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30719d | 김여운展으로 갑니다.
김여운 홈페이지_www.yeowoonkim.com 인스타그램_@kimyeowoon 유튜브_youtube.com/@yeowoonkim
아티스트 토크 / 2023_1125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목요일_10:00am~08:00pm / 주말_11:00am~05:00pm
수호갤러리 SOOHOH GALLRERY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일로 121 더샵스타파크 2층 G-24 Tel. +82.(0)31.713.0287 www.soohoh.com @soohoh_gallery
그들에게 빛을-김여운 ● 김여운의 그림들은 각각 작은 무대들과도 같다. 이 무대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배역으로 등장하는데, 토끼와 흰털여우, 작은 강아지들과 관상용 새들, 그리고 거리의 보도블럭 사이에서 발견할 만한 작은 잡초들이 그들이다. 이들을 그린 그림들은 흡사 자연사 박물관의 동식물 견본들처럼 이중으로 구성된 박스 액자 혹은 소박한 나무 액자 안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2009년부터 발표된 작품들을 보면, 그 전시방식에 있어서도 미술작품이라기보다는 아카이브에 가까운 형식– 견본장, 샘플상자, 테이블, 비선형적 전시배치 –을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10년 갤러리엠에서 열린 전시에는 잘린 상아의 그림과 더불어 라틴어로 'Lux Perpetua Luceat Eis'라고 적힌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이 문구는 "영원한 빛이 그들에게 비추기를" 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데, '레퀴엠'이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죽음의 피안으로 사라져버린 존재들에 대한 애도를 떠올린다. 이 작품은 당시의 작가의 창작적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던져준다. 현재 우리와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곧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 애도는 조만간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영원한 빛'은 그들의 존재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에 대한 예찬이자 동시에 이 세계가 제공해 줄 수 없는 지속적인 생명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보존된 상자 속의 이미지들이 재현하는 '죽음'과 '소멸'에 대한 관념과 그것들을 비추는 '빛'의 대비는 김여운의 예술적 사유에서 핵심적인 서사가 된다는 점을 이 그림은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전시에서는 천문학적 대상들– 은하, 성운, 행성, 등-을 낡은 문짝이나 창틀의 유리를 통해 바라본 것처럼 그린 작품들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작가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있는 혹은 살아있던 존재들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창밖 혹은 문밖은 바로 깊은 우주로 이어져 있고 이는 생명이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로부터 직접 기원한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2023년 갤러리 도스에서 열린 전시 『거기 있다』展에서 작가는 캔버스의 갈라진 틈을 통해 싹을 틔우는 길거리의 풀들을 그렸다. 이 연작들은 독특한 화면구성을 보여준다. 루치오 폰타나의 찢어진 캔버스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이 파격적인 화면은 실은 눈속임(trompe-l'oeil) 기법에 의한 것이다. 하얀 캔버스의 찢어진 틈은 세밀한 사실적 기법으로 재현한 것이며, 캔버스 뒤에 빈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착시인 것이다. 그리고 그 틈으로 삐져나온 작은 풀들은 마치 빈 공간에서 화면을 뚫고 나온 것처럼 극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화면의 거의 대부분은 원래의 하얀 캔버스 그 자체로 남겨져 있어, 이 그림은 아직 사용되지 않은 캔버스의 물성을 그대로 강하게 지니고 있다. 화면은 사물인 동시에 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원초적 공간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흰색의 공간은 회화적 무대이기도 하다. 즉 눈속임 효과에 의해 찢어져 있는 캔버스로 제시된, 서사적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유추하자면, 이 캔버스는 그 어느 곳에서라도 새로운 들풀의 싹이 뚫고 나올 수 있는 잠재적 공간이 된다. 아마도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수많은 풀들이 화면을 뚫고 나와 캔버스를 뒤덮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각각의 익명의 풀은 어떤 미래를 향한 출발점일 것이며 그 미래는 매우 강력한 변화와 차이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서사가 이 회화적 무대로서의 캔버스를 존립하게 하는 배경이자 맥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는 모두 누군가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어있다. Cleopatra와 Antony, Sophie, Anna, Virginia 등이 그 이름들이다. 다른 이름들은 몰라도 Cleopatra와 Antony 라면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사랑에 빠져 결국 함께 비극적 최후를 맞은 유명한 로마의 장군과 이집트의 여왕이 아닌가. 이 그림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초상화(portrait)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캔버스를 뚫고 나온 풀들로 묘사함으로써 화면을 역사적인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무대로 설정하고 있다. 인간은 모두 역사적 서사의 시공간에서 돋아난 작은 들풀과 같다. 한 계절을 살다가 스러지는 풀잎처럼 짧지만 분명한 자신만의 시간을 영위하기 위해 공허함을 가로질러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이다. 김여운의 화면은 텅 비어있지만 곧 수많은 사건들로 채워지게 될 영점(零點)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인 위인이건 익명의 존재이건 이 무대 위에서 다를 것은 없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작가의 세계관은 우주 전체를 수없이 많은 작은 무대들로 이루어진 박물관 혹은 아카이브로 은유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시를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다. 우주는 수많은 책들로 채워진 거대한 도서관이다. 사람들은 가장 핵심적인 책, 즉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집대성한 '바로 그 카탈로그'를 찾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도서관의 복도와 서고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김여운의 박물관은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붙은 풀들의 그림 혹은 익명의 동물과 식물들의 그림들로 채워질 것이다. 풀은 익명성의 기호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기호이기도 하다. 흰 캔버스는 무에서 돋아나는 이 존재들의 생명력을 위해 매번 갈라지고 벌어지는 '틈-기호'(chasm-sign)의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는 무로부터 비롯된다. 그 틈-기호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세계가 그것을 통해 생산된다는 것이며 각각의 존재에게 있어 그 세계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최근작 「너의 변수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3m 크기의 '집합체 X'라고 불리는 커다란 구와 그것의 무게 대칭을 이루는 접시, 그리고 이 둘을 들어올리는 균형점의 막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에는 수많은 변수들을 나타내는 종이 띠들이 붙어있고, 관객들은 'You'라고 적힌 그릇에서 단어가 적힌 작은 돌들을 꺼내 반대편의 접시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 이 단어들은 포용(Inclusiveness), 친절(kindness), 사랑(love), 관용(tolerance), 행동(action), 배려(solicitude), 노력(Effort), 배려(care), 관심(interest), 지지(support), 기부(give), 인간애(humanity), 이해(understand), 이타심(altruism), 수용(accept), 연대(solidarity), 공감(empathy) 등의 단어들이 적혀있다. 단어가 적혀있지 않은 돌들에는 관객이 직접 단어를 적어 넣을 수도 있다. 이 단어들은 모두 인류와 세계의 긍정적인 성격들을 나타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구로 표현된 세계의 숱한 모순과 부정적인 문제점들은 '우리'가 제시하는 적극적 실천에 의해 해소 가능한 것이 된다. 이 참여형 설치작품은 김여운의 문제의식과 세계관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가 의도하는 바는 단순히 조형적 결과물에 한정되지 않는, 세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결심과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의례(ritual)의 장치를 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는 작가로서 김여운이 차제에 어떤 예술적 몸체(artistic body)를 구축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빛'(Lux)은 무엇인가? 빛은 캔버스의 흰색이다. 회화의 세계 안에서 유일한 빛은 배경의 흰색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회화의 장소이자 공간이다. 그 위에 그려지는 모든 것들은 배경의 흰색으로부터 빛을 받는다. 이 회화의 갈라진 틈 뒤에는 어둠이 있다. 김여운의 그림에서 존재들은 어둠으로부터 캔버스를 뚫고 빛을 향해 몸을 일으킨다. 흰색은 '세계-기호(World-sign)'이자 원초적 구원의 기호이기도 하다. 물론 회화는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우리는 회화라고 부른다. 김여운의 회화는 그 세계에 대한 도식, 도표(diagram)이자 그 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대상의 예외적 초상화인 셈이다. '그들에게 영원한 빛을' 던지는 것은 김여운의 예술적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구원과 화해, 관용과 수용은 빛으로 가득 찬 이 세계의 본질이다.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세계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구축되어 나갈지 기대한다. ■ 유진상
Vol.20231124e | 김여운展 / KIMYEOWOON / 金여운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