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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기획 / 호리아트스페이스_아이프미술경영 후원/ 원메딕스인더스트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호리아트스페이스 HORI ARTSPACE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80길 26 (청담동 95-4번지) 노아빌딩 3층 Tel. +82.(0)2.353.1216 www.horiartspace.com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AIF Artmanagement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80길 26 (청담동 95-4번지) 노아빌딩 4층 Tel. +82.(0)2.518.8026 www.aifnco.com
아름다움과 시각적 쾌적함의 차이 ● "평온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충만함을 향한 길..." (프레데릭 보데 Frédéric Bodet) 1)
실재의 의심스러운 귀환 ●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al)』이 1996년 MIT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실재', 또는 '실재'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이 한 시절을 풍미했다. '실재의 귀환'을 이해하려면, 이 질문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실재란 무엇인가?" 저자인 핼 포스터(Hal Foster) 2)가 말했던 실재는 라깡적 의미, 기호 이론의 우위, 새로운 전복, 신체, 사회적 장소에 근거하는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맥락이다. 잠깐 다음의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기호학의 두 아버지의 족적은 역력하다.
아버지 1-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 그의 기호학 이론에 의하면 의미-또는 세계-를 전달하는 기호와 의미-또는 세계-의 관계는 임의적이다. 그러니 잘못 맺어진 의미체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 2-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 아버지 2의 기호이론도 조금 더 광범위하고 복잡하지만 맥락은 같다. 기호와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 사이는 정적(靜的)이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
핼 포스터가 말하는 실재의 귀환을 위한 전략이 무엇인가가 분명해졌다. 의미와 그것의 전달체계인 기호를 분리시키는 것, 즉 우리가 의미로 여기는, 매우 임의적이고 전혀 신뢰할만하지 못한 것들에 기대지 말기, 그리고 이제껏 의미로 간주된 것들 뿐 아니라 앞으로 간주 될 것들에 대해서까지, 즉 의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적으로 의심할 것! ● 근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이거 하나는 묻고 넘어가자. 기호의 분리를 통해 정말 실재는 '잘' 귀환했는가? 실재성에 대한 왜곡된 틀이 분쇄되고, 제대로 된 실재성에 다가섰는가? 의미와 기호 사이의 제대로 된 관계 정립은? ●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실재는 여전히 귀환하지 않았다. 귀환은 고사하고 소식조차 끊어졌다. 오히려 실재에 대한 만연한 무관심, 실재의 파국의 시대가 도래했다. 무의미만이 크게 약진했다. 무엇이 단단히 잘못되었다. 어떤 세대는 논평만 하면서 옛사람들이 저버린 불꽃을 되살리겠노라 외친다.(파스칼 브뤼크네르.Pascal Bruckner) 이 세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했다. "세계사의 위대한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반복된다. ... 한번은 커다란 비극으로, 그 다음은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 3) ● 실재, 실재성에 관한 이 질문에 대해 시몬느 베유(Simone Weil)는 답한다. 베유에 의하면 초점을 의미와 기호의 결합을 떼어내는 것에서 잘못된 결합을 주도하는 인간(성)으로 옮겨야 한다. 실재(성)는 대상에 끊임없이 거짓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성)의 동기, 즉 우리의 지각을 상상에 빠뜨리는 욕망과 집착에 의해 부ㅡ단히 소거되기 때문이다. 실재에 관하여 우리는 동굴에 갇혀 있다. 그 동굴의 이름은 집착이다. 우리를 거짓에 빠트리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 "대상에 거짓 가치를 부여하면 대상의 지각에서 실재성이 사라진다." 4) ● 즉 '누가 또는 무엇이 의미와 기호의 잘못된 결합을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이 없다면, 양자-의미와 기호-의 결합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만큼이나 다시 불러들이는 것도 동일한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의미와 기호의 관계를 뗀다는, 그렇게 되면 실재(성)가 오롯이 귀환할 거라는 상상, 우리의 지각을 동일하게 왜곡시키는 이 상상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우리의 세계에 부여하는 거짓 가치에 의해 소거된 비실재성의 삶을 살고 있다. 지각적 혼돈에 빠져 실재로 여기는 비실재의 동굴, 비실재의 감시 속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가치의 안개 너머의 실재성을 보기 위한 유일한 길은 대상에 거짓 가치를 부여하는 근원적인 조건인 집착에서 완전히 풀려나는 것이다.
제 2의 실재의 귀환, 녹여내기 ● "자살을 시도하다가 살아난 사람은 전과 다름없이 매어 있다." 5) ● 집착은 그만큼 지독하다. 인격에 뒤엉켜 있어 여간해선 떼어낼 수 없다.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마치 아라비아 사람 욥(Job) 6) 에게 종기가 필요했듯 고통이 필요하다. 고통 없이는 집착을 버릴 수 없다. 집착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상상의 작용일 뿐, 이내 증오와 거짓으로 되돌아간다. ● 김명주의 인물들은 그들의 존재성에 엉겨 붙은 집착을 녹여내는 고통의 상징적 과정을 거친다. 그들은 섭씨 1천 C〬 를 오르내리는 가마 안에서 계몽적인 오만을 녹여 존재성에서 분리해내는 과정, 자신의 욕망과 사람들의 의견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 실재성을 향한 산고(産苦)를 거친다. 유약이 흘러내리면서 아직 이름을 지니지 않은 내면의 세계가 드러난다. 결과는 열려 있다. 최종적으로 드러날 아름다움에 대한 예측은 금물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건 빗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익명적인 것을 지니고 있다. 이 익명성에 대한 존재의 반응이 무지(無知)로,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대상을 만나는 조건이고 순수한 기쁨을 맛보는 순간이다. ● 김명주의 인물들이 가마 안에서 구워지는 시간은 바로 이 무지가 고백되는 시간, 지독한 집착과 분리되는 익명성의 시간이다. 인내의 시간, 겸손의 시간이다. 겸손은 아직도 자신이 거짓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보데가 말한 "평온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충만함을 향한 길"이다. 7) 도자작업의 상징적인 미덕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미학으로 초대해 들인 김명주의 미덕이다.
아름다움과 시각적 쾌적함의 차이 ● "상상의 천국보다 실재의 지옥을 택해야 한다." 8) ● 우리가 습관적으로 혼돈하는 것과 달리, 아름다움은 시각적 쾌적함과 다르다.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기도 하다. 실재는 부드럽거나 달콤하지 않다. 오히려 단단하고 표면은 거칠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기쁨이 있다. 시각적 쾌적함에는 전적으로 부재하는 순수한 기쁨이 있다. 김명주는 이 기쁨에 근사한 경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에 대해, 2019년 1월의 작업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 "... 아직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있지만, 보다 진전된 앎을 향하는 느낌, 유년기에는 몰랐던 상실감의 근원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에서 오는 '삶의 환희'를 더 깊이 느끼어 간다." 9) ● 아름다움과 시각적 쾌적함의 질적 차이를 간과함으로써, 김명주의 세계는 종종 프로이트의 '운하임리히(Unheimlich)' 10), 즉 낯설음이나 불편함, 언캐니(Uncanny)에 궁극적으로 부합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곤 했다. 이 세계를 잔혹극이나 일본의 '부토(Butot)' 미학과 결부시키는 것이 그렇다.(프레데릭 보데) 김명주의 세계는 일본 부토의 미학의 중심을 이루는 폐허의 춤, 진혼곡이나 문명 저항의 의미와는 크게 상이하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방사능 재(災)를 뒤집어쓴 채 꿈틀거리는 고통의 율동은 김명주의 인물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이 세계에서는 잿더미로 변한 폐허 위에서 읊는 주술과는 다른 것이 공명한다. 이 낯섦은 익숙한 시각적 쾌, 의미의 거짓 배치가 녹아내리면서 드러나는 낯섦이다. 실재의 부재나 비실재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실재의 귀환'으로 인한 낯섦이다. 어린아이, 원시인, 신경증 환자의 체험을 아우르는 미적 체험을 제공한다는 언캐니와는 궁극적인 지향점이 다르다.
김명주는 천 개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믿기 어려울 만큼 각기 상이한 표정, 존재성의 다양한 층위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지닌 얼굴들이다. 중력의 법칙을 따라 세계에 부여했던 거짓 가치와 그것들의 잘못된 배치가 흘러내리면서, 아직 온전히는 아니지만 순수한 기쁨과 결부된 새로운 실재가 드러나는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표정이다. 특히 눈이 중요하다. 크고 영롱하게 빛나고 슬픔에 잠겨 있는 눈들, 움푹 패인 응시하는 눈, 하지만 부단히 암시되는 건 염원이요 희망이다. 중력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는 새로운 존재태, 슬쩍 모습을 내비치는 은총의 유증을 위한 묘사법, 망설이듯 무수히 그어지는 선들, 또는 눈이 아니라 시선을 형성하는 기법이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눈을 가져온 자는 그 눈에 비치는 대상도 함께 가져온다." 어떤 것을 보는 가에 따라 눈의 표현은 달라진다.
눈두덩 주위로 기대와 불안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조용히 흔들리는 이 표정의 세계는 그래서 몹시 풍부하고 아름답다. 유동성은 틈을 마련한다. 그 사이로 새로운 존재성의 기원을 향한 필연적인 떨림이 허용되는 틈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이상으로 분명하게 정의하는 건 당분간 덜 중요하다. 외형(外形)적 유사성이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경계를 확정하는 윤곽선도 따라 유동한다. 그들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에 자화상이라는 제목이 붙긴 하지만 자타(自他) 구분도 크게 무의미할 뿐이다. 그들 모두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연결된 인간 형제들, 곧 우리들이다. ■ 심상용
* 각주 1) 프레데릭 보데(Frédéric Bodet), '고통과 고귀함(La douleur et la grâce)' in Miroir de joie(exh.cat.), Beauvais: École d'art du Beauvaisis, 2022, p. 11. 2) 프린스턴 대학의 평론가이자 『옥토버(October)』의 공동편집자이다. 3) 파스칼 브뤼크네르(Pascal Bruckner),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이세진 옮김, 인플루엔셜, 2021, p. 99. 4) 시몬느 베유(Simone Weil),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p. 75. 5) 위의 책, p. 73. 6) 아랍어로 욥을 아이유브(Ayyub)로 부른다.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한 살라흐 앗 딘(Salah ad-Din)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구약 성서의 욥기의 주인공이다. 7) 프레데릭 보데, '고통과 고귀함(La douleur et la grâce)' in Miroir de joie(exh.cat.), p. 11. 8) 시몬느 베유(Simone Weil), 『중력과 은총』, p. 76. 9) 김명주, Playing Blind: 환상의 경계선(exh.cat.), 대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2019, p. 11. 10) 운하임리히(Unheimlich)는 집이나 안락함, 편안함의 의미를 지니는 어근 'heim'에 'un'을 붙여 낯설음, 불편함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Vol.20231105g | 김명주展 / MYUNGJOOKIM / 金明柱 / sculpture.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