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 · 변주

김주현_홍승혜_신옥주展   2023_0512 ▶ 2023_0616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23_0512_금요일_06:00pm

기획 / 이영욱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서부로1205번길 183 제2,3전시장 Tel. +82.(0)43.236.6622 www.spacemom.org

1. 이 전시는 '스페이스 몸' 전시장 공간에서 시작됐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시장에 들른 기획자에게 이 공간의 독특한 분위기와 특색이 새삼 모종의 전시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각각 콘크리트와 벽돌로 만들어진 두 개의 전시실과 그사이 이리저리 펼쳐진 마당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약간의 나무들로 구성된 이 공간은 여러모로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이다. 원래는 도시 외곽 준-농촌 지역 귀퉁이에 자리 잡았던 듯싶은 전시장은, 이제는 드높은 신설 아파트들에 거의 둘러싸여 고립되고 옹색해진 상태다. 하지만 그래선지 마치 자신만의 시간과 기억을 간직한 외딴섬처럼 어딘가 기이하기까지 하다. 전시실 하나는 콘크리트 건물이고, 다른 전시실은 벽돌을 쌓아 올린 약간 창고 느낌의 외관이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앞의 전시실은 단단하고, 매끈하고, 둔중하다. 투명 에폭시 처리된 노출 콘크리트 마감의 벽과 천장 그리고 구석의 단정한 창문은 한데 어울려 한편으론 방공호 느낌을 주고, 달리는 현대식 카페 분위기를 풍긴다. 뒤의 전시실에는 우선 안쪽 중앙에 나무 기둥이 서 있다. 한쪽 벽엔 밀폐한 창문, 다른 쪽 벽에선 가늘고, 약간은 길쭉한 유리 창문이 밖을 내다보고, 옆 방으로 들어가는 창살문이 있는가 하면, 천장은 높다. 조금은 특산물 전시실 같은 느낌이다. 마당의 잔디밭 주위로는 민속품 컬렉터이기도 한 공간운영자의 취향을 대변한 듯 이곳저곳에 석상, 돌기둥, 맷돌, 목제기물 같은 물건들이 놓여있다. 창고용 가건물이나 마당 뒤편에도 많은 기물이 쌓여있다. 대로에서 전시장까지 들어오는 길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마을 길에 가깝다. 밭과 개천과 집들. 그 길을 5분 여를 걸으면 전시장 입구다(하지만 전시가 열리기 한 달쯤 전 가려져 있던 전시장 후면으로 대로가 뚫리고 전시장 출입구 쪽이 밖으로 노출돼 전시장의 분위기는 또 한 번 크게 변환했다). 나는 이 공간과 둘러싼 주변 환경을 이곳에서 전근대로부터 포스트 근대까지 압축하여 진행된 시간의 폭풍, 그것이 남겨놓은 잔해물 같은 것으로 느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간을 거슬러 안착할 수 있는 전시를 원했던 듯싶고, 관심이 닿았던 세 작가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신옥주, 홍승혜, 김주현이 그렇다.

신옥주_지혜의 문_철판에 컷팅, 밴딩_204×216×120cm_1992~2022
김주현_함석판으로 된 경첩_함석판, 잇기_30×190×190cm_1999~2011 김주현_뒤틀림_동선, LED_80×80×150cm_2016
김주현_잉크 그림_종이에 잉크_51×52.5cm, 24.5×24.5cm_2010~8

2. 김주현의 작업은 통상 제작 시기를 따라 '붓기', '쌓기', '연결하기', '뒤틀기' 같은 작가의 행위방식을 지시하는 용어로 분류된다. 구상에 따라 간단한 세부 행위 규칙이 설정되면, 재료(석고, 종이판, 금속판, 사각 막대, 금속선 등)의 선택과 더불어 규칙에 따른 행위가 반복 수행되는 가운데 작품이 모습을 갖춘다. 행위 규칙의 반복은 체계를 산출하며, 반복되는 행위 과정은 작품에 시간의 흐름(지속성)을 부여한다. 이 진행엔 어떤 식으로든 기계적 엄밀함을 벗어난 요인들(작가, 재료의 비균질성 등)이 개입하기에, 체계와 과정은 우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생성하는 구조체, 혹은 유기체의 모습을 갖춘다. 이 작품이 하나의 종결된 상태로 제시되기보다 끝이-열린 생성하는 구조체의 단면처럼 가시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 내 생각에 그녀의 작업은 처음부터 생명의 은유를 내장하고 있었다. 인공 생명 학자인 크리스토퍼 랭턴에 따르면 생명은 "물질 조직의 속성"이며, 자연 속 생명체는 일련의 역동적인 물질 과정의 결과물이다. 작가는 작업 노트에서 "내 작업의 주된 내용은 바로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이 세계의 양탄자를 뒤집어 그 밑에 깔린 원리를 찾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세계(자연)를 단순히 외양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리를 통해 드러내려 한 시도는 짧지 않은 역사와 적지 않은 사례를 축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연의 유기체적 구조를 유추하게 하는 수많은 작품(아르프, 브랑쿠시)을 알고 있다. 하지만 김주현은 막연한 유기체적 은유를 넘어 비가시적인 자연의 역동을 드러내는 특정한 과정 및 체계와 작업을 결부시킨다. 당연히 이들 작업은 자연의 역동 메커니즘(물질에서 생명으로)을 단순히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 역동에서 추상한 일련의 규칙을 작동시켜 "모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일에 가깝다. 혹은 임의의 행위와 재료를 매개로 자연의 역동을 번역해 내는 일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김주현_크레파스 번지기 그림_종이에 크레파스_ 150×120cm_1991(2023 재작업) 김주현_붓기 드로잉_합판, 라카페인트_39.5×45cm_1988 김주현_꼬리가 있는 석고 붓기_석고, 철근_40×30×20cm_1998

초기의 '붓기' 작업(1986~95)은 비닐틀에 석고를 부어 입체물(원뿔, 삼각뿔, 직육면체 등)을 성형해낸 것들이다. 작가는 작업을 구상하고 틀을 만들며, 최초 행위를 수행하지만(붓기), 형태는 그 과정에서 자연의 중력 작용 및 비닐과 석고의 물리적 접촉으로 만들어지며, 최초의 행위 이후 작가의 개입은 제한된다. 이 지점에서 형태의 특이점들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사물의 흔적은 인위적으로 제작된 사물의 고정된 물(체)성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 아닐까? '쌓기'(1996~2001) 작업엔, 2만여 개의 직사각형 알루미늄판을 쌓아 정육면체의 모습을 갖춘 작업이 있다. 이 작업은 반복된 행위를 통해 수없이 많은 단편을 집적한 결과로 하나의 사물을 보여준다. 작품의 초점은 사물을 고정되고 완결된 덩어리로서가 아니라 수많은 요소의 집적 과정에서 생겨난 것임을 드러내는 데 있는 듯하다. 여기서 작가의 개입은 최초 구상에 따른 최소한의 반복 행위에 국한될 뿐이다. 작가에겐 재현적이고 표현적인 외양(볼륨, 형태)을 해체하고 사물(작품)을 그 근원(기본 단위의 집적)으로 제시하려는 뿌리 깊은 충동이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연결하기'(1996~2008)에서는, 사물 형태가 과정 혹은 집적의 소산임을 드러내는 '붓기'나 '쌓기'와 달리, 과정을 통해 사물이 형성되고, 증식되며, 변화해 가는 근원적 힘이 전면에 부각 된다. 곧 이들 작업은 고정된 물체가 아닌 증식하는 생명체 모형을 시뮬레이트한다. 작가는 물리학의 수학적 법칙이 생명의 법칙으로 이행하는 상동 관계에 기반하여 작품의 행위 규칙을 고안해내며, 이 행위 규칙에 따라 형태는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닮은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일종의 프랙탈 형상을 드러낸다. 방대한 양으로 집적된 행위(노동)와 재료로 설득력을 행사하는 이들 작업은, 각각 규칙에 따라 수평으로 전개되든, 수직으로 전개되든, 아니면 서로 엇갈려 증식되든, 변화하는 관계망의 형태를 가시화한다. ● 이후 그녀의 작업은 서로 연계되면서도 구분되는 두 가지 유형을 선보인다. 하나는 생명체로서의 식물이 실제 작업 속에 등장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뒤틀기'(2010~) 작업이다. 앞의 작업은 '연결하기' 작업의 자연스러운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연결하기' 작업은 '모의 생명체'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수학적 체계와 구조를 드러내며, 머물지 않고 성장하면서, 생태계 그물망으로 확산하고 포섭되는 체제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완전하며, 아름답다. 따라서 작업이 현실 세계의 강 위에 다리로 놓여 미감적 기능을 실제화하든(「생명의 다리」[2007]), 아니면 실제 생명체인 식물이 그녀의 작업과 함께 전시장에서 제시되든(『누구나 꾸는 꿈』[2009])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뒤틀림' 작업은 직선 아닌 나선을 기본형으로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 결합을 탐색한다. 이 생성 구조의 역동은 확장과 해체뿐 아니라 순환의 구조를 내부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작은 철선들의 연결로 생겨난 인공 세계가 하나의 회로가 되어 접점들 모두에서 빛날 때, 그것은 마치 물질과 생명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이아 우주의 상상계를 제시하는 듯하다.

김주현_피의 흐름_한지에 채색_49.5×51.5cm×4_2011 김주현_생명의 그물-콘솔_나무막대, 나무판, 식물_100×240×80cm_2020
홍승혜_FIGURE_자작나무 합판에 아크릴채색_가변크기_2022_부분

3. 홍승혜의 작가 이력에서 컴퓨터와의 만남은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미처 다 표출하지 못해 잠재된 심미적 욕구가 컴퓨터의 이미지 디자인 툴의 도움으로 해방되었다고나 할까? 이 디자인 툴은 작가에게 기본 형태(픽셀, 사각형, 그리드)를 제공했으며, 이들을 그야말로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 주었다. 단순한 클릭만으로 한정 없이 이미지를 생산, 변형(축소, 확대, 비틀기, 형태 만들기 등), 집적,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가능성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가능성의 지평 위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실제화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추상을 이해하는 홍승혜 특유의 입장을 주목해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홍승혜에게 추상(형태)은 원칙적으로 창조와 관련한 사안이다. 그녀의 추상 해석은 말레비치의 영향권 안에 있다. 말레비치는 순수 형태의 역동적 상호 관계에 기반하여 '비非대상'적 현실을 창조하려 했다. 그에게 자신의 (추상) 회화는 캔버스에 국한된 재현이 아니라 그 자체가 대상인 비대상의 현실이다. 그는 자신의 글 「예술에서의 새로운 체계들에 관하여」(1919)에서 "살아있는 회화는... 살아있는 세계 전체의 진정한 일부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표명이 가능한 이유는 형태가 이 세계의 역동 속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역동을 가리키고 있을 뿐 더러, 또한 그 역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하자면 예술작품은 기성의 세계상에 물들어 있는 재현체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공적-자연적 대상이다.

홍승혜_FIGURE_자작나무 합판에 아크릴채색_가변크기_2022

1997년 『유기적 기하학』 전시에서 홍승혜는 처음으로 컴퓨터 디자인 툴을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모니터에서 조성한 이미지를 물질화시킨 이들 작품에서 우선 눈에 띄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형태소(사각형)의 반복과 변형, 증식을 적극 활용한 점, 그리고 창, 계단, 집 등 형태소를 조합해 만든 기호화된 형상이 자주 등장하는 점이다. 수열화된 사회의 역동을 드러내는 형태와 일상의 정감이 깃든 건축적 요소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조형적 자세가 다층적 현실을 포섭하려 한다는 점을 예시한다. 우선 픽셀을 벽돌처럼 쌓아 만든 이들 작업은 형태와 형상의 윤곽을 따라 차이의 체계를 펼쳐 보이면서, 각각 나름의 순열, 조합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들 작업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그 독특한 대상(사물)성과 역동성에 있다. 이미 컴퓨터 활용 이전부터 그녀의 콜라주 작업은 서로 다른 형상을 지닌 사물의 병렬, 대치, 모음이었다. 컴퓨터 툴을 활용한 이후에도 액자 틀과 형상을 하나의 사물처럼 조성하거나 형태와 형상을 알루미늄 패널 위에 전사하는 식으로 사물성이 강한 작업을 시도했다. 액자 틀을 갖춘 회화와도 다르고, 조각도 아니며, 디자인에 가까워 보이나 기능이 다른 이들 작업은 어쩌면 모두가 아니기에 모두일 수 있는 독특한 대상성을 드러낸다. 형태와 형상으로 작동하는 대상이 그것이다. 이 대상이 유기(역동)성을 지니는 건 우연이 아니다. 개별 형태 단위는 인공적, 기하학적이지만, 형태의 병렬, 전개, 증식에서 드러나는 운동성, 형태 간 차이를 타고 전개되는 수학적, 기계적 움직임, 그리고 대상으로서의 작품이 외부 사물, 공간, 환경, 세계와 맺는 관계 양상에서 이 유기성, 역동성은 명료하게 드러난다.

홍승혜_MOVE_플래시 애니메이션, 개러지밴드_00:02:50, 반복재생, 가변크기_2022

현실에서 작동하는, 곧 현실과 대면하여 그것과 더불어 역동하는 형태(상)-사물을 창조하려는 홍승혜의 시도는 그 형태소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실상 무한한 변화와 가능성에 열려있다. 그녀의 초기 작업은 상대적으로 형태 자체의 역동을 창출하고, 형태와 공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다변화하는 사안(평면, 부조, 입체)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관심은 점차 구체적인 일상 장소의 기능 혹은 상징 층위와 대면하는(유사-건축, 디자인, 공공미술, 공간 조성 이벤트) 데까지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작업의 기본 단위인 형태소에 다양한 감각소=기표(소리, 행위, 프레임)를 뒤섞는 실험을 지속하며, 이는 결국 전복적인 매체전환(영상, 음악, 퍼포먼스 같은 시간매체로의)에까지 이른다. 물론 이들 작업의 성취는 추상적인 형태소 혹은 다양한 기표를 의도에 따라 최적화된 역동적 짜임새로 엮어낼 수 있는 솜씨에 근거한다. 기존 작품을 일정하게 잘라내 병렬한 전시(『파편』[2006])가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 2008년 "이중섭 미술상 수상 기념 전시"였던 『On & Off』는 한 사례로서 흥미롭다. 이 전시는 그녀의 다음번 수상 작가를 위한 시상식장 꾸미기였다. 기존 공간을 정리하고, 바닥에 테이프로 구획을 만들고, 그에 따라 의자를 배치하며, 앞쪽 벽에는 시상식임을 확인해주는 그래픽을 그려 넣는다. 두 개의 입체작업이 바닥에 놓이거나 공간에 걸리고, 뒤쪽 별도 공간에는 그래픽과 직접 디자인한 쓰레기통이 놓여있다. 이는 기능적, 미감적으로 공간을 재구성한 것이지만, 그 이상이다. 일상의 공간과 사건을 읽고, 그 안으로 자신의 유토피아적인 '인공 우주'를 침투시켜 스며들게 한 이 전시는, 구체적인 현장 안에서 우리를 '알고 있는-삶'으로부터 '있을-수-있는-삶'에로 이끈다.

홍승혜_About Frame_C 프린트, 플렉시글라스 마운트_ 40×30cm×2_2011 홍승혜_Orgainc Geometry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 나무액자_41.5×31.5cm_2015
신옥주_너에게로2005_철판에 컷팅, 밴딩_269×412×97cm_2005

4. 2008년 신옥주의 개인전 서문에서 최태만은 그녀의 작업을 '공간에 그려놓은 자유로운 선의 유희'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 표현은 그녀의 조각을 선의 움직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녀의 조각이 흔히 오해되듯 통상적인 형태적 구성의 조각을 빗겨나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 점에서 적실하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이 조금 보충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신옥주 작업에서 '선'은, 물론 '자유로운 유희'의 측면을 내포하지만, 내 생각에 '(끊이지 않는) 필획의 움직임'에 가깝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이 선에서 '신체성'이 두드러질 뿐 아니라, 선에 의해 조성된 작업이 '특유의 형상과 공간, 리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화가가 몸으로 익힌 숙달된 필력으로 종이 위에 선을 그어, 형상을 만들고, 여백과 더불어 공간을 조성하며, 끝내는 화면 전체에 기운생동氣運生動한 리듬을 불어넣듯 말이다. 철판에 열을 가하여 마치 엿가락처럼 뽑아 올린 그녀의 선은 신체적 떨림과 기세를 드러내는 붓의 필획과 닮아있다. 그녀의 작업은 물론 이 선을 종이의 표면이 아닌 허공 속에서 움직여 만들어 낸 결과다. 하긴 어떤 드로잉에서건 신체성의 흔적은 어느 정도는 남는다. 그렇지만 신옥주 작업에서 나타나는 신체성은 조금 다르다. 대작의 경우 그녀가 뽑아낸 선(강철)의 굵기는 8cm x 8cm에 달하며, 그 연장 또한 10m를 훌쩍 넘곤 한다. 그녀는 이 강철선을 잇고, 구부리고, 휘어 공간 속을 나아가고 움직이게 하여, 나름의 형태를 형성한다. 이 경우 그 선은 강철에 가해진 노동과 힘의 총량에 덧붙여 그야말로 '온몸이 투여된 신체성'을 발산한다. 몸과 공명하는 가운데, 몸을 싣고, 앞으로 나아가듯 역동적인 신체 감각이 작동하는 것이다.

신옥주_지평에서-땅거미_철판에 컷팅, 밴딩_42×150×112cm_1987 신옥주_지평에서-먼동_철판에 컷팅, 밴딩_116×170×96cm_1987

작업에서 상승, 하강하고, 꺾이거나, 구부러지고, 뒤틀리거나 휘돌아 감기기도 하는 선의 흐름은 그때그때 공간의 안팎을 열거나 닫아 구획하고, 형성한다. 단일한 선 혹은 여러 선을 병렬 혹은 복합 교차시킨 작업은 둘러보는 각도에 따라 또 다른 광경을 드러낸다. 부드러운가 하면 강하고, 어긋난 듯 균형을 이루고, 긴장과 이완, 움직임과 정지가 서로 맞닿아 있는 미묘한 형국이다. 작가의 신체성, 곧 감성적 기율에 의탁한 선의 동세는 이미 자연 및 생명의 흐름에 맞닿아 전반적으로 역동적이다. 동시에 이 동세에 포섭된 형태와 공간은, 직선과 곡선, 도형과 형상의 요소들과 더불어, 현실 세계와 그곳을 사는 인간에 대한 작가의 감각과 경험, 기억, 해석, 희구를 전달한다. 몇몇 작업에선 형태 자체가 식물의 생장 양태를 드러내기도 하고, 도시 공간 속 기계적 얽힘을 상상하게도 만든다. 선의 굴곡으로 드러나는 산의 능선이나 경계 너머의 문 같은 형상은 작업에 대한 암시적이거나 상징적인 해석을 뒷받침한다. 자연스레 각각의 작업은 또한 그때마다 형태를 가로지르는 상이한 리듬과 정서의 흐름을 드러낸다. 어떤 경우는 하늘을 향하는 희구, 또 달리는 땅의 곁으로 내려앉은 평화로움, 혹은 휘몰아 도는 운동 등. 신옥주의 역동은 이렇듯 이곳 자연 속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감각을 관통하여 넘나든다.

신옥주_지혜의 문_철판에 컷팅, 밴딩_87×60×41cm_2007 신옥주_너에게로(시리즈)_철, 동, 은납_가변크기_2023

작가에 따르면 그녀의 철판 작업(1976)은 당대의 사회현실과 예술의 한계(재현의 틀에 고착되어 있었던 기성 조각)에서 느끼던 답답함에서 벗어나려 우연히 시도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스티로폼 판을 구석에 놓고 깨뜨려 부서진 그 형상을 철판으로 옮긴 것이다. 초기 작업의 초점은 이렇듯 깨어진 철판의 모서리 형태와 그 형태들 사이로 부각 되는 배면 공간에 있다. 몇 년 후엔 새롭게 두 가지 양상의 작업을 선보인다. 하나는 철판을 불로 잘라 선을 뽑아내서는 그때마다 자유자재로 풀어 헤쳐 전개한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의 철판을 서로 연결된 다양한 곡면 형태(산의 모습)가 드러나게 오린 후, 그 형태 각각을 상이한 각도로 구부려 일종의 곡면으로 연결된 구조체로 만든 것이다. 이들 작업은 불을 다루며 철의 유연성을 새삼 자각한 것 그리고 철판의 판성板性에서 이탈을 꾀했던 당시 정황과 관련이 있다. 후자의 작업은 판과 판 사이 안으로 형성된 내부 공간이 판의 바깥면들이 서로 다른 각도로 외부 공간과 조응하는 모습과 함께 응축, 확산하는 공간을 제시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에서 역동의 리듬(후자의 경우는 내재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90년대 초반부터는 「지혜의 문」이라는 제목의 일련의 작업을 시작한다. 이 작업과 관련하여 그녀는 "자신의 벽을 부수고 딱딱한 틀들을 유연하게 열어 스스로를 비워나가면서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조각, '지혜의 문'을 이 땅 위에 세우고 싶다"고 말한다. "지평의 존재로서 신체를 통한 역동적인 체험의 확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벽으로 느껴지던 일상 풍경을 몸의 역동으로 뚫고 나가, 자기 비움과 확장을 통해 열린 바깥 세계와 화해하려는 희구를 느낄 수 있다. 이들 작업 중 '문' 형상이 나타나는 몇몇 작품은 주변에 배치된 자연적 요소(식물, 돌 등)와 인공적 요소(문, 도형 등) 모두를 끌어안아 경계 너머를 지향하는 듯하다. 대체로 200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지혜의 문」 작업 이후, 근자에 들어서는 작가의 관심이 '나도 모르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라 칭한 녹슨 쇳조각, 쓰고 남은 엉클어진 철사 뭉치, 구부러진 못, 철판이나 동판 쪼가리, 진흙 덩이 등으로 향한 듯하다. 그녀는 철사 뭉치나 진흙 덩이 여기저기에 세모꼴이나 네모꼴의 찌그러진 동판이나 철판 조각들이 간간이 박힌 유형의 작품을 한다. 초기부터 그녀는 들판의 넝쿨이나 잡초, 풀꽃 같은 무작위의 생명력에 주목해왔지만, 이젠 이 버려진 금속성 사물에까지 생명을 주려는 듯하다.

강태환(색소폰), 진향래(무용), 허희정(바이올린)_'파동' 공연_2023

5. 처음 전시 기획을 떠올렸던 당시만 해도 필자는 세 작가의 작업이 역동이라는 키워드로 함께 묶일 수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혹시 역동 개념이 여성 작가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의 편견이 부지불식간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각 작가의 작업 원칙이 전개되는 방식과 경과를 주목하면서, 그간의 평문들을 읽고,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작품을 다시 분석해 보는 가운데 자연스레 이 역동이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물론 앞서 확인했듯 이 역동을 구현하는 방식은 작가마다 꽤 다르다. 김주현은 물리적 자연과 생명이 지닌 역동 과정을,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일종의 규칙을 고안(수학적 연구에 근거하여)하고 행위를 집적시켜, 시뮬레이트하는 방식을 취한다. 홍승혜의 경우 역동은 형태의 기본 단위인 픽셀 혹은 사각형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으며, 이 기본 단위를 최적으로 짜 맞춘 형태를 대상 세계와 대면하여 작동하게 하는 식으로 역동을 구현한다. 신옥주의 경우엔 철판에서 끌어낸 선에 신체성을 담고, 이 철선의 역동이 그것을 포함하는 세계 속 자연과 생명의 풍요로움에 최대한 상응하게끔 작업을 구상한다. 어떤 경우든 이들 작업이 자신이 경험한 시대 환경(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중반생)으로부터 발원해, 당대의 예술적 지형(재현체계)의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서 생겨난 것임은 분명하다. 하여 이들 세 작가의 작업은 도시화, 산업화, 현대화로 급속히 변화하는 시각 현실을 관통하면서 능동적으로 구현해낸 새로운 감성 체계(역동)를 제시한다. 물론 살아있는 생명으로부터 추상한 질서, 곧 역동을 이들 세 작가가 어떻게 작업의 화두로 공유하게 된 것인지 또 이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인지와 관련해서는 좀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이 몸소 체험한 일상 삶과 시각 현실의 격동에서 근원적인 감성적 요구를 확인하고 끝내는 그 요구에 충실했으며, 이로써 형식의 제어를 매개로 명확히 감지되는 예술적 설득력을 끌어낸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성취다. 특히 형태 중심의 조각 전통의 하중에서 벗어나 그 배후의 역동을 가시화하기 위해 끈질긴 탐구를 지속해 나간 김주현의 탐색과 그 성과, 추상을 순수 형식적 본질이나 초월적 도상이 아닌 일종의 수행적 실천으로 해석하여, 형태(상)를 또한 작동하는 형태로 끊임없이 변용, 확장해 나간 홍승혜의 독자성, 전통 서화의 필획을 공간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기존 조각의 언어와 어법을 갱신한 신옥주의 자생성은 그야말로 주목에 값한다. 이 성취는 작업의 갈피마다 새겨진 살아있는 감각들로 격동을 함께 했던 사람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 기억이 저장된 장소를 살아낼 사람에게 특정한 제안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굳어 버린 혼돈의 일상에 치유의 방향을 지시하거나, 유토피아적 가상의 형태를 공동의 현장에 스며들게 하거나, 혹은 비워져 열리는 몸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여기가 로도스다"라는 충언을 따른, 이들 작업은 각자의 품새로 이곳에 안착해 있다. ■ 이영욱

Vol.20230511h | 역동 · 변주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