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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3_1014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화요일 휴관
일공갤러리 10 Gallery 서울 강남구 삼성로115길 37 1층 Tel. +82.0507.1399.2630 @10galleryseoul
가벼움의 공속성 ● 평면 위에 선으로 그렸는데도 온전한 구체적 신체로 읽어내는 지각이야말로 우리가 묘사하는 인물에 관한 양해사항이다. 마치 문자로 써놓고도 사실적인 대상의 면모를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들여 사람을 묘사하고 풍경을 마치 현실에 가깝게 묘사하려 한다. 그리고 그 묘사법을 익히려 하고 때로 미술로서의 가치를 그런 기술에 기탁 하기도 한다. 그런데 도리어 이런 기술을 버리고 평면성을 고집하고 그 평면성으로 세계를 바라보려 한다면 어떨까. 최민국이 구사하는 인물묘사의 평면성에 상응하는 배경과 상실에 호응하는 인물들의 읽기 힘든 표정은 대상의 묘사나 사건, 재현을 통한 표현으로 다가오기보다 미완의 인물을 양해사항으로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작품의 구성은 이미 전제된 구상으로 진행된다고 하면 너무 건조한 판단일까. 우리가 우리말을 써서 사유하는 한, 그 사유가 한 발자국도 한국어의 역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타자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전제된 구상으로 진행된다'는 지적이 그렇게 크게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 같다. "진부한 지각작용, 추억, 환상 등 물리적인 클리셰들만큼이나 심리적인 클리셰들이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화가에게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우리가 '클리셰'라고 부를 수 있는 사물의 모든 범주는 시작도 전에 이미 화폭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 (안 소바냐르그, 이정하 옮김, 들뢰즈와 예술, 열화당, 2009. p.258)을 안다. 그리고 대부분 그렇게 시작되지 않는가.
인물을 그린다는 것은 이미 대상으로 인물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것이 재현으로서 표상이라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해체된 형태로 표현되어도 최소한 개별적 체험의 재현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최민국의 인물 작업에서 새삼스럽게 사물과 묘사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대상을 묘사하는 그의 태도가 바로 그가 말하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묘사라기보다 마치 드로잉 된 선으로 인체나 풍경의 입체감을 더듬어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만큼 그의 인물은 입체감 혹은 사실적인 묘사가 부족하다. 그 부족 혹은 결핍이 그의 어법이자 의미를 구성하는 방법이 되고 우리는 그 결핍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의미로 이동하게 된다. 세부묘사가 거의 없는 인물을 포함한 대상들, 중경과 후경이 바다나 하늘로 처리되는 미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여백 상태의 제시는 작업 태도로 확연하고 분명하다. ● 이어폰을 끼고 있는 귀는 묘사라기보다 귀라는 형태만 제공할 뿐이고, 이어폰 선은 그저 선을 그어놓은 듯하다. 여성의 상체를 묘사하면서도 브래지어 끈은 그저 선으로 그어져 있을 뿐 두께도 음영도, 질감도 목격하기 힘들다. 머리카락도 마찬가지다. 옷 역시 커다란 주름 몇이 드러날 뿐 재질감도 입체감도 상관하지 않은 듯하다. 밋밋한 몸통으로 잡혀 있을 뿐 몸이라는 구체적 묘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무나 기타 배경의 묘사도 같은 수준이자 맥락이다.
전경의 인물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중경과 후경이 바다나 하늘, 어떤 것도 아닌 빈 곳 혹은 여백으로 처리되고 있다. 전경의 색상을 이어가는 분위기로써 중경과 후경의 색상처리가 이어지리라는 예상을 뭉개버리고 만다. 목격할 게 없다. 상하로 나뉜 화면 구성, 그 앞에 인물이 전경을 차지하고 그 뒤로 빈 바다와 하늘이 있다. 상하, 앞뒤로 나뉜 이원적 구조가 그의 작업을 이끄는 주된 동력이다. ● 테이블에 등을 보이고 앉은 남녀가 잡혀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휴대전화를 만지고 그곳에 여자의 시선이 가 있다. 남자의 시선은 허공에서 흩어진다. 동석한 남녀의 상황은 어떤 사태도 사건도 표정도 없는, 그저 일상의 무관심으로 잡혀 있다. 인물을 받치고 있는 의자와 테이블 역시 그저 구조적인 선으로 드러날 뿐 구체적인 묘사나 색채로 사물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테이블이나 걸상이라는 이름으로 거기 있을 뿐 시각적인 입체감으로서 환기되는 사물임을 제공하려 않는다. 마치 없는 듯이 있다. 현실태를 얻지 못한 사물들, 시선을 갖지 못한 인물들, 그리고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은 정황이다. 충실하게 묘사되지 않았지만, 화면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등장인물이다. 인물만 집중적으로 표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경과 원경은 인물에 비교해 함축적인 제시로 생략되고 있다고 할까. 접사된 인물의 배경으로 백사장과 바다, 하늘이 보인다. 그러나 이들 역시 그저 구분되어 있을 뿐, 묘사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거부는 묘사 자체로 드러낼 수 없는 하나로서의 일체화의 시각적 지각으로 여겨진다. 인간과 대비되는 어떤 것이다. 배경은 인간이 거기 있다는 대비로써 사실을 확인하게 할 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미완성으로서 인물과 미완으로서 바다와 하늘이 거기 있다. 미완, 그것이야말로 그가 보아내려는 세계다. ● 대상에 대한 어떤 감성도 거부하는, 대상에 대한 감성적인 동조 이전에 있을 법한 그런 상황이다. 중경으로 잡힌 화초 들도 그저 비슷한 형태와 모양, 색상으로 병치하여 배치되어 있다. 겨우 음영으로 입체감을 대신하는 정도이다. 입체감 대신 기본적인 형태와 음영만이 묘사를 대체하고 있다. 구체적인 장면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오후」의 눈 부신 햇살 아래 환영이나 환각처럼 대상들이 드러난다. 어떤 입체감, 현실감, 구체성이 없는 이미지로서 인물들, 전혀 이질적인 것들과 일체화를 이루는 공속성consistance을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가 보게 되는 인물과 배경은 양해사항으로서 사물 이해나 인식으로 보상된 것이다. 물질로서 사물이나 인물이 아니라 빛에 과다 노출되어 맹목의 상태가 된 그런 순간의 형상에 가깝다.
말하자면, 물질성이 빠져나간 자리에 그의 인물과 배경이 있다. 그의 형태와 여백은 대립이 아니라 하나로서 서로 영향을 주는 역동성, 정적 이미지와 움직임을 보여주는 관계다. 새로운 차원의 이미지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런저런 전시에서 목격되는 유사한 이미지들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 대부분 기법이나 장식적 효과로 적용된다면 그의 작업은 물음의 형태다. ● 자기 정체성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정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물음에의 답은 미완의 형태들로 드러난다. 아니 입체적인 구체성이 평면으로 전환되어 나타난다. 다 보여줄 것 같지만 어떤 것도 긴밀한 묘사를 통해 사물로서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구체성도 제공하지 않는다. 평면성에 기울어진 사유의 일단을 추측할 수 있는 여지가 개입하는 곳이다. 감각 속에서 이름으로 규정되지 않는 것으로서 상황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회화성을 구축한다. 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은 잠재태로써 세계의 만남. 그런 것을 드러내는 그리기의 세계. 사물의 명확한 인식 이전에 직접적인 접촉만이 있는, 그런 전후의 흐름을 시현 하고자 한다. 구상화로서 구체적이고 충실한 묘사보다 구체적 사실로서 인식되기 이전에 드러나는 것에의 관심이다. 평면에로의 귀환이다. 그것이 끌어내는 미완의 인상은 작품 전체를 추동하는 일종의 장치다.
최민국의 작품을 일견할 때, 사실, 밋밋하고 제대로 된 묘사도 사건도 긴장감 넘치는 구성도 없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배경까지 밋밋한 표현은 거의 비어 있는 여백으로 거들 듯 평면적으로 처리되고 있다. 그렇다고 결기 넘치는 구성도 객쩍은 묘사도 없는 인물화, 최신의 이념을 보아내려거나 상품으로서 배려를 가진 구상성도 그리 드러나는 것 같지 않다. 어떻게 보면 특징이랄 것이 거의 목격되지 않는, 어딘가 손을 더 대야 할 것 같은 미완의 인상이 짙다. 이 미완의 인상은 묘사되어 구체적인 사물로서 이름 붙여지고 인식의 대상이 되기 이전의 지각 그 자체로서의 상황을 드러내려 한 것은 아닐까. 일견할 때와 달리, 여러 점 작품을 보아가면서, 앞에서의 단언을 조금 유보하게 된다. 어디에도 구체적인 인물을 찾아낼 수 없지만 거기 있다는 사실, 상황은 분명한 것이다. 사물로서 인물이나 바다나 하늘, 나무가 아니라 인물로서의 개별성보다 인물이라는 그것, 자연과 변별되는 그것으로 인식되는 것. 그리고 변별로서 차이를 부정하지 않지만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 고정적인 불변체임을 인정할 수 없는 시선으로 이해된다. ● 자아의 확인, 자아의 이해와 자기와 세계와의 관계. 이질적이고 소외된 자아와 세계가 조우하는 순간을 보아내려 한 것, 그것이 그의 작업이 아닐까. 공속성이라는 흔치 않은 어휘를 끄집어낸 것도 그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그의 여백 주위를 맴돈다. 가볍고 부드럽고 무게감 없는 인물의 묘사와 분위기만 있고 사물이 없는 화면에서 얻어지는 질문이다. 그의 작업은 나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내가 설 자리, 내가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 내 정체성의 문제를 보아내려는 무거움이야말로 더 이상 접근하기 힘든 표면의 가벼움이 아닐까 하는, 그런 그리기다. (최민국 작업실 부산 서면 2019.10.14. 오후 1.30.) ■ 강선학
Vol.20231014d | 최민국展 / CHOIMINGOOK / 崔珉菊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