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주관 / 안동문화예술의전당_(사)코아스페이스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국민체육진흥공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안동문화예술의전당 ANDONG CULTURE & ART CENTER 경북 안동시 축제장길 66 상설갤러리, 5갤러리 Tel. +82.(0)54.840.3600 art.andong.go.kr
한국적인 극사실주의와 팝아트의 시론 ● 『경계』전은 기시감이 들게 한다. 전시에 선보인 작업은 극사실주의적인 양식적 특성이 두드러진 한국식 팝아트, 혹은 팝아트의 변용을 잘 보여주는 예들이고, 2000년대 중후반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대중적 인지도를 넓혔던 양식의 작업이다. 국내 미술계에서 팝아트적인 양식은 수법이나 양식에 한정되기보다 넓은 의미에서 역사적 배경과 맞물린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맞이한 소비와 대중문화의 시대적 상황에서 일상적인 오브제나 광고나 대중문화의 단편이 순수미술의 분야로 수렴되었다. 또한 북미와 유럽의 미술시장에서 1960년대, 1980년대, 2000년대, 20년 주기로 팝아트와 연관된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는 미술이 등장할 때마다 국제 미술시장은 환호했고, 한국에서도 극사실주의, 팝아트, 혹은 두 개의 양식을 아우르는 작업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술적 장로서 자리매김해왔다. ● 그렇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리는 팝아트의 한국적인 변용은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외부 대상 세계를 최대한 수동적인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재현해낸 극사실주의 작업은 그 이면에 어떤 예술가의 의도를 내포하는가? 우선 극사실주의가 물리적인 리얼리티에 충실할 것이라는 통념에 제동을 걸고자 한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지만 사실주의의 환영 효과는 오히려 회화가 담고 있는 도덕적, 사회비판적, 미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풍요의 신화: 두민, 이흠, 김영성 ● 나의 작업에는 항상 반영상이 존재해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리, 거울, 고여 있는 빗물, 수면에 그려진 대상의 단순한 형상으로서 존재해왔다. 또한 진실과 거짓, 실패와 성공 등과 같이 삶 속에서 이분법적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졌을 때 심리적 현상들을 반영해왔는데 이를 통해 인간의 욕망에 담긴 양면성을 표현한 것이다. (두민 2019)1) ● 「The Boundary of Fantasy(환상의 경계)」(2019)에서 완벽한 대칭이 눈에 띈다. 검은색의 바탕과 붉은색, 노란색의 테이블 색상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면서 규칙적인 형태가 반복된다. 물론 자연의 세계에서는 완벽한 대칭이란 찾아볼 수 없다. 실제 삶에서 물건이 완벽하게 대칭적으로 놓이는 상황이란 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규칙적으로 배열된 카지노의 테이블 위로 불확실성에 돈을 베팅하는 인간의 욕망이 넘쳐흐른다. 대칭으로 놓인 카지노 테이블 너머로 이미지들이 뭉개지면서 배열은 부분적으로 흐트러진다.
「환상의 경계」 시리즈에서 두드러진 반복 패턴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도 일컫는 팝아트 작업에서 자주 등장한다. 우선 규격화된 도시나 대량 생산된 물건들로 둘러싸여 있는 현대인의 환경을 잘 요약해준다. 또한 반복은 자본주의의 강조하는 양적인 팽창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문양이나 형태, 오브제가 반복되면서 이미지는 끝없이 재생산된다. 1960년대 워홀은 캠벨 수프에서 같은 소비재를 그야말로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찍어내듯이 실크스크린으로 찍어 낸 바 있다. 올덴버그는 일상 용품을 확대해서 오브제로 만들었다. 따라서 「환상의 경계」에서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형태는 오히려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 혹은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흠의 '달콤한' 회화를 해체해보자. 「Blue Sweet(파란 사탕)」(2021)에서 클로즈업된 사탕 표면 위에 연속해서 돌아가는 소용돌이 패턴은 계속 반복되어서 화면 밖으로까지 이어진다. 관객은 사탕의 "달콤함"이 공간적으로나 시간상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들게 된다.
「無⦁生⦁物(무생물)」(2023)에서 김영성은 투명한 유리 재료의 내부나 반사되는 물체 위에 동물을 올려놓음으로써 안과 밖, 위와 아래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동물의 이미지가 확장되어가는 환영을 만들어낸다. 유리나 스테인드글라스 등은 공통으로 형태와 주위 환경,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차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재료이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어항 속과 밖의 풍경이 겹치고, 빛의 굴절과 반영을 통하여 크기가 혼동된다. 또한 작가는 관객의 대리인이자 관찰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을 포함한다. 관객은 인물, 물체, 동물 간의 크기를 비교해보면서 사진 속 리얼리티의 인위적인 속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 따라서 두민, 이흠, 김영성의 극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투영하는 인위적인 풍경에 해당한다. 반복의 수법이나 반사를 통해 확장된 이미지는 부풀려진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다. 형태가 연속해서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관객의 시각적, 감각적 욕망을 계속해서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판타지가 만들어진다. 이에 작가 두민이 암시한 바와 같이 반복은 이처럼 인간의 끝없는 물욕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인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 장르화의 신화: 정성원, 김성윤 ● 이흠의 사탕을 소재로 한 회화가 정물화(15세기 더치의 정물화, 즉 '바니타스'에 자주 비교되는)와 연관됐다면, 극사실주의적인 회화는 전통적인 장르화인 인물화, 풍경화, 심지어 성상화로부터 출발하는 경우들이 많다. 여기서 극사실주의적인 회화의 중요한 출발점이 물리적인 리얼리티가 아니라 회화적인 전통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실주의적인 회화의 출발점이 대상이 아닌 재현의 역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 정성원의 「Antic and Eternal Return(익살스럽고 영원한 귀환)」(2013)은 얼핏 사실주의적이지만 초현실주의에 가깝다. 꿈의 이미지에나 나올법하게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 양의 이미지가 덧입혀져 있다. 전체 그림의 구성은 15세기 르네상스 성상화의 정점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à)」(1498-99)를 따른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인간을 양에 비유하기에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양'일 것이라는 해석에 근거해 보인다. 이상적인 마리아의 이미지를 우스꽝스럽게 그렸기에 성상 파괴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양은 생명과학에서 대표적으로 복제하는 동물이기에 생태적인 이슈와 연관해서 볼 수도 있다. '생명 창조'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의 오만을 다룬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성원의 작업이 르네상스 성상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김성윤은 19세기나 20세기 초 유명인의 초상화 전통을 따른다. 「Steeplechase, Will Forrester」(2013)에서 대상은 지금은 사라진 올림픽 종목의 선수들이다. 작가는 초기 올림픽 기념사진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어설픔, 옛스러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운동복을 입은 남자 선수들의 모습이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미국의 인상파이자 아카데미 화파인 존 싱어 사전트 스타일로 재현해보고자 하였다고 설명한다.2) 신체의 비율을 알 수 없게 만들거나 인물을 어둠 속에 위치시키는 등 전통적으로 인물을 이상화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영웅의 이미지로 재탄생 되기 직전, 정면이 아닌 측면이나 예기치 못한 눈높이와 각도에서 일상적인 운동선수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인물화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들은 과연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카데믹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정성원과 김성윤의 작업은 전통 성상화나 인물화가 지닌 이상화된 이미지를 해체한다. 관객에게 익숙한 장르화를 차용해서 낯선 풍경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적인 극사실주의의 또 다른 특징으로 성상화나 인물화를 통하여 도덕적 메시지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다지 아름답거나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휴머니즘의 신화: 한영욱, 강기훈 ● 사실적인 재현은 동일성, 일치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진 실제(實際)의 실재(實在)를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의 실재는 사실이나 현실 그대로 존재함을 재현하는 것, 즉 대상이 지닌 실재성의 표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대상이 지닌 실제의 실재를 도출하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본인이 추구하는 회화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강기훈 2023)3) ● 한국적 극사실주의가 특정한 문화적이고 미학적인 계보에 근거하고 있다면, 한영욱과 강기훈의 극사실주의 회화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인물화와 정물화를 해체한다고 할 수 있다. 대상의 외면을 통하여 내면의 정신세계나 물건이 지닌 상징성을 표현해온 낭만주의적이고 태도와 두 작가 모두 거리를 두고 있어 보인다. ● 근경에서 인물을 그리는 한영욱의 「(Face-w08)」(2020)은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 왔다. 거칠고 나이가 든 대상자의 늙고 거친 피부의 표면은 통상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소재는 아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일은 이들의 얼굴이 각각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사한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거나 인물상 사이의 차이가 매우 표피적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근경에서 대상을 다루게 되면서 각 대상이 지닌 개성(즉 표피 너머의 정신)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 인물의 외형을 통하여 내면(정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인물화의 기본 목적은 인본주의의 핵심 사상에 부합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인간의 내적 정체성은 가변적인 외부 조건과는 달리 숭고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한영욱의 인물화에서 작가는 대상을 극도로 가까이에서, 그것도 불규칙한 피부의 표면을 즉물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물의 표피가 관객의 눈길을 강렬하게 끈다. 일상적인 인물화를 낯설고 새롭게 보려 하는 의도도 있지만, 인물화 장르에서 강조되어온 인물의 내면에 대한 휴머니즘적 관심이나 메시지를 차단하고 있다.
한영욱의 즉물적인 인물화만큼이나 강기훈의 정물화 시리즈 「빛-대추」(2021-2022) 시리즈에서도 표면의 효과는 중요하다. 작가는 대추의 의미를 풍요와 연관시키기도 하지만 대상인 물건의 실재(實在)성을 재현하고자 한다고 밝힌다. 즉 현재 여기 있음의 '현존성'이 작품의 주제이자 그의 극사실주의의 목표이다. 예를 들어 「빛-대추」에서 대추가 변하지 않는 근본 조건인 상수라고 한다면 동일한 대추는 빛을 투과하는 서로 다른 조건들에 놓이게 된다. 이때 빛은 변수로 작용한다. ● 원래 정물화에서 빛은 중요한 동인(agent)이다. 빛은 공간의 거리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공간적 깊이감을 소멸시키는 데에도 사용된다. 작가는 주어진 대상인 대추 그 자체보다 빛과 대추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조건에 관심을 지닌다. 이때 대추는 그것이 지닌 상징성이나 그것을 통하여 도덕적 메시지나 의미를 부여해온 정물화의 전통(앞에서 언급한 바니타스)에 반하고 있다. 오히려 강기훈에게 대추는 물체가 시, 공간에 현존하는 방식을 다루는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인물화에서 인물과 화가의 거리, 포즈, 빛의 명암은 대상에 대한 환영을 만들어내거나 아름답게 꾸미는 데에 사용됐다면, 한영욱과 강기훈의 회화에서 극사실주의적인 기법은 오히려 인물의 표피 너머, 혹은 정물의 대상 너머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이해하려는 관객을 저지한다. 관객의 개인적인 해석이나 상상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에게는 현존하는 인물, 대추만 존재해 보인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추가 대추일 뿐이듯이 그림도 그 자체로 현존하는 또 다른 물체이다.
나가는 말: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 한국적 극사실주의나 한국적 팝아트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일련의 회화는 예술이 결국 인간이 보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두민의 경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끝없는 물욕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써 반복과 대칭이 일어나고 있는 카지노를 택하였고, 이흠은 사탕 위의 반복되는 패턴을 강조한다. 과장되고 반복되는 패턴은 현실의 반영인 동시에 소비문화가 지닌 달콤함을 효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된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 마찬가지 맥락에서 피에타를 연상시키는 정성원의 성상화나 김성윤의 올림픽 영웅화는 사실주의적인 수법이 암시해 온 이상적인 의미를 파헤친다.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고 아름다움 풍경의 이면에 감춰진 낯설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한영욱과 강기훈은 인물화와 정물화가 담아온 휴머니즘적인 깊이의 문제에 도전한다. 한영욱의 인물화는 대상자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반영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다. 대신 관객이 표피 정도의 깊이, 즉 Skin-Deep에 집중하게 만든다. 「빛-대추」에서도 대추는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소재는 빛과 조화를 통해서 현상계의 조건를 되짚어보는 매개체로 사용된다. 과장된 빛의 효과와 광택이 나는 표면 덕택에 관객의 눈은 화면 위에 머무르게 된다. 인물화나 정물화는 이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적 장르가 아닌 화면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21세기 고도로 성장한 한국의 물신주의와 물질주의를 반영하고 재고하는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 고동연
* 각주 1) 두민, 작가의 글, 2019. 2) 인용 전유신, 『김성윤展 / KIMSUNGYOON』 서울: 16번지, 2011, 개인전 브로슈어 서문. 3) 강기훈, 작가의 글, 2023.
Vol.20230714a | 경계 境界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