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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페이지룸8
관람시간 / 01:00pm~06:30pm 수요일_01:00pm~07:30pm / 월,화요일 휴관
페이지룸8 PAGEROOM8 서울 종로구 북촌로11길 73-10 1층 Tel. +82.(0)2.732.3088 www.pageroom8.com @pageroom8
페이지룸8은 2023년 10월 20일부터 11월 12일까지 손지영 작가의 개인전 『Schattenwald』([샤텐발트]; 그림자 숲)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손지영 작가가 한국에서의 작업 활동과 독일 유학 생활에서 천착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주제를 해가 지면서 '산'이라는 대상 자체가 그림자로 바뀌어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 자신만의 회화와 입체 작품을 통해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빛과 어둠, 실재와 그림자 등으로 하나의 큰 맥락에서 파생되는 소주제로 이어진다. 조각을 전공한 손지영 작가는 이러한 주제 사이에서 대상의 입체감과 평면성을 어떤 개념으로 접근하고 해석하는지를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해 형상을 변주하며 발전시키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입체와 회화는 작가가 일상에서 경험한 시각적 장면으로부터 모티프를 가져온 점이 흥미롭다. 2022년 경남창작센터에 입주한 손지영 작가는 당시 낮에 산책을 하며 본 산과 밤에 본 산이 동일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빛이 어둠이 되면서 거대한 입체감이 무색하게도 완전한 평면으로 변해 보이는 장면이 작가에게 극적으로 다가왔다. 손지영 작가는 그림자의 깊이를 프러시안블루 유화 물감을 여러 겹으로 칠하여 밤을 재현한 검은 톤으로 구현한다. 그리고 페이지룸8에서 보이는 북악산과 인왕산의 윤곽과 산의 단면을 상상하여 돌을 캐스팅한 조각을 실제로 잘라 그 단면을 노출시킨다. 이렇게 손지영 작가는 안팎에서 달리 보이는 숲처럼 빛과 어둠에 존재하는 그림자가 대상을 가리거나 드러내면서 변하는 시각적 형상을 예술적 개념과 재료적 측면에서 탐구하고 있다. ■ 박정원
텅 빈 주어의 문장들 ● 이 글은 손지영의 작업 사유들을 문법화해보는 하나의 시도이다. 손지영의 고민은 바람과 빛에서 시작한다. 그가 "실제로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 마치 없는 것 같지만 실재하는 대상" 1) 이라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할까?
1. 바람 - "Es windet"/"It winds"/"( )가 분다" ● 초기 작업인 「바람 잡기」(2007)를 보자. 손으로 텅 빈 대상을 쥐고 있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방식으로 바람을 붙잡는다. ( )을 붙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손에 쥐고 있던 특정 물체를 '빼내고' 그렸다. 텅 비게 붙잡음으로써 오히려 구체적으로 붙잡는다. 바람 · 빛 · 날씨와 관련한 특정 자연 현상들은 가주어es/it 문장으로 서술된다는 점이 떠오른다. 가령, "바람이 분다"는 표현은 "Es windet/It winds"라 말한다. 내용상 주어가 텅 비어 있다. "( ) windet/( ) winds"인 셈이다. 누가 부는지, 무엇을 위해 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보이지 않고, 그저 '불음' 자체가 바람인 것이다. 그래서 행위자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손지영은 바로 이러한 텅 빈 주어를 연출한다.
「Forest of Wind」(2015)를 보자. 늦은 밤, 저 멀리 은은하게 빛나는 반투명 전신 창 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있다. 반투명 전신 창에 내부의 커튼만이 펄럭인다. '저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분명히 무엇인가가 바람을 불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이 바람을 불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채로, 그저 분다. 실상 그 안은 텅 비어 있다. "( )가 불고 있다." ● 이렇게 보니, 손지영이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2) 이라 말하는 것은 문법상 텅 빈 주어이다. 재현되어야 할 주어("바람"이라는 명사)가 비어 있다. 이 텅 빈 주어는 홀로 쓰일 수 없고, 술어와 관계해야만 쓸 수 있다. '( ) + 동사' 형태로 말이다. 홀로된 '단어'가 아닌, 최소한 주어와 동사로 이루어진 '문장'이 요청된다. 이는 곧, 재현 대상이 아닌, 무엇인가 작용/현상하는 '상황'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손지영의 작업은 재현이 아닌 '상황'임을 발견한다. 그것도 작용의 행위자이자 원인인 주어 · 주체가 텅 빈 상황 말이다. 요컨대, 손지영이 말하는 "바람"은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실상 "( )이 분다"는 상황이다. 안소연이 매체 측면에서 "재현이 아닌 상황적인 것" 3) 이라 평가한 것이 인식론의 층위로 확장된다.
2. 빛 - 1) "Es scheint"/"It shines"/"( )가 빛난다" ● 텅 빈 주어의 문법은 계속된다. 「White Cube」(2011)를 보자. 깜깜한 지하 공간, 살짝 열린 방의 문틈으로 하얗고 강렬한 빛이 새어 나온다. '저 안에는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밝은 빛이 새어 나올까?' 하지만 문틈을 들여다보면 하얗고 강렬한 빛남만 (볼 수) 있을 뿐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무나 강렬한 빛남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내용상 주어가 텅 비어 있음을 발견한다. "( )가 빛난다", 재현될 대상 없이 상황만 있다. 으레 빛이 빛나고 있으니 빛의 원인인 무엇인가(문법상 주어)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습관적인 사고에 경종을 울린다.
「Leuchtende Archiskulptur」(2015)에서도 그러하다. 천장과 문이 뚫린 방, 그 안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지만, 뚫린 천장과 문에는 천막이 씌워 있다. 빛은 밖으로 새어 나올 수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고 빛의 원인자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새하얀 빛남만 거기에 있다. "( )가 빛나다"의 상황이다.
2) "( ) scheint" ● 텅 빈 주어의 문법은 한 번 더 나아간다. 독일어 동사 "scheinen빛나다"의 명사형 "Schein"은 '빛 · 빛남 · 비춤'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동시에 "외형 · 외관"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아이러니하다. 단어 하나가 비춤과 그 비춤에 의해 "비추어진 외형 · 외관"을 동시에 뜻하니 말이다. 한 단어 안에 능동자와 피동자가 묶여 있다. 빛남이 동시에 비춤인, 절대적으로 이타적인 빛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빛남은 또한 비추고, 그렇게 비추어진 것이 바로 외관 · 외형이다. 그렇게 비추어진 외관 · 외형은 마치 원래 그런 빛깔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보인다.' 따라서 "Der Schein scheint"는 "빛남이 빛난다"는 동어반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외형 · 외관이 (비추어져) 보인다"는 뜻도 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비춤과 비추어지는 것을 서로 떼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4) 빛이 대상을 보이게 하지만, 비추이는 대상 없이는 빛도 생각할 수 없다. 비춤과 비추어진 외형 · 외관은 필연적으로 묶여 다닌다. "Schein"이라는 단어가 '빛 · 빛남 · 비춤'과 '외형 · 외관' 둘 다 뜻하는 것처럼. 이에 비추이는 것 없이 순수한 비춤 자체를 보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연합에서 빛은 피사체를 비추는 전제이자 수단으로서 가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구로서의 빛을 너머 빛 자체" 5) 를 보일 수 있을까?
일군의 회화 작업들 「빛에 관한 연구」(2017-) 시리즈, 「그림자가 놓인 테이블」(2020), 그리고 「다섯개의 하얀 그림자」(2020)를 보자. 빛이 비추이는 영역은 텅 비어 있고, 반대로 그림자의 영역과 어두운 부분이 그려져 있다. 음화된 것이다. 빛이 너무 쨍하게 비추인 부분은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역설적인 현상을 극대화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춤과 비추이는 외관 · 외형 둘 다 빠졌다. "Schein", 즉, 빛남이자 동시에 그 빛남에 의해 비추어지는 외관 · 외형이 빠진 것이다. 이렇게 손지영은 "Der Schein scheint"에서 주어 "Der Schein"을 빼내고, 텅 빈 주어의 자리만 남겼다. 다시 한 번 "( ) scheint", 텅 빈 주어의 문장을 발견한다. 이 문장은 중의적이다. 비추어진 영역이 빠졌다는 말임과 동시에 그것을 비추는 비춤 또한 빠졌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 )가 빛난다"와 동시에 "( )가 (비추어져) 보인다"의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빛남과 외형을 빼내자 동사로 서술된 "scheint빛나다"라는 작용 자체만을 보이는 것에 성공한 것 같다. 비추어진 영역이 부재한 채로, 비춤의 작용만이 남았는데, 비춤의 흔적으로서 그림자와 비춤의 주변부로서 어둠이 비추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3) "Es scheint"/"It seems"/"-처럼 보인다" ● 이렇게 주어를 텅 비우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윤곽이 남는다. '윤곽'이라는 말은 지각 가능성과 동시에 그 지각의 불확실성을 뜻한다. 형태가 보이지만, 그 형태가 불확실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상응이라도 하듯이, 독일어 "Es scheint"도 "It seems", 즉, "-처럼 보이다(-인 것 같다)"는 뜻으로 쓰인다. "-처럼 보인다(-인 것 같다)"는 말 또한, 시각적으로 판별 가능함과 동시에 그 판별의 불확실성을 뜻한다.
「Café Paris」(2012)와 「블라인드」(2020)를 보자. 탁자 위에 '아마도' 특정 오브제들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에 하얀 천이 덮여 있다. 그리고 그 안 에서 ( )가 빛나고 있다. ( )가 빛나는 덕분에 천 아래 오브제들의 그림자와 윤곽이 비추어져 보이지만, 대강 무엇인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스레 천 아래 덮여 있는 것들을 추측하게 된다. 하나, 둘, 개체를 셀 수 있는 오브제들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한덩이로 보이기도 한다. 오브제가 먼저 있고, 그로 인한 그림자와 윤곽이 보이는 것인가? 아니, 순서는 정반대이다. 먼저 그림자와 윤곽이 보이고, 그로 인해 저 아래에 무엇이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뿐이다. 설령 그림자와 윤곽이 분명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무엇인가처럼 보일 때에도 말이다. 윤곽은 마치 탁자 위의 정물들'처럼 보인다.' 또한 그렇게 '빛난다.'
「Anne Frank」(2015)와 「Book of Light」(2015)에서도 "Es scheint/It seems"의 문법을 발견한다. 양면으로 인쇄된 얇은 종이 위를 비춘다. 인쇄된 내용들이 비친다. 하지만 각 면의 인쇄 내용들이 서로 중첩되어서 내용을 읽기 어렵다. 아니, 내용을 이해할 정도로 읽는 것은 실상 불가능하다. 읽을 수 없는 이중의 텍스트는 마치 텍스트'처럼 보인다.' 또한 그렇게 '빛난다.'
3. 흔적 - "( ) ist/( ) is/( )이다 · 있다" ● 그러고 보면 텅 빈 주어의 문법은 손지영의 '빼냄'을 문법화한 것이다. 주어 자리에 있던 내용을 비우는 것은 오브제 또는 소재를 빼내는 것에 해당한다. 소재가 빠진 자리에는 여전히 윤곽과 흔적이 남는다. 텅 빈 주어의 자리 옆에 여전히 동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텅 빈 주어의 문법은 부정문의 문법과는 다르다. 부정문 "A ist nicht/A is not/A이지 않다"와 달리, 텅 빈 주어 문장 "( ) ist/( ) is/( )이다"는 "A ist/A is/A이다"에서 주어 "A"를 빼내는 과정, 즉, 시간의 경과와 역사성을 내포한다. 그래서 "한 때 있었다"와 "더이상 있지 않다"를 동시에 말한다. 또한 부정문은 A를 부정 판단하는 명제인 반면, 텅 빈 주어의 문장은 판단되어야 할 대상이 부재한 채로 그 대상을 긍정한다. 흔적은 A 자체이지는 않지만, A를 증거 · 지시하기 때문이다.
「고민의 흔적」(2020)을 보자. 하얀 실리콘으로 캐스팅된 책상과 의자가 있다. 책상 위를 보니, '아마도' 머그컵 · 지우개 · 연필 · 공책 · 연필깎이가 놓였던 자리에 자국들이 남아있다. 이 흔적들은 물론 그 사물들 자체이지는 않다. 하지만 흔적들은 '아마도' 머그컵 · 지우개 · 연필 · 공책 · 연필깎이를 단순히 부정하거나 부재를 지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 ) ist/( ) is/( )이다"의 형식으로 그것들을 긍정한다. '아마도' 머그컵 · 지우개 · 연필 · 공책 · 연필깎이가 한 때 있었고, 더이상 있지 않다.
일군의 캐스팅 작업 「In a Plastic Bag」(2007), 「The Soft Place」(2008), 그리고 「무거운 숨」(2021) 또한 그러하다. 일상 사물들의 외형이 아닌 내부의 형상이 캐스팅되어 있다. 물론 이것들은 어떤 사물들의 외관 · 외형이지는 않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이 내부의 형상들이 외관 · 외형을 부정하지 않은 채로, 외관 · 외형을 지시한다. 외관 · 외형은 한 때 있었고, 더이상 있지 않다.
4. 숲 · 산 ● 정물에서 풍경으로 모티프를 옮겨본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 · 숲의 풍경으로 말이다. 「햐얀 숲」(2021)을 보자. 우거진 나뭇잎과 가지들의 풍경이 음화되어 있다. 즉, 빛에 비추이는 부분이 빼내어져 있고, 반대로 상대적으로 빛을 덜 받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이 그려져 있다. 앞서 이러한 문법을 「빛에 관한 연구」 시리즈의 회화 작업들, 「그림자가 놓인 테이블」(2020), 「다섯개의 하얀 그림자」(2020)에서 확인한 바 있다. 주어 자리에서 "Der Schein(빛 · 빛남 · 비춤 · 외형 · 외관)"을 빼낸 "( ) scheint" 문법 말이다. 앞선 작업들이 음화된 정물의 상황이었다면, 여기서는 음화된 하얀 풍경이 상황으로 연출된다. ● 숲 · 산이라는 모티프에서 공간감의 새로운 층위가 시작하는 것 같다. 손지영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 물리적 한 시점에서 볼 수 없는 측면들에서부터, 나아가 숲이라는 모티프와 그것이 선사하는 잡다한 감각들과 상상에 의해서 환기되는 내적 심상까지 포괄 · 확장된다. 우리는 눈앞의 한정된 개수의 우거진 나무들과 경사면, 그리고 그 위로 맞닿아 있는 하늘만 보고도 그것이 숲 · 산임을 알게 된다. 눈앞에 펼쳐진 나무들과 경사면이 시야를 가려서 저 뒷면과 옆면, 그리고 그 안을 볼 수 없음에도 숲 · 산임을 아는 것이다. 너무 가까이 있거나 너무 커서 전체상을 다 볼 수 없더라도, 심지어는 그 안을 거닐며 나무들과 경사면으로 이루어진 비슷한 풍경들만 계속해서 접하더라도 숲 · 산임을 아는 것이다. 눈앞의 나무들과 경사면이, 전체상을 못 보도록 가리면서도, 오히려 저 너머까지의, 저 깊숙한 안쪽까지의 숲 · 산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환기시키는 역설이다. 물리적으로 볼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크고 깊게 공간의 심상이 확장된다. 감각과 추측, 그리고 상상이 한 데 엉켜 팽창한다. 이는 비단 시지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간감 · 깊이감은 전신의 감각과 상상의 영역으로 번진다. 숲 · 산 저 깊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뭇잎들이 흔드는 소리가, 이름모를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린다. 경사면을 비추는 햇빛의 움직임에 따라 응달이 펼쳐졌다가 서서히 거두어지더니 이윽고 밤이 된다. 경사면은 숨이 차고 평평한 곳은 안도감이 든다. 거센 바람에 갖가지 꽃냄새와 나무냄새가 흙냄새와 뒤섞여 불어오기도 한다. 저 안을, 저 너머를 보지 않는 채로 이렇게 온갖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숲 · 산의 부분이 전체를 떠오르게 하고, 또한 계절을 말해준다. 설령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 감각에 주어지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숲 · 산을 그렇게 안다. 숲 · 산은 방금 실제로 일어난 일들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한 데 뒤엉켜 있는 사건의 장소인 것이다. 숲 · 산은 손지영이 오랜 시간 모티프 삼아왔던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보고이자, 또한 상상의 보고이다. 6)
「검은 숲」(2021)과 「검은 산」(2022)을 보자. 멀리서 언뜻 보면 살짝 얼룩덜룩한 검푸른 색의 캔버스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나뭇잎과 가지들의 군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검푸름들 간의 미세한 차이가 미세한 윤곽을 자아내고 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숲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앞서 「하얀 숲」(2021)이 햇빛이 쨍한 낮이었다면, 「검은 숲」(2021)과 「검은 산」(2022)은 프러시안 블루 계열의 검푸른 밤이다. 앞서 설명한 숲 · 산의 역설적인 공간감 위에 검푸른 밤의 공간감이 포개어져 있다. (잘) 보이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서서히 보이면서 생겨나는, 역설적으로 풍부한 공간감 말이다. 어두운 숲 · 산의 단면만으로도 저 안의, 저 너머의 깊이가 환기된다. 이러한 이중의 공간감 위에 회화라는 매체가 자아내는 또다른 내적 심상의 공간감이 겹쳐진다. 단순히 원근법의 작위적인 공간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보다시피 이 두 작업은 원근법과 관련이 없다). 2차원 평면 고유의, '(내적) 침잠'이라 불리는 공간감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숲 · 산이라는 소재, 밤이라는 상황, 회화라는 매체의 세 가지 층위가 포개어진 공간감은, 이 시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면모들, 시각 이외의 감각들에 의해 감각되는 것들, 내적 심상으로 상상되는 것들의 총체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감각과 추측, 그리고 상상이 한 데 엉켜 팽창하는 것이다. 이제 앞서 말했던 '재현이 아닌 상황'은, 뒤로 돌아가서 보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실적 시각 층위, 지금 숲에서 느껴지는 시각 이외의 감각적 층위, 그리고 내적 심상으로 환기되는 충만한 상상의 층위를 복합한다.
「쪼갠 산」(2022)을 보자. 더 대범하게 3가지 층위의 복합물인 3중의 공간감이 환기되도록 시도하는 것 같다. 압축 스티로폼으로 만든 산등성이 윤곽의 평판 두 개가 직각으로 붙어 있다. 앞서 「검은 산」(2022)의 다채로운 검푸름과는 달리 새까만 단색이다. 세상에 저렇게 직각으로 펼쳐진 산은 없고, 이토록 단조로운 검은색 밤 풍경도 없다. 그래서 「쪼갠 산」(2022)은 일종의 단순화된 기호 또는 지시체로 보인다. 밤의 산 풍경을 상기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지시체 말이다. 이토록 단순한 조형만으로도 검은 밤 창밖으로 감각되는 산의 공간감을 향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산"이라고 명사로 고정된 실체를 주어의 자리에서 텅 비우고 있는 손지영의 고심을 목도하고 있는 것 같다. 시점에 따라 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산 하나의 수만 가지 인상과 면모들, 시각 외로 주어지는 산 하나의 갖가지 감각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산의 내적 심상들... 앞서 장황하게 묘사했던 숲 · 산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강렬하게 살아 움직인다. 이 강렬한 살아 움직임을 보이게 하는 방법은, 눈앞의 풍경을 최대한 정밀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쪼갠 산」(2022)처럼 텅 비워 둔 최소한의 지시체로 숲 · 산이 생동하고 있는 상황을 환기시키는 것 아니었을까? 다시 한 번, 보이는 것 너머로 보이지 않는 것들은 텅 빈 주어의 문장으로 상황화 되고 있는 것 같다.
5. "( ) lebt/( ) lives/( ) 살아있다" ● 수만번의 망치질들이 반복되면서 "망치"라는 말이 생겨난다. 7) 이렇게 명사 "망치"는 수많은 망치질들을 한 데 묶어 명명하는 약속된 발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망치"라는 말을 경유해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지자, "망치"를 성립하게 했던 수만번의 개별적인 망치질들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린다. 앞선 개별 행위작용들이 탈각되자, 명사는 이내 화석이 된다. 더 나아가 주객전도된다. 수많은 상황들의 변화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시간"이라는 말이 생겼건만, 이윽고 우리는 "시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며, 시간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이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는 착각 속에 산다. "바람", "빛"도 마찬가지이다. 수만번의 불음들이 모여서 "바람"이 되었건만, "바람"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던 개별적인 불음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마치 "바람"이라는 인격체 또는 사물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이렇게 주어의 자리에 놓이는 명사는 우상이 된다. 8) ● 텅 빈 주어의 문법으로 손지영이 보여주는 것은 엄밀히 말해 명사 "바람"과 "빛"이 아니다. 그것들이 성립되기 이전의 개별적인 불음과 빛남의 현상들, 즉, "분다", "빛난다/보인다"의 개별적인 상황이다. 눈이 어둠에 점차 적응하면서 이것 저것을 분간하게 되는 것처럼, "사과", "빛", "그림자" 등, 이것 저것으로 명명되기 전의 상황에서부터 "빛"과 "바람"이라는 지시어가 (재)탄생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숲 · 산"도 마찬가지이다. 손지영은 익숙함에 의해 굳어버린 "숲 · 산"을 풀어헤쳐서 생동하게 만든다. 이를 위해 주어의 자리에서 "숲 · 산"을 비워내고 "( ) lebt/( ) lives/( ) 살아있다"를 상황화한다. 예술과 예술가가 하는 일이 누차 보아 왔던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라면, 손지영과 그의 작업들은 그 일에 충실하다. 손지영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의 다른 이름은 '사물들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 잇해완
* 각주 1) 손지영, 「손지영 포트폴리오」, 2022, 2쪽. 2) 손지영 인터뷰, [2022.06.09.] 3) 안소연, 「형태의 윤곽을 지각하는 태도 (2021 북구예술창작소 평론매칭 워크숍: 손지영-안소연)」, 2쪽. 4)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김준수 옮김, 아카넷, 2022, 75쪽. 5) 손지영, 「손지영 포트폴리오」, 2쪽. 6)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돈키호테 성찰」, 신정환 옮김, 을유문화사, 45-61쪽. 7)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돈키호테 성찰」, 신정환 옮김, 을유문화사, 28쪽. 8)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니체 전집 14: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293쪽.
Vol.20231020d | 손지영展 / SONJIYOUNG / 孫池英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