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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 2023_1111_토요일_04:00pm
주최 /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주관 / 제주민예총_포지션 민 제주 후원 / 제주특별자치도
관람시간 / 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포지션 민 제주 Position Min Jeju 제주 제주시 관덕로6길17 2층 @pominje
그때 박영균이 있었다 ● 박영균의 작품에는 그가 서 '있던' 삶의 '현장'들이 있고, 현장의 대부분은 동시대 대한민국의 사회역사적 순간들을 관통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허구가 아닌 현실을 오브제로 삼는 이 다큐멘터리 안에서 작가 자신은 일종의 연출자가 되어 작품 안에 집어넣을 현실을 선택하고 편집한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현실의 한 측면에 대해 관객을 특정한 시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작품 뒤에서 현실을 해설해 주는 주체로, 때로는 작품 한 구석에서 현실을 관망하는 주체로, 때로는 작품 안에 등장한 또 다른 대상들과 상호작용하는 주체로, 때로는 그러한 현실에 개입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끊임없이 성찰하는 주체로 말이다. 이데올로기를 긍정하면서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하려 했기에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질문들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에 그는 작품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디에 두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 "현장 활동 시기는 본인에게는 많은 교훈과 미술이 사회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이며,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학 3학년 시기에 가슴에 와 닿았던 '예술의 표현은 삶에 있다' 이 간결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고, 그 충격에 대한 실천으로써 현장미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써 본인의 창작에 있어서도 리얼리티는 삶을 중심에 둔 소통과 형식에 대한 고민을 더욱 확장시켜주었고, 작가로서의 객관성 또한 획득하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의 박영균은 대중들에게 혁명적 삶을 즉각 전달하려는 목적을 위해 그는 작품 뒤에서 현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주체로 현장에 서 있었다. 1980년대의 어떤 민중미술의 전통 안에서는 개인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무화(無化)되는 것이 미덕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시기 그림을 두고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표면적 입장과는 별개로, 작품안에서 끝내 '자기'를 버리지 않았던 점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민중미술 선배 세대의 방식을 잇던 '벽화 앞에 선', '망보던' 20대의 박영균은 50대의 '망보는 박영균'으로 이어졌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 1997년-2002년의 현장 ● 박영균 스스로는 1997년에서 2002년 사이의 작품을 두고 작품 속에서 세대 정체성을 표현한 시기로 구분한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공통의 목표가 사라진 시대에서, 감옥을 다녀온 운동권 출신 예술가는 순수함을 지켜내야 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어야 했다. ● 더 이상은 이렇게 무위도식하면 살 수 없겠다는 그의 결심은 「86학번 김대리」(1996)를 만들어냈다. 혁명을 해야 하기에 편하게 일상을 말할 수 없던 시기를 지나온 박영균에게 평범한 일상의 발견은 삶의 비참을 극복할 유일한 원동력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시대'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상'을 그려낼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백골단의 동태를 살피며 벽보를 붙이던 청년은 노래방에서 메마른 민중가요를 열창하고 있는 김대리가 되어 있었다. (...) 현실의 화가 박영균은 대한민국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알 길이 없고, 작품 속 김대리는 박영균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김대리의 모습에 화가 박영균을 위화감 없이 겹쳐둘 수 있는 것은 그가 사회진출 모임을 하던 전대협 세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거창한 담론 속에서의 예술이 아닌 평범한 노동으로서의 예술 활동을 추구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살찐 소파를 내다 버리고": 2004년 이후의 현장 ● 1996년 만들어진 작품 속 주체이자 일상의 노동자 김대리는 2004년 무렵까지 이어져 오면서, 작품 바깥의 주체인 화가 박영균에게 있어 더 이상 '발견된 일상이 아닌 '권태로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지난 수년 동안 자신의 실존을 투영하면서 공허함과 씁쓸한 분노를 표현해왔던 바로 그 소파를 버리고 다시 새로운 현장을 찾아 갔다. 그에게 있어 예술가의 독자성은 좁은 작업실을 현장 삼아서는 온전히 발휘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 "저는 현장작업을 안했던 것 같아요. 현장에 가본 적도 없고. 가기는 갔지. 대추리, 강정... 그런데 저 스스로를, 제가 거기에 전면적으로 투신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해요. 아예 처음부터 출발 자체를 '나는 그 사람들의 뒷모습 작업을 해야지.' 그랬어요. (...) 전면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부채감 같은 것들은 항상 있어요. 그런데 저하고는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대추리에서 '나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섞일 수가 없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 현장에서는 열심히 싸우고 하는데, 늘 현장에 있으면서도 이거는 아닌 거야. 굉장히 관찰자 입장으로 본 것 같아요."
작품 안에서, 현장의 정보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태도는 분명 양가적이다. 그는 현장과 자신과의 거리, 관계의 깊이를 현장의 상황에 맞게 조정하면서 상호작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가령 <들 사람들>에서 그의 시선이 대추리 주민들이 아닌, 차라리 라포 형성이 더 되어 있는 동료 예술가들에게 쏠려 있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 현장과 자기와의 관계맺음의 정도에 따라 작가는 어느 한 쪽의 시선을 선택하거나 양쪽의 시선을 결합한다. 광화문 현장 한 쪽에서 현장을 지켜보는 작가의 모습은 그가 작품에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도상이다. 같은 구도 안에서 작가 주체의 모습은 같은 장소이지만 어떤 현장에 자신을 투영했는지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 하나의 역사적 현장에 대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경험의 주체로서 작가는 필연적으로 –영웅이지만 본래의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되는– 이중적 삶에서 고뇌하며 과거의 영웅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새로운 질서 속에서 관망할 수밖에 없는 스파이더맨에 자신을 투영한다.
"보라" : 지금, 여기의 현장 - 잠시 구름속에 앉아 있는 길 ● "2010년대 초중반 무렵, 그런 생각을 했어요. 현장에 가지 말고 그림을 그리자. 그래서 현장을 안 가고 컴퓨터 화면에서만, 현장의 사람들을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이미지를 가지고 와서 그걸 내 작업실에서 조합을 해 보자. 그런데 실패했던 것 같아요. 역시 현장에 가야지. 예술가는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느낀 게 관객에게 전달되는 거지, 내가 감동도 없는데 기술로만 현장의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게 가능한가. 현장에 가지 않고, 감정을 배제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 연출을 해보자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결국은 제가 거기에 좀 진 것 같아요. 역시 현장에 가서 같이 울고 웃고 그래야지 나도 신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깨달은 것 같아요." ● 박영균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버리고 현장에 투신하거나, 현장에서 도피하거나, 또는 현장에 다가가는 것을 주저할 필요 없는 동시에 지극히 예술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 주체가 있어야 하는 본연의 현장-작업실과 예술가로서 사회참여적 역할을 해야 하는 현장을 한 화면 안에 서사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 "예술은 분명히 누군가한테 영향을 주지만, 그 징검다리는 자기가 놓는 거잖아요. 돌을 여기다 놓고 또... 계속 세대를 건너가는 사람들인데, 자기가 놓은 징검다리가 물에 안 쓸리어 가면 또 뒷사람이 볼 것이고. 그런 태도로 자기가 자기 삶을 그냥 살아내는 것 같아요." ■ 양정애
Vol.20231111d | 박영균展 / PARKYOUNGGYUN / 朴永均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