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골목으로 들어온 미술_견見-물物-생生-심心

오픈스페이스 블록스 기획 릴레이 개인展   2023_0502 ▶ 2023_091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송하나 『견見-물物-생生-심心 '보다'』 김태헌 『 견見-물物-생生-심心 '事物에 이끌리다'』 이원호 『 견見-물物-생生-심心 '서식지'』

기획 / 오픈스페이스 블록스 지원 / 성남문화재단 성남문화예술인 창작지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오픈스페이스 블록스 openspace BLOCK'S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남문로43번길 13-2 Tel. +82.(0)10.2247.4346 openspaceblocks.com blog.naver.com/openspaceblocks4144

뵌 몬에 홀린 마음들 ● 사람은 먼저 마음을 내어 무엇을 짓고 일으키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은 저절로 짓고 일으킨 것이 스스로 마음을 낼 뿐이다. 먼저 마음을 낸 자리에는 사람의 '싶뜻(慾心)'이 선다.1) '싶뜻'이 예술을 부린다. 하늘은 늘 그저 있는 그대로 움직이니 '싶뜻' 따위를 따로 갖지 않는다. 굳이 말하면 스스로 움직이는 저절로가 '싶뜻'이리라. ● 하늘을 닮은 것이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하다. 그렇다!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그래서 하늘을 두고 빈 것으로 가득 가득이니 쓰고 또 써도 다 채우지 못한다고 했다. '없(無)'에서 '있(有)'이 나고 또 나고 나도 '없'은 줄어들지 않는다고도 했다. '없'은 끝이 없는 없이요, 바닥없는 바닥이며, 바깥 없는 여기이지 않은가. '있'이 결국 '없'으로 돌아가니 '있'은 어디에 있고 '없'은 또 어디에 있나. '있없(有無)'는 하나로 솟아 돌고 도는 으뜸 하나일 뿐이다. 그 하나는 '있없'에 앞서 있으니 또한 비어있다. 그래서 하늘땅 사이는 텅 빈 빈탕으로 가득 가득한 풀무 속 같다고 한 것이다. ● 오픈스페이스 블록스에서 풀무 속 같은 작가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꿍꿍하는 마음을 냈고, 짓고 일으키는 마음을 냈고, 불현 듯 좋아지는 마음을 냈다. 그 마음을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한다. 그런데 예술을 그 마음으로만 보아야 할까?

#1. 본 몬에 난 마음(見物生心) ● '견물생심'은 대체로 "몬을 보니 마음이 난다."라고 풀지만, 이 글을 쓰는 글쓴이는 "뵌 몬에 난 마음."으로 푼다. 말이 나온 곳(出處)을 알 수 없으니 글쓴이는 깨달음에 빗대었다.2) "몬을 보니 마음이 난다"로 풀면 '몬'에 '싶뜻(慾心)'이 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마음의 주인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뵌 몬에 난 마음."으로 풀면 그 뜻이 다르다. 마음의 주인이 '몬'이지 않은가! 사람이 나서서 보는 것을 '시(視)'라 하고, 그저 저절로 나타나 보이는 것은 '견(見)'이라 한다. 그러니 견물생심은 저절로 뵈는 몬에 난 마음이라고 해야 옳다. ● 견물생심의 '물(物)'을 한자말 물건(物件)으로 바꾸거나 만물(萬物)로 푸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한자를 다른 한자로 바꾸는 것은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견물건생심'이 아니고 '견만물생심'도 아닌 견물생심은 '물(物)'을 그저 '몬'으로 보라는 이야기다. '물(物)'을 '몬'으로 푼 까닭은 그것이 우리말로 '몬지'(맞춤법은 '먼지')이기 때문이다. '물'은 물건이나 만물을 이루는 본디 바탕으로서의 '몬'이요, '티(티끌)'이다. 그리고 이 '몬'은 우리말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말이기도 하다. ● 민세 안재홍(1891~1965)은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글에서3) "진리는 영원히 묵었고 또 영원히 새롭다. 오인(吾人)은 이제 새로운 사회과학의 칼로, 고조선 문화의 진망(陳莽)을 헤치고, 구원(久遠)한 생명을 담고 있는 선민(先民) 창성(創成)의 생활이념을 뒤져내어, 써 신시대(新時代) 건조(建造)의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 조선의 선민이 맨 처음에 발견한 세계관적 철리(哲理)는 '비'요, '씨'요, '몬'의 그것이었다."라면서 "'비'는 허공(虛空)이니, 유주만유(宇宙萬有)가 허공에서 생성하고 출발한 것임을 규정함"이라 했고, "'씨'는 종(種)이니 즉 종자(種子)이다. 허공이 세계의 외연이면, 종자는 그 중핵(中核)이요 섬위(纖緯)"라 했으며, '몬'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말했다. ● "'몬'은 물질(物質)을 이름이라, 세계 생성의 호대(浩大)한 물질 방면은 '몬'으로써 일컬었나니, 집결(集結)이 '모음' 혹 '모듬'이요, 물질의 부유방산(浮遊放散)되는 잔재는 '몬지'이다[지는 잔재(殘滓)요, 분(糞)]." ● 민세는 '비', '씨', '몬'이라는 우리말에서 철학의 첫 뿌리를 찾았다. 여기에서 살필 수 있듯이 '몬'은 '몬지'요 '찌(殘滓·糞)'이다.4) 그 뜻은 다른 말로 '티끌'라는 이야기다. '몬'은 온갖 것들의 '바탕(質)'인 것이다. 자 그런데 "뵌 몬에 난 마음."이라 했으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뵌(見)'은 '눈(◉→目)'에 '사람(儿)'이 더해진 글꼴이다. 무엇인가 저절로 '나타나고 드러났다'는 뜻이다. 누군가 보고 싶어 보는 게 아니라 그저 눈앞에 나타났기에 뵈는 것이다.5) 그 저절로 뵈는 무엇을 '몬'이라 하고. 그렇게 드러나 뵈는 '몬'에 난 '마음'이니 그것은 꿍꿍(想像)하는 '몬'이요, 짓고 일으키는 '몬'이요, 불현듯 있어 좋아지는 '몬'인 것이다. '몬'에 난 '마음'이니 그 마음은 아마도 첫 마음으로 '참마음(眞心)'일 것이다. ● '비'에서 '씨'(비→씨), '씨'에서 '몬'(씨→몬), '몬'에서 '잘몬(萬物)'(몬→잘몬), '잘몬'에서 다시 '비'로 돌아갈 때(잘몬→비), 그 돌아가는 '돎(徼)'은 자연이 그러하듯 저절로 내고 낳고 되고 이루는 '산알'의 뜻으로서 '생의(生意)'6)이고 생생화화(生生化化)일 것이다. 그러니 견물생심을 도둑놈 심보로 몰아가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견물생심을 무언가 가지고 싶은 '싶뜻'으로만 푸는 것은 '사람마음'을 주인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싶뜻'이 일어나는 자리는 사람마음이다. "몬을 보니 마음이 난다."고 푸는 그 마음 난 자리에 사람이 있다. ● 하지만 '몬에 난 마음'이라 했을 때는 '몬' 스스로 짓고 일으킨 '마음'이니 사람의 '싶뜻'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래서 노자(老子) 늙은이는7) "늘 하고잡 없에 그 야묾이 뵈고(常無欲以觀其妙), 늘 하고잡 있어 그 돌아감이 뵈와라(常有欲以觀其徼)."라고 했다.8) 무얼 하고 싶어 하는 '하고잡'이 바로 '싶뜻'이다. 그 '하고잡'이 없는 자리에 깊게 야물어가는 신비로움이 있다. 그게 아니면 벌써 '싶뜻' 돌아감이 뵐뿐이다. ● 2023년 오픈스페이스 블록스에 펼쳐놓은 송하나(5월), 김태헌(7월), 이원호(8월)의 작품들은 사람마음과 '몬'이 서로 느껴 응하면서 일으킨 '홀림'이었다. 그들의 예술은 술수 부리는 마음과 몬의 교감이요, 감응이요 감흥이란 이야기다. 송하나의 온갖 '꽃무늬' 작품은 무늬마음에 홀린 한 예술가의 '짓됨(造化)'이었다. 김태헌의 작품들도 그렇다. 온갖 사물들이 나타내 보여주는 마음에 그의 마음도 미혹 당한 것이다. 사물들이 낸 마음은 그 어떠한 '싶뜻'을 갖지 않았다. 그저 김태헌 스스로 '싶뜻'을 일으켰을 따름이다. 이원호의 소리는 또 어떤가. 그는 홀로 소리마음이 보내는 소용돌이에 휩싸여 휘몰아쳤다. 그의 마음이 소리에 이끌린 것이다.

송하나_꽃(주민 체험을 위한 협업 작업)_이미지 스티커_가변크기_2023
송하나_꽃(주민 체험을 위한 협업 작업)_이미지 스티커_가변크기_2023

#2. 송하나, 무늬마음에 홀린 예술가 ● 꽃무늬의 실체는 살코기다. 이 명확한 하나의 사실은 그의 작품을 풀어가는 작은 단서이다. 살코기를 홍보하는 광고지는 고기의 신선도를 좀 더 과장하기 위해 '핏빛'으로 선연한 사진을 이용한다. 시뻘겋게 보일수록 사람들은 고기 살 마음을 내는 것일까? 왜 광고주는 뻘건 고깃살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일까? 광고지 속 시뻘건 살코기 사진은 '견물생심'의 실체이리라. '사람들이여 나를 보고 돈을 내라!'를 부르짖고 있으므로. 그는 광고지에서 살코기를 오려 붙이고 그 옆으로 무수한 나뭇잎을 그려 넣었다. 그저 그렇게 나뭇잎을 그려 넣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꽃이요 꽃밭이요 꽃의 난장으로 알고 느낀다. 얼핏 보았을 때 느끼는 이 '홀림'이야말로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미학의 유쾌한 장치일 것이다. 그러나 '뵌 몬에 난 마음'을 가로챈 사람들이 '몬을 보니 마음 낸다'고 그렇게 마음 낸 자리에서 그들이 맞닥뜨리는 것은 '살코기'라는 어이없음이다. ● 어이없어 웃는 웃음, 혹은 예술이라는 이 술수 부림의 미학에서 관객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가 적어놓은 노트에는 "맞아. 남들은 꽃길만 걷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사실 들여다보면 꽃길만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한 어느 아주머니의 말이 있다. 이 말이 한 열쇠다. 내가 이 말에서 주목한 것은 '아무도 없더라.'이다. '몬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갈마들 때 그 자리는 '없(無)'에 이른다는 것. 허무주의(nihilism)가 아니라, 산알이 싱싱하게 움직이는 '빈탕(太虛)'이랄까! ● 동아시아의 앞사람(先民)들은 텅 비어 있는 '빈탕'이야말로 이 우주를 살아있게 하는 실체라고 보았다. 바로 그것이 민세가 이야기한 '비(虛空)'이다. 숨(氣)의 바탕을 이루는 몸이기에 태허(太虛)라 하고,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으되 그 빔으로 가득가득한 것이기에 허무(虛無)라 하고, 그 어떤 꼴과 빛도 없으되 그 모든 '꼴빛(形形色色)'을 다 아우르기에 허공(虛空)이라 하는 그 '비' 말이다. ● '아니, 무슨 관객이 그런 걸 느낀단 말이야?'하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깨달음이란 그저 그렇게 느껴져 오는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깨달음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터진다. 사람들이 그걸 잘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고 하지 않은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신 물은 달콤하고 시원했으나, 눈 떠 보니 그것은 해골 물이었다! 그에게 견물생심은 없었다. 물은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 ● 송하나는 무늬마음에 홀린 예술가다. 무늬가 짓고 일으키는 마음에 홀려 그 또한 마음을 낸 것이 그의 그림들이다. 저 마음이 이리로 와서 내고, 이 마음이 저리로 가서 내는 '번갈아 감'이 그의 작품을 느끼는 방식이다. 저 마음 이 마음, 서로가 하나로 번갈아 가는 '한 꼴 차림'에서 살코기는 꽃무늬로 살아올라 활활 거리리라. ● 알아차리면, 그것이 본래 광고지에 있던 살코기더라도 이제 꽃으로 피어난 무늬들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무수한 이 모든 꽃무늬야 말로 살코기가 짓고 일으킨 예술의 술수 부림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 아름다움에 비수가 있구나!'하는 마음도 시나브로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송하나_잎_종이에 연필, 유채_61×45cm_2023 송하나_아는 숲_종이에 출력 이미지, 수채_70×107cm_2019
송하나_꽃_종이에 전단지, 잡지, 유채_39×49cm×16_2018

#3. 김태헌, 뵌 몬에 마음을 낸 예술가 ● 뵌 '몬'에 마음을 낸 이는 김태헌이다. 바꾸어 말하면 '몬'이 낸 마음에 그의 마음이 미혹되었다고 해야 하리라. 두 마음이 한마음으로 감응한 자리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무언가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는 건 예술가의 즐거움"이라며 '이끌림'을 단서로 내놓는다. 그런 뒤 그는 이끌림을 "붙잡고 질문을 던지고, 낯설게 하고, 재해석하고, 즐"겼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낯익은 낯섬(uncanny)'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태헌_견見-물物-생生-심心 ‘事物에 이끌리다’展_오픈스페이스 블록스_2023
김태헌_사물 그리기-주차방해물 외_캔버스에 유채_가변설치_2023

이끌리는 것은 '매혹(魅惑)'에 가깝다. 매혹은 '도깨비 홀림'이란 뜻이다. 그가 수집한 '몬'이 낸 마음은 소리 없는 '멋짓'이다.9) 그 '멋짓'은 오래 묵어 낡은 멋이요, 깊게 배어서 움쑥 든 멋이요, 잡동사니로 굴러온 손마음 멋이요, 뜬금없이 붙어서 싱싱 오르는 멋이요, 버려진 것들에서 발견하는 넝마주이 멋이요, 철지난 아름다움에 달라붙은 풋풋한 멋이요, 일상에서 얻어걸리듯 마주하는 삶의 멋이다. ● 그는 '몬'이 내는 '멋'에 이끌려 그것들을 작업실로 옮긴다. 옮긴 뒤에 하는 일이란 그저 '몬'의 '멋짓'을 다시 꾸밀 때까지 천천히 고요히 마음을 살피는 일이다. 이 마음에 저 마음을, 아니 저 마음에 이 마음을. 처음 마주할 때의 마음은 그저 이끌림이었을 뿐 그들이 새로 '멋짓'을 꾸리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김태헌_「도마 테이블」 등_‘事物에 이끌리다’展_오픈스페이스 블록스_2023

「도마 테이블」은 수산시장에서 닳고 닳은 도마였다. 그의 작업과정을 아는 이가 보내준 이 도마는 그의 작업실로 와서 곧바로 작품이 된 게 아니었다. 생선기름에 찌든 도마를 그는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어 잘 마르게 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도마를 볼 수 있었다. 도마가 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도마를 보고 어떤 마음을 냈을까? ● 숱한 칼질로 만신창이가 된 도마는 어딘가에서 불쏘시개나 어쩌면 쓰레기 따위로 버려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와 마주친 거의 모든 '몬'의 상황은 그런 것들이다. 그가 주워 온 '빠이롯뜨'(한국파이롯트를 그렇게 부른다)의 '낡은 의자'도 실제로는 버려진 것이다. 쓸모를 잃은 물건은 사물(事物)이 아니다. 그저 '몬'에 불과하다. 아버지 집에서 가져 온 '수석(水石)'도 마찬가지다. 버려진 것들은 사물로서의 '경치(景致)'를 상실한다. 그는 상실한 자리에서 마음을 낸다. ● '낡은 의자'에는 '꽃수'와 '금박액자'로 마음을 냈고, '도마'는 칼의 흔적을 지우고 곰팡이를 벗겨낸 뒤에 어여쁘게 갈고 갈아서 '테이블'로 마음을 냈고, '수석'에는 영롱한 유리구슬로 마음을 냈고, 알몸 피규어는 조개껍데기에 올려 '비너스'로 마음을 냈고, 녹슨 방범창에는 이것저것 작은 인형들을 올려 마음을 냈다. 그는 이 작품에 「반짝이는 15개의 별-금광동을 기억하며」라 이름 붙였다. 그러면서 "작업은 방범창 안에서 자신만의 별을 만들며 살아간 사람들과 재개발로 사라진 금광동을 상상하며 만들었다. 작업을 끝내고 다시 보니 방범창 그물에 걸린 세상 이야기 같다."고 뒷말을 덧붙였다.

김태헌_뜬금없이 구슬산_수석, 구슬_가변설치_2023

그런데 나는 "방범창 그물에 걸린 세상 이야기"라는 말이 꼭 그 작품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제 삶을 다해 사물로서의 기능이 사라진 '몬'에 술수 부림의 예술을 불어넣은 까닭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를 두고 '뵌 몬에 마음을 낸 예술가'라고 하는 것이다.

#4. 이원호, 소리마음에 휩싸인 예술가 ● 블록스 벽에 걸린 스피커에 귀를 맞대고 소리를 들었다. 내 귀는 그 소리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는 소리가 난 장소를 들려주었으나 귀는 그 장소를 그려내지 못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귀를 바싹 붙여 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에 길이 있을 것이므로 그 길에서 풍경이 그려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 뚜벅뚜벅 걸어가고 오는 발자국소리, 어딘가에서 굴러가고 오는 사물의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빗소리, 지지직거리며 흘러가는 전기소리, 벌레가 꿈틀거리는 소리… 알아차리기 힘든 어떤 소리들이 저 너머에서 건너왔다. 나는 건너온 소리들에서 그 소리의 마음을 듣고 싶었다. 그래야 그가 낸 마음도 알 수 있었으므로.

이원호_서식지_8개의 스피커 유닛, 와이어, 8채널 사운드_가변설치_2023
이원호_서식지_8개의 스피커 유닛, 와이어, 8채널 사운드_가변설치_2023

전시를 보고 작가와 만나고 긴 대화를 나누었어도 내게는 그 소리들의 실체가 잘 잡히지 않았다.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되 잘 보이지 않았고, 소리가 보이는 듯했으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며, 소리를 잡았다고 느꼈으나 손에 쥘 수 없는 소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들은 이 현실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스며들었다. 이 전시의 기획자는 "반복적인 현장답사와 관찰의 과정에서 작가의 허밍(humming)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유행가는 마치 시적 중얼거림이나 추상적인 음악을 듣는 것 같은 특유의 성조로 사물화된 인간의 존재를 환기한다."고 했는데 너무나 적확한 이야기였다. ● 소리는 삶이 현실을 너무도 뚜렷하게 환기시키는 '현존(現存)'의 실체였다. 소리가 낸 마음은 어떤 풍경도 어떤 역사도 어떤 사건도 아니었으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들이 한 소용돌이로 돌아가는 매우 구체적인 형상이었다. 나누어지지 않는 풍경의 역사가 있었고, 역사적 사건이 있었으며, 여전히 우리 주변에 남아서 겉도는 그 무엇이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그렇게 꼴 지어서 따져 물을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는 현존이었다. ● 그는 소리가 낸 마음을 받아서 '긔림'를 짓고 일으켰다.10) 짓고 일으키는 마음(作心)에 그리워 그리는 그림이 있었다. 소리가 들려주는 그림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소리가 낸 마음에서 그의 마음을 보았다. 그는, 아니 그 자신은 소리들에 휩싸인 소용돌이였다. 그는 스스로 소용돌이를 일으켜 그림을 그렸다. 내 귀는 그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의 고요한 자리에 이르렀다.

이원호 _견見-물物-생生-심心 ‘서식지’展_오픈스페이스 블록스_2023
이원호 _견見-물物-생生-심心 ‘서식지’展_오픈스페이스 블록스_2023

세 작가의 전시는 고요한 자리에서 비롯하는 '몬'의 무늬요, 결이요, 소리였다. 그 무늬와 결과 소리가 '몬'의 마음이었다. 예술가들은 그 마음에 잇대어 예술을 지었다. 그리고 블록스는 그런 두 마음이 하나로 휘돌아가는 또 다른 소용돌이였다. 나는 그 소용돌이치는 블록스에서 예술의 '참꼴(眞身)'을 엿보았다. ■ 김종길

* 각주 1) 욕심(慾心)의 우리말로 '싶뜻'을 썼다. 가지고 싶고, 하고 싶어 하는 '싶음'에 '뜻'을 더한 것이다. 다석 류영모가 그리 바꾸어 썼다. 욕망의 우리말은 '하고잡'이다. 2) 어떤 이는 고사성어(故事成語)라 하고, 어떤 이는 불교에 있는 말이라고 하나 곧바르지 않다. 3)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편, 『민세안재홍선집2』(지식산업사, 1983), 29~31쪽에서 가져옴. 우리가 지금도 나날이 쓰고 있는 한자는 그대로 두고 잘 쓰지 않는 한자만 괄호에 넣었다. 4) 어른들이 '찌' 혹은 '찌찌'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부스러기 '찌꺼기'이거나 '똥'이기 때문이다. 5) 내가 보는 것을 말할 때는 '시(視)'를 쓴다.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생의(생의)'는 "'생(生)을 지향하는 우주적인 의지'라는 뜻으로 성리학의 본체론에서 쓰이는 용어."라고 밝히고 있다. '생의'를 철학개념으로 사유한 이는 임성주이다. 그는 "우주의 본체는 이(理)와 기(氣) 두 가지가 아니라, 오직 생의(生意)에 가득 찬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기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기는 종래의 성리학에서 이해해 온 잡다한 물질적 질료가 아니라 순수한 생의의 기이므로 마음과 본성을 둘로 나눌 필요가 없으며(心性一致), 나아가 이와 기도 두 가지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理氣同實)." 7) 노자(老子)는 사람이름이 아니다. 그저 '늙은이'라는 말이다. '늙은이'는 '늘그이' 곧 '늘 그이'라는 뜻이다. 8) 다석 류영모의 노자 늙은이 풀이에서 가져왔다. 본디 글에는 하늘아를 쓰고 입술소리를 살려서 "늘 ᄒᆞ고ᄌᆞᆸ 없에 그 야믊이 뵈고, 늘 ᄒᆞ고ᄌᆞᆸ 있어 그 도라감이 뵈와라."라고 되어 있다. 『다석일지(제4권)』(홍익재, 1990)을 살필 것. 9) '멋짓'은 디자인을 달리 부르는 말로 날개 안상수가 처음 썼다. 10) 우리 옛말 '긔림'은 그리고 그리운 그림이라는 뜻이다.

Vol.20230507c | 견見-물物-생生-심心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