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먼지바람잠 Sparrow Dust Wind Sleep

이정展 / LEEJEONG / 李貞 / mixed media   2023_1117 ▶ 2023_1202 / 월,화요일 휴관

이정_한밤의 조각가_현수막 프린트, 각재_116.5×90.5cm_2023_설치전경(드로잉룸2.5 외부 베란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드로잉룸2.5 [가을에서 겨울] 공모展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화요일 휴관

드로잉룸2.5 Drawingroom2.5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다길 9 (연희동 128-30번지) 2.5층 @drawingroom2.5

기억 속의 이미지가 어느 날 꿈에 재등장했던 강렬한 순간을 메모한 적이 있다. 갑자기 날아든 꿈의 조각들마냥 덩그러니 주어진 네 개의 단어는 팔랑이듯 내려앉은 낱장의 종이들처럼 각기 다른 시간의 면면이 포개지고 중첩되어 현재와 조용히 맞닿아 있었다. ● 남겨진 단어들을 나는 한동안 반복적으로 읊조리곤 했는데, 앞뒤 순서를 바꾸어가며 불러보는 단어의 나열과 기호의 배열은 각각의 의미를 흐리게 하는 대신 일정한 리듬을 가진 운율, 내지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느슨하게 빚어진 한 덩어리. 글자의 발음은 전후 관계가 뒤바뀐 듯 일상에 잠식해 있는 신호들을 번갈아 가며 타전한다. 선명한 색이나 정확한 위치를 짓지 않는 회색의 얼룩과 몇몇 모험적인 구석들. 켜켜이 쌓인 생활 속 습관이나 무심한 행동의 기제. 미약한 각성제로 말미암아 쉽게 지나치고 잊혀지는 제스처와 그렇게 나타난 돌발표시들. 그 연장선에서 매일 같은 곳을 드나들고 배회했던 짧고 긴, 특별히 강렬하지 않은 순간들의 '나'의 위치를 떠올리게 한다. - 미발행 단편 『Sparrow Dust Wind Sleep』 프롤로그 중.

이정_참새먼지바람잠(drawing)_종이에 연필_2022

내용물을 밖으로 꺼내고 나니 손바닥 위에 작은 빈 상자가 놓인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의 옥탑방은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며 투두둑 윙윙 텅텅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통 알 길이 없는 지하공간 안에서는 머리 위로 둥둥 떠 있는 형광등이 꺼져버리면 모든 것이 암흑으로 지워진다. 망설임은 손가락을 오므려 한 번에 구겨버리면 끝나는 걸까? 에 대한 것이다. 종말을 선고받은 한 마을도 마침내 완벽하게 텅텅 비워져 결국 사라지기까지 4년이라는 유예기간의 점진적인 기울어짐이 있었다.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거짓말 같은 뉴스나 날씨 예보와는 다른 것이다.

이정_ㄸ_마닐라지에 유채_29.7×42cm_2023
이정_Untitled(aplat shape)_캔버스에 유채, 왁스, 채색된 목재 판넬_(L)52.9×45.5cm, 60.5×72.6cm / (R)89×36.5cm_2023_설치전경

그러므로 사적 공간이란 말은 어딘가 무색하다. 뉴스를 끄고 핸드폰도 끄고 바깥의 소음이 점점 커질 때까지 공간을 찬찬히 둘러본다. 매일 같은 지점에 누워 있었던 방바닥 어딘가, 아마도 시선이 천정 모서리 아래쯤으로 고정된다면 그곳이 나의 자리일 것이다. 낡은 커텐이 반을 가린 창 앞에서 이중 삼중으로 부딪히는 빛과 그림자. 안전하다고 느꼈던 그 사이에 끼어 서 있어 본다. 갈라지고 깨진 타일 바닥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몸의 균형이 삐걱거림에 맞춰지는 식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 느리게만 흘러가던 짧은 순간에도 공허의 표피가 만들어낸 공간의 여백은 언제나 같은 자리를 메우고 지탱한다. 그곳의 표피와 감촉, 분위기나 상태 등에 맡겨지는 건 어렵지 않다. 나 역시 문제는 그 공허와 이왕이면 춤을 출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정_참새먼지바람잠展_드로잉룸2.5_2023
정_온종일_낡은종이, 풀, 실_가변크기_2023
이정_일어선 테이블_목재, 이불천, 먹지, 종이축구공, 먼지테이프, LED T5_130×115×57cm_2023
이정_펼쳐진 일인용 테이블_목재(합판, 월넛)_119.6×161.4×51cm_2023
이정_참새먼지바람잠展_드로잉룸2.5_2023

가령, 그 프레임을 뚫고 들어온 친숙한 정황. 표피 그 자체가 찢어지며 의식을 깨웠던 직접적 관여가 있다. 힘겹게 일어난 정오의 어떤 날. 강렬한 빛을 (마지막으로) 발산하던 커튼을 비몽사몽간에 터치하는 순간, 이내 바스러지는 낙엽보다도 더 가볍게 조각나 버리는 커튼이 있다. 일시적인 머뭇거림은 커튼, 접촉, 깨어남의 소리 없는 한 박자이다. 지금보다 더 추웠던 팬데믹의 눈 오는 겨울밤에는, 이번엔 불 꺼진 그대로 같은 창 앞에 서 있을 때, 탈색된 커튼 너머로 적막한 회색의 눈을 짓이기며 홀로 눈사람을 조각하는 이의 섬세한 동작이 있다. 그저 눈덩이로 맞서는 기습적인 사투.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작업은 꽤 오래 지속된다. 누군가를 향한 필사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의 방점은 아침까지 버틸 필요 없는 눈사람에게 목도리를 씌워주는 것으로 끝난다.

이정_1289일_마스크고리, 마스크 끈, 채색된 로프, 스톤 클레이_가변크기_2023
이정_한밤의 조각가_캔버스에 유채_116.5×90.5cm_2021
이정_참새먼지바람잠_벽면과 바닥에 드로잉_혼합재료(시멘트, 페인트 ,바람개비, 흙, 낙엽, 종이드로잉, 기타)_364×196cm_2023_설치전경(드로잉룸2.5)
이정_참새먼지바람잠_혼합재료_364×196cm_2023_부분
이정_From Sun To Sun(해가 뜨고 질 때까지)_종이에 연필, PVC 프린트, 목재, 와이어_89×69cm_2023_설치전경(드로잉룸2.5 복도)

한편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그 작은 제스쳐는 '바다와 바람이 배의 형상을 만들었다'는 고대의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상기시킨다. 바다와 바람에 맞서거나 함께 춤을 추거나 배의 형상은 이미 오래전에 갖추어졌다. 그보다는 지금도 바다와 바람, 배의 형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별한 무엇이거나 무엇 때문이라는 이유가 탈각되면 빛바랜 한 여인의 사진도,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낡은 커튼도, 길 위의 플라터너스나무도, 정체불명의 되살아난 것들과 시간을 측정하기 힘든 지구 바깥의 돌 마냥 비슷하고도 생소한 것이 된다. ■ 이정

Vol.20231117e | 이정展 / LEEJEONG / 李貞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