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퍼포먼스 / 2023_0415_토요일_04:30pm
주최 / (주)마인드디자인 주관 / (사)글로벌평화예술문화재단_(주)마인드그라운드 협력 / 아시아명상협회 후원 / 서울특별시
관람시간 / 11:00am~06:00pm
누하동259 Nuhadong259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27-4 Tel. 070.4916.9095
마인드디자인이 준비한 서울시 공공한옥 누하동259의 두 번째 전시가 열립니다. 서해영, 정나영 두 작가의 『우리가 왜 친해졌을까(Close and Closer)』는 세상의 모든 나와 세상의 모든 너, 우리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선이 맞닿는 순간의 짜릿함, 스치는 손끝의 촉촉함, 둘러싼 공기의 포근함. 너와 나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진동을 두 작가는 주목합니다. 나는 나이기도 하지만 너이고, 너는 너이기도하지만 나입니다. 여자이기도 하지만 남자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지만 식물이기도 하고, 바위나 흙이기도 합니다. 꽃잎 흩날리는 완연한 봄날, 서해영, 정나영 작가의 작품들 사이에서 하나의 떨림이 되어보는
부서짐으로 붙이는 것들: 서해영-정나영 2인전 『우리가 왜 친해졌을까』에 대하여 ● 꽃과 흙의 향기가 반가운 건 꽃이 꽃이기 때문일까, 내가 흙이 아니기 때문일까. ● 꽃샘추위 중 친구라는 존재는 그 친구와 함께 마시는 따듯한 차와도 같다. 꽃샘추위의 첫 월요일 아침을 기억하는가, 그 출근길을 기억하는가: '아, 춥다. 아, 토요일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 카페에 가야지. 아, 카페 주인님께 내가 좋아하는 그 노래를 틀어달라고 해야지. 아, 내가 좋아하는 그 친구와 그 음료, 공간, 그리고 음악을 함께 즐겨야지.' 눈을 뜬다. 토요일 아침이다. 오늘도 춥다. 오늘도 설렘의 난로에 불을 붙인다. ● 『우리가 왜 친해졌을까』의 작품들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서해영의 정나영을 2017년 독일 베를린의 제카/우(ZK/U) 레지던시에서 만나기 전의 작업, 그 이후의 작업, 정나영의 서해영을 만나기 전의 작업, 그리고 그 이후의 작업. 이들은 한국하고 약 8,0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친구가 되었다. 왜일까, 태어나고 자란 곳이 한국이기에? 그렇다면 모든 한국 사람이 서로 친구인가? 왜일까, 한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났기 때문에? 그렇다면 한국에서 독일보다 약 10,000 킬로미터 더 떨어진 아르헨티나에서 만났다면 더 친해졌을까? 이들은 왜 친해졌을까.
모든 예술은 일반적으로 그 작업의 '결과'를, 즉 최종 작품을 감상자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게 된다. 서해영의 조각 전시에서 관객이 보는 건 조각이지 작업으로 인해 재료의 가루와 땀이 쌓인 작업실 바닥이 아니다. 작가가 작업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탐독해야 했던 도서들, 수강해야 했던 교과목들, 그리고 작업실의 월세 계약서에 적힌 금액을 벌기 위해 치뤄온 노동 또한 전시장에서 관객이 보거나 상상하는 일 역시 드물 것이다. 그렇기에 그 과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하여 작품의 위치, 즉 감상자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는 일은 그 가치에 대한 통찰이 가능한 예술가에게 유의미한 도전이 될 것이다.
한편 서해영의 이러한 '과정 조각'은 '과정에 대한 설명'과 동치가 아니다. 작가의 작업에 대한 노트를 읽었다고 하여 실제 작품을 감상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전시를 관람하지 않은 채 작가가 자기 작업을 설명하는 아티스트 토크를 관람하는 것은 작품 자체의 감상과 전혀 다른 실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서해영이 조각을 통해 과정을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조각이며, 이에 과정과 결과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고, 창작이기에 해체를 통한 소멸을 넘어 해체를 통한 생성이다. 따라서 감상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영감을 얻게 된다. 첫째는 당연히 작업 자체가 주는 영감이다. 둘째, '과정과 결과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인류의 가장 오랜 논제 가운데 하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한 영감이다. 즉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이분법적 담론의 역사가 그 둘의 일치라는 탈-이분법적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감상이다. 셋째, 작가가 과정 자체를 재현함으로써 작가와 감상자 모두 예술적 창작이라는 실천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소들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통찰을 위한 영감이 생성된다. 가령 「산에서 조각하기」 연작은 작업의 본질적인 원소들인 산이라는 자연, 중력이라는 자연의 힘, 그리고 인간의 생존이라는 자연적 현상까지의 재현이고, 「3」은 세 명의 인간을 재현한 세 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연작이 아니라 인간의 성별, 인종, 그리고 연령 등 우리가 개인의 정체성을 전형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요소들을 소거하는 사유의 과정을 재현하여 인간이라는 존재의, 그리고 그들의 모임이자 관계인 사회라는 존재의 보편적 본질에 대한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 개의 작품이다.
행위의 재현을 실천하는 것은 정나영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해영하고 차이가 있다면, 서해영은 과정이라는 행위를 조각, 사진, 설치 등의 부동적 상징물로 재현하는 반면 정나영의 여러 작업에서는 부동적 상징물과 함께 행위의 동적 상징물이, 즉 '행위를 상징하는 행위'가 공존한다. 이에 정나영의 퍼포먼스가 포함된 작품들을 '작품 + 작품과 관련된 퍼포먼스'의 구조로 감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서로 다른 (흰색을 포함하여) 네 가지 색상의 사각형들로 구성된 작품 + 검은색 테두리선들'의 구조로 감상하는 게 위험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혹자는 작품의 부동적 요소들하고는 달리 행위적 요소는 행위가 끝난 다음에 소멸하므로 작품의 일부로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위가 끝난다고 하여 그 시각성까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점토를 만지는 손동작은 지문을 남기고, 장갑을 끼고 만진다 하여도 만짐이라는 행위 자체 때문에 만지기 전하고는 다른 형태를 남긴다. 이는 사람과 사물 사이의 행위적 관계 뿐만 사물과 사물 사이의 행위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종이에 점토가 묻기 위해서는 '묻힘'이라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바람이라는 자연의 행위에 날린 점토가 종이에 묻을 수 있고, 바람에 날린 종이가 점토에 붙을 수 있으며, 정나영이 점토를 종이에 묻힐 수 있다. 하지만 행위가 없는 점토 묻은 종이는 존재할 없다. 따라서 점토가 묻은 종이를 전시한다는 것은 행위가 끝난 이후에도 그 행위를 전시하는 것이다. 정나영의 행위 전시는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움직임과 멈춤을, 행위와 그 결과를 창의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영감을 제공한다. 「진달래 꽃」에서 손이 만진 흙은 꽃이 되고, 발이 만진 꽃은 흙이 된다: 흙의 모든 단계의 변화에는 행위가 있고, 각 과정의 결과는 행위의 증거를 담고 있다. 「관계」에서 손에 흙을 묻히는 행위를 실천한 감상자에게 시각 예술은 촉각 예술이 되고, 정나영에게 촉각 예술은 시각 예술이 된다: 감상자는 정나영이 되고, 정나영은 감상자가 되며, 이에 감상자-정나영 관계는 감상자-감상자 관계가 되는 동시에 정나영-정나영 관계가 되기도 한다. 결과도 행위가 된다, 멈춤도 움직임이 된다.
'그렇다면 어차피 모든 작품은 창작이라는 행위의 결과이므로 모든 전시는 행위 또한 전시하는 게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데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위의 결과만 감상하고 행위 자체에 대한 감상은 배제되는 실천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해영하고 정나영과 같은 예술가가 있기 때문에 정신의 흙 속에 묻혀 있는 상태로만 존재할 수도 있었던 감상의 씨앗이 묘목이 되고 결국 꽃필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성찰의 첫 문장인 "꽃과 흙의 향기가 반가운 건 꽃이 꽃이기 때문일까, 내가 흙이 아니기 때문일까" 또한 그렇게 하여 개화했다: 꽃의 향기는 꽃의 생성의 결과이고, 그 생성은 흙의 영양분을 먹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영양이 가득한 흙도 그 특유의 향기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결국 흙마저 다양한 미생물들의 생태계 형성이라는 행위의 결과인 것이지 않은가. ● 예술 작품이 아닌 수많은 것들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될 것이고, 그중 우정이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좋아하는 음료를 함께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그 순간 자체를 상당히 즐기는 반면 그 순간이 올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한 사유는 그만큼 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가끔 친구하고 찍은 옛날 사진을 오랜만에 보면 카페에서의 즐거움이 줄 수 없는 온기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닫는다: 내가 이 친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 친구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음료를 좋아하기 때문이었음을, 그걸 확인하고 그 이후에 공통의 취향을 함께 키워 나간 과정이 있었기에 친구가 어느 추운 월요일 아침에 문득 생각난 것이지 아무런 인과 없이 그런 게 아니었음을. 이런 맥락에서 두 작가의 만남과 그 이후 싹트고 자란 친분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면, 다양한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레지던시에서 행위와 결과의 공존적 재현을 시도하는 의지를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다는 게 이 전시를 통해 두 작가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유의미한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그 구체적 실천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도, 즉 꽃은 흙이 아니다 하여도, 둘 다 향기와 그 만듦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 안재우
Vol.20230415d | 우리가 왜 친해졌을까 Close and Closer-서해영_정나영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