 차와 음식을 나누는 행위. 위무이자 대화고, 파티이자 제사다. 따라서 화면은 100여 년 전 여성 항일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사진을 통해 현재로 소환하고 제사상에 올린 제물 3) 과 신물 4), 즉 정물을 매개로 해서 그들에 대한 류준화의 기도하는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하겠다. ● 신작들은 표면적으로는 정물화다, 정물화. 한문으로는 「靜物畵」이니 고요한 사물의 상태를 그린 그림이란 뜻. 영어로도 살아있는 존재가 정지된 상태라는 「Still-Life」 5) 로 표기한다. 동서양 모두 같은 의미로 이 장르의 성격과 개념을 규정한 듯싶다. 다만, 시선의 주체가 외부 세계를 객체로 가늠하는 「Land-Scape」와 세계를 내외부로 분리하지 않는 동양의 「山水畵」가 구별되는 것처럼, 대상의 부동적 조건에 기초하는 '靜物'과, 물활론 6) 적 개념이 반영된 'Life'는 그 의미가 비슷함에도 약간의 뉘앙스 차이를 남긴다. 그러니까 류준화의 근작 정물화에 등장하는 기물들은 제물과 신물의 기능을 하는 활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작가의 내면 의식이나 여성주의적 시각을 버무리면서 동시에 역사적 지향성까지도 포섭한다. 정물은 장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작가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제의의 중심 소재로, 주제에 이르는 통로를 형성한다.

류준화_꽃과 별들의 파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4cm_2023

서두에 거론한 「윤형숙과 제자들」과 소녀회 멤버들을 그린 「지치지 않는 기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은 사람 형상이 등장하지 않는, 류준화의 집 정원 풀밭에 놓인 식탁의 정경이다. 그야말로 정물화다. 의자들은 비어 있고 식탁 위 초대한 이들의 사진이 각자의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꽃과 별들의 파티」). 사진이 사람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지금 그들이 그곳에 부재하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는 다시 사람의 척도인 말(言)의 부재를 의미하며, 결국 그 식사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그들과 작가의 묵시적 행위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즉 작가의 상상이란 것. ● 식탁에는 물병, 컵, 술병, 글라스, 과일, 접시, 촛대, 꽃과 화분, 연밥, 기타 테이블 웨어들이 놓여있다. 그런데 테이블 주변 공간이나 배경이 밝지만은 않다. 대체로 어둡거나 흐리다. 밝더라도 그 색상이 원색인 녹색이 아니라 혼색인 올리브그린류의 중(저)채도라 그런지 분위기가 묵직하다. 색채뿐 아니라 풍부한 질량의 안료로 물질감과 표현성도 더 도드라진다. 초대한 주인도 초대받은 객도 부재한 채 홀로 놓인 테이블의 화면이 환기하는 것은 영성의 분위기로 엄숙하되 뭔가 유동하듯 동적이기도 하다. 더불어 숭고한 보라색 꽃과 반짝이는 별이 장식한 서정적 공간에 놓인 식탁에는 작가의 마음도 오롯이 놓여져있다. "내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제사상을 차리는 것은 그녀들의 존엄함을 환기하고 그녀들의 자리를 만들고 싶어서다. 최근에 와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료와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이 아니어도 여성들은 늘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7) 라는 의지가. ● 그렇다. 작가가 초대한 이들은 앞서 거론했듯 100여 년 전 분들로 모두 타계했다. 그들의 실체는 당연히 이곳에 존재할 수 없다. 초대한 그들이 없는 식탁에서 류준화는 그들과 항일 이야기·역사관·여성관 등을 무언으로 담소한다. 그리고 사람 없는 만남과 만남의 현장을 캔버스에 남긴다. 그림으로 연역한 제의(祭儀)다. 따라서 이 정물은 현실이되, 상황은 환상이다. 현실의 작가가 죽은 인물을 소환한 비현실적인 상황설정. 이 정물화에서는 초대받은 여성 주인공들의 형상은 없다 8). 그러나 그들의 형상이 생략된 이 이미지는 오히려 작가에겐 그들과 만났던 추억이 각인된 푼크툼이고, 관객인 우리에게는 전달되어오는 메시지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외적으로는 정물화이되, 정물화 형식을 빌린 채 판타지와 리얼리티가 결합한 역사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모든 역사화의 구조는 그렇다. 이미 과거 시제를 일류전을 통해 현재화하는 것이니까.

류준화_파란컵-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23

풀밭 위 식탁에서 류준화와 저승의 선배 여성 선각자들 사이 영적인 매개는 「여자-물고기」와 「물고기가 오다」란 작품에 등장하는 식탁 뒤 벽화의 인면어(人面魚), 컵에 그려진 「파란 컵-새」, 「만찬」에서의 식탁 위 고양이, 목마 인형과 멀리 정원을 소요하는 말과 같은 동물이다. 「Still-Life」란 어휘에 애니미즘의 뜻도 있음을 참조하면, 이 생명체들이 영매가 되어 류준화와 류준화가 호명한 혼령을 연결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등장하는 여러 집기나 과일들은 류준화가 소환한 영혼들의 응대로 인해, 화면 내 단순한 정물이나 기물을 넘어서는 물활성을 확보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초대받은 이들(귀신)의 터치로 이승과 저승, 산 자와 죽은 자, 그림을 그리는 이와 보는 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샤먼의 소도구가 되었다고나 할까, 정물이되 정물을 넘어선 활물의 제기와 신물로 말이다.

류준화_여자-물고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3×45.5cm_2023

이런 화면을 바탕으로 초대한 이들에 대한 류준화의 애도와 환대와 오마쥬, 그리고 그녀의 "지치지 않는 기도"가 전체 작품, 즉 이번 전시의 주제가 된다. 동물의 정령을 매개로 한, 여성 항일운동가 혼령과의 접신은 여성주의와 역사 인식과 샤머니즘이 결합하는 구조다. 묘하다. 우리 미술에서 역사적 소재를 샤먼과 정물과 조합한 내용이나 이미지가 없어서다. 그러나 다음의 작가 노트를 보면, 이런 작가의 내적인 필연성이 이해된다. "의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들, 존재하나 배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생명들"과 "모욕과 혐오의 경험이 있는 여성들에게서 태어나는 또는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 남다른 애잔함" 9) 을 가진 작가가, 그들을 애도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찾은 것 말이다. 우리로부터 잊혀진 역사적 인물 중에서 남성 운동가보다는 여성 지사들이 많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명예로운 호명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던 그들을, 자료를 통한 대면을 넘어서서 동지애와 인간애와 존경심으로 호명하고 존엄하게 모시는 게 제사라면, 그들의 흔적과 혼령이 깃든 이 현장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화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심이자 제사가 아닐까. ● 그러면 화가 류준화는 어떤 여성 독립운동가를 이 제의에 초대했을까? 기록사진에서 옮겨온 두 작품과 초상 연작에서 이 궁금증은 풀린다. 「윤형숙과 제자들」, 그리고 「소녀회의 야유회」 10) 란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일제강점기 광주와 호남에서 항일운동을 했고, 일제로부터 고난을 받은 여성 선각자들이다. 그러니까 류준화는 그림 속의 꽃·별·숲의 정령이 된 이들을 새벽 식사나 만찬을 겸한 애도의 제삿상에 초대한 것이겠다. ● 앞서 내가 '혼령'이라 일컬은 이 '귀신' 11) 들은, 이미 오래전 타계해서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실체가 아니므로 당연히 화면 내에 형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초대받은 그들이 식탁 위 기물과 함께 그 공간에 현전하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화면의 분위기는 일반적이지 않게 된다. 소재인 정물을 "미적으로"만 보고 또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만 매달리는 정물화의 일반적 관습에서 보면, 작가-동물-정물-귀신이 함께 연결되는 샤먼적 물활론의 생명성은 이채롭다. 역사 속 인물, 그들과의 영적 접촉, 작가의 여성주의적 지성이 정물화란 장르를 빌려서 전개되는 방식이자, 그런 작가의 의식이 작가 특유의 형식에 의해 상징적 형상으로 현전 되어서다. 그 결과 화면은 정물화이되 내용은 정물화를 넘어서는 역사적 서사로 확장되었다가, 종국에는 다시 그런 서사를 넘어서는 상징으로 관객에게 전유된다. 그게 회화다. 작가의 내면이 대상과 상호 삼투하고, 그로부터의 표현이 형상과 물질로 남게 되는 것. ● 형상은 서사를 넘어서서 감각적 대상으로 남은 결과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류준화의 이 정물화(이자 역사화)에서는 그렇게 감각화된 형상이 오히려 서사를 더 증폭시켜주는 듯하다. 이처럼 그림 그리는 행위가 주체와 타자를 넘나드는 제의와 같을 때, 형상은 감각을 넘어서서 메시지로 작동한다. 류준화의 작업을 이끌어나가는 사유와 몸에 익숙하게 체득된 그리기 방식이 그 바탕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류준화_흰 꽃들의 기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4cm_2023

과거 2012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류준화의 개인전에서 가부장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여성주의적 관점을 피력한 어린 소녀들의 형상은, 류준화에게 잠재되고 내재된 생태적 에너지(기질)와 여성에 관한 젠더적 인식이 혼융되면서 그녀 특유의 그리기 방식으로 현전한 형상이었다. 설화적·무속적 뉘앙스를 풍기는 그 화면은, 남성성의 상대적 존재로 규정되던 고착된 여성성을 전복시키면서 '노라'나 '바리데기' 같은 원형서사를 자신의 젠더적 주제에 활용한 것이었다. 그때에도 작가의 독자적 표현은 서사보다 강력한 형상으로 작동했다. 회화적 기량과 주제 의식이 잘 결합된 결과였다. ● 그런 류준화가 몇 년 전부터 실체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인물화를 그린 2020년 「담갤러리」의 『100년 동안의 날개짓』 개인전과, 그 유형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실내 화초 정물을 그린 『Green Family』전을 같은 해 「나무아트」에서 가졌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연작으로 새로운 모색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다음 해 2021년 봉화 『백두대간수목원』에서 열린 「Ritual Table-감사의 테이블」전에서 이 둘을 연결하는 실험을 하고, 이번 개인전에서 이 이질적인 내용과 장르를 하나로 묶으면서 역사적 여성주의 서사를 감각적 회화로 구현해냈다. ● 실존적인 개별의 여성성을 말하던 것으로부터, 좀 더 분명하게 역사적·사회적 젠더로의 문제의식의 이행이다. 과거 구작에서의 집을 나온 소녀가 아니라, 집을 지키면서 세상의 모순까지 구체적으로 말하려는 입장 같다. 여성의 주체적인 자유에의 '욕망'은 항일 여성의 역사적 '운동'으로 소재가 바뀌고, 비유의 수사법은 역사적 사실의 소환으로 리얼리티가 강화된다. 그런 변화 때문인지, 최근 정부와 일부 기득권층의 친일적 행태가 도드라지는 현실에서, 류준화의 이런 주제의 발현은 자연스럽게 오늘의 정치적 입장으로 일정 부분 치환되어 읽히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동시대적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작가 본래의 지향성이 느껴지고 읽혀진다는 뜻이다. 정물화란 도식적 장르로 보는 이들에게는 이 화면이 단순하게 거기 있는 사물의 재현에 지나지 않겠지만, 작품 사이 연결과 흐름의 연속성에서 보는 회화적 시공간에서는 '가상적 실재'인 헤테로토피아이자, 작가의 페미니즘에 기반한 역사적 정치성이 현전된 '리얼한 환영'으로서의 판타스마고리아이기도 하다. 그만큼 더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에 기반한 상징이 현실적 주제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 물론 우리는 류준화의 그림을 일차적으로는 미적·감각적으로 감상한다. 그러나 좀 더 작품의 전후좌우와 배면과 정면을 아우르면서 내용에 대한 인식적 영역까지 맥락화해서 소구하게 되면, 작가가 제시한 세계가 우리에게로 전달-분배가 되고, 거기에서 감성을 함께 공유하는 지점이 생성된다. 미적인 행위와 반성적 인식의 교집합이자 교감과 공감의 장을 좀 더 넓게 확보하는 소통행위다. 또한 그것은 내용/형식, 감성/인식, 작업/감상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서서 작가와 관객이 함께 미적·정치적 분모를 확보하면서 미술 행위의 궁극적 주체가 되는 소통이 아닐까 싶다. 작가의 책상에 쌓인 「책의 무게」를 견뎌내고, 그 꼭대기 촛불을 그린 「책들의 기도」처럼 류준화 내면에서 인문(사회·역사)과 생명(여성성·자연)에 대한 그의 지향성이 "지치지 않는 기도"로 통일되는 지점 말이다. 거기에서 나는, 그녀가 비유와 상징, 몸짓과 흔적으로 은밀하게 그림속에 숨겨놓은 여성들의 숱한 고난도 동시에 깨닫게 된다. 감각과 감촉으로 그런 현실을 느끼게끔 만드는 회화적 기량이 그 바탕임은 물론이다. ■ 김진하

* 각주 1) 윤형숙 열사는 1900년 전남 여수 출생. 1919년 03월 10일 광주에서 거행된 만세운동 선두에서 시위를 벌인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그 시위에서 일본 헌병이 휘두른 군도에 오른팔이 잘려 쓰러졌으나, 다시 일어나 왼팔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더욱 크게 외치며 시위를 주도.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오른쪽 눈 시력을 잃은 채 옥고를 치름. 이후 혈녀(血女)라는 별호로 인해, 학적부와 판결문에도 윤형숙이라는 본명 대신 '윤혈녀'로 이름이 기재됨. 옥고를 마친 후 "외팔이 선생님" 또는 "외눈박이 선생님"으로 불리며 1927년 이후 야학 지도교사로 여성운동 및 문맹 퇴치 운동 펼침. 1950년 한국전쟁 때 전도사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총살당함. 2004년 건국 포장 추서. 2) 소녀회(少女會)』 / 1928년 고순례 · 김귀선 · 남협협 · 박계남 · 박옥련 · 박현숙 · 장매성 · 장경례 등이 전남 광주에서 조직한 여성 항일 운동 단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킴으로 남녀 차별 없는 평등사회를 구현하려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으로 조직. 광주학생운동 이후인 1930년 1월 광주여고보의 이광춘(李光春)이 일제 교육에 대한 반대로 백지동맹 단행을 공개적으로 주장함으로 강연회 주동자들이 옥고를 치룸. 3) 제물(祭物): 사람이 귀신에게 예로 바치는 공물. 이 그림에서는 피와 고난의 상징이자 그 결과물인 과일, 함께 대화하는 이미지 차(茶), 지성의 표지인 책 등이다. 4) 신물(神物): 촛대, 개 인형, 화분 등 제의(祭儀)를 위한 기물. 제기(祭器)를 뜻함. 5) 정물화 Still-Life: 여기서 Still은 '고요'라는 뜻이고, Life는 '살아있는 것'이란 뜻. 그러니까 Still-Life라는 병렬식 조어는, 사물이 고요하게 있으되 생명이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을 이르는 말이다. 6) 물활론(영어: Hylozoism, 物活論) 질료를 뜻하는 'hyle'와 생명을 뜻하는 'zoe' 합성으로 만들었다. 이 질료생명론(質料生命論)은 물질에 비실재적 실체 또는 독자적인 사유 체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이다. 무생물을 생명이나 의지를 가진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며, 물활론적 사고는 고대 부족들의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과도 관련이 있다. 질료를 뜻하는 'hyle'와 생명을 뜻하는 'zoe' 합성으로 만들었다.(위키백과에서 발췌 인용) 7) 류준화, 작가노트, 2023 8) 물론 그들, 즉 인물이 중심이 되는 그림인 「윤형숙과 제자들」과 「소녀회의 야유회」의 경우, 장르는 정물화가 아니라 '인물 역사화'로 할 수 있겠다. 9) 류준화, 작가노트, 2023 10) 이 사진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1929년 11월 3일 독립운동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 7명이 시위가 끝나고 사직공원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출처: 시민의소리 www.siminsori.com) 11) "귀신을 사람의 지혜가 축적된 산물로 보고 死靈과 대화하는 巫의 존재를 이해하고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죽지 않는 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에 욕망의 순화 · 정화하는 반성 기제로서 죽음의 귀신화(상징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임우기(문학평론가)의 2023. 11. 17일의 페이스북 글 중에서.

Vol.20231213e | 류준화展 / RYUJUNHWA / 柳俊華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