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은 일상에서 발견한 사물을 통한 사유에서 출발한다, 출발의 시작점인 비닐봉지는 평범한 일상 속 물건보다 더 보이지 않는 사물이다. 그런 비닐봉지가 어느 날 기존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일종의 해석적 경험으로 나의 삶 속으로 들어와 내 삶과 존재의 은유적 투사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단순히 주관적 은유로 생각하기보다 그 자체로서의 존재, 하나의 고유하고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사고로 진전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닐봉지라는 사물에 대한 접근은 사물 본성에 대하여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H3_ 아크릴 패널에 유채_91×116.8cm_2016~7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H4_ 아크릴 패널에 유채_116.8×91cm_2016~7

내 작업의 근저인 '사유'란 단순히 가시적으로 사물의 형상과 껍질을 보는 차원을 넘어 타자의 입장 즉, 사물의 깊이 그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사물 너머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할 때 비로소 그 본질과 마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여긴다. 사물 너머의 보이지 않는 의미는 사물의 층위를 보다 깊이 있게 바라볼 때 찾을 수 있다. ● 한 편, 작품이 외형적으로 리얼리즘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으로 분류되지만 일차적으로 보이는 외형을 비집고 들어가다 보면 대부분의 공간에서 의외의 추상성이 눈에 들어오는 양상을 보인다. 그 안에 내재 된 추상적 요소와 가시성의 뒤편에 존재하는 내면 혹은 사유적 측면의 매력은 비닐 작업의 매력 중 하나이다. ● 내가 리얼리즘 회화로 정의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다음과 같다. 전반적인 분위기나 형태를 유지해나가기 위해 페인팅 이전에 다각도로 촬영을 하지만 막상 실제 페인팅에 들어가면 페인팅을 하는 화면 안에서 다시 화면을 조율을 해나가며 완성 시킨다. 그 이유는 작품 안에서 내가 원하는 빛과 공간을 좀 더 내포하거나 덜어내며 자유롭게 작품을 이끌어가기 위함이다. 여기서 위에 언급한 내재 되어 있는 추상적 요소란 캔버스 안에서 조율해 나갈 수 있는 비닐의 주름이며 그 사이의 공간이다. 주름은 시간의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요소이며 흔적의 반복이기도 하다. 작품의 공간 내에서 나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그려지기도 하는 주름 즉, 흔적들은 작업을 하는 동안 대상을 보다 깊은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가고픈 설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V17_ 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4~5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V16_ 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4~5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V5_ 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3~4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V3_ 캔버스에 유채_182×116.8cm_2013~4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V17_ 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4~5

외형의 형태는 구상적(리얼리즘)이지만 내가 지향하는 부분은 표상 너머이며, 단순한 리얼리즘적 재현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이유는 관객에게 형태적으로 친숙하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표현 방식에 나의 목적이 있지 않다. 때문에 나의 작업은 극사실주의 작업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관객에게 친숙한 사물이 감성적으로 낯선 것으로 다가와 평소 간과하며 살았던 그 너머의 어떤 것을 발견하고 잠시 머물러주길 원한다. ● 만약, 해를 거듭해 작업을 해나가며 리얼리즘적 표현보다 더 좋은 표현 방법을 찾게 된다면 나는 그 표현 방법을 새롭게 연구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나의 창작활동에 있어 '표상 너머'라는 주제는 내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탐구해가고 싶은 회화의 중심 주제임은 변함이 없다. 그런 이유로 작품의 영어 제목은 'Beyond what you see' 이고, 한글 제목은 '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이다. ● 나의 작업의 스타일은 현재 '비닐로 만들어진 사물'과 '비닐봉지' 자체를 그리는 두 가지 타입이다.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V12_캔버스에 유채_72×116.8cm_2014~5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V13_캔버스에 유채_72×116.8cm_2014~5

장호정_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Beyond What you see-V63_캔버스에 유채_65.1×53cm_2023

첫째, '비닐로 만들어진 사물'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선택한 사물을 비닐로 본을 뜬 후, 사진으로 촬영하고, 회화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을 비닐로 촘촘하게 감싼 후, 다시 조심스레 벗겨내고 사물을 감쌌던 원래의 모양을 복원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일상의 사물은 기존의 외피를 벗고, 전혀 다른 외피를 뒤집어쓴다. 이를 통해 사물은 원래의 기능과 개념, 물질성 등을 벗어나게 된다. 이때 바슐라르의 말처럼 관객이 일상적인 시선을 거두고 사물 자체에 대해 사유하게 되리라 기대한다. 어쩌면 사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바꿀 때 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작업은 사물의 외피를 벗겨냄으로써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과 동시에 사물은 외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물이 표상너머로 성장하기 위해 겪는 탈피의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 공간에 관한 것일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사물이 존재하는 또 다른 지점을 열어놓고 싶다. ● 일상의 감각과 사유를 너머가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술의 매력이다. 이것이 예술가의 주관적인 관점의 해석이 보다 넓은 의미의 현상학적 입장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아닐까... 둘째, '비닐봉지' 그 자체를 그리는 작업인데 이 작업은 대부분 가벼운 무게의 비닐봉지가 캔버스공간 전체를 압도하는 무게로 위치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닐봉지를 너머 깊이있는 사유의 영역을 노크하길 바란다. 아무런 장식도, 그림자도 없이 바닥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비닐봉지 단독 사물 그 자체로 말이다. 일상에서 눈에 뜨이지 않는 비닐봉지가 나의 캔버스에서는 보석보다 빛이 나는 존재로 격이 있게 자리하길 바란다.

장호정_사물에서 사유로展_아트레온 갤러리_2023

장호정_사물에서 사유로展_아트레온 갤러리_2023

장호정_사물에서 사유로展_아트레온 갤러리_2023

장호정_사물에서 사유로展_아트레온 갤러리_2023

들뢰즈는 "회화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닐봉지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를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비닐봉지는 비닐봉지 이외의 다른 사물과 함께 존재했었음을 주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흔적으로 남긴다. 그것은 흔적의 대상을 숨기고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 대상의 존재를 직접 드러내고 있지도 않다. 단지 흔적으로 주름이 어떤 존재와 더불어 존재했었음 또는 현재 존재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無 이기도 하며 찰나刹那 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無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것 또한 존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 이 지점이 내가 작품에 등장하는 비닐봉지와 비닐로 감쌌던 흔적으로 남은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사물事物에서 사유思惟로' 라는 테마이자 주제를 가지고 작품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이라는 두께가 스며있다. 보이지 않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품은 것이 비닐봉지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단, 여기서의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그것은 Beyond what you see 라 할 수 있다. 표상 너머에 대하여 우리는 쉽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단지 제시, 혹은 암시할 뿐 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동시에 존재한다. ■ 장호정

Vol.20230414b | 장호정展 / JANGHOJUNG / 張淏晸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