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그리고...

김희정展 / KIMHEEJUNG / 金熙貞 / painting   2023_0901 ▶ 2023_0910

김희정_마를린 먼로와 시간 마시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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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일요일_12:00pm~05:00pm / 10일_12:00pm~01: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gallerydam_seoul

그림, 사랑-되기로의 초대 ● 김희정의 회화에는 심리적 밀도가 있다. 이 밀도는 응시를 깨운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고 있지만, 또 우리 안 또 다른 눈과 마음이 보며, 그림의 표면 너머에서도 우리를 본다. 거기엔 무의식적 매혹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라캉에 오래 심취해왔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라캉의 개념, 모티브, 이론적 체계가 그림 자체의 분위기나 느낌, 형식의 미적 계기가 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 제시된 오브제들은 이미 정신분석적 의미로 물들어 있다. 라캉에 머무른다면, 그의 그림은 타자의 응시의 장소, 무의식의 결여를 은유하는 끝없는 환유의 굴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김희정의 회화에서 그것의 정신분석적 의미를 캐낼 필요는 전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정신분석가도 아니고, 그림은 정신분석이 아니다.

김희정_마이클 잭슨과 시간 마시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65.1cm_2023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다. 그는 이제 라캉의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제 라캉이 말하는 욕망을 영원한 결핍이나 부재의 드라마로 보기보다, 오히려 무엇인가 생산되는 것, '되기becoming'의 사건, 어떤 변용태affect가 되어 가는 정동적 사건으로 바라본다. 이 되기의 사건은 이질적인 만남이고, 잠재적 이질성이 만나 새로운 존재 역량과 상태가 발현하는 순간이다. 욕망은 결핍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반대로 변형, 변이, 차이, 생산이다. 부리오의 말처럼, 그림도 만남의 상태다. 그림은 김희정과 만나지만, 관객 모두와 만난다. 만남은 단지 결핍의 무의식이 자신의 대상을 응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의 결핍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건 기억이건 관객의 잠재적 세계와 만나 그들의 되기를 강요한다.

김희정_심리적 풍경Psychological Scene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8.5×53cm_2023

김희정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대상,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이미 노스탤지아가 된 대상들을 소환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즐겨보던 영화의 장면을 불러내 되기의 욕망을 회화로 무대화한다. 그의 그림 안에서 그도 되고, 우리도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일어나는 회화의 되기는 헐리웃 배우-되기다. 오해할 필요는 없다. 김희정이, 내가, 관객이 비비안 리나 오드리 헵번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헐리웃 배우-되기는 동일화도 아니고 재현의 문법과도 관련이 없다. 그것은 그림 안에서 배우와 우리 사이, 그 배치 안에서, 그림이 그것과 만나는 사람과의 수많은 배치 속에서 그들 각각의 무의식적 되기와 정동적 변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은 김희정과의 관계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고, 나와의 관계에서 다른 역량을 발휘하며 다른 것이 된다. 그림도 우리도 모두 다르게 된다. 그의 그림에 진하게 묻은 노스탤지아 감성은 그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소화될 때마다 우리를 다른 되기와 역량, 상태로 이끄는 특이성이다. 그의 회화는 바로 이 되기가 일어나는 무대이자 장소, 그것의 배치물이다. ● 그는 그 '되기'의 정동적 사건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그저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일반성을 표현하는 말이고, 되기의 가장 일반적이고 극적인 형태로서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행위만큼 우리를 극적으로 변용하는 사건이 있는가. 사랑만큼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드는 게 있는가, 사람들은 그런 되기의 경험을 '이야기', 즉 일화 기억의 형태로 저장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 김희정 자신의 사랑-되기의 이야기, 자신의 무의식적 자아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림의 일차 관객은 언제나 화가 자신이니. 하지만, 예술가인 그는 자신의 그림 무대에 사람들을 초대해 그들이 의식적 자아에서 탈주해 사랑-되기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 김희정이 탐험했던 욕망은 이제 사랑-되기로 승화됐다. 그의 여정에 동참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그림이 주는 느낌에 슬쩍 빠져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 조경진

김희정_오드리와 시간마시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23

프로스트가 "화자는 과거를 되살려낼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아 기뻐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리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했던 것처럼, 점점 멀어져가는 과거의 시간과 점점 다가오는 개인의 소멸, 즉 죽음에 대한 인식이 감각적으로 지각될 때 우리의 감각도 확장된다. 이 경우 표상할 수 없는 현대인의 불안이 욕망과 연동됨으로써 내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마치 유령처럼 탈현실화된다. 이것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드라마화가 일어나면서, 내용적으로는 정신분석적 치유가 체험된다. 이 때 라캉의 이론에서 빌려온 대상a 즉 상실된 욕망을 대체하고 나의 시선에 존재하는 타자성으로 발현되기를 기다린다. 주체는 항상 비어 있음으로써 존재하고,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다시 욕망한다. 욕망이 "순수한 결핍이 갖는 힘"인 반면, 불완전한 상징체계를 기표로 하는 주체는 어떤 완결점에 도달하기 어려워한다. ● 나의 작품들은 회화에서 상실과 부재의 드라마화(Dramatization)를 통해 이를 시각적으로 현전시켜 여기에 몇 가지의 양상들이 설정된다. 상실과 부재는 욕망의 결여로부터 기인하는 것인데, 그것은 때로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 혹은 재조합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고 때로는 일상 속 친숙한 대상들 중 서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한 화면 속에 병치시킴으로써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이런 기이한 낯설음이 사실상 그들이 부재하고 있음을 가시화할 때가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합리성, 인과성, 보편성 등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실을 드러내 보인다. 상실된 대상인 오브제a를 현재 속에 회귀시켜 부재를 현존하는 것으로 복구하려는 이러한 현전화는, 시간적 재배열에서 아니면 시간이 응고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과거로 지나갔거나 묻혀버린 욕망의 대상을 마치 박제하고 붙잡아 두고자 하듯 보인다.

김희정_카사블랑카-바라다보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91cm 2023

나는 비가시적이고, 재현시킬 수 없는 것(부재)을 '현전'의 형식을 빌려 가시적으로 드러내며 이것을 '부재의 드라마화'라고 설정하였다. 여기서의 현전은 지시대상과의 유사성을 표방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부재의 기억 또는 상실 대상a의 욕망의 상징물로서 선인장 혹은 이것이 변형되고 왜곡된 손가락 형상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와 함께 등장하는 프레임 속 도상은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도록 널리 알려진 인물(비비안 리 마이클 잭슨 오드리햅번...)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화면 안의 모든 요소들은 데페이즈망적 병치를 통해 어떤 낯설음의 응시를 유발한다. 한편 간혹 보이는 커피 브랜드인 스타벅스 같은 브랜드 역시 소비를 향한 욕망의 대상물로 변주되고 있다. 현대인의 욕망은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 마그리트에 따르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란 곧 닮음을 창조함으로써 "신비로움"과 "자유"를 실현하는 행위이며,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적 행위'란 역설적으로 대상과 동일화함으로써 소외되었던 주체성을 되찾는 해방의 행위이다. 결국 나에게도 모호한 잃어버린 대상a를 추구하고 복구하는 과정은 주체의 조각들을 회복하고 형상화해내는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 김희정

Vol.20230903i | 김희정展 / KIMHEEJUNG / 金熙貞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