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선(禪) 沉默的禅

창페이롱展 / QIANGFEILONG / 强飞龙 / sculpture   2023_0524 ▶ 2023_0529

창페이롱_팔괘 八卦_수지_60×28×28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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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3_0524_수요일_05:00pm

2023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박사학위 청구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코사 Gallery KOSA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0(관훈동 37번지) B1 Tel. +82.(0)2.720.9101 www.kosa08.com

창페이롱의 '침묵의 조각' - Ⅰ. 프롤로그 -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현인들이 던져온 주된 물음이다.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웅변은 은(銀)이요, 침묵은 금(金)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성경에는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잠언 21:23)라는 말씀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시의적절한 말과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장자가 언급한 '위대한 변론은 말로 하지 않는다'는 뜻의 '대변불언 (大辯不言)', '말이 많으면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노자의 '다언삭궁(多言數窮)' 등 동양철학의 경구 속에서도 침묵을 긍정하고 이상적인 상태로 여기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교훈과 깨달음은 동시대에서 얼마나 유효한 가치를 지닐까?

창페이롱_왕 王_동_70×30×30cm_2022

대부분의 격언(格言) 속에서 침묵을 긍정적 상태라 본 것과 달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침묵'이란 단어는 '강요된 침묵'과 같은 부정적 의미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한편, 창페이롱 조각에서 말하고자 하는 '침묵'은 여전히 앞서 언급한 '긍정적 의미'에 가깝다. 그는 조용하고 잠잠한 모습의 인물을 표현해왔는데, 그것이 바로 본인이 도달하고 싶은 이상적이고 안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어 자기성찰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사색과 침묵의 상태로 인도한다.

창페이롱_왕양명 王阳明_청동_70×30×30cm_2021

Ⅱ. 침묵의 선(線) : 형상으로 말하다 ● 창페이롱은 뛰어난 손재주와 감각으로 중국 조각계에서 내로라하는 조각가 중 한 명이다. 이러한 재능은 그의 고향에서 제일가는 수공예 장인인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대학에서 정식으로 조각을 배우기 전부터 이미 탁월한 기예를 갖추고 있었다. 찬란한 문화유산을 지닌 중국의 아카데미에서 소위 '프랑스식 사실주의'를 전통이자 배움의 표준으로 삼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외침(外侵)에 의한 변화와 굴곡을 겪었던 중국의 근대화 과정과 궤가 닿아 있다. 한때 세계 문명을 주도했던 중국은 근대에 이르러 자신들이 서구에 비해 낙후되어 있음을 인지, 이에 일부 지식인들은 이성과 과학기술을 통한 '구국(救國)' 을 주장하게 된다. 이때 미술의 영역에서는 소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원근법에 의해 대상을 재현하는 이른바 유럽 고전주의 전통이 학습의 본보기로 여겨지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 그로 인해 중국에서 '조각의 전통'을 언급할 때 두 가지의 뿌리를 떠올리게 되는데, 첫째는 바로 20세기 초 구국의 신념을 품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소위 1세대 현대 조각가들에 의해 계승된 '리얼리즘 조각'이고, 다른 하나는 선사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소위 '중국 전통조각'이다. 한편, 아카데미 체계에서는 주로 프랑스식 사실주의 조각을 배우게 되는데, 이에 대한 한계와 의구심을 느낀 그는 어린시절부터 접해온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과의 결합을 시도한다.

창페이롱_무경계 无界_수지_90×40×26cm_2018

창페이롱이 조각하는 방식은 '형상기억(形象記憶)'에 의존하는 동양화의 화법과 유사하다. 이는 눈앞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본 것을 기억해 그리는 일종의 창작을 통한 수행법(修行法)이다. 또한 그는 작은 모형을 만들어 이를 토대로 크게 확대 혹은 변형하지 않고, 바로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감당할 만한 사이즈로 작품을 제작하는데, 본인의 육체와 작품이 조화롭게 일체를 이룰 수 있는 높이 90센티에서 120센티 사이로 작품 크기를 한정한다. 이는 작업을 하며 느끼는 순간순간의 감정과 호흡을 온전히 작품에 묻어나게 하기 위해 선택한 작업 방식으로, 이것이 바로 그의 조각을 통해 동양화론에서 가장 높은 경계(境界)라 말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을 느낄 수 있는 이유다.

창페이롱_사냥꾼 猎人_수지_50×30×30cm_2020

창페이롱의 조각은 사실적 묘사와 기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통상적으로 '사실주의 조각'이라 불리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그의 조각은 '사실'보다는 '사의(寫意)'에 가깝다. 그의 작품은 주로 실존했던 인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결코 특정 개인의 모습을 핍진(逼眞)하게 묘사하거나, 그 인물과 관련된 서사(敍事)를 전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업적을 이뤘는가'와 같은 세속적 잣대에 의해 형상화된 모습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사색의 순간', '침묵의 상태'를 특정 인물의 형상에 빗대어 보여줄 뿐이다. 다만 그가 장자, 구마라습과 같은 선인들을 소재로 택한 것은, 그들의 삶과 인생 궤적에 담긴 상징성을 통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인도하는 침묵의 상태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매개라 할 수 있다.

창페이롱_몽판툰가 蒙恬屯边_수지_60×30× 26cm_2018

그가 조각의 언어로 침묵을 말하는 방식은 시기별로 변화해왔다. 2014년부터 선보인 '침묵의 선(線)' 에서는 기본 조형요소 중 하나인 선의 다양한 변주와 재조합을 통해 침묵의 상태를 형상화하였다. 이식된 전통과 토생토장(土生土長)한 전통 간의 결합을 시도해온 그는, 동양의 인물화에 나타나는 선묘(線描)의 체계와 특성을 삼차원의 조각 언어에 적용시키며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보편적인 심미관에서 볼 때, 인물상에 많은 선(線)을 조밀하게 묘사하면 내면의 불안감 혹은 복잡한 심리 등을 나타낸 것이라 해석한다. 예컨대 베르니니 조각에서의 선은 인물의 감정과 작품이 지닌 내러티브를 보다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장치로 읽혀진다. 반면 작품 속에 넉넉히 비워 둔 여백(餘白)은 보는 이들을 위해 남겨둔 '사색의 공간'이라며 칭송되어 왔다. 이와 같은 시각적 형식에 대한 '왜곡된' 관념과 편견은 소위 모더니즘 미술 등장 이후 '추상 대 구상', '추상이 우월하다' 등의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창페이롱_꽃을 뜯다 拈花_수지_60×28×28cm_2015

한편, 이와 같은 이분법적 심미관에 반기를 든 작가는, 작품에 많은 선이 등장해 시각적으로 다소 번잡해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묵연한(默然) 상태에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며 사색하는 인간상을 표현해내고자 했다. 그는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아무리 많은 선을 묘사하더라도 내재적 규칙에 의해 배열된다면, 여기에 작품 외형의 윤곽이 간결하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조화롭고 안정적인 상태를 구현해 낼 수 있음을 발견했다. 베르니니 조각에서의 라인은 인물의 역동적인 자세와 호응하며 함께 움직이지만, 창페이롱 조각에서의 선은 조각적 덩어리와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마치 이중주와 같은 완전한 합일을 이룬다.

창페이롱_구마라습 鸠摩罗什_동_23×40×15cm_2022

2017년에 제작한『구마라습은 역사적 운명 앞에서 양면적인 감정의 충돌을 느끼며 고뇌하는 인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다소 과장된 무거운 옷자락의 표현을 통해, 험난한 길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던 대가의 겸허한 태도와 번뇌의 무게감을 극대화하였다. 그의 조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아웃라인의 단순함은, 관객들의 시선을 작품의 내부공간으로 향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자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순을 표현한 것이다. 외형적으로 늘 특유의 호방함과 '형님다움'을 보여주는 그이지만, 동시에 내면에 존재하는 번잡하고 애타는 마음을 '선(線)'에 담아 밖으로 흘려보냈다.

창페이롱_도화선 桃花扇_수지_60×28×28cm_2017

Ⅲ. 침묵의 선(禪) –침묵 가운데 홀연히 깨닫다. ●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이미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구축한 마흔의 나이에 타국으로의 유학은 그에게 적잖은 무력감과 상실감을 들게 했다. 공자는『논어에서 마흔의 나이를 '불혹(不惑)', 즉 어떠한 유혹에도 정신을 잃지 않는 나이라 형용했지만, 또한 역사와 문화적으로 많은 유사점이 있는 중국과 지척거리인 한국으로의 유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 난생처음 고향을 떠나온 작가는 타지에서 적응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밤이 찾아오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만큼 매일매일을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잠을 이루려 노력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점점 또렷해졌다.

창페이롱_앙망 仰望_수지_60×28×28cm_2014

손자병법 제7편에 '이환위리(以患爲利)'라는 성어가 등장한다. '걱정을 이로움으로', '고난을 기회로 삼는다'는 뜻으로, 창페이롱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형용하는데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고독에 빠져 홀로 낯선 도시를 감상하고 산책하며 어떻게 하면 작품을 통해 내면세계를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예술가가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예술은 없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그는 보다 '모더니스트'에 가까운 태도로 창작에 임했다. 한편, 불면증은 그로 하여금 '침묵'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있는 고찰을 하도록 이끌었고, 이로써 그의 조각은 이른바 '형상'으로 말하는 '침묵의 선(線)'을 지나 '침묵의 선(禪)'에 다다른다. ● 여기서 '선(禪)'은 무아적정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종의 수행 방법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경지에 몰입(沒入)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조각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장인적 기예(技藝)로써 형상 안에 담고자 했다면, '침묵의 선(禪)' 단계에 이르러서는 내면에 집중하며 얻은 깨달음을 자신 안에서 한차례 정련하고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 외재화(externalize) 하였다. 그로 인해 조형언어에도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는데, 작품의 윤곽은 이전과 같이 고요하고 정태(靜態)적이지만, 전반에 걸쳐 분포되어 있던 선의 묘사는 마하파(馬夏派) 화풍의 변각(邊角) 구도를 연상케 하듯 일부분에만 집중해서 나타나게 된다.

창페이롱_동화 시리즈 童话_흙_25×7×5cm_2023

바야흐로 우리는 말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핏대 높여 부르짖는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은 다 하면 구차해지기 마련이다. 노자는『도덕경에서 여러 장에 걸쳐 침묵의 가치를 강조하였는데, 한 예로 제23절에서 '말을 적게 하고 자연에 따르라(希言自然)' 는 말을 남겼다. 자연은 말없이 스스로 '그러함'을 드러내 보인다. 들꽃은 누가 봐 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말없이 스스로 꽃을 피우고 진다. 자신의 내재적 규율에 의해 살아가기에, 왜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은 지, 목련처럼 청초하지 않은 지 시샘하고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서로를 시기하고 동시에 끝없이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목말라 한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 오늘날 우리가 그 어느때보다 극심한 갈등과 결핍감을 느끼는 것은, 자기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이기 보다 타인과 집단이 정해 놓은 잣대에 의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 작가는 발을 땅에 딛지도 못한 채,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이곳저곳을 부유하는 사람들에게 잠시 땅에 발을 딛고 멈추기를 권한다. 그는 주로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긴 듯한 모습의 인간을 조각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있어 '눈'의 묘사는 인물 표현의 핵심이다. '마음의 창'으로 비유될 만큼, 인물의 상태와 정신적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라 여겨왔다. 한편, 작가는 눈을 감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며, 자의적으로 인물에게 특정한 감정을 부여하는 것을 차단시킨다. 눈을 감음으로써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보는 이의 시선에서 다양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투영시킬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창페이롱_여명 曙光_수지_50×18×25cm_2022

Ⅳ. 침묵의 선(善) - 물을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 창페이롱의 작업세계를 조명하는 글을 쓰기 위해 그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나는 작가가 참으로 선한 사람임을 느꼈다. 외형에서 느껴지는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거침과 자유분방함 너머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통찰력을 느꼈다. 그는 노자와 선종 사상으로부터 삶과 창작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었다. 노자는 최상의 선(善) 은 물과 같다 말했다. 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늘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른다.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결코 다투지도 뽐내지도 않기에 저절로 만물을 자라게 한다. 이에 반해, 인간은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다툼과 갈등도 마다하지 않는다.

창페이롱_뒷모습 시리즈 背影系列_화지_40×20×1cm×8_2023
창페이롱_로댕에게 경의를 표하다 致敬Rodin_화지_40×20×1cm×3_2023

이른 나이에 소위 성공한 조각가 대열에 든 그는, 결코 남들 앞에서 득의양양하지 않고 늘 담담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말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한마디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비판에 노출되기 쉽다는 뜻이다. 장자(莊子)의 외편(外編)에도 '곧은 나무는 쓸모가 많아 먼저 베인다(直木先伐)' 라는 성어가 등장하는데, 유능함이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기에 남들 앞에서 지나치게 돋보이는 것을 지양하라는 삶의 처세술이 담겨있다. 어쩌면 그의 침묵은 '타고난 재주꾼' 인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일지 모른다.

창페이롱_공생 共生_삼끈, 금속_45×30×30cm×2_2023

창페이롱은 사춘기 시절의 반항으로 부모님에 의해 절로 보내져 6개월간 사찰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한참 피가 끓는 나이에 담장 밖조차 나가지 못하고 견뎌야 했던 고독은 그로 하여금 남들보다 조금은 일찍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순리를 깨닫게 했다. 그가 계속해서 침묵에 대해 예찬하는 것은 아마도 당시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무의식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침묵은 그저 정적이 흐르는 무음의 상태가 아닌 마음의 평온이자 안녕(安寧)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더 명확한 사고와 직관을 갖게 하는 자아실현의 방도이다.

창페이롱_자기 반성 시리즈 内省_삼끈, 금속_50×20×10cm×4_2023
창페이롱_분열 시리즈 分裂_삼끈, 금속_45×10×30cm×4_2023

"오직 침묵 속에서 내 안의 진정한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창페이롱 인터뷰에서 발췌)

창페이롱_선, 휘감다 시리즈 禅, 缠_삼끈, 금속_45×10×30cm×8_2023
창페이롱_추락 시리즈 坠落_흙_30×20×15cm×3_2023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오롯이 혼자인 상태에 놓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과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마주할 수 있다. 지독한 불면증을 이겨낸 그에게 침묵은 창작의 영감을 선물했다. 작가는 지난 십 년간 작업에 몰두하며 그렇다 할 외부 활동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 적은 없다 말한다.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노자가 말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이룬다'라는 경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즉, 그가 택한 무위는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함의 무위이다. 창페이롱은 자신에게 있어 침묵은 가장 좋은 스승이라 말한다. 침묵으로 인해 자신을 알게 되었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Ⅴ. 에필로그-침묵으로의 초대 ● 현대인들은 침묵에 익숙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익숙한 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침묵이다. 타인에 의해 강제된 침묵은 내면을 갉아먹고 병들게 한다. 반면 자발적 침묵은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케 한다. 하지만 강요에 의한 침묵에 익숙해지면,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의(自意)적 침묵에 몰입할 수 없기에, 침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침묵하면 외려 내면의 목소리는 커진다. 어떠한 외부의 간섭과 방해 없이 오로지 나 혼자인 상태에 놓였을 때, 비로소 마음 깊은 곳에서 건네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타인에게 침묵을 강요받는 삶을 사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성찰과 사색의 기회를 갖기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작가는 관객들을 자신에게 깨달음을 얻게 해준 '침묵의 상태'로 초대한다. 작품과 마주하는 동안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고 잠시라도 자신의 마음을 직시할 수 있도록 관객들을 침묵의 상태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조각가인 그가 세상과 소통하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식이다. ■ 조혜정

Vol.20230524e | 창페이롱展 / QIANGFEILONG / 强飞龙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