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쌓기 Stacking up the Light

김은주_이경민_이미솔_이산오展   2023_0527 ▶ 2023_0610 / 월요일 휴관

디자인 / 최진영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김명진 후원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_갤러리175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 Gallery175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53 2층 Tel. +82.(0)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Gallery175

『성냥쌓기』는 보이는 붓질 이전에 쌓여 온 시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붓질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비롯되었다. ● 하나의 그림은 시간의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려낸 사람의 단조로운 노동, 치열한 수행으로 일궈낸 생활 양식은 특유의 언어를 만들어 내고, 마침내 그것을 마주한 사람에게 말을 걸게 된다. 이렇듯 찬찬히 쌓여 온 흔적들이 보는 이를 서서히 물들이는 것이 미술이라는 언어의 소통 방식이다. ● 이 전시를 함께 준비한 네 명의 작가와 회화 이전의 회화, 회화 이후의 회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기에 앞선 시간을 보내는 각자만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리기 행위 이전에 무엇을, 얼마나 쌓아 두고 시작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틀 짓기'에 관한 생각과 연결 지어볼 수 있다. 작업 과정에서 틀은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미 주어진 매체의 한계도 있고,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 낸 틀도 있으며, 그 틀을 벗어나려는 손의 움직임도 있다. 잠시 들뢰즈의 사유를 빌리자면, 빈 캔버스를 마주한 작가는 머릿속에 이미 있던 관념적인 이미지와 손만이 해낼 수 있는 돌발적인 행위 사이에서 씨름하며 흔적을 남긴다. 이렇듯 하나의 그림 안에서 통제와 우연의 줄다리기가 이루어진다면, 표면 위에 흔적을 쌓아간다는 것은 결단력과 망설임을 모두 요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미솔_팥배나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23

먼저 이미솔의 회화를 보자. 여기에서 우리는 '쌓기'의 흔적을 직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그에게는 "과정을 가시화하여 쌓는 것 자체가 그리기의 형식이자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작가의 시간"을 전면에 드러내기 위해 반복되는 일상이 화면을 구성하게 하는 방식을 만들어 냈다. 캔버스에 칸을 나누어 한 칸을 하루에 수행할 일과로 부여한 것이다. 이 칸을 채우기 위해 작가는 매일 산책길을 나서서 같은 장소를 사진으로 찍는다. 그리고 사진을 일정한 틀로 잘라내어 오늘의 과업에 해당하는 만큼 그림으로 옮긴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고 부분과 부분이 차츰차츰 모여 전체를 완성해 나간다. 근면성실하고 자기통제적인 방식의 수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만든 이 규칙은 시간이라는 변수에 의존하고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을 보여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극단적인 예로는 그리고 있던 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가지치기 되거나 하룻밤 사이에 눈이 쌓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매일의 날씨와 색의 온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칸과 칸 사이에는 간극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작가는 분명 매일 본 것을 충실히 그리는 수행을 하고 있는데도, 눈으로 볼 수 있는 풍경과는 멀어지게 되어 그만의 회화 언어가 만들어진다.

이경민_어제의 구름_오늘의 햇빛_시아노타입_19×15cm×31_2022

이경민 또한 산책을 하며 작업의 소재를 발견하곤 하는데, 주로 형태가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대상이 그의 마음에 들어온다. 한동안 그는 구름, 물거품과 같이 매일 볼 수 있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 것들에 집중해 왔다. 그리고 이처럼 붙잡을 수 없는 대상들을 여러 차례 '번역'하여 자신의 시각 언어로 만들어 내는 방법론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어제의 구름, 오늘의 햇빛」(2022)의 경우에는 그날의 구름 모양을 클레이로 만들고, 다음날 햇빛으로 인화하는 시아노타이프(cyanotype) 방식으로 이미지를 생성한 것인데, 그리하여 매일의 구름 형상이 조금의 시차를 가지고 나타난다. 물거품에서 출발하는 신작 「Awa」(2023)는 먼저 사진 찍은 것을 종이에 옮겨 그리고, 필름지를 대어 붓으로 선적인 요소들을 더한 후 다시 한지에 모노타이프(monotype, 판화와 회화의 중간 프로세스)로 찍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하나의 평면에 쌓아 올리면서 그는 점차 "본래에 봤던 것과 멀어지며," 작가조차 충분히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로 재구성해 나간다. ● 이들의 작업은 정해진 규칙을 따르면서도 예상대로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향해 간다. 봤던 것과 멀어지는 데서 더 나아가, 처음에 그리려 했던 것과 멀어지는 것이 때로는 더 나은 결과를 만든다. 가 보지 못한 길로 기꺼이 가고, 예상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자기 몸을 맡기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발견될 무엇을 기대하는 것. 이러한 지점에서 작업은 노동과 명상 사이에 위치하게 되고, 표면 너머의 이면과 본질에 관한 이야기로 침잠해 들어가기도 한다.

김은주_빛의 결_캔버스에 유채_145.5×97cm_2023

김은주의 최근 작업은 "투명하고 따뜻한 빛"을 촘촘히 쌓아 몸으로 색을 기억하려 하는 태도와 관련된다. 요즈음 그가 차분히 감각하려는 대상은 주로 노을빛을 담은 일렁이는 물결이다. 그는 빛이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신비에 대해 자주 생각하며, 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인 물결에 집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가 바라보려고 하는 것, 바라보는 마음은 물결의 이미지를 넘어선다. 물결을 그리는 것은 서서히 밀려왔다가 떠내려가기를 반복하는 그 리듬처럼 어떤 장면을 다시, 또다시 바라보려는 마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붓질을 통해서 스스로 구상했던 것을 넘어서는 어딘가에 도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상의 외형보다는 내부로 들어가는 데 마음이 가고,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본질에 관심이 간다"는 그의 작업에 대해서는 글을 아껴두게 된다. 그 진정한 목적지는 지금 바로 드러나기보다 미래에 발견될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산오_무겁고 가벼운 것들_도자에 색연필, 깃털, 종이에 인쇄, 나무_가변크기_2023

이산오는 그리기·만들기에 앞서 언어로 탑을 쌓는다. 흙으로 빚어낸 책, 그 위에 조심스레 얹어진 손의 형상은 "그림이란 말 없는 시이고 시는 말 있는 그림" 같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업은 흙과 흑연을 쌓아 써 내려간 일종의 시 같아서, 몇 개의 중심이 되는 단어들이 있고 그 사이로 여백을 연결해 나가듯 배치된 조형이 있다. 이를테면 「무겁고 가벼운 것들」(2023)은 죽어가는 작은 새를 구하려던 작가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작업이다. 한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존재의 스러져감은 삶과 죽음에 관해 되묻는 「고백록」(도자 책 안의 시)을 쓰도록 만들었고, "책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무덤에, 새는 보이는 것들의 영혼에" 대입하여 작업하게 했다. 이는 연필 드로잉 「고백록」(2023)으로 연결되어, 흑연이 짙게 쌓일 때까지 반복되는 섬세한 선들로 새들의 군무를 상상하기에 이른다. 차분한 리듬으로 조심스레 형상을 더듬어 나가는 검은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그가 쌓아온 사유의 흔적들이 드러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따금 미술 작업은 누군가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읽히기를 기다리며 놓여 있는 시처럼 보인다. 그 안에는 작가조차 알지 못하는, 아직 읽히지 않았기에 발현되지 않은 무언가가 잠재되어 있다. 이런 믿음을 바탕에 두고, 지금의 붓질이 언젠가의 유의미한 파동이 되기를 바라는 기다림이야말로 투명한 쌓기의 시간을 지속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 그래서 우리는 지금 '성냥쌓기'를 하고 있다. '성냥'을 쌓는다는 것은 이미 환하게 밝혀진 빛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누군가에게 가 닿아 비로소 발하게 될 빛을 미리 생각하는 일이다. 아마도 서서히 나타나 오래도록 어른거리게 될, 가만히 잊혔다가도 어느 순간 잔잔히 다시 반짝이게 될 빛. 불안한 파장에 오늘도 기꺼이 몸을 맡긴 채, 무용한 일에 깊이 골몰하며 그 빛을 상상해 본다. ■ 김명진

* " "로 표기한 부분은 작업 노트나 작가의 말에서 빌려온 표현이다.

Vol.20230527d | 성냥쌓기 Stacking up the Light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