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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우 블로그_blog.naver.com/kwangwoohan 인스타그램_@kwangwoohann
작가와의 대화 / 2023_0908_금요일_06:00pm
후원 / 성남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9:00pm 월,토요일_10:00am~05:00pm / 일요일 휴관
성남문화예술교육센터 꿈꾸는 예술터 Seongnam Art & Culture Education Center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수정로 386 3층 라이브러리 2 Tel. +82.(0)31.240.9120 www.snarte.or.kr
존재론적 놀이(play)로서의 미적 체험-한광우의 『침묵의 경기장: 신곡 La Divina Commedia』 展에 부쳐 ● "예술은 우리가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거짓이다."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놀이하는 예술'은 가능한가? ● 첫눈에, 한광우의 예술은 참신하고 명랑하다. 작품의 형식과 외양은 쉬운 접근성을 무기로 현실이탈의 즐거움과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준다. 어떤 특정 이념이나 고도의 사유(思惟)를 강요하지 않으며, 작품의 원본성(aura)이나 물질적 완성도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작가가 제안하는 것은 '놀이'(play)의 풍부한 문화적 감수성과 그 쉽고 즐거운 삶의 방식이다. 관객들은 옅은 수준의 열정과 지식으로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으며, 몰입도에 따라 유쾌한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 실용성의 영역 밖에서 영위되는 활동이기에, '생명 에너지의 낭비'라는 존재의 사치스러운 포만감도 느낄 수 있다. 한광우의 조형 감각은 놀이의 수단처럼 보이며, 미학은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의 게임이론이 말하는 경쟁, 협력, 갈등, 대립 등에 관한 집단의 '전략적 고려'(strategic consideration)에 전적으로 종속된 것으로 보인다. '작품'이라는 의미가 거추장스럽기만 한 작가는 그래서 자신의 작품을 '놀이판'이라고 부르곤 한다.
물론, 놀이와 예술을 하나로 뭉뚱그려 취급하긴 힘들다. 인류 문화의 원초적 단계에서 주술(呪術)과 제의(祭儀)의 초월적인 목적 안에서 밀접하게 결합해 있던 놀이와 예술은 '자기 목적성'이라는 본연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예술의 에너지는 창작과 감상의 욕망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쌍방향적(interactive) 욕망은 작가와 감상자라는 긴장된 관계성을 창출하고, 예술작품은 어떤 내용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하나의 소통 통로가 된다. 하지만 놀이에서는 이런 원리적 분열이 일어나지 않기에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필요하지 않다. '현실이탈'의 결과도 상이하다. 놀이는 현실 세계의 무게를 지니지 않는 경쾌한 세계로서 현실로부터 부유(浮遊)해 있지만, 예술은 자기 목적적임에도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통해 결국 현실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작가가 추구하는 놀이와 예술의 일체감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놀이와 예술은 모두 '현실의 위반과 이탈'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한, 놀이가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고 '반복'이라는 시간적 성격을 통해 새로운 현시적(現時的) 의미를 획득하듯이, 예술작품도 감상하는 이에 따라 매번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감성을 창출한다. '다양성의 통일'이라는 미적 원리의 차원에서도, '언어학적 미결정성'의 차원에서도, "한정되고 임시적인 완성"(R. Caillois)이라는 측면에서도 놀이와 예술, 그리고 한광우의 순발력 넘치는 일회성 이벤트는 온전히 하나이다.
놀이의 보편성과 인간의 자유의지 ● 『호모 루덴스』(1938)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J. Huizinga)의 생각처럼, 작가에게 문화는 원초부터 놀이 되는 것이며,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발달해 왔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서 유희 충동의 기본 욕구를 해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불어 재밌기, 승리의 기쁨 느끼기, 규칙 습득하기" 등을 익히면서 자신의 존재감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H. Cox). 놀이 개념의 세부적인 요소들은 존재가 세계와 고차원적으로 관계하는 방식들, 예컨대 미술, 음악, 무용, 건축, 문학 등에서 보이는 요소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한광우의 '참여-놀이-예술'은 미술이라는 장르적 폐쇄성을 뛰어넘어 놀이의 문화적, 기호학적 관계 방식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전시의 부제로 선택된 신곡(La Divina Commedia)도 의미심장하다. 익히 알려진 대로, 신곡은 저자인 단테 자신이 지옥-연옥-천국을 유랑하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여행기로,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그리고 그 안에 제기되는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면서 서구 기독교 문명을 집대성한 문학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연옥(Purgatorio)에서 단테를 안내했던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역할을 자처하며 전시장을 찾은 관객을 인도한다. 연옥은 일곱 가지 근원적인 죄(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를 지은 자들이 자신의 죄를 깊이 통찰함으로써 정화될 기회를 얻는 곳으로, 현실의 거울이자 지옥과 천국에 관한 암시를 풍부하게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한광우는 영원한 비탄과 징벌의 상징인 지옥, 욕망의 선택과 책임의 번뇌로 가득한 연옥, 그리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추구들이 아무런 고통 없이 해소되는 천국으로 이루어진 이 존재론적 경계들을 해체하여 생(生)과 사(死), 죄(罪)와 벌(罰), 성(聖)과 속(俗)의 강한 양극성(兩極性)을 놀이의 보편성 안에서 희석한다.
작가는 단테가 묘사한 지옥-연옥-천국의 의미와 교훈을 차용하고, 여기에 놀이의 보편 감각을 투사해 새로운 통합적 현실을 창조했다. 전시장에 세워진 아홉 개의 놀이판은 인간 희로애락의 즐거운 패러디인 동시에 인간의 개별적 특성과 집단적 특성이 활발히 교차하는 범문화적 사건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경쟁심, 질투, 탐욕, 성취감, 굴욕감, 죄의식, 좌절감 등이 복잡하게 뒤섞인 심리적 환경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실존의 태도를 드러내게 된다. 실존의 자유의지(free will)도 유희의 들뜬 분위기를 뚫고 비로소 우리의 의식 표면에 떠오르게 된다. ● "게임을 위한 도구들은 다채로운 색감과 형태, 풍부한 상징과 은유로 흥미와 유희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다채로움과 풍부함 뒤로는 수많은 익명(anonym)의 자유의지가 비석처럼 새겨져 있다. 결국 나의 작품은 현실의 단편적인 유희와 목표를 향한 맹목적인 시선 뒤로 숨겨진 수많은 '숨'과 '결'에 대한 재현이다." (한광우, 2023 작업 노트 中) ● 단테는 자유의지를 그릇된 것과 올바른 것을 구분하는 "스스로의 빛"으로 정의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자유의지는 신조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며, 추상적 개념인 신을 우리의 모습과 닮게 묘사한 것도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윤리 영역에서 자유의지는 선악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 상태로서, 그 책임 또한 자신의 것이다. 제도적 권력은 통제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는 놀이와 예술 속에서 자신들의 힘을 키워 왔다. 물론, 제도적 권력은 자신의 책임에 소홀했고, 개인의 자유의지는 늘 무거운 책임감에 위축되어왔다.
실존의 게임, 실존의 깨임 ● 다시 한광우의 전시를 들여다보자. 주로 2인 1조로 진행되는 놀이판에서 참가자들은 과녁을 향해 무언가를 쏘기도 하고, 스스로 과녁이 되기도 한다. 서로 균형을 맞춰 앉아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테이블 위에서 서로의 호흡을 공유하며 티(tea)타임을 갖기도 하고, 안대로 눈을 가린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도움으로 징검다리 돌과 같은 원형판을 밟아가며 한 바퀴 돌기도 한다. 이렇듯, 작가가 제안하는 게임은 능동적인 참여자에게 명령하진 않지만, 그 속에 뛰어든 참여자들은 신체 조절 능력으로 서로 돕거나 경쟁하며 게임의 규칙에 따라 수동(受動)한다. 잔뜩 고양된 유희의 분위기와 함께 공존을 위한 제도적 생활의 언표들이 강하게 지속하면서, 게임은 제한 없는 야단법석이 아니라 규칙 준수의 안정감이 지배하게 된다. 참여자들의 자유의지는 게임의 의지에 종속되고, 이들의 성취도 게임의 성취 안에 빠르게 흡수된다. 그래서 『침묵의 경기장』의 '침묵'이 가리키는 바는 규칙과 권위의 역사가 허락한 이 '가상적인 자유'를 위해 개인이 치러야 할 대가(代價)이기도 하다.
우리는 완전한 자유란 불가능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떤 고차원적인 사상이나 초월적 의식이 말하는 완전한 자유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순수하고 무결한 형태의 자유는 오로지 신비(神祕)와 신성(神聖)의 영역 안에서만 자신의 일부를 드러낼 뿐이다. 이쯤이면 작가의 놀이판은 완전한 자유를 빙자한 또 다른 구속, '허구적 출구'에 다름 아니며, 참여자들도 점차 존재의 의미와 목적 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실존적 위기가 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실존적 위기는 곧 실존의 자유의지를 요청하기에, 부조리의 삶을 견디는 우리에겐 오히려 '깨임'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 "우리에게 중요한 건 불완전한 실존의 삶 속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의 작업은 이 확고한 사실에 대한 오마주이며, 포기할 수 없는 자유의지의 표현이다." (한광우, 2023 작업 노트 中)
한국미술계에서도, 국제미술계에서도 한광우만큼 놀이와 예술의 일체감을 보여주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 『침묵의 경기장: 신곡』 展에서도 작가의 예술적 개성과 장점은 빛을 발한다. 전시는 경쟁, 운, 모의(謀議), 현기증과 같은 놀이의 다양한 영역 안에서 게임 참여자들의 신체 움직임과 감정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행동과 생각이 사회라는 거대한 게임 구조에 종속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방과 구속, 자율(自律)과 타율(他律), 이기(利己)와 이타(利他)의 경계를 쉼 없이 넘나드는 한광우의 놀이는 진실과 허구의 뒤섞임 속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이자, 거대 담론과 '나' 사이에 벌어지는 '존재론적 놀이'가 된다. ● 누군가에겐 한광우의 놀이판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놀이의 가벼운 겉모습과는 반대되는 놀이의 깊은 함의가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다. 게임을 하는 즐거움만으로도 충만한데 예술작품이라니 뭔가 철학적 계시가 있을 것 같아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은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참신과 명랑을 운명처럼 지속한다. '완전한 자유'라는 허상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빛"(자유의지)을 마주하니, 흠칫 만나게 되는 기망(欺罔)의 뉘앙스도 즐겁기만 하고, 눈앞에서 만져지는 온갖 억압의 기호들도 신나기만 하다. ■ 이재걸
Vol.20230905f | 한광우展 / HANKWANGWOO / 韓炚佑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