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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여주시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뮤지엄 려 Art Museum Ryeo 경기도 여주시 명품로 370 (상거동 462번지) 퍼블릭마켓 내 Tel. +82.(0)31.887.2630 www.yeoju.go.kr/ryeo/index.do www.youtube.com/channel/ UC1S5hoO6-BxBEIjLsJFQb8w
소요유(逍遙遊)의 미학: 우연성, 반복, 그리고 삶과 죽음의 초월 ● 한 획 한 획 긋는 행위에서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 작품을 뒤로 한 채 미래에 완성될 작품을 위해 또다시 붓질한다. 예술가에게 작품의 완성은 끝이 아니다. 창작의 도착점인 동시에 출발점이다. 작품의 완성은 새로운 작품을 시작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예술가는 한 획 한 획 긋는 행위를 통해 힘들었던 삶을 위로하고 다가올 삶의 평온을 염원한다. 어쩌면 예술에서 작품의 완성보다 그 반복하는 붓질이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로하는 한 획, 마음의 평온을 염원하는 한 획. 우리는 알고 있다, 붓질이 없이는 작품의 완성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점의 세계 ● 이영숙은 반복된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의 초월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완성을 향한 열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완성에 삶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작가는 삶 자체가 목적임을 깨닫고 '여기(here)'에 집중한다. 하나의 점을 찍고, 하나의 작은 원을 그리는 반복된 과정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고 삶을 노래한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점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계의 형성이,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임을 깨달아 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작가노트)
숙련된 솜씨로 동양의 산수화를 그렸던 작가는 전통 산수화에 현대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점묘법을 사용하면서 점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2013년까지 그는 다양한 점법을 사용해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하지만 2013년 이후 그림의 성격이 달라진다. '점 그 자체'를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점의 반복된 형태가 만들어 내는 추상적 형상으로 작업이 변모한다. 이는 동양의 점법과 서양의 점묘법이 변증법적으로 결합한 방식으로, 서양의 표현성에 동양의 정신성을 담는 형식으로의 변화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원형의 점은 이영숙의 기억에 각인된 장면과도 연결된다. 작가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할머니 댁에서 봤던 떨어지는 빗방울과 그 빗방울이 물이 고인 바닥에 떨어져 작고 동그란 파장들을 만들어 냈던 장면. 그는 어린 시절 봤던 빗방울이 만든 수많은 작고 둥근 파장들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작업은 이런 기억의 장면이 희미하게 스며 있는 듯 느껴진다. ● 작가에게 점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가는 징검다리며, 전통에서 현대로 가는 통로다.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표현이 만나는 공간이고, 예술과 기억이 압축된 세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너무나 작기도 하지만 무한한 존재이다."(작업노트)
무(無)와 새로움 : 죽음과 삶의 초월 ● 작가는 매일 반복되는 여유 없는 삶과 반복해서 점을 그리는 상황을 마주할 때 불현듯 회의감이 밀려든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삶과 행위에서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은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게 삶이다." (작가와의 인터뷰) 그는 이러한 허무한 상태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 진입했을 때 변화가 발생한다고 본다. 허무를 발판으로 형성된 부정적인 의미의 '무'는 어느 순간 긍정적인 의미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는 아무것도 없기에 새로운 희망의 공간을 열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나 하찮은 삶의 연속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를 깨닫게 되지만 '무'의 세계에서 보면 새로운 '여기'일 수 있다." (작업노트) 허무한 것, 그런 게 작업일 수도, 삶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무'인데, 그 '무' 안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인 것 같다."(작가와의 인터뷰) 이영숙은 반복이 회의감을 가져오고 허무를 느끼게 하지만, 그 허무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전환되어 새로운 것이 창조될 공간을 연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임"을 깨닫게 되는 지점이다. 바로 작은 점(죽음)이 무한한 존재(삶)일 수 있는 가능성이며, 반복된 행위가 허무(죽음)를 불러오지만, 새로운 창조(삶)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무'가 어떻게 새로운 창조의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작가는 '우연성'과 '여기(here)'의 개념을 '무'에 대입함으로써 '무'를 창조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매일 반복되는 삶에도 변화가 있고,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리가 삶의 '반복'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은 우연성(예측 불가능성)을 긍정하며 끊임없이 새로 생성되는 현재('여기')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것을 작업의 방식으로 끌어온다.
최근 작가는 물감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아크릴 푸어링(acrylic pouring) 기법으로 초벌 표현을 한 후 그 위에 그와 어울리는 색상의 점이나 작은 원을 반복적으로 그려 화면 가득 채우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쉽게 말하면 규정화된 형상을 그리는 것을 목적이나 목표로 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물감의 '우연성'을 토대로 하여 순전히 현재, 바로 '여기'에만 집중하면서 그 우연성에 어울리는 점이나 작은 원을 반복해서 그린다. 그렇게 어떤 목적이나 목표 없이 '지금-여기'에서 행하는 행위를 즐기며 반복했을 때, 작품은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 여기에는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스며 있다. 작가는 '지금-여기' 누리고 있는 삶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태도, 다시 말해 목적 없이(우연성) 삶 그 자체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소요유(逍遙遊)'의 태도다.
소요유와 목적 없음의 목적 ● 우리는 「Here-소요유(逍遙遊)」라는 작품 제목을 통해 작가가 추구하는 작업 방식과 태도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알 수 있다. 작가는 '지금-여기'에서 현실 세계에 얽매이지 않은, 초월한 삶 그 자체를 살아가길 꿈꾼다.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 소요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어떤 인위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삶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요유는 매일 반복되는 삶이라도 그 삶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임을 일깨워 준다. 작가는 어떤 형상을 그리기보다 소요유의 태도로 현재의 순간('여기') 그리는 점이나 작은 원에 집중한다. 이로써 현실 세계를 초월하여 '절대 자유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소요유'는 노자의 '무위이무불위(無爲⽽無不爲)', 즉 '도는 항상 작위(作爲)함이 없지만, 이루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과 그 맥락이 맞닿아 있다.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는 반복은 그 자체가 이미 성취한 것이다.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한 목적(무불위)을 위해 목적을 없앤다(무위). 이것이 '절대 자유의 세계'의 원리다. 따라서 우연성을 따라 한 획 한 획 점을 찍고 원을 그리는 작가는 그리는 그 행위 자체로 절대 자유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작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완성된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이영숙은 '이미'과 '아직' 사이에서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 안진국
Vol.20230920a | 이영숙展 / LEEYEOUNGSUK / 李英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