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RTIST」 Ⅲ. 추억찾기

이명재展 / LEEMYUNGJE / 李明宰 / mixed media   2023_0822 ▶ 2023_0909 / 월요일 휴관

이명재_몸짓18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188×254cm_2023

작가와의 만남 / 2023_0824_목요일_02:00pm

2023 수성아트피아 지역작가 공모 지원사업 「A-ARTIST」展 Ⅲ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수성아트피아 SUSEONG ARTPIA 대구 수성구 무학로 180 Tel. +82.(0)53.668.1840 www.ssartpia.kr @ssartpia_official

『이명재』展에 부쳐 - 중의적(重義的) 주제의 다층적 구현 시도 ● 서양화를 전공한 이명재는 대학 졸업 이듬해인 1990년 신조회 공모전 대상 수상 기념으로 대구 동아쇼핑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미 재학 시절부터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며 유화의 기량을 충분히 성장시켜왔던 작가는 그 데뷔전에서 대형 캔버스들을 여럿 선보였는데 내용은 어떤 상징적 흔적을 추구하는 진지한 추상 작업이었다. 그때 서문을 쓴 정점식 선생의 글을 참고하자면, 이명재의 표현내용이 "주술적인 선사인들의 엄숙한 삶의 흔적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것들이 단순한 붓놀림이 아니라 자기가 익힌 수법에 스스로가 거역하면서 새로운 동기를 찾으려는 행위가 역력해 보인다."라는 점을 의미 있게 지적했었다. 이로써 작가의 등단 초기 화풍과 제작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는데 그는 비구상 회화를 하면서도 「삶의 얘기」(1990, 문화예술회관)에서처럼 제스처(gesture)와 행위로서만이 아닌 서사(narrative)적 상징이 있는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이명재_몸짓5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142×112cm_2023

이후에도 이명재 작가는 1991년 작 「삶의 얘기-9108」 같은 표현주의적 스타일의 페인팅에 열중하면서 '상징적인 추상화'의 표현과 방법에 관해 탐구하며 청년 시기를 보냈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 즈음 그는 교외에 있는 농촌의 한 폐교로 작업실을 옮겨갔다. 그곳에서도 현대적인 회화의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면서 자신의 조형 언어를 개발하던 중 기존의 붓으로 그리던 그림으로부터 '행위가 만들어 내는 작품'으로 방법적인 전환을 시도한, 작가로서는 획기적인 경험을 했다.

이명재_몸짓6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162×115cm_2023

사건은 물론 평소 작가의 "새로운 동기를 찾으려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우연히 작업실로 쓰고 있던 학교 교실 바닥의 얼룩들이 지어낸 무늬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교실의 마룻바닥에는 오랜 시간 형성된 수많은 자국이 남겨져 있었는데 그 흔적들로부터 직접적인 방법으로 형상을 찍어내 그 이미지들을 그림에 이용해 본 것이 결국 작품 세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명재_몸짓7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162×115cm_2023

그것은 일단 형식적으로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무의식적인 방법'으로서 일종의 프로타주 기법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제목 미상의 1999년에 제작한 한 작품은 그때까지 추구하던 기존의 회화적 표현과 달리 이제 캔버스에 상징적인 표현으로 그리기보다는 복제하듯 직접 대상을 옮겨와 화면에 부분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명재_몸짓8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162×115cm_2023
이명재_몸짓12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45×105cm_2022

대상으로부터 형상을 옮겨오는 자동기술적인 전사(轉寫) 방법인 이 프로타주 기법은 또한 선택한 대상의 표면을 탁본하듯 재현해 부조처럼 응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든 매체 자체를 작품화함으로써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이후부터의 작업은 직물(fabric)이나 종이 죽 같은 재료를 사용해 탁본으로 얻은 매체가 바로 주제 표현의 바탕으로서 캔버스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제의 모티프로 사용돼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 성격을 결정짓고 있다.

이명재_몸짓20,21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548×760cm_2023
이명재_몸짓9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75×125cm_2023

이상의 변화 과정을 요약해 보자면 처음에는 캔버스 천 위에 직접 대상의 이미지를 프로타주 하는 방식으로 취하다가 뒤에는 대상을 탁본한 오브제를 캔버스 위에 콜라주 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캔버스를 대신한 이러한 방법적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부조 같은 입체를 바탕으로 그 위에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나무나 식물을 탁본하여 화면을 부조처럼 만들 때는 자연이 주제로 추구되었다. 돌아보면 처음 비구상적 유화 작품에서 서사적인 삶의 이야기가 은유적으로 암시되다가 구상적인 자연 이미지에서의 탁본에서는 서정적인 감수성을 시각화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방법과 매체(재료)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과정은 다른 한편 주제의 탐구와 맥을 같이 했다. 최근에 와서는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가 무엇일까"라는 문제를 안고 또 한 번 작품 세계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명재_몸짓12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70×50cm_2023
이명재_인연11,12_한지종이죽, 멍석탁본_72×37cm_2023

이번 수성아트피아 전시회는 바로 작가가 찾으려는 한국적인 이미지가 과연 어디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 것인지 출품된 그의 작품을 통해 확인해 볼 기회였다. 짐작하건대 그는 지난 시대의 향토적인 사물의 이미지에 여전히 애착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들의 현대적인 구현을 위한 방법에 고심해 왔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두 가지 정도 새로운 패턴이 한국적인 정서와 관련해 채택되고 실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명재_「A-ARTIST」 Ⅲ. 추억찾기展_수성아트피아_2023

우선 바탕 작품의 모티프는 마당에 펼쳐놓는 거칠게 짠 큰 자리인 '멍석'이라든가 한옥 대청에서의 '마룻바닥' 등의 이미지들이다. 이런 지난 시대의 향토적인 사물들을 통해서 작가는 개인사적인 서사를 추억하려는 것만은 분명 아니다. 그보다 전통적인 가치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런 물건들에 깃든 삶의 내용을 오늘날 유의미하게 재해석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조형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미학적 가치가 있다. 멍석은 바탕을 이루는 골과 올들이 엮이면서 만들어 내는 조형적 질서가 매력적이며 마룻바닥 역시 과거의 것이지만 시대를 초월한 미적 내용을 가진 물건으로서 보편성을 갖는다. 나아가 작가는 이것을 탁본의 방식을 통해 시각화하는 데 의의를 둔다. 작가는 이것을 종이 죽으로 떠내는 방식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현한다고 믿고 있으며 개성적인 제작방식을 통해 형식을 현대화한다고 믿는다. 현대적 매체에 반영된 시간의 구속 너머에 있는 영원한 미적 질서를 고정하는 셈이다.

이명재_「A-ARTIST」 Ⅲ. 추억찾기展_수성아트피아_2023

이렇게 현재화한 과거의 사물, 정신적 미적 질서를 바탕에 만들어 놓고 거기에 다시 자신의 새로운 주제를 중의적으로 구현하고자 하고 있다. 중요한 지점은 그 현대화한 과거의 문양 위에 이중으로 그리고자 하는 한국적인 이미지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새롭게 보여준 것으로서 도라지꽃을 비롯해 야생화들을 음각으로 새겨 넣거나 옅은 담채로 표현한 여러 점이 출품되었는데 다시 자연을 주제로 추구하던 지난 시기의 작품들과 비교되었다. 또 하나 새로운 패턴은 멍석 질감의 탁본 바탕 위에 춤사위의 율동감을 느낄 수 있는 선적 드로잉과 절약된 물감 표현으로 춤 동작의 움직임을 묘사한 작품들이었다. 속도감 있게 표현된 선들과 극적인 물감 표현은 역시 그의 초기 유화의 상징적인 추상 표현을 떠올리게 하면서 세련된 감각으로 전통을 현대화하려는 시도가 느껴졌다.

이명재_「A-ARTIST」 Ⅲ. 추억찾기展_수성아트피아_2023

이렇게 현재화한 과거의 사물들에 투과하는 정신성의 보편적 가치를 부각하면서 거기에 다시 한국적인 이미지라는 주제를 다층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번 전시회의 의도이고 내용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중 삼중의 이미지들 위에 구현되는 조형 행위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면서 울림을 주는지는 관객들의 상상력에 맡겨지게 된다. ■ 김영동

Vol.20230822g | 이명재展 / LEEMYUNGJE / 李明宰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