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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라이展 / JULY / installation   2023_1007 ▶ 2023_1022 / 월요일 휴관

줄라이_받아쓰기01: 사랑의 뼈, 사기_나무 패널에 패브릭 콜라주_180×80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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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3_1007_토요일_05:00pm

오프닝 퍼포먼스

기획 / 안산문화재단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대안예술공간 이포 ALTERNATIVE ART SPACE IPO 서울 영등포구 도림로126길 9 Tel. +82.(0)10.5382.6921 www.facebook.com/spaceipo @art_space.ipo

"수만 수 겹의 종소리" 이디스 현, 이정옥, 이재이, 줄라이…… ● 위 사람은 모두 한 사람이다. 나는 이디스 현이 쓴 이야기 『줄타기 광대』와 『모얀의 숲』을 읽은 자리에서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었다. 믿을 수 없는 무엇을 앞에 두고 여러 번 눈을 깜빡이는 사람처럼. 광을 내어 닦은 종들이 무한히 흔들리는 우주가 있다면, 그 세계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디스 현이 단어마다 작은 종들을 달아 두었기 때문이다. 어떤 운명도 그의 예술적 재능을 감출 수 없도록. 이디스 현은 이야기를 짓고, 이정옥은 인문학을 읽고, 이재이는 아이를 기르고, 줄라이는 헝겊을 자르고 붙인다. 이 전시장에는 시각예술가 줄라이가 많은 이름들을 살며 도달했고 기어이 무너뜨릴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콜라주는 화면을 구성하기 이전에 '만지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질감을 붓으로 '묘사하는' 회화와는 다르다. 줄라이는 조형을 하기 위해 온갖 직물을 쓰다듬고 간지럽히며 자체의 물성과 가능성에 골몰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그가 뜯고, 엎고, 덮고, 뒤집고, 칠하며 직물의 고집스러움과 너그러움 위에서 줄타기를 한 매혹적인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화면 겹겹이 쌓은 종소리에 벌써 마음이 부푼다. 그는 우리에게도 수많은 이름을 빌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그가 타협한 조건이 진실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 (이디스 현, 『모얀의 숲』) ■ 배수연

받아쓰기01 : 사랑의 뼈, 사기詐欺 ●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창세기」 29장 29절) 하나. 야곱은 사기꾼이다. 그는 사랑에 빠져 라헬을 위해 14년간 무료로 봉사한다. 둘. 라헬의 아버지 라반도 사기꾼이다. 라반은 딸을 주겠노라는 거짓 약속을 빌미로 14년 동안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셋. 사기꾼 야곱을 속인 것은 사기꾼 라반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사기꾼을 속여 그의 '칠 년'을 '수일'로 단축시켜버린다. 넷. 「창세기」의 저자는 사기꾼을 농락한 사랑의 사기 행각을 한 줄의 사실로 일축시킨다. 살점 하나 없이 오롯이 뼈대로만 이루어진 그 문장에는 사랑의―사기의 기술奇術/記述이 부재한다. 다섯. 사랑은 사기꾼을 상대로 농을 치고, 글쓰기는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상대로 농간을 부린다. ● 삶이 뭐야? 사랑이 뭐야? 나는 피터에게 묻곤 했다. 그는 그날 있었던 일들로 삶이 무엇인지 또 사랑은 무엇인지 매번 다르게 답해주었고,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자장가처럼 읽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잠들었다. 삶이 매일 아침 찾아오는 질문이라면 사랑은 어쩌면 가장 정답에 가까운 오답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므로. 궁금한 것은 '수 일 같았'던 여러 해, 눈 먼 야곱의 밤하늘이다.

줄라이_받아쓰기02: 빚과 낭만_나무 패널에 패브릭 콜라주_120×90cm_2023_01
줄라이_받아쓰기02: 빚과 낭만_나무 패널에 패브릭 콜라주_40×60cm_2023_02
줄라이_받아쓰기02: 빚과 낭만_나무 패널에 패브릭 콜라주_40×30cm_2023_03

받아쓰기02 : 빚과 낭만 ● 최초부터 인류는 자신을 만들고 자신에게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남겨준 힘에 대해 부채를 지고 있다…… 본원적 부채는 결코 상쇄될 수 없다. 어떠한 증여도 등가가 될 수 없으며, 부채를 상쇄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리스 고들리에, 『증여의 수수께끼』) 살다보면 한번쯤은 궁금해진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 그런데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 이미 준비되어 있는 동문서답이 있다. - 기독교: 태어나면서 원죄를, 그 후로는 자범죄를 지었으니 너는 죄인. [범죄소설] - 불교: 현생의 고통은 전생의 업으로 인한 것이니…… [사이비SF] - 고들리에식 인류학: 너의 삶은 빚 덩어리,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어라. [신파] ● 태어나겠다고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나고 보니 죄와 업, 빚이 있다. 사랑도 법도 아닌, 죄와 업, 빚이 우리 존재를 호명한다는 생각은 어떤 의미로는 꽤 낭만적이다. 존재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존재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것, 거기에 서사-드라마의 씨앗이 배태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조르주 베르나노스)의 한 대목은, '신파'와도 같은 고들리에식 빚더미를 일종의 '로맨스'로 풀어낸다. "우리가 천부의 은총을 갚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질문은 '왜'가 아닌 '어떻게'로, 다음과 같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은총과도 같은 이 빚더미를 어떻게 누리며 살 것인가.' ● 내 옥탑방 작업실의 이름은 고요한 산사를 떠올리며 지은 이경사<異炅寺). 언제나 희망사항은 핸드폰이 없는 은둔자 생활. 때때로 기도보다 더 간절한 것은 묵언수행. 실패했지만 한때 내 인생의 모토는 낭만/신파/로맨스로부터 벗어난, 칠정육욕이 없는 삶.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 매일 밤 낭만이 내 베개를 베고 누워 코를 곯고 있다.

줄라이_받아쓰기03; 작가의 이불_나무 패널에 패브릭 콜라주_210×35cm_2023

받아쓰기03 : 작가의 이불 ● 그게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꼭 아름다움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하고, 만족스러우며, 완성된 것이다. 땅 위를 걷고 있다는 나의 이상한 감각도 거기에 있다. 인간의 지위가 한없이 기묘하다는 감각. 달이 떠 있고, 산처럼 솟아 있는 구름이 보이는 러셀 광장을 총총걸음으로 걷는 것.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등등. 이런 질문은 항상 내 마음속을 떠다닌다. (버지니아 울프, 『울프 일기』) 작가란 무엇인가. 그 자체로 충분하고 만족스러우며 완성된 '그것'을 알아보는 눈? 딛고 선 땅으로부터 기묘한 인간의 지위를 감지하는 중추신경? 철학적인 물음들이 공전하는 마음의 우주? 그렇다면 작가의 행복은 무엇인가. 눈과 중추신경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시간?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정지된 순간? ● 그런 눈과 그런 중추신경과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작가는 불면증에 걸린 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노동은(예술은) 작가의 불면을 극으로 몰아감으로써 잠의 문턱에서 간신히 기절시키는 고단한 수면기제다. 필요한 것은 잠이 아니라 이불일지도 모른다. 부드럽고도 서늘한, 포근하면서도 달라붙지 않는, 적당히 무겁고 가벼운, 그러니까 작가를 벌거벗은 아기로 만들어줄 그런.

줄라이_받아쓰기04; 각성_나무 패널에 패브릭 콜라주_240×110cm_2023

받아쓰기04 : 각성 ● 징표, 예감, 그리고 신호는 낮이고 밤이고 물결처럼 우리의 신체기관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이용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벤야민, 『일방통행로』) "징표, 예감, 그리고 신호"는 미래에 관한 것이다. 미래를 암시하는 이 단서들은 순간순간 감각 물질처럼 내 육체를 통과해 사라진다. 사라져버린다. 이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러니까 섬광처럼 번개처럼 파편의 형태로 번뜩이며 통과하는 찰나에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것. 그것들을 언어로 해석하려 드는 순간, 스쳐간 미래는 이미 기억되지 못할 과거로 폐기되고 없으므로. 그런데, 그렇게 감지한 미래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알아차린 미래를 바꾸거나 놓칠 수 있을까. ● '징표, 예감, 그리고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건 내 어린 욕망이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어리석은 청춘이 내 몸과 정신을 그리고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분노해야 할 순간에 이해하려 들거나, 울어야 할 때 웃거나, 포기해야 하는데 집착하거나……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싫다고 주장하던 것들을 다 이루며 살고 있고, 인생은 뒤죽박죽 벌거숭이 삼천포. 그러니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로 회귀해야 할 것이다. 이해하지 말 것, 분노할 것, 울 것, 그리고 타인의 욕망을 포기할 것.

줄라이_받아쓰기05; 수다, 리듬, 아기_나무 패널에 패브릭 콜라주_가변크기_2023

받아쓰기05 : 수다, 리듬, 아기 ● 우리가 먹는 것은 재미있고, 우리가 마시는 것은 더욱 더 유쾌하다—칠면조 고기, 프랑스산 갈로 포도주, 핫도그, 수박, 파파이스 과자, 연어 크로켓, 살짝 얼린 과즙 프레피스, 크리스천브라더스 포트와인, 오렌지색 호밀빵, 서양참외 캔터롭스, 파파이샐러드, 치즈—술, 음식, 그리고 파파이스 과자. 파파이스 과자라고? 우리는 『도둑일기』 『이 집을 불태워라』 『벌거벗은 점심』 같은 책을 읽는다.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낚시』)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고 읽는 삶이 더없이 즐겁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언어로 전달하고자 할 때, 과연 어떻게 쓰는 것이 효과적일까. 이 온전한 감각 경험들을 불완전한 언어로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리차드 브라우티건은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나열한다. 함께 먹은 것, 마신 것, 읽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열거한 다음 마침표를 툭 찍어버린다. "칠면조 고기, 프랑스산 갈로 포도주, 핫도그, 수박, 파파이스 과자……" 독자는 그가 적어놓은 음식의 목록을 읽지만, "연어 크로켓, 살짝 얼린 과즙 프레피스, 크리스천브라더스 포트와인, 오렌지색 호밀빵……" 읽히는 건 음식의 목록이 아니다. "서양참외 캔터롭스, 파파이샐러드, 치즈—술, 음식……" 리듬. 음식의 이름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어떤 리듬이다.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한 맥박, 들뜬 리듬, 충만한 호흡, 그래서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불안한 심장 박동, 끝없는 나열…… ● 밀란 쿤데라의 어떤 소설에는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어떤 아주머니가 나온다. 쉼 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불안을 잊기 위해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거라고, 서술자는 다소 시니컬한 태도로 말한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자꾸만 흐르는 시간과 내내 낯선 세계와의 접점을 잊게 해주는 누군가의 수다가 좋다. 그의 수다는 마치 끝없는 나열처럼 잦아들 듯 다시 이어졌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기가 생겼다.

줄라이_받아쓰기06; 내 이름 짓기_나무 패널에 패브릭 콜라주_160×140×100cm_2023

받아쓰기06 : 내 이름 짓기 ● "코로스: 내 딸이여, 그대는 아마도 아버지의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일 게요." "아버지 당신의 운명은 우리[나]의 것입니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안티고네는 아버지이자 오빠인 오이디푸스의 죗값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탄생 이전부터 신탁을 통해 호명된 것이었으며, 왕에서 죄인으로, 영웅에서 추방자로, 영광과 몰락을 아우르는 추락의 행보를 통해 그는 빛나는 영광의 자리뿐만 아니라 어둡고 음산한 그림자의 광휘마저 획득하게 된다. 안티고네의 오빠들은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운명 그 자체를 통째로 원했다. 그녀의 욕망은 지극히 순수했으므로, 그 어떤 오염 물질도 용납할 수 없었다. 여기서 오염 물질은 말하자면 '삶'이다. 약혼자와 결혼하고, 오빠들의 시신을 자연에 맡기고, 법과 적당히 화해하며 하루하루 육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삶. ● 어느 날 내 이름의 한자를 분해해서 들여다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의미가 너무 많았다. 그 의미들이 마치 관처럼 나를 가두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나는 아무 의미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앞뒤가 똑같은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서서히 낯선 삶이 찾아왔다. 더 이상 남의 옷 같지 않은, 내 몸에 적당히 맞는 삶. 어쩌면 '호명'은 스스로의 이름을 짓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저 태어나버렸지만 그럼에도 마치 내가 선택해서 삶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어떤 태도와도 유사하다. 받아쓰기07 : 나의 아줌마 ● 나의 앙리, 나의 아름다운 이, 나의 히아신스 꽃밭…… 나의 자유, 나의 생각, 내가 기다리던 내세와 현세…… 나의 양심, 나의 용기, 나의 오른손…… 나의 천상의 계단, 나의 생명의 원천…… 나의 행복, 나의 죽음, 나의 고독…… 나의 요람, 나의 노스탤지어…… 나의 사막의 오아시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종교, 나의 내면의 음악, 나의 가엾은 병든 앙리, 나의 부드럽고 하얀 유월절의 어린양, 나의 천국의 문. (클라이스트에게 보내는 헨리에테의 마지막 편지) 시대를 앞서 간 천재 작가 클라이스트는 사촌 누이 헨리에테와 함께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먼저 헨리에테를 쐈고 그 다음엔 총구를 스스로에게 겨누었다. 생을 끝내기 전에 헨리에테가 클라이스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그를 향한 그녀의 애절한 사랑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내세와 현세이며, 요람이자 사랑하는 어머니, 부드럽고 하얀 유월절의 어린양이자 천국의 문이 되어주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거운 호명으로, 존재의 용적을 초과하는 부름으로 누군가를 지목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듯 불가능한 존재를 욕망하는 그녀의 결핍을 역설한다. 신조차도 그녀의 호명에는 응답하지 못할 것이므로. 남는 것은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대상 없는 부름, 충분하지 않았던 그녀 자신의 삶을 향한…… ● 얼마 전에 예니와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며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나도 저런 아저씨 있으면 참 좋겠네, 하다가 문득, "그러고보니 예니, 나는 아저씨는 없지만 '나의 아줌마'는 있어. 다이미. 내 인생 최고의 아줌마." 그리고 20대 청춘인 예니에게 부지런히 성장하여 나의 아줌마 2호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삶이 뭐야, 사랑이 뭐야, 더 이상 묻지 않게 된 건 그냥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며 ― 빚지고 베풀며 되는 대로 어떻게든 ― 사는 게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의 신성한 짐승 피터, 우리의 아기 허니킴, 나의 아줌마 다이미, 그리고 나를 찾아올 또 내가 찾아낼 숱한 나의 아줌마들……

배사과_받아쓰기08; 이리와요, 텍스트씨_퍼포먼스 영상_00:30:00_2023

받아쓰기08 : 주인공 ● 퍼포먼스, "이리와요, 텍스트씨", 배사과. 그때부터 나는 나의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어딘가에 나의 구원자가 살고 있고, 그가 언젠가는 먼지 위에서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청각이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포착할 수 있을 텐데. 제발 그가 나를 더 적은 낭하들과 더 적은 문들이 있는 그런 곳으로 데려다 주기를. (보르헤스, 「아스테리온의 집」) 텍스트씨와의 마지막 식탁이 차려진다면, 맞은편엔 아마도 보르헤스의 아스테리온이 앉아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 피터가 「아스테리온의 집」을 읽어주는 밤이면 부끄럽게도 이따금 눈물이 난다.) ● 나는 내 인생의 전부일 거라 믿었던 책들을 거의 전부 내다버렸다. 혼자일 거라 작정했으나 느닷없이 사랑이 문을 두드렸고, 허니킴과 더불어 가장 두려웠던 모성애가 잠에서 깨어났다. 서울 바깥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연고도 없는 안산에 둥지를 틀었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실마리조차 없었던 시각예술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십대의 어느 가을날 거리에서 더러운 오렌지를 내게 건네주었던 거지 할아버지는 "사람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나는 청소와 빨래를 하지"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 무언가를 꿈꾸거나 계획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아마도 어떤 '흐름' 같은 게 아닐까. 손님처럼 나타나서 나를 끌어가고 데려가는, 누군가는 운명이나 신이라고도 부를, 내 인생의 낯설고 기이한 주인공…… 그러니 그동안 주인공 행세를 했던 텍스트씨, 나는 이제 그만 청소와 빨래를 하러 갑니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텍스트씨. ■ 줄라이

『추신: 잘 있어요, 텍스트씨』는 '받아쓰기'에 관한 전시다. 작가는 인문학 텍스트 8개를 발췌하고, 문자로 이루어진 그 원본 텍스트들을 시각예술 언어로 받아쓰는 시도를 한다. 그런데 이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만약 받아쓰기에 성공한다면 타인의 언술만 드러날 것이므로. 받아쓰기 수행자는 실수하고 실패한 지점에서만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므로. 따라서 줄라이의 받아쓰기는 처음부터 실패를 목표로 한다. 보다 창의적인 오류과 신박한 오독을 겨냥하며. 작가 자신에게 한때 깊은 성찰과 감동을 주었던 그러나 이제는 멀어지고 싶은 텍스트들과 제발 잘 이별하기 위해. 그러나 미련한 미련에 쿨하게 돌아서지 못하고 결국 실패한 신파가 되고 만 소심한 인사말, "추신: 잘 있어요, 텍스트씨" ■ 대안예술공간 이포

Vol.20231003d | 줄라이展 / JULY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