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현 인스타그램_@lizelll 주기범 인스타그램_@gombe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본 전시는 인천광역시와 (재)인천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2023 예술창작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개최되는 사업입니다.
후원 / 인천광역시_인천시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인천문화양조장(스페이스빔) Incheon Culture Brewery(Space beam) 인천 동구 서해대로513번길 15 1층 우각홀 Tel. +82.(0)32.422.8630 www.spacebeam.net @spacebeam_community
이름 없는 그 장면들, 장면 없는 그 이름들 - '투명함을 깎는 일'에 문장을 눕히며 ● 어느 땅의 시간이 흘러 또 다른 터전이 덮이고, 무너지고 무너뜨린 자리 위 켜켜이 쌓인 퇴적물로 두꺼워진 지층은 곧 이어질 죽음의 시간을 담보한다. 얼핏 시간이 정지한 듯한 장면. 모두가 떠난 도시 앞으로 걸어 나와 저 깊이 숨겨진 시간을 마주하기로 결심한 콜데바이 1) 의 편지에 한 시인은 이러한 문장을 눕힌다. "발굴을 하는 자에게 폐허 도시는 잊힌 도시가 아니다. 자신의 환상 속에서 움직이고 자신을 구속하는 살아 있는 현재이다." 2)
먼 이야기에서 잠시 빠져나와, 초겨울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전시장 위 쌓아 올린 물감층은 당장의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 눈앞을 가로막은 장막을 조심스럽게 거둬내고자 하는 고고학자의 태도를 견지하게 한다. 이는 아마 이상현과 주기범의 그림에서 자주 발견하게 된 단어들, 유적지, 탐사, 수집이라는 작은 이정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폐허 도시가 아닌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풍경 앞에 서서 저 뒤편을 감지하는 예술가의 행위는 고고학자의 그것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닮았거나 상이한가.
이상현은 오래된 역사란 애초에 쓰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도시 외곽을 거닐며 시선을 어지럽게 하는 사물을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대상과 나 사이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잠시 지연시키듯, 끝내 시선을 거두지 못한 장면의 탁본을 떠내어 먼 시간의 지층을 상상한다. 단일한 방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기도의 안쪽」(2023)처럼 위태로운 임시기물을 땅 위에 세워보거나 손으로 무언가를 우그러지게 했다. 반복하여 감각한 인간이 쌓아올린 땅의 나머지와 암흑을 파고 들어간 틈바구니(「검은 눈」, 2023)도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불안한 사물의 터전도 이전과 다른 형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오히려 이러한 형상은 실재 이전부터 그 안에 내재되어있던 시간을 드러내고 있다.
주기범은 기억 저편에 방치되어 있던, 과거에 분명 어떠한 이유로 렌즈에 담았던 이미지를 당시의 감정과 기억이 소거되었을 즈음 다시 꺼내 화폭으로 옮겨왔다. 새로이 시도한 그의 만화적 캔버스는 시간의 순서가 으레 있으리라 생각하는 우리의 인식을 배반하고, 서로 연결되지 않고 어긋난 채로, 이전에 경험한 그리고 앞으로 경험할 모든 시간이 한 페이지 안에 뒤섞여 나타난다. 「하나가 될 수 있는 신호탄」(2023) 안에서 그는 울산에 머무를 당시 보았던 기념비와 인천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기념비를, 장소도 시간도 제각각인 축적된 사물의 모양새를 무음의 신호탄을 기제로 건져 올린다. 건져진 이미지는 아무런 연고 없이 다만 '있음'으로 자리한다.
두 화가는 지난 날 스쳐온 장면과 필연적으로 과거가 될 시간에 어느새 덧입혀진 맥락과 서사를 지우고, 구태여 이름 붙이지 않은 장면들을 "살아 있는 현재"로 불러와 탐구한다. 대게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한 치의 구부러짐 없는, 선형적인 시간 안에서, 그렇게 지금껏 체득한, 사고 안에서, 사물의 이름을 불러왔다면, 언어의 오차가 없(어 보이)는, 세계에서, 추방당한 장면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기 위해, 혹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자, 대상을 투명하게 감싸고 있는, 우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그저 가만히 응시함으로서, 그 너머를 바라본다, 선연히 움직이고, 서로, 중첩되는 풍경을. 3)
전시 『투명함을 깎는 일』 서문 의뢰와 함께 건네받은 문서에는 사무엘 베케트의 저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워크룸 프레스, 2016)의 일부가 적혀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해설을 덧댄 전승화는 번역이란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 즉 원작의 재현이기에 "일종의 정물화"라고 정의하며, 반면 베케트의 글은 번역과 원작 간의 위계적인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 "원작 이전에 있었을 텍스트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상현과 주기범이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리고자 한 일종의 '풍경화'란 무엇이었을까. 투명한 장막, 즉 완전한 원본에 대한 관습적인 믿음을 저버리고/깎아내고 창작과 모방의 경계가 흐려지는 모호한 자리에서 문자 이전의 존재를 붙잡는 일. 두 화가의 바지런한 수행을 거쳐 전시장에 놓인 이름 없는 장면들, 장면을 잃고 나뒹구는 수많은 이름들. 굳건한 질서가 어그러져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워진 세계. 서로가 서로를 잃고 불규칙하게 자리한 모양새에 다시금 단정적인 언어를 부여하는 대신, 어느 시인이 포갠 문장을 슬며시 바꿔 적는 데에서, 또 다른 작은 이정표를, 허락된 자리를 빌려 눕혀둔다. "그림 그리는 자에게 여기의 풍경은 정지된 세계가 아니다. 자신의 시선 속에서 움직이고 자신을 구속하는 살아 있는 현재이다. ■ 박이슬
* 각주 1) 독일의 고고학자로 1899년부터 18년간 바빌론의 유적을 조사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2) 허수경,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난다, 2018, p. 23. 3) 문장에 끊임없는 쉼표를 남김으로써 "익숙한 요소를 낯설게 만들어 독자들이 그 요소들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구성한 사무엘 베케트의 글처럼 의도적으로 쉼표를 남용해 적었다. 분절과 이음 사이 브레이크를 유영하고, 결코 가지런하지 않은 시간을 반복해 인식하며 들여다보길 관람자에게 권한다.
Vol.20231114i | 투명함을 깎는 일-이상현_주기범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