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 만다라 혹은 모나드 Everything in the world, Mandala or Monad

2023년 무안군오승우미술관 미디어아트 기획展   2023_1117 ▶ 2024_021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23_1215_금요일_04:00pm

참여작가 박인선_정나영_이매리_임용현 김범수_조현택_이예린_윤준영

주최,기획 / 무안군오승우미술관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입장마감_05:00pm / 월요일 휴관

무안군오승우미술관 MUAN SEUNGWOO OH MUSEUM OF ART 전남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 7 Tel. +82.(0)61.450.5482~6 www.muan.go.kr/museum @muan_museum_of_art

그림은 모나드처럼 창이 없고 평면이지만 단순히 표상을 넘어 작가가 몸담고 있는 시대와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외적 · 내적 환경을 반영하는 어떤 세계를 보여준다. 관람자들 역시 그림에 표상된 것만 보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독자가 텍스트 자체의 계열적 의미뿐만 아니라 텍스트들의 행간 혹은 빈 칸들로부터 건져 올린 생각들로 어떤 의미를 완성시키는 것처럼 오히려 그림에 드러난 것들로 미루어 드러나지 않는 현상들을 끌어올리고 우주 혹은 자신의 세계를 투사시켜보는 일에서 미적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미를 획득하게 된 어떤 현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여러 실체들의 복합체에 의해 형성된다. 세상에 드러난 하나의 현상이 접혀져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잠재적 주름들의 자생적 운동 속에서 잠깐의 펼침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물체를 분리하는 이원적 사고와 인간중심주의의 사고를 극복하고 개별적 실체의 잠재된 힘과 자발적인 운동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처럼 우리의 인식이 기계적인 연장에 의해 파악된 명석 판명한 것만을 실체라고 정의한다면 잠시 펼쳐진 주름의 현상 외에 접혀진 수많은 겹주름들의 혼연한 실체들은 모두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바로크 시대, 양차 세계대전, 그리고 현대의 네오바로크처럼 위기의 시대마다 우리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항상성을 명석판명하고 지배적인 논리보다 타자화된 이 혼연한 실체로부터 그 대안을 찾고자하는 노력을 반복해왔음을 알 수 있다. ● 17세기에 라이프니츠는 신의 예정조화와 개인적 실체의 양면 -형상(形相)과 물리적 실재-을 모두 지니고 있는 아주 작은 단위로서 모나드를 제시하였다. 그는 바로크의 문턱에서 이 모나드론을 통해 데카르트와 뉴턴의 형상과 절대성을 비판하면서 변곡과 곡률, 함수와 변수, 미적분이라는 수많은 변화지점을 내포하고 있는 혼연한 개념의 실체를 주장하였다. 창문이 없는 아주 작은 원자인 단자로서의 모나드는 수많은 주름과 겹주름으로 덮인 채 접힘과 펼침, 그리고 드러남 속에 숨은 무한의 잠재성을 지닌 채 미소지각(微小知覺)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의 실체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주체가 사유하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도 끊임없이 지각(미소지각)활동을 하는 실체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외부 세계의 표상은 지각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모나드 내부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세계의 표상을 자발적으로 발생시킨 결과로써 나타난다. 마치 바로크 성당 내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파사드의 조각처럼.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계에 눈을 돌리도록 만들면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게 한다. ● 19세기 무렵 유럽에서는 인류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집단의식의 원형을 주장했던융(Carl Gustav Jung)을 비롯해 신지학회를 창설한 블라바스키(Blavatsky, Helena Petrovna)여사나 러시아 밀교주의자인 우스판스키(Peter D. Ouspensky) 등에 의해 당시의 근대 기계론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고대 혹은 동양철학이나 불교로부터 찾으려하는 움직임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비의(秘儀的)적인 신화나 불교의 탄트리즘을 통해 우주와 인간의 합일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공간을 조화를 이룬 유기체 혹은 물리적 실체의 구조로 표현하고 있는 만다라에 대한 관심이 회화 이외에도 영화나 예술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융은 직접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매일 만다라를 그렸으며, 정신치료 요법에 사용하기 위해 만다라를 심리적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도형의 형태로 제시하였다. 융의 만다라에 대한 폭넓은 문화적 해석은 특히 미국의 화가, 영화인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세계대전 이후의 트라우마와 산업사회의 물질주의에 대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다. 예를 들면, 폴록은 알코올 중독 때문에 융에게 정신적 치료를 받았고, 이 동안에 만다라를 그렸으며 그의 액션페인팅에도 영향을 미쳤다. 뉴먼 역시 융의 이론에 심취했으며 'Nature mandala'라는 주제로 사진, 회화 조각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삶과 죽음'과 같은 양극성이 지닌 모순과 그 통합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신지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칸딘스키도 인도의 요가로 명상을 하였으며 불교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 과학, 사회, 기후, 자연, 전염병, 전쟁 등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현시대의 특성을 바로크 역사와 깊이 연결시키고 있는 요즘의 네오바로크 담론은 19세기에 편향적인 이념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제시해주었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와 불교의 만다라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 모나드와 만다라는 미소지각으로 감지되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미립자 세계의 찰나적 시공과 그 안에 주름과 겹주름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감추고 있는 억겁의 시공이라는 이 역설적인 세계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이 역설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의 세계를 나타내며 단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란 우주를 하나의 세상으로 표상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세상은 동시에 무한한 우주를 반영한다. 예술가는 어떻게 세상의 모든 것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편향된 이념이나 통념을 비판하고 있는가? 그리고 세계에 존재하는 양극성의 모순을 어떤 방식으로 화해시키면서 두 세계의 조화와 새로운 세계의 질서, 혹은 윤리적 측면을 표현하고 있는가? 현상을 보는 관점이 다양한 것만큼 작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그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전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박현화

박인선_무제_영상_2023
박인선_물줄기1 watercourse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91×91cm_2021
박인선_물줄기2 watercourse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91×91cm_2021

박인선의 작업 모토는 '모든 본질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이다. 그녀는 땅과 바다, 건물과 인간, 도시와 자연처럼 상대성을 내포하고 있는 여러 현상들과 시공들을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하나로 연결하여 원형이나 타원 혹은 좌우대칭에 가까운 새로운 구조물로 만들고 있다. 「Seed」, 「Watercourse」 연작들은 페인팅과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하학적이고 건축적인 구조물을 보여주는데 궁극적으로 본질과 현상을 연결시켜 만든 하나의 우주처럼 보인다. 이 특별한 우주는 그녀가 주재하는 조화의 질서, 즉 물, 땅, 바람과 같은 자연의 흐름으로 가속화되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재편되고 통합되는 과정을 겪는데 그녀가 부여한 연결과 조화의 캐논으로 완성된 이 세계는 자아와 우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밀교의 만다라를 상기 시킨다.

이매리_Homeostasis_금박 종이, 신문_가변설치_2023
이매리_시 배달 Poetry Delivery_ 스피커 2개, 디지털 페인팅에 금박_112×162cm_2023

이매리의 '시(詩) 배달' 연작은 유적지를 발굴하듯 지층에 묻힌 오랜 문명의 역사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록하고 '지금, 여기'로 배달하고 있는 작품이다. 올해 제작된 '시(詩) 배달#20230625'는 일제강점기와 한반도의 분단으로 인해 굴곡진 삶을 살다 카자흐스탄의 묘지에 잠들고 있는 어느 한국 음악가가 수집한 민족음악 두 곡의 사운드와 평면작업의 결합을 보여준다. 음반에 담은 사운드는 '고려 아리랑'과 이 곡이 들어 있는 SP 판에 담긴 민속 음악이며, 평면은 금박으로 된 텍스트와 악보, 디지털 프린트라는 매체로 물질화(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을 나타낸다. '고려 아리랑'은 1차 세계대전 독일과 러시아 전투에 참전했다가 '프로이센 수용소'에 갇힌 고려인 2세 김 그리고리와 안 스테판이 부른 것을 레코딩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평면과 사운드라는 단순한 매체의 표면이 반영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루 다 밝혀낼 수 없는 무게의 삶과 역사가 잠재되어 있는 지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1940년대의 디아스포라 음악가의 지난한 삶과 그가 '고려 아리랑'을 통해 불러낸 1917년 1차 세계대전 중에 고려인들이 겪은 굴곡진 역사로 망각이나 소실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지닌 시공의 이야기이다.

정나영_Godspeed You_알루미늄 패널, DC 모터, 모션 센서, 컨트롤러, 스틸, 스트로보스코프 조명_ 지름 150cm_2020_부분
정나영_Godspeed You_알루미늄 패널, DC 모터, 모션 센서, 컨트롤러, 스틸, 스트로보스코프 조명_ 지름 150cm_2020_부분
정나영_Godspeed You_알루미늄 패널, DC 모터, 모션 센서, 컨트롤러, 스틸, 스트로보스코프 조명_ 지름 150cm_2020_부분

정나영의 「Godspeed You」 연작은 모터 센서가 부착된 원형으로 된 알미늄 패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반복되는 화려한 추상적 문양이 프린트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일종의 만다라 구조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터로 회전하고 있는 원형 알루미늄 판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나이트클럽의 미러볼이나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 전쟁을 상징하는 무기와 바니타스적 해골, 분출하는 화산과 상징적인 기호, 선 등이 수없이 반복되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형상들이 특정한 사건을 다룬 원본 영상의 일부를 잘라내어 탈맥락화된 것이며 텍스트로부터 떼어낸 왜곡되고 희화화된 사건들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말한다.

임용현_무한의 지평선_단채널 와이드 영상_810×5390px, 00:03:30_2023
임용현_Moon Rainy_단채널 와이드 영상_1080×5760px_2022

미디어 작가인 임용현의 '무한의 지평선'은 매체의 본질인 빛에 대한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그는 '빛도 숨을 쉬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계속해서 던졌으며 이에 대한 답은 빛의 입자와 유기체인 인간과의 관계로 나타났다. '무한의 지평선'은 시공의 차원과 미립자(양자)의 파동으로서의 에너지는 상대적이며 인간의 영혼은 그 두 성질의 경계를 결코 나눌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무한의 세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와 '미소지각' 이론에 빚지고 있다. 더욱이 라이프니츠는 영상 미디어의 근간인 이진법 체계를 다듬었고, 그 체계를 직접 사용하였으며 미적분과 무한소의 존재를 밝혀낸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무한의 지평선'은 빛의 여러 성질에 의해 변화되는 무한한 우주의 현상- 반복 생성되는 기하학적 프랙탈(fractal)구조와 폭발(빅뱅), 파동과 에너지 등- 속에 외롭게 서 있는 개체적 실체인 인간의 존재를 표현한 작품이지만 마치 우주쇼를 벌인 듯한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준다.

김범수_Hidden emotion_영화필름, 아크릴 상자, LED_45×45×10cm×2_2021
김범수_Beyond description_영화필름, 아크릴 상자, LED_ 190×120×10cm×2, 210×120×10cm_2021

김범수는 이미 상영되었거나 용도가 폐기된 공연장면, 다큐멘터리, 흑백 혹은 컬러 영화 등 다양한 종류의 필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이미지와 스토리에 인위적인 요소인 빛을 개입시켜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해온 작가이다. 「Hidden Emotion」, 「beyond description」, 「contact-2」작품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구조물은 35mm, 16mm, 8mm의 필름 속에 집약되어 있는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르거나 붙이면서 재편집되어 새로운 맥락으로 구성되며 이를 반영하는 추상적이고 건축적 선들이 성당의 창문과 같은 외형의 표면을 이루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LED빛으로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외형의 표면은 그 아래 잠재되어 있는 세상의 모든 이미지와 스토리들에 의해 발현되는 찰나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준영_달과 검은 바다_한지에 먹, 콘테, 채색_130.3×97cm_2019
윤준영_어딘가에_한지에 먹, 콘테, 채색_110×100cm_2022
윤준영_space-believer_돌, 3D 프린팅, 검은구_30×30×30cm_2022

윤준영의 작품은 집, 망루, 나무, 새떼, 바위, 미로, 건물, 바다 등 언어의 구조처럼 상징화된 이미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식 아래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세계를 암시한다. 명확하게 상징화된 체계를 통해 끝을 알 수 없는 혼연한 세계의 존재를 끌어내고 있는 이 역설은 집, 건물, 나무, 광원 등, 작가의 기억을 통해 드러난 것들이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바다의 검은 심연 속에서 잠시 떠오른 불안하고 위태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자아와 관련된 개인적 실체이면서 또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보이지 않고,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우주를 자신의 세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실체적이고 물질적인 전략(매체)들과 끊임없이 사투하는데 그 결과가 한지에 먹, 콩테를 이용한 관념적 페인팅으로부터 바위, 돌, 합판으로 만든 집, 수조 등을 배치한 설치 작업으로 나타났다.

이예린_발밑 세상에의 노크_단채널 영상_2002
이예린_NYC10 #02: W_C 프린트_114×76cm_2010 이예린_NYC11 #04: Crysler Building_C 프린트_101×71cm_2011

한국에서는 비교적 드문 개념미술가인 이예린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잠재된 혹은 주름으로 접혀진 세계를 사진, 회화, 영상, 설치,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드러내면서 우리의 굳어진 통념들을 뒤흔든다. 그녀의 3분짜리 비디오 작품 「발밑 세상에의 노크」는 잠자고 있는 땅 밑 세상을 농구공 사운드로 두드려 일깨우고 건물의 바닥에 비친 구조물 사이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정경을 다시 거꾸로 뒤집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바닥에 반영된 허상이 거꾸로 치솟아 실상의 세계를 차지한 것이다. 이 영상의 사진적 버전이 「NYC11#」이나 「AZ#01」이다. 이 작품은 물웅덩이에 비친 시뮬라크르 세계의 색을 강조하고 현실을 오히려 흑백으로 처리하여 그림자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허상과 현실의 구분을 뒤집은 뒤에 다시 풍경의 상하를 도치함으로써 관념적인 두 세계의 존재를 뒤바꿔 놓았다. 그녀가 바닥에 고인 물을 통해 하늘, 인간, 건물, 자연 등 세상의 모든 것을 왜곡된 형상으로 반영시키고 있는 초현실적 장면은 성당 내부의 모든 것들을 반영하고 있는 파사드와 유사하다.

조현택_스톤마켓-포천_잉크젯 프린트_150×590cm_2020
조현택_스톤마켓-부산_잉크젯 프린트_120×370cm_2020
조현택_스톤마켓-화순_잉크젯 프린트_120×260cm_2020

사진작가인 조현택이 「스톤마켓-포천, 부산, 화순」연작에서 보여주고 있는 독특한 점은 석재상의 다양한 종교적 석상들과 탑, 무덤조각 등을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독특한 점은 작가가 일몰 혹은 여명의 새벽 길 위에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아스라한 시공이 만들어내는 각종 종교적 석상들의 낯설고도 기묘한(Uncanny) 아우라를 잡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스럽지만 속되고, 한 공간으로 모여든 여러 종교적 이콘은 평화롭지만 이질적인 신들의 긴장감으로 위태로우며, 성모마리아의 기쁨과 부처의 염화미소는 온화하지만 그로테스크하고, 구원을 위한 초월적 존재지만 궁극적으로 팔리기 위해 진열된 상품의 교태를 수반한다. 작품의 가로 크기가 거의 3미터에서 7미터에 이르는 실사적 규모의 사진은 거대한 성당이나 불교적 사찰의 건축물과 상응하면서 선과 악, 삶과 죽음, 인간의 욕망과 구원, 카니발적 희생과 생명의 생성이라는 극단적인 세계가 잠재되어 있는 종교적 만다라의 세계를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것, 만다라 혹은 모나드展_무안군오승우미술관_2023
세상의 모든 것, 만다라 혹은 모나드展_무안군오승우미술관_2023
세상의 모든 것, 만다라 혹은 모나드展_무안군오승우미술관_2023

르네상스 이래로 미술은 응시 자체보다는 시선을 우선시하면서 응시를 억압하거나 포기하도록 해왔다. 뒤샹 이후로 현대 미술은 이러한 흐름의 방향을 바꾸고자 노력 중이다. 특히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작품은 더욱 그러한 측면이 강하다. 미디어 아트도 그런 경향에 동참하고 있다. 다만 아직 그 역사가 짧아서인지 미디어 아트의 결과물에 대해 관객의 반응이 다소 미온적이다. 미디어 아트가 담아내는 영상을 차분하고 진득하게 관람하는 감상자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최근 현란해진 미디어 아트 (가령 몰입형 '빛의 벙커'나 미디어 파사드 등)를 체험한 관객들의 반응이 '표피적이고 찰나적인 느낌만 남는다'가 지배적이다. ● 이런 결과에 대해 작가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리는 그 대처 방식에 대한 힌트를 라캉의 '스크린' 개념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타자의 질서를 비추는, 타자의 권력을 반영할 뿐인 거울"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스크린 너머의 실재계 혹은 진리의 응시를 드러낼 것인가? 현실의 가상적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을 탐색하고, 진정한 세계의 그림자라도 비추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 만다라 혹은 모나드」 전시회는 미디어 아트의 화두와 방향성에 대해 흥미롭고 진지한 탐구의 장을 제공한다. ■ 김승환

Vol.20231117i | 세상의 모든 것, 만다라 혹은 모나드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