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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작가와의 만남 / 2023_0530_화요일_04:30pm~05:00pm
2023 수성아트피아 지역작가 공모 지원사업 「A-ARTIST」展 Ⅰ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6월 6일 휴관 기획공연 있는 날(6월 8,9,16일)_10:00am~08:00pm
수성아트피아 SUSEONG ARTPIA 대구 수성구 무학로 180 1전시실 Tel. +82.(0)53.668.1800 www.ssartpia.kr @ssartpia_official
내 생각의 봄날, 사십춘기-정민제의 작업을 보고 읽으며 ● "나는 왜 사람들이 모든 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삶은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셸 푸코) ● 사십이다,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가야겠다. 한 프랑스 시인의 말을 빌어 이렇게 적어본다.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작가는 작업해야 한다. 생활인으로서의 나와 예술가로서의 나, 이 두 모습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나는 설정해야 할까? 이것이 모든 예술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때 예술과 삶은 하나도 아니지만(不一), 둘도 아니다(不二). 좋은 예술가란, 자신의 삶에서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의 관계를 잘 설정하는 이이다. 이 예술 아닌 것들을 일상(日常)이라 부른다면, 한 예술가의 성패는 이 관계를 자기 삶의 사소한 일상에서 잘 설정하는 이이다. 그러나 잘 기억해야 한다. 이런 관계의 새로운 설정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기존 예술과 일상의 개념 모두를 바꾸는 일, 곧 예술과 일상에 대하여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정의를 발명하는 일이라는 것을.
"정민제는 일상을 이야기하며 엄마의 삶을 시각화한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졸업 후 갤러리 큐레이터, 미술품 경매회사 옥셔너를 거쳐 20년째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세 아들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결혼과 출산, 육아의 경험에서 비롯된 작업들로 여성들의 존재가 투영된 일상의 소품들을 재료로 채택하고 바느질이라는 행위를 작업의 소재로 삼으면서 주로 여성과 연관된 일과 사물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녀들의 베란다 정원」 시리즈를 거쳐 「어쩌다 엄마」까지 일상을 조형적인 구조 속에서 시각화하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근 '코로나 세끼' 작업은 더욱 자신의 삶에 가까이 들어와 여성 주체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이는 정민제가 이전 직접 작성한 「작가 프로필」이다. 이 짧은 글 안에 정민제가 생각하는 예술과 삶,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자신의 전략과 방법론이 모두 담겨 있다. 이번 전시는 말하자면 작가의 열 번째 개인전에 해당된다. 최근 전시의 제명은, 2020년 『전지적 자아시점』, 2021년 『불편한 틀』, 2022년 『My green wonderland』 그리고 2023년의 『사십춘기』로 이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고, 오직 나만이 판단의 기준이며, 따라서 자아의 시점은 (한계라기보다는) 인식과 지각의 '조건'임을 선언한 전지적 자아시점은 불가피하게 세상과의 불화를 가져오고, 이는 (생태학적 문제를 비롯해) 함께 사는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건강한 불편함'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나와 세계에 대한 부정적 관점에 머물지 않고, '놀라운 나의 초록빛 세계'의 구축을 향해 퍼져나간다. 이제 정민제는 '사십춘기' 통해, 나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 행동(persona)를 일상과 예술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전유한다, 그러니까 - '나답게' 같은 말이 아니라 -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나와 세계를, 그러니까 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발명한다. 이러한 과정은 불가피하게 나 자신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명확한 인지와 의심을 전제로 하여, 그에 대한 나의 새로운 대항-생각(counter-thinking), 대항-품행(counter-conduct)의 모색을 포함한다.
작업 중 일부의 제목을 살펴보면, 2021년의 「나는 알고 나를 모르는 너에게」, 「코로나 세끼」, 2022년의 「나의 삶을 너무 들춰보지 마세요」, 2023년의 「온전히 쉴 시간도 자신도 없었다」, 「당신은 아들이고 나는 며느리잖아요」, 「podaegi」 등이다. 작업의 제목과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이것이 한 명의 주체가 자기 땅에 발딛고 서서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신을 새롭게 발명하기 위한 인식과 회의의 시간을 겪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그러니까, 이러한 부정과 회의, 그리고 다른 삶, 다른 예술의 모색은 나의 존재를, 세계를, 예술을, 관계를 실험(實驗)하는 일임을. 실험은 라틴인들에게 ex-peritus, 지금의 이 상태와 달리 살고 생각하고 겪는 것을 의미한다. 실험은 기존의 세계에 기반하여, 기존의 세계로부터 빠져나가는 일, 곧 탈험(脫驗)이다. 이렇게 기존 시스템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틈새를 내는 일은 그 시스템에 뿌리박고 있는 자, 그러나 완전히 뿌리박혀 있지만은 않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씩씩하다고 삶의 고통이 나를 비켜 가겠는가, 아무도 모르는 헛헛한 심정이 없겠는가. 누군들, 삶의 고통이 없겠으며, 누구라 한들, 삶의 고통을 어떻게 당신 앞에서 다 말하겠으며, 글 한 편에 다 실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앞에서 절절히 울지 않았으니 너는 슬픔도 고통도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사람을 대해서는, 곤란하다. 씩씩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이미 삶의 고통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다는 말이다.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태도, 미셸 푸코가 말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주체화는 19세기 메이지(明治) 지식인들에 의해 윤리(倫理, 동아리의 이치)라, 의미가 축소되어, 잘못 번역된 그리스어 품성 형성(ethikos, ἠθικός)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좋은 비평가는, 좋은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더 나은 방식으로, 그러니까 생산적인 효과가 발생하도록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문제의식을 설정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정민제의 전략은 윤리가 심미성을 초과하는 효과를 낳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한 작가와의 만남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에게, 바로 물었다. "가령, 엄마-작가 같은 (여성주의) 담론, 물론 이는 '인권'이라는 당위가 있지만, 이런 작업은 불가피하게 텍스트가 이미지를 초과하는 측면이 생겨난다. 결국 이미지가 메시지의 수단이 될 위험성도 있지 않은가? 혹은 '여성적인 것'에 자신의 작업이 갇히는 듯한 느낌이 있지는 않은가?" 작가의 대답은 (모르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내 의심을 풀어주었다. 이런 위험성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어떻게 제어하는가, 라고 내가 물었을 때, 작가 정민제의 답은 담백하고 간결했다. ● "저 제어 안 해요. 하고 싶은 대로 다해요. 왜냐하면 다 누구의 취향이고 정답이 없는 분야잖아요. 기초가 되어 있느냐, 기본을 지키고 있느냐의 문제라고 봐요. 어떤 카테고리나 범주에 저를 묶는 것은 보는 사람의 문제인 것 같아요. [...] 제어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몇 년 전 같으면 주변을 의식했을 텐데, 지금은 안 해요. 텍스트를 그냥 쓰는 건 아네요, 전체적인 저만의 밸런스를 맞추고 디자인을 짜서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좀 쎄게 얘기해주고 싶어서, 각인시켜주고 싶어서, 바로 보이게, 그냥. [...] 너나 나나 아직 덜 익었고 죽어도 완성이 안 된다고, 우리 다 배워가는 과정인데. [...] 소프트한 것이나 여성적인 것이나, [전에는] 신경 썼겠죠, 아니다 아니다 해도. 이제는 그런 거 크게 신경 안 써요. 제가 재밌는 걸 해야 되겠더라고요. 무언가를 '가지고 놀 때' 뭐가 나오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제일 관심 있는 거 가지고 하는 거 같아요." (2023년 4월 27일, 작가와의 대화)
안심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 없이 했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 선택한 것이라면, 전략적 선택이라면, 문제가 될 수 없다. 충분한 모색과 숙고 후에 선택한 내 작업의 결과를 내가 책임진다는 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이러한 태도가 중요하다. 누가 나에게 무슨 권리와 역능으로 이런저런 작업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남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와 당신이 삶의 조건(Lebensform)이 다른데, 같은 방법론을, 그러니까 내게 남의 작업 방식을 택하라고? 내 옷이 나의 딸에게 맞지 않듯, 나의 방법이 당신에게 맞지 않는다. 생각의 '보편적인' 옷, 예술의 '보편적' 방식이 있다는 생각은 그저 내 생각, 보다 정확히는 권력-지식의 담론이다. 보편성이 권력투쟁의 장치이다(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존중할 필요가 없는' 생각을 '존중하지 않을' 능력,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여성주의 역시, 고등 교육과 경제적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남성적 보편성과 인간적 보편성이 동일시될 수 없음을 자각한 여성들의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관계가 주어지고 그 상황에 적합한 해법과 전력이 주어지는 것이지, 다양한 관계들을 가로지르는 '보편적인' 해법 따위는 없다. 정민제의 작업은 예술은 이래야 한다는 '보편성'을 파괴하고, 오늘 나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작업 방식을, 관계를 발명하려는, 하나의 실천이다. 정민제는 내 작업을, 내 방식으로, 수행한다. 이는 정민제가 더 이상 타인의 판단을 존중하고 경청할지언정, 그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기초에 숙련되어 있으며, 기존의 규칙을 검토하고 변경할 만큼 기존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고 있고, 나의 새로운 작업을 이미지와 텍스트의 측면에서 남들, 그러니까 상황을 공유하는 수많은 다른 나들 앞에 제시할 만큼 배우고 고민하고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정민제가 말하는 '사십춘기'의 의미이다. 사십춘기는 마흔이 된 한 사람이 생각이 새로 피어나는 생각의 봄날(思春期)이자, 이제 막 무르익어 피어나려는 예술의 푸른 봄날(四十靑春)이다.
나는 전시의 제목 『사십춘기』를 『사십청춘』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정민제 일상의 씩씩함과 예술의 튼실함이 나에게 이런 인상을 주었음직도 하다. 이제, 이 글을 읽은 당신도 당신의 인생과 생각의 봄날을 가져다줄 '당신 인생의 구원자'를 보고 싶은가, 그럼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걸린 거울을 보라, 그리고 말하라.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아끼고 알아주겠다고,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늘 공정하게 대해주겠다고. 모든 사람은 누구든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한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니, 내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그 사람을 대하듯, 내가 너를 늘 대해주리라. 자기를 아끼지 않고 남을 아끼는 방법은 없는 것이니. 나는 '자녀와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볼모로 삼아 여성의 삶을 착취하는' 오늘 이 대한민국의 현실에 발 딛고 서서 작업하는 작가 정민제의 삶과 작업에서, 이기주의도 희생도 아닌, 참다운 '자기배려'의 길을 모색하는 한 사람, 어떤 경우에도 남의 작업이 아닌 '여기-오늘-나'의 작업을 만들어내는 한 예술가의 모습을 본다. ■ 허경
Vol.20230531f | 정민제展 / JUNGMINJE / 鄭珉製 / fabric.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