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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3_1202_토요일_04:00pm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두루 아트스페이스 DURU ARTSPACE 서울 마포구 토정로 121-1 (상수동 354-13번지) Tel. +82.(0)2.720.0345 www.duruartspace.com
어떤 풍경 ● 누군가는 글로, 또 다른 누군가는 다채로운 색으로 어떤 풍경을 그린다. 「저녁의 소묘 4」라는 짧은 시에서 소설가이자 시인인 한강은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겨울 저녁 시간에 마주한 설경에 관해 이야기한다. 1)
저녁의 소묘 4 ● "잊지 않았다 //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 부스러질 것들 // 부스러질 혀와 입술, / 따뜻한 두 주먹 //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 무엇인가 / 반짝인다 // 반짝일 때까지"
눈송이 하나가 반짝이며, 아니 반짝일 때까지 살얼음 위에 내려앉는 순간을 지켜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어쩌면 '검은 웅덩이'는 밖을 응시하는 동공, 그리고 그 위에 반짝이며 맺힌 형상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시인이 글로 그린 풍경에는 관찰하는 시선과 기다림, '부스러져 없어질' 것들의 생생함이 담겨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 놓인 12월, 추운 겨울에 열리고 있는 정민우의 개인전 『미미식탁』에서도 우리는 시간에 의해 중첩된 작가의 시선과 인간의 유한함을 그린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대신 작가는 정물화의 형식을 빌려 이를 풍부한 색채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꽃이 담긴 화병과 코카콜라 캔, 모래시계를 사물의 윤곽이 돋보이도록 표현한 「테이블 시리즈-코카콜라」(2022)는 언뜻 일상에서 우리가 쉽게 마주치거나 소비하는 것들의 조합으로 보일 수 있지만,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정물화의 한 장르인 '바니타스(Vanitas)'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다. '사라짐' 또는 '소멸'을 뜻하는 바니타스 그림은 전통적으로 해골이나 빈 유리잔, 낡은 책이나 촛불, 시들어 가는 꽃 등으로 정교하게 구성된 장면을 통해 현세의 덧없음과 시간의 무상함,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다. 정민우의 「코카콜라」 속 화려하게 핀 핑크빛 꽃과 폐기될 캔 음료,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모래시계는 마찬가지로 생명과 소멸을 암시하지만, 지극히 동시대적이다. 덧붙여 이 작품에는 작가만의 유머가 깃들어 있다.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캔 표면에 비좁게 적힌 zero sugAr와 'new taste'라는 로고에 미소 짓게 되지 않는가?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 동물과 인물을 주로 다루어 온 작가가 새롭게 주목한 정물을 '식탁 시리즈'라는 제목으로 엮어 소개한다. 미술사에서 식탁은 예술의 실험적, 정치적, 비평적 장소로 꾸준히 소환된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곳이자 가장 밀접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폴 세잔(Paul Cézanne)은 사물의 본질, 그리고 그 사물을 시간이라는 축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탐구하기 위해 식탁에 놓인 사과에 집중했다. 그저 볼품없이 놓여있는 과일들을 수일에 걸쳐 바라보고, 다른 위치에서 관찰하며 이 변화의 과정을 하나의 결정적 장면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여성 사진작가 캐리 매 윔즈 (Carrie Mae Weems)가 단출한 부엌 식탁을 배경으로 철저하게 연출한 「The Kitchen Table」(1990) 흑백 사진 연작은 또 어떤가? 그는 흑인 가정이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인종적 문제를 식탁을 주변으로 펼쳐지는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도를 통해서 드러낸다. 반면 김범은 「다리미 모양의 라디오, 라디오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다리미」(2002)를 통해 실제로 어디선가 사용했을 법한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흰 천과 변형된 제품을 배치해 기존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을 구상한 바 있다.
정민우 작가의 「테이블 시리즈」에 등장하는 식탁은 작가가 경험하는 일상의 풍경을 담아내는 무대 역할을 자처한다. 테이블 위로 자리 잡은 음식과 음료, 물건 등은 매주 그가 작업실에 가져오는 간식의 일부이거나 애착을 갖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어 책상이나 테이블에 놓고 구도를 잡은 후 사진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작업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루틴 중 하나로, 그는 이러한 기록 이미지를 바탕으로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린 뒤, 붓질로 채워진 면들과 검은 선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 외에도 정민우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선별한 디지털 이미지를 화폭에 옮기거나 부분적으로 발췌해 '식탁 위 풍경'을 완성하기도 한다. 「테이블 시리즈-쿠키」(2023)와 「테이블 시리즈-음료수」(2023)는 심지어 그가 매주 마주하는 작업실 공간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림 속에서 벽면에 가지런히 걸린 공구와 이전에 그린 자화상의 일부를 마치 힌트를 발견하듯 포착할 때 우리는 스튜디오의 내부를 어렴풋이 떠올려 보거나, 그 공간에서 함께 작업하는 다른 작가들의 붓질과 움직임, 그리고 그들 간의 교류도 상상해 보게 된다.
줄곧 아이패드를 활용해 디지털 드로잉으로 빠르고 단순한 형상을 제작했던 정민우는 지난 일 년간 「테이블 시리즈」를 주제로 아크릴채색 물감을 기반으로 한 회화 작업에 몰두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사진으로 포착한 이미지를 회화적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각 사물이나 음식이 갖고 있는 물성, 부피, 무게, 또는 감각적 특징이 패턴화된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특성의 사물들이 그의 식탁 위에서는 평면성을 강조한 추상적 패턴과 굵은 윤곽선의 조합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특히 '김치볶음밥'이나 '김치만두' 등을 그린 사분원 형태의 캔버스 연작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그의 시선과 예술적 기법은 보편화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겪는 작가들의 경우 그들의 행동이나 관심사 또는 활동이 예술 작품 속에서 반복적인 패턴으로 나타나거나, 변화에 대한 저항이 동일한 주제와 기법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명확한 선들로 이루어진 시각적 언어를 작가가 불완전하다고 인식하는 세계를 완성하려는 욕구를 구체화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공통적 특징'을 강조한 이러한 해석은 또 다른 폭력적 범주화를 강요할 뿐이다. 2)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민우 작가만의 고유한 회화적 특징이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해서 개발되고 다양화 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각 작품이 제시하는 관점을 예시로 주목해 보자. 「테이블 시리즈-음료수」(2023)는 작품의 소재가 되는 대상과 일정 거리를 둔 채 눈높이에서 바라본 장면을 담고 있지만, 「테이블 시리즈-샌드위치」는 부감법을 활용해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샌드위치를 재현한다. 마찬가지로 「테이블 시리즈-만두」(2023)는 식탁 위 각기 다른 두 요소의 관계성을 탐색하는 반면, 「테이블 시리즈-체리」(2023)는 열매의 높낮이가 만들어 내는 리듬을 강조한다. 작가는 때로는 하나의 물체를 확대해 개별적으로 조명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복잡하게 얽히거나 배열되어 보이는 장면을 담기도 한다. 이렇듯, 자칫 반복적으로 비칠 수 있는 그림들에서 우리는 비슷한 듯 모두 다른 화면의 구성을 마주하게 된다. 전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100호 크기의 대형 회화 작품은 지금까지 작가가 꾸준하게 확장해 온 회화 실력과 예술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만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일이 온전한 하나의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이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세계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할 때 화폭의 크기는 단순히 규모(scale)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더 큰 캔버스는 더 복잡하고 넓은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 임수영
* 각주 1) 한강, 「저녁의 소묘 4」,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서울: 문학과지성사, 2020. p. 91. 2) Gonzalez Barajas, A., & Hung Ho, R. (2021). "Unmapped realms: Representation of inner mythologies in the creative work of artists with autism". Epidemiology and Psychiatric Sciences, vol. 30.
Vol.20231202j | 정민우展 / JEONGMINWOO / 鄭旻右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