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3_1014_토요일_02:00pm
작가와의 만남 / 2023_1104_토요일_02:00pm ▶ 참가신청(구글폼)
주최,주관 / 제주특별자치도 (사)한국미술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화요일 휴관
제주갤러리 JEJU GALLERY in SEOUL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인사아트센터 B1 Tel.+82.(0)2.736.1020 @jejugallery_seoul
제주갤러리는 제주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 김승환·안세현 작가를 초청하여 『검은 고양이 눈 감은 듯』을 개최한다. 전시 제목 '검은 고양이 눈 감은 듯'은 검은 고양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얼른 보아 알아보기 어렵다는 뜻으로,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한국 속담이다. 이번 전시는 예측 불가능하여 불안한 상황 속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각자가 어떠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탐구한다. 그 과정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다. 스스로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인 듯하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은 불안한 상황일수록 강하게 제기된다. 길었던 팬데믹의 시간은 지구에 사는 유기체로서 인간의 삶과 인간이 만든 사회를 성찰하게 하였다.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경쟁사회에서 실존을 위한 윤리적 고민까지 성찰 대상의 폭과 깊이가 확장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고 일 년이 지났다. 최근 사회와 환경면에서 다루는 일련의 기사들을 통해 다시금 사회의 위기를 느낀다. 경제 불황과 일자리 정책 실패로 인해 고립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많아지고, 사회의 양극화에 따른 반사회적 범죄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마지막 저서인 『리듬분석』에서 리듬은 공간, 시간, 에너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공간과 시간, 에너지 소비의 상호작용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리듬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리듬은 인간존재와 우주 사이의 다양한 관계들이다. 1) 대화, 소통, 협력, 경쟁, 갈등 등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일정한 패턴과 리듬이 형성된다. 인간은 자연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르페브르는 서로 대화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전체 리듬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를 '조화리듬'으로 규정하며, 리듬성이 조화를 이룰 때가 건강한 상태라 말한다. 이에 반하여, '부정리듬'은 예측하기 어렵고 무작위적인 패턴으로 리듬의 조화가 깨지면서 고통과 질병상태를 불러오게 한다. 인간의 내면은 다양하고 다면적이다. 안정된 리듬과 패턴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경험과 사유를 해야 할 것인가? 김승환·안세현 두 작가는 각기 구사하는 매체와 양식의 차이가 보여주듯 상이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사유를 권한다.
김승환은 예술과 사회가 만나는 접점으로 제주의 이면을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 그는 사진과 영상을 통한 작업을 주로 하였으나, 현재는 단편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추룩 썬샤인」 2) 은 2020년에 제작한 단편영화로 '플라스틱과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들이 매일 바다로 쏟아져 들어와 변해가고 있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투명하고 맑은 바다의 물결로 시작하여 쓰레기 더미에 걸려 죽어가는 바다 생명체들을 구출하는 영상으로 끝이 난다. '이추룩 빛나 보이는 바다'는 해양쓰레기로 덮이고, 백화현상으로 바다 생명체가 사라지고 있는 실상이다. 기존의 생산 체제와 소비 방식이 자연의 리듬과 더 이상 공존하지 못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정 리듬이 생성된 것이다. "엄마의 꿈은 바다가 다시 살아나는 거였어." 라는 대사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영화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프레임 밖 전시공간에는 여주인공이 자신의 개인전에 출품했을 법한 사진 작품과 그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품을 배치하여, 영화와 연결되는 심상적 공간을 구성하였다. 「이추룩 썬샤인」이 지구의 현 상황을 대변하는 작품이라면, 「불의 발견」은 불이 발견된 태초의 이야기로 돌아가 원시적이었던 순간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는 '미래 세대에 전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지구'이다. 영상은 무용가가 땅에서 일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안무는 바다에 생물이 첫발을 내딛고 인류가 직립 보행을 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해당 장면은 당초 무용가가 춤을 끝낸 후 엎드리는 장면을 역 편집한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조작한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로 미학적 효과를 부여했다. 영상에 등장하는 물, 불, 숲은 무용가들의 손에서 소중하게 옮겨지고, 영상이 교차하면서 순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무용가들의 움직임 사이에 공백을 두는 느린 전개는 영상의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우리에게 내면을 탐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영상은 새로운 미래를 품은 만삭의 무용가에게 불을 전달해 주고 그 불을 품은 무용가의 실루엣으로 끝난다. 「불의 발견」은 자연생태의 순환성과 '불'을 기호화하여 지켜내야 할 환경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이추룩 썬샤인」과 「불의 발견」은 지구의 모든 생명이 같이 어우러져 살아갈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안세현은 공간연출을 전공한 작가로 문학을 기반으로 한 우회적 재현을 작가 고유의 해석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시점(視點)에서 시공(時空)으로」는 애니메이션 「나츠메우인장(續夏目友人帳)」에서 영감을 얻어 '단단하고 몰입된 부분을 해체하고 확장성을 가지고 오는 것'을 핵심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 작가는 전시 공간을 3개로 구획하여, 관람객이 유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첫 번째 공간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작성하여 파쇄할 수 있도록 한다. '나'라는 존재에 매몰되어 있는 부분을 환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 방에는 아홉 개의 좌대 위에 배치된 패널이 있다. 패널 위에는 색 얼음이 놓인다. 작가가 올려놓은 얼음은 층층이 쌓아 올려진 주식의 지표를 뜻한다. 작가는 주식시장을 상당히 추상적이면서도 목적지향적인 성격이 뚜렷한 곳이라 말한다. 사람들은 특정 회사의 주식에 희망과 기대를 품고 공포와 배신을 경험하기도 한다. 얼음은 작가가 의도한 대로 생성되기 어렵고, 의도한 대로 흔적을 남기기도 어렵다. 제각각으로 생성되는 얼음과 자연스럽게 녹아 흘러내리는 형상은 다양한 개개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세 번째 공간에는 얼음을 생성하기 위한 도구와 지표 등에 대한 자료가 있다. 작가가 구현한 '시점(視點)'은 어떠한 한 가지 사항에 과몰입하여 발생하게 되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한 역동적인 세계다. 작가가 공간을 구성하는 데 섬세함을 발휘한 부분은 유연성과 확장성이다. 세 개의 공간을 부드러운 소재인 천의 경계로 오가도록 하였으며, 첫 번째 공간보다 두 번째 공간을 확장하여 '얼음'이라는 관찰 대상을 다양한 방향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사유 공간을 확보하였다. 작가는 모든 공간에 대한 정보를 최소화하여 제공한다. 특히, 마지막 공간에는 얼음이 무엇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으나, 이러한 정보를 주지 않은 채 관람객이 공간을 체험하도록 한다. 이는 작가가 관람객에게 편견이나 사전지식 없이 공간을 사유하는 경험을 하도록 설정한 것이다. 즉, 그는 관람객이 공간을 유랑함으로써 어느 하나의 시점이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방식으로 대상에 대해 생각해 보는 무의도적이고 무목적적인 태도를 경험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한 것이다. 한 가지에 매몰되기보다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과거와 미래, 현실과 환상, 시간과 공간 등 공간의 리듬과 시간의 리듬이 맞물린 지점에서 조화 리듬을 찾아내고자 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작품이 품고 있는 내재적 의미를 찾기보다는 공간을 통해 관람객들이 사유의 시간을 경험하도록 설정한 것이 특징이다. 김승환의 작품으로 구성된 갤러리 속 영화관과 안세현이 기획한 체험 공간이 그것이다. 이들의 작업은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연결된 존재임을 강조하여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탈피할 것을 제안한다. 인간은 분명 이기적인 성향을 가지면서도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 등의 이타심도 가지고 있다. '검은 고양이 눈감은 듯' 모호한 사회 속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을 유지하고 타인과 조화롭게 살아가려는 방안의 모색이 필요하다. ■ 김유민
* 각주 1) 앙리 르페브르, 『리듬분석』, 정기헌 옮김, 갈무리(2020), p. 82.-83 2) '이추룩 썬샤인'에서 '이추룩'은 '이렇게', '이만큼'이라는 말로 제주도 방언이다. 작가는 제주도 방언 '이추룩'에 영어단어 'sunshine'을 합쳐 제주어가 사람들 입에서 직접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지었다고 한다. '이추룩 썬샤인'의 영문 제목은 'It's look sunshine'으로 국문 제목과 발음을 유사하게 표현하였다.
다(多)리듬성의 미학: 우리 시대의 새로운 방식의 구원 ● 나와 타인을 저울질한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사이를 오간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좌표 잃은 시간이 삶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신을 죽이며(니체) 절대적 도그마를 무너트린 포스트모던 사상은 우리를 권위에서 해방시켰다. 신의 초월성을 낮추고, 신의 편재성을 줄여 각자의 삶에 맞게 개인의 주머니 속에 넣어주었다. 거대한 절대 진리를 조각내서 그 조각들을 각자의 주머니에 넣어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해주었다. 상대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다. 이제 너의 말도 맞고, 내가 하는 말도 맞다. 정답은 없고 각자의 진리가 평행선 위에 존재할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 ● 검은 고양이는 언뜻 봐서는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알아보기 힘들다. 몸도, 눈도 모두 검기 때문이다. '검은 고양이 눈 감은 듯'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 이번 전시 『검은 고양이 눈 감은 듯』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치가 모호함으로써 의미의 혼란을 겪는 상황을 드러낸다. 전시를 기획한 김유민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살아가고 있는 각자에게 이러한 불안한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떤 방향을 향해 살아가야 할지"를 묻는 전시라고 말한다. 김유민 큐레이터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예측하기 힘든 지금과 같은 시대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리듬분석'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 김유민 큐레이터는 '리듬분석'에서 사회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타인들과의 에너지가 상호작용하면서 균형 있는 리듬을 이루는 부분에 주목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향성을 잡을 수 있다."고 본다. 조금 다른 시각으로 '리듬분석'을 바라볼 수도 있다. 절대적 진리가 사라지고, 이제 각자의 주머니에 담긴 진리의 편린을 만지작거리며 '존재의 불안'에 허덕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울 '새로운 진리', 즉 '우리 시대의 새로운 방식의 구원'을 '리듬분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주머니 속 진리에 빠져 자신 안에 갇혀 버렸다. 나와 다른, 타인에게는 관심조차 없이 내 주머니 속 세상에 빠져 그저 일상의 반복을 무의미하게 행하며 살아간다. 주머니 속 진리의 편린으로는 그 어떠한 실존적 의미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런데 앙리 르페브르는 리듬이 반복되는 가운데 자기 고유의 패턴을 만든다면서 반복을 긍정한다. 아울러 예상치 못한 새로움에 관해서도 말한다. "리듬의 영역에서는 가장 먼저 반복을 예로 들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속의 반복, 재시작과 회귀, 즉 율(mesure)이 없다면 리듬도 없다. 그러나 무한하게, 동일성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반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반복과 차이의 관계가 도출된다. 일상생활, 의례, 의식, 축제, 규칙과 법 어느 것이든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것, 새로운 것이 반복적인 것 속에 끼어들기 마련이다."(『리듬분석(Elements de rythmanaltse)』 중) 그는 반복이 만든 리듬에 맞춰 가능성의 춤을 춘다. 반복을 통해 각자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들 결합하며 다(多)리듬성이 구축된다. 리듬이 단순히 반복이 아닌 것은 그것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것이 끼어들기 때문에 늘 새롭다. 언제나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경치가 같은 것은 아니다. 반복은 사실상 반복이 아니다. 반복 그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 타인의 반복에 관심을 두는 것. 이것이 신의 죽음 이후 존재론적 불안을 잠재울 '우리 시대의 새로운 방식의 구원'이 아닐까. 나의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타인이 형성한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심, 각 개인이 반복으로 만든 리듬들이 공명하는 사회, 이것이 각자의 진리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는, 실존의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을 구원해 주지 않을까. ● 예측 불가능하고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상대주의적 시대에 『검은 고양이 눈 감은 듯』은 삶에 내재한 의미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준 김승환과 안세현의 작업을 통해, 우리 각자가 지닌 존재론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김승환은 제주에 살면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극영화로 제작하여 사소한 생활 방식의 변화가 삶과 환경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안세현은 목적지향성을 무화(無化)하는 방식으로 서류를 파쇄하고 무의도적인 이미지의 반복 형성함으로써 사유와 회의의 공간을 넓힌다.
'이만큼'의 절망과 '이만큼'의 희망: 김승환의 '이추룩' ● 미래는 주어지는가, 만드는 것인가? 미래는 바뀔 수 있는가? 아마도 김승환은 미래는 한 발짝 한 발짝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는 제주에 살면서 경험한 삶과 자연을 예술의 창작 동기로 삼는데, 특히 작업에 환경이 오염된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할지 보여주는 삶의 태도를 담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환경과 예술에 관한 태도가 강하게 담긴 단편영화 「이추룩 썬샤인(It's look sunshine)」과, 퍼포먼스의 몸짓과 불의 상징성을 결합하여 생태적인 삶의 필요성을 표출한 무빙이미지 「불의 발견(Discovering of Fire)」, 그리고 영상 작업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카이브 작업 등을 선보인다. ● 「이추룩 썬샤인」은 쿠알라룸푸르 국제환경영화제에서 단편부문 베스트상을 수상하고, 해외영화제 13곳에 연이어 초청될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호평받은 단편 극영화다. 이 영화는 제목이 인상적인데, 특히 '이추룩'이 눈에 띈다. 영어 제목인 It's look sunshine(이렇게 눈이 부시다)에서 'It's look'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처럼 보이는 '이추룩'은 사실 제주 방언으로, '이만큼'이란 뜻이다. 김승환은 "이미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라고 했는데(연출의도), 여기서 '이만큼'은 환경오염이 '이만큼' 와있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볼 수도 있고, 뒤의 '썬샤인(햇살)'을 붙여 아직 '이만큼의 햇살(희망)'이 존재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제주어가 사람들 입에서 직접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영화 제목을 만들었다."라고 밝히긴 했다(작품소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두 가지 의미를 고려하는 것은 내용에 '이만큼'의 절망과 '이만큼'의 희망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상군(上軍) 해녀인 영은의 엄마가 물질 중에 폐그물(환경오염)에 발목이 감겨 목숨을 잃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해양오염이 우리의 삶 위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이만큼' 와있다). 동시에 가능성도 보여준다. 기존의 화학약품 대신 커피가루, 워싱소다, 비타민C 가루, 바닷물 등을 사용해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사진을 현상하는 영은의 행위와 해변을 청소하고 수집한 재활용 쓰레기를 업사이클링하는 승환의 존재, 그리고 승환이 플라스틱병들을 모아 배를 만들어 결국 태평양을 건너는 데 성공하는 모습과 손뜨개질하는 것을 좋아했던 상군 해녀 영은의 엄마가 알록달록한 손뜨개들로 덮인 산호들 위로 헤엄치는 환상—산호뜨개(coral knitting)는 산호 보호를 강조하는 메시지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해양환경 보호 운동이다. 이 장면은 산호뜨개를 떠오르게 한다.—등을 통해 지금보다 좋아질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이만큼의 햇살'). ●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사소한 행동이 가져올 변화다. 해양오염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행하는 비치코밍(Beach Combing), 친환경 사진현상법의 사용, 플라스틱병을 모아 만든 배,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알리기 위한 산호뜨개.... 영화는 사소한 행동의 부정성 또한 잊지 않는다. 마지막에 나오는 엔딩크레딧 영상(Ending Credit Clip)은 현실에서 촬영된 실제 자료 영상으로, 사소한 행동이 해양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호일 봉지를 먹는 호주 바다사자, 물고기 사이에 마치 물고기처럼 떠 있는 비닐봉지, 투명 플라스틱 컵 안에 갇힌 게, 비닐봉지에 갇혀 있는 해마 등의 영상들은 우리가 쉽게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환경에 영향을 주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일회용품을 아무 생각 없이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환경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한다. 김승환은 말한다. "우리의 사소한 생활 방식을 고치지 않는다면 바다의 아름다움과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연출의도)
함께 전시된 「불의 발견」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실내 공연을 하지 못했던 퍼포머가 자연에서 공연하는 모습과 인류를 발전시킨 불의 발견을 상징적으로 결합해 "다시 새로운 불을 발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업이다(작업노트). 작가는 이 새로운 불이 미래세대에 전해 줄 '생태적인 삶'이나, '새로운 항바이러스 면역체계', 혹은 다시 과거로 돌아간 '원시적인 삶'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작업노트). 흥미로운 부분은 실내 공연이나 전시가 힘든 팬데믹 상황에서 이 작품을 온라인에 공개했다는 점과 불특정 다수가 접속하는 온라인의 특성을 고려하여 뮤직비디오의 형식으로 제작했다는 점이다. ● 김승환은 작업을 통해 아무 생각 없이 기존의 편의만을 생각하여 반복된 삶을 살면 결국 암울한 미래가 다가올 뿐임을 암시한다. 아울러 반복되는 일상에서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미래가 바뀔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욕망의 좌절을 넘어 욕망의 불활성으로: 안세현의 시공(時空) ● 2013년 제주로 이주한 안세현은 개념 미술과 공간연출을 결합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해 왔다. 관람의 대상을 역전하기도 하고(『검정 사각형의 여집합』), 예술가의 독자성 신화를 허무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녹아버린 검정 사각형』). 그런가 하면, 소설 속의 시공간에서 상황을 빌려와 부재와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계 사이에서 느꼈던 감정과 인식을 애도 작업으로 보여주기도 했고(『Phenomenon』, 『Phenomenon_0』), 삶의 허무, 실존의 의미, 삶의 태도 등을 사유하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깨끗하고 밝은 곳』, 〈고도를 기다리며〉, 『확신의 세계에서 실존하기』). 이렇게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면 작업을 해왔던 안세현은 이번에 목적지향성이 강한 데이터가 그 목적지향적 세계를 이탈, 혹은 탈피했을 때 생겨나는 무의도적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홀려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관찰하고, 느끼고, 사유하도록 이끈다.
전시공간을 '시점(視點)에서 시공(時空)으로'라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연출한 이번 전시는 단순히 옳고 그름, 긍정과 부정이라는 규범적이고 계몽적인 이분법적 사유 방식을 넘어서 회의적 태도를 갖고, 사유의 여백을 넓히도록 우리에게 요청한다. 작가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자신의 진리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개인의 심리 상태를 깊이 있게 탐색한다. 그는 마음의 방향이 자신에게 있는 '이기심'뿐만 아니라, 그 방향이 타인에게 있는 '이타심'도 자신의 만족감, 행복, 안도 등의 성취이기 때문에, 이타심 또한 '이기심의 끄트머리'에 있는 감정이라고 말한다(작업노트). 작가는 이 말을 통해 선/악, 긍정/부정, 개인/사회 등으로 이분화하는 것은 오만한 일이며, 어떤 목적을 지향할 때의 달라질 가능성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숙고하길 바란다. 이러한 사유와 회의를 요청하는 것은 유동적 사고를 통해 개인의 사유 공간이 넓히길 원하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일상은 분주함으로 사유의 공간은 메꿔 버린다. 사유의 공간이 없으면 실존적 의미가 존재할 수도, 발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작가는 사유의 시공간을 넓히길 원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이렇게 넓혀진 사유의 시공간에 '주식의 세계'를 불러오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굉장히 이성적이고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견고한 세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시장에 직접 참여해 보면 공포와 불안, 기대와 희망과 같은 추상적인 감정들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세계", "가장 철저하고 극단적으로 목적지향적인 현실"(작업노트). 이것이 작가가 인식하는 '주식 세계'다. 작가는 이러한 '주식 세계'를 불러와 목적의 무목적성이 눈앞에서 시연되도록 만든다. 이건 단순히 주식시장이 보여주는 욕망의 좌절을 넘어서 욕망의 불활성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긍·부정을 넘어서 작동하지 않게 하는 방식이다. ● 전시 공간은 크게 「백무화」, 「시점에서 시공으로」, 그리고 숨은 공간으로 나눠어 있다. 전시 도입부에 있는 「백무화」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피자마자 져버리는 꽃"을 의미하는 공간으로, 서류 파쇄기를 이용한 관객 참여의 공간이다. 여기서는 자신의 이름이 적은 종이를 설치된 구조물에 넣으면 파쇄되어 흩날리는데, 이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개인의 정체성, 욕망 등이 찰나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공간을 지나면 「시점에서 시공으로」라는 이번 전시의 중심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는 "각기 다른 의도와 목적들이 치열하게 충돌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의 의도가 무의미해지는", "아주 소수 사람만 성공하고 대부분 사람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주식시장의 세계가 들끓고 있다(작업노트). 하지만 그것을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공간에는 9개의 단과 그 위에 패널이 놓여 있고, 벽에 같은 크기의 패널들이 전시되어 있다. 단 위에 놓인 패널에는 하루에 하나씩 삼각뿔 모양의 색 얼음이 놓이게 되는데, 관람자는 색 얼음이 녹는 모양과 다 녹은 후 마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작업을 들끓는 주식의 세계와 연동해 놓았는데, 그 매개체는 바로 삼각뿔 모양의 색 얼음이다. 이 얼음은 주식 세계를 상징하는 거대 IT 기업 애플(apple)의 주식 변동에서 나오는 지표들을 내적 생성 규칙에 따라서 얼린 얼음으로, 들끓는 주식의 세계를 차갑게 압축해 놓은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얼음은 어떤 의도된 이미지도 만들지도 못한 채 전시공간에서 그냥 녹아버림으로써 그 욕망이 불활성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색 얼음이 녹아 완전히 건조된 패널은 벽면에 걸린 새 패널로 교체되어 작품으로 전시된다. ● 전시공간에는 숨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는 얼음이 생성되는 과정과 자료, 생성할 때 사용한 도구들, 얼음을 보관하는 냉동고(세로형 쇼케이스), 얼음 생성된 날짜의 주가와 이슈를 담고 있는 신문기사 자료들이 놓여 있다. 색 얼음은 특정 날짜의 특정 날짜의 애플 주식의 변동 자료를 바탕으로 여기서 생성된다. 이 공간은 작가가 얼음을 생성하는 작가의 공간이면서, 관람객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타인의 공간이기도 하다.
생존을 넘어선 유희, 새로운 불의 발견 ●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시도 끝에 일시적으로라도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이 되는 세계를 잠시나마 오갈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러한 이동성이 리듬을 만들 때 바다 위의 우리는 찰나와 같은 이 생 속에서도 생존을 넘어 유희를 획득하고 긍정할 수 있으리라."(작업노트) 안세현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김승환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새로운 불을 발견해야 한다. ... 우리는 이 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불을 발견할 거라 믿는다."(작업노트) 두 작가는 생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믿는다. 획득하고 발견하리라 믿는다. 이들이 보여주는 예술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방식의 구원'이 가능함을 믿게 한다. ■ 안진국
내가 제주도에 처음 왔던 해가 2012년 4월이었다. 그때 난 카메라 가방 하나에 기타 하나와 옷가지가 담긴 작은 배낭 하나가 나의 모든 살림살이였다. 나는 내가 소비를 줄여 더 이상 짐을 늘리지 않는다면 나로 인해 발생하는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미니멀한 삶을 살아보겠다고 나 스스로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한때 나는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게 미덕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정의로운 기준처럼 살아온 적이 있다. 그 시기는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도 유지되었다. 그런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언젠가 하늘이 착한 나를 알아봐 주고 권선징악의 이치에 따라 나는 아주 당연히 성공적인 미래를 맞이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왔었다. 내가 그런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건 어린 시절의 전래동화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씀과 착하게 살라는 미디어의 세뇌 같은 나를 둘러싼 주변의 환경이 크게 영향을 끼친 거 같다. 그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잘하지 못했고,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고, 돈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협상을 잘하지 못했고, 부동산 계약에서 늘 손해를 보아 왔다. 어찌 보면 나는 지금도 나의 문제를 주변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 나의 문제이고 내가 극복해야 하는 일이 분명히 맞다. 그런 나를 알아가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알게 되었다.
「이추룩 썬샤인」과 「불의 발견」은 환경 문제와 인류의 변화를 다루는 작품이다. 나의 여정과 이 두 작품은 지구를 위한 환경을 생각하면서도, 인류를 위한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자기 발전과 성장을 하고 싶어 하는 나의 이기적인 작업이다. 나는 나의 작업을 통해 나를 지키고, 나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을 찾는 과정을 통해 느낀 내 생각을 나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 생각한다. 환경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며, 우리 스스로 성장하면서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향해 가는 느낌이다. 두 작품과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이기심과 이타심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하여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먼저 챙기면서도 환경을 고려하며 행동할 때, 나와 나의 주변 세계 간의 균형이 이루어진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내가 부여잡고 살던 그 이타적인 기준이 무너지게 되었지만 나는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경험을 통해 배웠고 그걸 나의 기준으로 새로이 교정하고 살아 보고자 최근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착한 사람보다는 너 자신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이기심과 이타심이 적적히 균형 잡힌 그 어느 지점의 평화로운 세상이길 간절히 바란다.
이추룩 썬샤인: It's Look Sunshine ● 제주도 작은 어촌마을, 주인공 영은은 상군 해녀인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영은은 동네 오래된 친구 승환에게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다. 영은이 배우는 사진은 기존의 화학약품을 사용하지 않는 커피 가루, 워싱소다, 비타민C 가루, 바닷물 등을 사용하는 친환경 사진현상 방법이다. 영은의 엄마는 오래전부터 물질을 해 왔지만, 점점 바닷속에서 수확하는 소라, 성게 등의 양이 예전 같지 않아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도 조업을 나가기 시작한다. 상군 해녀들끼리 모여 물질을 하던 날 그만 바닷속에 잠긴 폐그물에 발목이 감겨 나오지 못하고 만다.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슬픈 일을 겪은 영은은 바다를 보기가 힘들어 제주를 떠나게 된다. 기일이 되어 다시 고향을 찾은 영은을 맞이 한 건 영은에게 사진을 가르쳐 준 비치코머 승환이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이 단단해진 영은은 이제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해변에서 바다 쓰레기들을 사진으로 찍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승환은 그의 버킷리스트였던 태평양의 쓰레기 섬을 찾아 떠난다.
불의 발견 : Discovering of Fire ● 2021년, 바이러스가 강타한 문화예술계는 문화생태계의 심각한 파괴를 초래했다. 「불의 발견」은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후 급속한 발전으로 이룬 첨단 과학기술과 현대 문명이 단 하나의 DNA에 맞서 무력한 상황의 뿌리를 재고하려는 이야기다. 우리는 지구를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고,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이는 인류에게 슬픈 종말을 초래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사라진 후 후회하기 전에 새로운 불을 발견해야 한다. 미래세대에 물려줄 '새로운 불의 발견'은 당장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새로운 항바이러스 면역체계일 수도 있고, 과거로 돌아가 생태적이고 원시적인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불을 발견할 것이라고 믿는다. ■ 김승환
이기심과 이타심 ● 이 두 양단의 단어를 생각해 보면 기본적인 특징은 아마도 이기심은 마음의 방향이 자신에게, 이타심은 타인에게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 목적 지향성을 지닌다.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명확하게 방향과 목적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타심이라는 타인을 향한 마음이라는 것도 결국엔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만족감, 행복, 안도 등을 성취하기 때문에 실행된다고 생각한다.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는 행복, 즐거움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타심은 이렇게 한 두 단계를 거쳐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이기심의 영역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끊임없이 상호 교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행동의 주체마저도 그것을 규정하고 시작하거나 명확하게 이해하고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행위 주체자의 '心',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언어나 개념으로 정의하는 일은 어렵고 그것이 현실에서 여러 상황과 변수들을 맞닥뜨릴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 중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우리 각 개인과 사회 안에서 무엇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지,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이고 권장되어야 하는가 규정하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목적을 지향할 때 언제나 달라질 가능성, 대상을 바라보는 회의적 태도, 그리고 그것이 발생 할 수 있는 여지의 공간, 즉 사유의 공간을 확보하고 접근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목적지향적 세상과 사유 ● 이기심이나 이타심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목적 지향성을 지닌다. 목적이 지니는 집중성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배제하기, 사고의 경화(硬化), 그에 따르는 사고 반경의 축소 등을 수반한다. 이러한 양상들은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점점 더 집중을 가속화하고 집약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정작 목적에 도달하였을 때 중요한 가치들을 상실하거나 그 목적의 주체인 자기 자신마저 훼손시키기도 한다. 어쩌면 찰나와 같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이 유한한 자원을 운용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눈앞의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그래서 변화 가능성의 공간-사유의 공간을 확보하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순응만이 지속된다면 이러한 양상은 더욱 고도화될 것이고 그 주체와는 분리된 채 오로지 목적만이 존재하는 괴이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불가피한 선택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고정불변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내가 이해하는 이 세계의 본질은 바다와 같다. 바다라는 본질은 변함없지만 늘 새로운 파도가 그 형태와 성질을 다르게 드러내듯 끊임없이 변화하고 요동친다. 우리는 그 위에 던져져 있고, 그 변화의 세계에서 단단하고 뾰족한 것으로 대항하는 일은 우리를 점점 더 수면 아래로 이끌어 갈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하는 표면 위를 누비며 목적한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패들보드와 같은, 넓지 않더라도 그 위에 두 발을 딛고 서거나 때로는 누워서 쉴 수도 있는, 내가 그 위를 이탈할지라도 나와 연결되어 있어 다시 그 위로 오를 수 있는 공간, 나는 그것이 사유라고 생각한다. ● 또한 내가 생각하는 사유는 대상뿐 아니라 그 주변의 맥락까지 살피는 일이며 유연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충격에 대한 저항이 적고 그 충격을 포용하는 힘을 지닌다. 그래서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고 이것은 '점유'에 가까운 것이어서 나에게 사유는 3차원 공간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사유의 공간을 갖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어떻게 그 사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사유의 공간 확보하기 - 애니메이션 「나츠메우인장 夏目友人帳」에 나타나는 무의도적이고 무목적적인 태도 ● 나는 애니메이션 「나츠메우인장」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사유의 공간을 확보한 인물들의 태도들을 통해 모호하게 느껴지는 사유의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우선 이 작품은 일본 작가 미도리카와 유키의 만화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으로 어릴 때부터 남들은 보지 못하는 요괴를 보는 능력을 갖춘 소년, 주인공 나츠메가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갖춘 할머니 레이코의 유품 '우인장'을 물려받은 이후, 그 우인장에 있는 이름들을 요괴들에게 돌려주는 나날을 보내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나츠메에게 요괴를 볼 수 있는 능력은 그를 거짓말쟁이로, 기분 나쁜 아이로 보이게 하는 것이어서 그를 고립시키고 외롭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인장에 종속되었던 요괴들에게 이름을 돌려주면서 다양한 대상들(요괴, 인간, 신 등)과의 관계와 경험이 쌓여 갈수록, 주인공의 세상은 조금씩 확장되어 간다. 나는 그중에서도 / 優しい (やさし) yasashi : 온순하다, 곱다, 상냥하다, 다정하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 이 단어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로 느껴졌다. 아마도 '상냥하다'라는 우리말과 가장 가까운 표현일 것 같다. 나는 작품 속의 상냥함에 선행되는 무의도적이고 무목적적인 태도가 이끄는 경험을 통해 극 중 인물들의 사유 공간이 확보되고 그들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에 주목했다. 무의도적인 태도라는 것은 대상을 규정하지 않은, 열린 편견이나 선입견을 품지 않고, 대상과 마주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정. 말. 어려운 일로 느껴지는데.. 어쩌면 순수 과학적 관찰 행위가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색얼음 관찰하기 ● 사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의도적이고 무목적적인 태도로 대상을 바라보는, 과학적 관찰 행위를 떠올렸다. 이러한 관찰 행위는 정해진 시점이나 의도 없이 다양한 각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즉, 하나의 시점(視點)이 아니라 시공(時空) 안에서 '봄'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일이다. 나는 이번 작업에서 이러한 봄의 방식을 차용하여 색얼음을 만들어 관찰하고자 한다. ● 색얼음은 말 그대로 색을 넣은 물로 만든 얼음이다. 그것을 상온의 공간에 놓으면 얼음은 형태가 소멸하여 가는 동시에 가지고 있던 색으로 흔적을 남긴다. 색얼음이 생성하는 흔적은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저 자연적인 현상이며 이유도, 의도도, 목적도 없는 형태의 흔적을 남기며 사라진다. 그러한 과정을 관찰하면 색얼음이 놓인 판넬이 완전히 건조될 때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것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동시에 당황스럽고, 지저분하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유한성을 지닌 모든 대상(각 개인, 어떤 존재, 현상)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작업 안에서 개별성과 시간성을 지니고 있으며 변화하는 대상, 형태적으로는 소멸하지만, 흔적을 남기는 다양한 대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매체로 쓰인다. 지난 작업과 다른 요소가 있다면 이번 작업에서 색얼음이 생성되는 과정은 철저하게 의도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대상을 기반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다.
목적 지향적 대상을 무의도적으로 생성되는 이미지로 치환하기 ●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철저하고 극단적으로 목적 지향적인 현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곳, 바로 주식시장이다. 이곳은 경제 주체가 각자의 판단과 예측, 계산에 의해 가치를 교환한다. 굉장히 이성적이고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견고한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시장에 직접 참가해 보면 공포와 불안, 기대와 희망과 같은 추상적인 감정들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세계임을 느낄 수 있다. 각 종목이 좌에서 우로,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리며 이동하는 점이 만들어 내는 그래프는 마치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뜨거운 광기의 드로잉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 점의 향방에 모여지는, 아니 이 점이 빨아들이는 극단적인 집중성이 몹시 흥미롭고 괴이하게 느껴진다. 각기 다른 의도와 목적들이 치열하게 충돌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의 의도가 무의미해지는, 쏟아부어진 각자의 에너지가 무색하게 아주 소수의 사람만 성공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슬픈 세계. 나는 이 세계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지표들을 기준으로 규칙을 만들어 색얼음을 생성한다.
시점視點에서 시공時空으로 ● 무의도적 태도로 대상을 바라보는 일은 말하자면 집중된 시점을 해체하고 시공을 획득하는 일이다. 그렇게 획득된 공간 안에서 사유가 이루어질 때 우리 삶 속에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고 목적의 주체자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가치들이 배제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 사회 안에서 이제는 잘 사용하지 않아 낯설기까지 한 '상냥함'이라는 단어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너무 비현실적인가.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독에의 두려움이 있어요. 고독 속에 계속 머물러 있다 보면 고독은 광기로 변합니다. 서서히 미쳐가는 거죠. 이 고독한 광기가 어느 한 집단이나 작은 부분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담보해야 하는 값이라면, 그 고독 때문에 생기는 광기는 집단화돼요. 그리고 이 광기가 집단화되면 어떤 환영으로 변합니다. 어떤 환영이냐 하면, '이건 본래 그런 거야'라는 것이죠. 그 환영이 현실이 돼요. 집단화된 광기는 환영이 되고, 환영은 리얼리티가 돼요." (『상처로 숨 쉬는 법_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 한겨레 출판.) ● 이번 작업은 결국 목적 지향적 대상을 무의도적으로 생성되는 이미지로 치환하여 관찰하고, 느끼고, 사유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문장 속엔 모순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의도된 모순이다. 목적주의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 목적 지향적 세계로부터의 이탈 혹은 탈피를 위한 목적을 지니는 작업. 이 모순은 우리는 아마도 목적주의적 세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향에 가까운 세계라거나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보고자 하는 시도, 그 시도 끝에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느낄 고독감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뛰어드는 일에 나는 깊은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시도 끝에 일시적으로라도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이 되는 세계를 잠시나마 오갈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러한 이동성이 리듬을 만들 때 바다 위의 우리는 찰나와 같은 이생 속에서도 생존을 넘어 유희를 획득하고 긍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작업이 누군가에게 그러한 시도의 시동이 되는 순간이 될 수 있다면 아주 기쁠 것 같다. ■ 안세현
Vol.20231014g | 검은 고양이 눈감은 듯-김승환_안세현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