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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울산광역시북구 주최,주관 / 북구예술창작소 소금나루2014_플랜디파트
관람시간 / 화~금요일_09:00pm~06:00pm 토요일_09:00pm~03:00pm / 일,월,공휴일 휴관
소금나루 작은미술관 울산 북구 중리11길 2 북구예술창작소 Tel. +82.(0)52.289.8169 www.bukguart.com @bukguart
오수지의 흑백 드로잉에 대하여 ● 2022년 어느 시기부터 오수지의 작품에서 색이 사라졌다. 30×30㎝의 작은 종이를 몇 개의 선으로 구획하고 그 안에 채우는 이미지들은 주로 연필과 콘테, 그리고 목탄으로 그려졌다. 어떤 작품에는 미미하게 부분적으로 채색이 된 경우도 있지만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거의 색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화면을 구획한 네모칸 안에는 아주 사소한 장면들이 그려진다. 한 화면에 그려져 있지만, 작은 네모칸들의 연관성을 찾다가는 바로 길을 잃게 된다. 만화의 칸처럼 연결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내용적으로 이해가능한 것은 아니다. 제각기 그려진 그 사물들, 그 광경들은 오수지 작가의 연상 속에서만 의미로 연결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의 제목을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으로 짓는다. 그의 제목은 몇 단어만으로도, 그렇지 않아도 수수께끼 같은 작품 속에서 길을 잃도록 보는 이를 이끈다. 관객은 화면 안으로 끌려 들어가서 그가 그린 사물, 인체, 풍경이나 장면의 일부를 오래 바라보게 된다. ● 인간의 사고(思考)가 어떻게 흐르는지를 떠올리면, 오수지가 그리는 드로잉들의 전개방식은 어쩌면 사실주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사과를 먹다가 언젠가 눈 오던 날이 생각나고, 어제 놓친 일정이 떠올랐다가 전화기를 충전해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되기 일쑤이니 마련이니 말이다.
「새빨간 거짓말」(2023)에 등장하는 테이블 위의 접시, 그 위의 과일, 스푼에 놓인 알약들, 의자의 윗부분과 옷걸이, 두 개의 칫솔과 빗, 반점이 나기 시작한 귀와 반점이 더 넓게 퍼져버린 귀의 연이은 이미지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의미에 대한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한 장면에 덧이어진 이 사물들은 오수지 작가의 개인적인 일상사 속에서 어떤 연관성을 가진 채 결국 '새빨간 거짓말'로 연결되는 것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이에게는 어쩌면 각자의 소설을 쓰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 이 작품들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어떤 사물이 모종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정도를 짐작할 수는 있다. 예컨대 껍질이 약간 벗겨지거나 반쪽으로 나오거나 잘게 잘려진 사과가 어떤 상징이라는 것을 알겠다. 유리판이 깨진 벽시계와 두루말이 휴지, 여자의 구두, 머리끈, 담배와 성냥, 가시 돋친 장미와 가위, 목이 꺾이거나 잘려나간 꽃송이들은 여러 작품들 속에서 반복된다. 이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화면의 사물들 가운데 2022년 이전의 작품에서도 종종 보였던 것들도 있다. 오수지는 자신이 머물렀던 흥겨운 식사자리나 술자리의 테이블을 즐겨 그렸기 때문에 접시나 포크 스푼 등은 이전에도 자주 등장했다. 이십대 청춘의 흥겹고 가난한 술자리에는 배달로 시킨 안주들과 더불어 냅킨 대신 두루말이 휴지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30×30의 흑백 드로잉에서는 이 사물들이 그럴법한 장면의 흔한 사물들이라기에는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등장하고 있다. 그 의미는 어떤 장면을 염두에 둔 작가의 심중에 있으며, 문장으로 끝나지 않는 제목들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2022년부터 2023년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 드로잉들은 오수지 작가에게 있어서 어떤 변곡점인 것 같다. 이전의 작품들에는 유머, 능청스러움, 여유, 관대함, 친근함이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태도였다. 오죽하면 그는 '그림 속에서 키우는' 강아지 '닥수'를 빌어, 젊고 귀여운 사랑과 시샘의 장면들을 보여준 바 있다. 학창시절의 밤샘작업이나 수업 장면 속 친구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리기도 했다. 벽화에서 영감을 받아 백토를 종이에 바른 다음 채색을 하여 화면 전체가 날것으로 보이지 않는 세련미를 일찌감치 터득하기도 했다. 화려하게 색을 펼치면서도 바탕의 백토가 가진 중화력으로 인해 어디 한 곳 눈에 설어 보이지 않고, 단무지와 나무젓가락만을 그려도 화면 자체의 생기가 완연했다. ● 하지만 색이 다 빠지거나 거의 줄어든 30×30의 흑백 드로잉에서는 기존의 생기가 빠지고 날이 단단히 서 있음을 느낀다. 날카롭게 벼린 칼로 그린 것처럼 이미지들이 날카롭고, 그려진 모든 장면들이 수사의 단서들처럼 의미를 향해 달려가기도 하며, 서로 부딪쳐 분산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어떤 힘이 있다. 쉽게 건너뛰거나 무마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웃음기 없이, 그렇다고 절망이나 낙담의 정서로 빠지지 않으며, 작은 정사각형의 종이가 검어질 때까지 긋기를 계속하는 이 행위에는 분명 내재하는 힘이 존재한다. 무엇을 기억하는지, 어떤 골목을 지나, 어떤 막다른 곳에 다다라, 그곳을 어렵게 빠져나왔는지 술술 보여주기에는 그의 조형적 사유가 두껍다. 오히려 그는 흑백 드로잉 이전의 작품에서도 보여주었던 사물들의 이미지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버렸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의 이미지들은 '도상'화 되었다. 도상은 그림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깎다 만 과일이나 접시에 놓인 먹다 남은 것들은 서양 전통에서는 필멸자의 허무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오수지의 그림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만의 도상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그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희미하게 열쇠를 찾을 수 있다. 댕강 목이 잘린 꽃 같은 것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열쇠도 있지만, 그놈의 신발들, 구두 뒤축에 발뒤꿈치가 까지기도 하고, 발보다 지나치게 크기도 하며, 나란히 놓여 있기도 하고, 제각각 흩어지기도 하는 신발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작가가 언어로 설명해 주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연이은 자신의 작품들 가운데서만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개인적 도상이기 때문이다. ● 그는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써 오던 매체들을 사용하지만, 전형적으로 서양 중세 후반기의 메시지 전달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림 속에 글자를 담은 띠가 펄럭이며 등장하는 것은 꼭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었던 서양의 종교화가 아니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는 식물에 감은 리본 같은 형태로 글자를 써 넣고, 흑백 드로잉 연작에는 원고지 형태에 문장을 써 넣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단서와 흔적만을 남기는 방식이지만, 오수지의 연필 끝을 붙들고 늘어지는, 그로 하여금 색채를 멀리 하고 검정을 무한히 쌓아 올리게 하는 그 어떤 장면에 대한 감정적 폭발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글자와 이미지를 희롱하는 개념미술가가 아니라면, 자신의 일상을 그려왔던 화가로 하여금 화면에 글자를 쓰게 만드는 일은 이미지의 세계로 다 전하지 못하는 영역을 끝내 담기 위한 행위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이미지에는 힘이 있다. 보는 이에게 생생하게 기억되는 힘이 있다. 힘을 빼고 반복하는 행위만을 남기기 위해 채색을 보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미지들은 더 강력한 힘을 얻었다. 나는 흑백 드로잉 연작 서른일곱 점만을 보았지만 그 속의 이미지들이 뒤엉켜 저절로 어떤 장면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어떤 장면이 클로즈업되었다가 다시 멀어지는 것 같은 입체적인 경험을 한 것만 같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거대한 장면을 이루고, 가벼운 일상의 흐름 속에서 잊히지 않는 사건이 벌어지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묵직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의 작은 흑백 드로잉들은 그렇다. ● 하지만 이 드로잉 연작에서 오수지 작가는 자신의 특장점들을 모두 놓아버렸다. 화면의 구성에 있어서도, 이미지의 서사에 있어서도 그가 원래 지녔던, 아마도 본래적인 성정에서 나왔을 특성들을 일부러 배제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드로잉 연작이 과도기일 것으로 추정되고, 한 챕터를 넘기고 다음 챕터를 시작하는 망설임의 단계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 흑백 드로잉은 그 자체로 완결되는 부록으로 뒤에 첨부하도록 하고, 다음번, 혹은 그 다음번의 전시에서는 예의 위트와 따스함의 정서가 이전보다 더한 깊이를 가지고 드러나기를 바란다. ■ 이윤희
어떤 일들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억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 나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일련의 굵은 기억들을 꽤 오랜 시간 묵혀왔던 것 같다. 털어낼 방법을 찾지 못해 늘 불안을 안고 지내오면서 우연한 기회로 글쓰기 수업을 듣게 되었다. 마음에 있는 것들을 차차 글로 적어볼 수 있게 되었고, 수업을 통한 시간은 내게 작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지난 몇 년간 곱씹어 온 생각에서 분리시키려 했던 강박대신 받아들일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점점 시각 작업으로 풀어낼 수 있는 용기로 나아가게 해주었다. 그렇게 흑색 드로잉을 시작할 수 있었다. ● 흑색 드로잉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기억들이 엮인 이야기이다. 특정인물과 사건을 짚어낸 것이 아닌 여러 날 이후로 변화하는 태도와 기분을 적어낸 일기가 되었다. 결론짓지 못하고 이어오는 관계, 마음에 삼키고 마는 말, 분명하지 않은 상황, 해결되지 않는 소란스러운 감정을 바탕에 두고 선명한 기억들을 화면 위로 옮겨본다. 신중히 마음을 따른 제목을 적어본다. 글자 옆으로 그려 넣은 큰 사각형 안으로 빈 네모가 가득 차오를 때까지 검은 선을 쌓아 올린다. 날카롭게 그어내고, 손가락 마디 끝으로 비벼도 보고 찍어도 보고, 때로 숨을 누른 채로 종이 가까이 흐릿한 엷은 터치들을 만든다. 끊김 없이 쌓고 쌓는다. 하얗고 검은 터치들은 부드럽고 포근하게 꾹꾹 눌리고 쌓여 반짝이는 표면을 만들어 낸다. 느리고 긴 숨으로 지나온 시간을 뱉고 또 뱉기를 반복한다. 변화하는 기분들로 터치는 계속해서 더해지고 분명해진다. 흰 네모들을 검게 지워가다 보면 기어코 어느 지점에서는 빈 네모만이 남게 될 날이 오겠지. 그리고 어쩌면 그런 이유로 드로잉을 계속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흑색으로 그려낸 장면들은 그간의 시간과 경험이 담긴 현실이면서 회화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마음의 풍경이다. 결국 현실은 변하였고, 변하지 않는 기억과 마주하여 그 불안 너머의 다음 세계를 생각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간다. ■ 오수지
Vol.20231107d | 오수지展 / OHSUJI / 吳秀智 / painting.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