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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후원 / 수림문화재단_수림아트랩 신작지원 2023 기획 / 임휘재(독립 기획자)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김희수아트센터 KIM HEE-SU ART CENTER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118 아트갤러리 Tel. +82.(0)2.962.7911 www.soorimcf.or.kr
안녕하세요. 이수지 입니다. ● 먼 곳까지 전시를 보러 와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곳에는 완성된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을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완성되기 전의 과정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전시에 대해 설명 드리기 전에 전시 서문을 왜 제가 끄적이고 있는지 궁금하실 텐데요. 이번 전시를 지원해주신 수림아트랩 신작지원 프로그램은, 지원서를 쓰는 단계부터 기획자와 작가가 협업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기획자님과 많은 양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하나가 주체가 되어 다른 하나를 섭외하는 일반적인 과정의 전시와는 달리, 저희는 시작부터 같은 무게로 전시를 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기획자님이 저를 알아가듯, 저 또한 전시라는 틀안에서의 기획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기획자에게 작가의 개인전을 기획하는 일이란 많은 가능성들을 누르고 끝내 타인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희의 과정과 대화 속에는 기획자님이 언제나 매우 중심에 계셨는데도 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번 전시에서는 어떠한 것이 완성되기전의 과정을 무대위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획자님의 생각과 글도 함께 전시되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부끄러운 글솜씨지만 기획자님 대신 제가 전시 서문을 쓰며 그 과정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형식과 과정(도구)이 결과물 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와 상응하는, 때로는 더 비중 있는 무언가로 보여 지기를 바라며 도구를 만들고 과정을 짓는데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쏟습니다. 만들어진 형식과 도구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오히려 반복적인 노동, 아니면 생산활동에 가깝습니다. 결과물의 시각적인 일시성 너머의 보이지 않는 과정들이 더 두터울 수 있음을 전달하고자 지금까지 결과물과 함께 도구를 전시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해 왔습니다.
고민은 작년 여름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도구와 결과물을 함께 무대위에 올려놓았을 때, 도구가 더 이상 단지 도구로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과정을 만드는 시간'과 '결과물을 만드는 시간'이라는 '인과'의 입체적이었던 두 과정은 분명히 다른 태도와 마음가짐의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될 때면 이 둘의 관계가 직선상에 놓이며 같은 무게의 개개의 작업물 연작으로 보여지지는 않는가 하는 부분에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작업실에서 늘 곁에 두고 쓰던, 명백히 도구일 뿐이었던 것들은 전시라는 형식 안에서 어떠한 예술, 설치미술, 가끔은 퍼포먼스를 곁들인 작품 등으로 은연중에 모순된 아우라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한 비평가에게 도구를 전시함에 있어서, 과연 그것들이 무대 위에 올랐을 때, 단지 도구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도 어떻게 해야 도구가 무대위에서도 도구가 될 수 있는 지 잘 몰라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에게 도구는 무엇일까요. 저는 도구가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도구는 현재 진행형으로, 무엇이라고 하기보다 계속 변화하는 어떤 상태에 가깝고, 목격하기보다 목도하는, 'see' 보다는 'watch'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결과물(작품)은 그와 같은 공간과 시간을 모두 달린 뒤 완전히 멈추어 마침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박제된 상태로, 저는 이를 마치 해소의 시간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의 제가 생각하는 도구는 그러합니다. 그런데 결국 생각의 말미에 늘 들었던 의문은 도구를 정의 내리는 것이 지금의 저에게 왜 이렇게 중요한 일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매우 근본적인 의문부터 충족되지 않으니 언제나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쓸데없는 강박 같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러한 저의 의식의 흐름을 그동안 무작위로 감당하신 기획자님의 글 초고를 읽게 되었을 때,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획자님의 글은, 어쩌면 그 말뜻의 경로까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저 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저를 설명하기 위해 써 주신 친절한 글이 관객들께는 조금 불친절한 글이 되지는 않을지 하는 염려도 대신 해봅니다.
이번 전시는 도구를 도구로 보여질 수 있도록 고민하며 구성해 보았습니다. 무언가를 신성하게 보이도록 하는 배치는 최대한 배제하고, '현재 진행중'임을 드러낼 수 있는 소품도 사용해 보았습니다. 덧붙여 어쩌면 지난 도구들의 현재 행방이 궁금하실까 하여 들어가시는 입구 쪽에 그에 대한 책자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기획자의 글은 여러가지 형태로 때로는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바탕이 되기도 하면서 저의 작업과 관계를 맺으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 그럼 즐거운 관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이수지
* 본 글은 처음과 끝이 없이 계속 반복되는 구조를 지닙니다. 어디에서부터 읽어도 좋습니다. * 글의 각 문단은 전시 공간에 다양한 형태로 산발적으로 배치되며, 플로어 플랜(플라이어)에는 순서가 표기됩니다.
(...) 1. 끝을 호명하기 싫은 순간이 있다. 그것은 끝의 가장자리를 상정할 수 없어서기도 하지만 아쉬움과 미련이 그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창작의 순간, 작품의 완성을 승인하고 공개를 허가하는 것은 창작자 자신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따금에서 끝의 단언은 불가능하다.
2. 이수지는 『네 가지 도구』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그리고 그 옆의 나는 기획자가 되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이 둘은 얼마나 일치하며 얼마나 다르게 이 과정에서 묶일 수 있는가. 우리가 향하고 있는 선형적 시간은 어떤 공진화 과정이 될 수 있는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고민은 '우리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라는 의문으로 쌓였다. 지속적이고 집합적인 탐구를 예술로 여길 때, 우리가 하는 것은 예술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단지 우리는 함께 빵을 나눈다는 의미의 라틴어 쿰 파니스(cum panis)로부터 밥과 음료를 나눠 마시며 반려(companion)의 관계가 되어간다. 그리고 우리의 반려는 서로의 세상에 대한 주체 만들기와 객체 만들기의 얽힘의 결과물이 되어간다. 시간을 들여 이수지의 이모저모를 천천히 바라본다. 애정을 섞어 한소끔 불을 지핀다. 그리고 그가 되었다가, 그가 될 수 없었다가를 반복하며 글을 써내려간다. 이렇게 『네 가지 도구』는 서로가 만들어 낸 예술가와 기획자라는 주체이자 객체가 얽혀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우리는 『네 가지 도구』 안에서 지금까지 이수지가 핵심어로 말해왔던 형식, 내용, 과정, 결과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낱실들의 직조 과정을 추적하고 동시에 낱낱들을 각각의 개체로 해체하며 다시 연결하는 과정을 향해 나아간다.
『네 가지 도구』에서 이수지가 펼쳐 보이는 것은 단지 '도구'이다. 그러나 한편, 펼쳐 보임, 즉 전시라는 것은 보여주는 이와 보는 이를 상정하고 예술 작품이라는 호명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체제를 포함하게 된다. 이에 따라 누군가는 이수지의 '전시된 도구'를 다른 무엇, 이를테면 예술 작품으로 감각하고 인식한다. 그러나 이수지는 전시된 도구가 완결된 형태의 결과적 작품으로 보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에게 전시된 도구는 기능적 역할로 위치하며, 이후의 시간에 놓여질 생산물(창작 결과물)을 품고 있는 중간의 무엇일 뿐이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방향을 설정한다. 첫째, 도구의 정의를 찾아가는 방향이자 여전히 결론 내지 못하는 그 과정 자체라는 표류가 될 수 있다. 둘째, 펼쳐 보임에서 펼침의 방법이다.
3. 나는 이수지와 공진화의 현장에 놓인 동료로서 그가 결정한 전시 제목 『네 가지 도구』를 '네(너의), 가지, 도구'로 읽는다. 이수지와 도구의 관계는 '이수지-도구 연리목'을 구성한다. 이수지로부터 가지를 뻗친 도구, 도구로부터 가지로 뻗친 이수지, 그 무엇이든 '이수지-도구 연리목'은 스스로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왔던 이수지/도구가 잇닿은 결과물이다. 이수지와 도구는 서로 다른 뿌리를 지녔지만, 양분과 면역계를 공유하는 관계로 이미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가 본인과 분리된 것으로의 도구를 명징하게 정의하려는 시도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이 연리목을 담당하는 정원사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의 공진화 과정 가운데, 만약 가지치기를 잘할 수 있다면, 가지치기의 결과에 따라 두 뿌리가 이어지거나 나눠질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각각의 줄기가 지닌 의미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의 분리 (불)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가지치기 가운데 이수지-도구 연리목의 줄기(stem)는 어떤 줄기(stream)로 읽힐 수 있게 될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생산한 도구를 단지 도구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그의 염원을 위해서, 그 스스로에게 절실한 도구의 정의를 위해서 우리는 '도구'의 규정, 정의를 묻는다. 이는 전시 공간에 들어선 순간, '네 도구가 당최 무엇인지', 이것은 이수지 스스로에게 직면한 질문이자,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으로 드러날 것이다.
4. 『네 가지 도구』는 앞으로의 기대, 무엇이 만들어질 가능성, 즉 규정되지 않는, 규정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이수지 자신과 그의 창작물을 포괄하며 드러난다. 이수지는 자신에 대한 규정적 호명으로 메이커, 예술가, 기획자, 작가, 레지던시 입주자, 예술계 종사자, 그리고 불린 적 없는 새로운 이름을 고민한다. 어느 하나로 자신을 규정할 수 없는, 그렇기에 어딘가 명징하게 뿌리내릴 수 없는 이수지가 되어, 자신의 승인에 따라 뿌리내린 도구의 양분에 기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반대로 어딘가 뿌리내릴 수 없는 도구라는 존재가 이수지의 양분에 뿌리내려 기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잇다 보면 그 둘은 공생의 관계로 향해간다. 그가 자신의 규정적 호명을 완결 짓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수지에게 자신의 창작물은 완결된 마스터 피스로 놓여질 수 없는 것, 계속적인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그는 전시라는 일시적인 포맷을 통해 '지금의 나는 이런 나'라는 단편성을 강조하며, 완결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의 배치를 고민한다. 특히 『네 가지 도구』에서는 '현재 진행 중(LIVE)'이라는 본인의 시점을 공유하기 위해 '조명과 글'을 돋보이는 연출적 구성을 추가한다. 조명이 꺼진 무대의 정적과 조명이 켜진 무대를 대비시키며, 전시가 지닌 일시적 포맷을 강조한다. 이로써 이수지는 우리의 체제 안에서 선재적으로 획득한 일명, 작품의 아우라(aura)를 제거하길 시도한다. 그리고 나는 글이 되어 그의 곁을 머물고, 그가 디딜 대지가 되며, 그의 주변을 맴도는 단서가 된다. 이러한 시도는 예술 작품이라는 명칭에 연결된 감각과 인식 그리고 존재로의 이동 문제에 있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아우라를 문제 삼아 과정의 아우라, 결과의 아우라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5. 이렇게 이수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리고 그의 과정을 곱씹어 보면, 그는 과포화 상태이다. 그의 안에는 퍼텐셜 에너지가 가득하여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긴장과 갈등이 항상 내재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따금 외부의 에너지의 유입 등의 자극을 통해 상의 전환을 이룬다. 이렇게 그의 예술 세계에서 '장(phase)'이 탄생한다. 이수지의 '장'은 과포화 상태를 거친 상전이 결과로 나타난다. 과포화 상태를 거치지 않는 보통의 경우, 상전이는 온도, 압력 등 외부의 조건에 따른 평형상태의 이동에 의해 발생한다. 즉 조건의 변화에 따라 평형상태의 상은 그 모습을 액체에서 고체로, 기체에서 액체로 마땅히 변화된다. 그러나 과포화 상태란 정상적인 평형상태에서 벗어난 상태이며, 열역학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또는 비평형 상태이다. 또한 과포화 상태는 평형 상태를 기준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이상의 상이 포함된 상태이다. 이수지는 그의 안에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양립시키며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가, 상전이를 통해 해소되었다가, 다시 불일치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이수지는 스스로에게 모순으로 쌓인 질문들, 이를테면 과정 자체만을 전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그리고 이들의 양립 불가능과 불일치, 그러나 답을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의지로부터 비롯되어 고정된 형태가 아닌 다가올 변환들로 충전된 풍부한 상태가 된다.
과포화 용액의 상전이 현상을 통해 실재에 대한 탐구를 실행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개체화론을 살펴보면 개체란 과포화 용액과 같은 상태의 전개체적(preindividual) 실재가 상전이하면서 발생되는 것이다. 시몽동은 과포화 용액에서 석출되는 결정체를 개체로 설명하였고, 이를 확장하여 개체를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주변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적 실재로 보았다. 과포화 용액의 상전이는 겨울철이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똑딱이 손난로'가 그것인데, 이것은 용해도 이상의 결정을 녹이고 있는 과포화 상태의 용액(똑딱 이전의 액체 상태의 손난로)이 외부의 충격(똑딱)을 통해 상전이 되는(액체에서 고체로 변화하는) 현상으로 불안정한 과포화 상태의 용액을 결정화시킴으로써 안정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미 전개체적 상태였던 손난로는 퍼텐셜 에너지가 가득한 상태였기 때문에 똑딱이는 작은 힘에도 상전이가 발생한다. 이수지의 과포화 상태는 똑딱이 손난로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 이수지는 결과적으로 주어진 구조나 형태보다 그러한 구조나 형태를 발생시킨 근본적인 작용에 주목한다. 즉, 개체화된 실재가 발생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발생의 동력을 밝히는 것으로 생성-존재 운동 그 자체를 포착하는 것이다. 이는 실재를 탐구한다는 거대한 학문적 뭉치에서 대개 탐구대상의 객관적인 구조나 형태에 주목해왔다는 점, 그리고 각각의 개체화된 실재는 독자적 실체로 여겨지며 생성과 존재를 대립항에 둬왔다는 점에 대항하는 이수지의 독창성이다.
6. 이렇게 이수지 작가를 천천히 바라보다 두 가지를 발견한다. 첫째, 그는 불변적 항들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둘째, 그는 자신의 외부에서 규정된 어떤 것의 과정이 쉽게 생략된다는 점에 대해 간지러워 한다는 것이다. 이수지에게 중요한 것은 외부를 통해 규정된 개체들을 모범으로 하여 과정, 결과, 형식, 내용, 공진화, 장 등의 '개념적인 개체들', 종이, 실, 바늘, 나무 등 재료로서 '물리적인 개체들', 그리고 도구, 도구에 대한 이수지의 필요, 도구 이후의 작업의 변동 등의 도구를 중심으로 한 '확장된 개념적 개체들'에 대한 개체화의 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이수지는 결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략되었던 과정에 대한 구체적 서술을 회복한다. 환언하면, 『네 가지 도구』는 이수지에게 구성된 작품을 모범으로 하여 그의 작품화의 원리를 찾는 일련의 과정의 반복 속 일부이며, 여기에서 소거된 작품의 제작 과정을 반추하는 시도이다. 어쩌면 여기서 실재하는 것은 시간을 통해 전개되는 이수지의 작품화 과정일 뿐이며, 작품들은 이러한 작품화 과정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결국 이수지의 존재론은 생성의 존재론이다. 이수지는 자신과 도구라는 존재에 다가섬에 있어 존재와 생성을 대립항으로 위치시키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양립 불가능한 상태들을 양립시키고, 불안정한 가정들로 충만한 상태가 기꺼이 되어가며 단일성과 동일성의 논리적 조건을 넘어선 상태를 향해간다. 이렇게 이수지는 퍼텐셜 에너지로 가득 채워져 생성과 존재를 혼합해 나간다. 지속적으로 이수지에게 도구와의 관계가 중요시되는 것은 그의 생성의 존재론은 곧 관계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이수지에게 도구라는 것은 생성의 목적을 두고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이수지는 도구를 존재 그 자체만으로 말하지도 못하고, 생성 그 자체만으로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도구는 충만한 퍼텐셜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하며, 또 무언가로 생성하려는 잠재성을 지닌 전개체적인 것으로 자신과 똑 닮은 과포화 상태이다.
7. 이수지와 도구는 모두 과포화 상태이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를 개체화시킴과 동시에 존재자 안에 구조의 형태로 현전하며 공진화한다. 그들의 안에는 과정과 결과, 생성과 존재 등의 대립적으로 여겨진 개념들이 양립 가능한 관계로 위치한다. 이수지와 도구는 양립 불가능한 긴장된 힘들 사이에서 각자의 이질성을 반영한 채로 평형을 찾아가며 공진화한다. 이렇게 이수지와 도구는 규정이 불가능한 전개체적 상태에서 개체화를 통해 스스로 규정 가능한 상태가 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 이수지의 도구는 기술적 완전성에서 아주 낮은 정도에 해당하는 자동성을 제쳐둔다. 그의 도구는 어쩌면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이수지를 비롯한 외부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열린 시스템일지 모른다. 그의 도구들은 낮은 수준의 완전성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를 공진화 시키는 열린 시스템 안에서 준안정적인 상태를 취한다. 그리고 이수지 내부의 긴장과 갈등, 도구 내부의 긴장과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며, 과포화 상태로 다음 상전이를 기다리고 있다.
8. 끝을 호명하기 싫은 순간이 있다. 그것은 끝의 가장자리를 상정할 수 없어서기도 하지만 아쉬움과 미련이 그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창작의 순간, 작품의 완성을 승인하고 공개를 허가하는 것은 창작자 자신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따금에서 끝의 단언은 불가능하다. (...) ■ 임휘재
Vol.20231116e | 이수지展 / LEESOOJI / 李受志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