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에르메스 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수요일 휴관
아뜰리에 에르메스 Atelier Hermès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대로45길 7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B1 Tel. +82.(0)2.3015.3248 maisondosanpark.hermes.com/ko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프랑스의 원로 화가 크리스티앙 본느프와의 개인전은 그의 특별한 추상 화면이 제시하는 형식적인 실험의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다가온다. 그의 실험은 미술사에서 '회화의 막다른 골목'이라 정의될 수 있었던 지점에서 제안된 새로운 방향성이었기에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당대의 지적인 논의들과 다양한 대안들을 재고하고 함께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작가는 특유의 다공성의 천과 그 위에 겹친 콜라주를 근간으로 회화의 절대명제인 평면성을 극복하고 실제적인 공간의 차원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대안자들처럼 이젤 회화의 포맷을 포기하기 보다는 그 틀을 유지함으로써, 회화의 종말을 무한히 유예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마치 대지 위에 그물망을 설치한 채로 중력을 거슬러 튀어 오르는 공중 곡예를 연상시킨다.
크리스티앙 본느프와는 젊은 시절에 미술사학자이자 미술이론가로 활동했고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는 화가이다. 큐비즘과 구성주의, 근대 건축사 연구자였던 그는 특히 피카소의 콜라주 전문가였는데, 무엇보다도 콜라주 조각을 화면에 부착할 때 사용한 '핀'의 의미를 가장 먼저 주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핀이 회화 표면을 뚫고 들어가는 지점에서 평면의 일체성이 파기되고 대신 평면의 두께가 드러난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캔버스 표면과 콜라주 사이의 틈이 내포한 공간성에도 주목했다. 이후 콜라주는 1974년이후 본느프와가 화가로 전향하면서 활용한 핵심적인 기법이 된다. 이는 회화매체의 독특한 본성이 평면성에 있다고 보는 그린버그식 본질주의 또는 환원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서, 모더니즘 회화가 텅 빈 캔버스라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더니즘 회화의 종착지는 '특수한 사물'이라 불린 미니멀 조각이거나 캔버스의 프레임과 표면을 해체한 쉬포르/쉴파스 그룹의 조각 설치가 되고 말았다. 회화 표면이 분리될 수 없는 평면을 지향할 때, 역설적으로 평면의 존재의미는 사라지고 투박한 물질만이 남게 된 것이다. 본느프와는 건축 재료로서 벽의 균열을 수리하는데 쓰는 탈라탄 거즈나 트레비라(Trevira) 직물처럼 투명에 가깝게 얇고 투과하는 재료를 회화의 표면으로 채택했다. 그것은 기존의 막힌 캔버스 천보다 물질성은 더 희박하면서도 더이상 단일한 평면에 머무르지 않는 다층적인 회화를 제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뒤면으로 물감이 스며들고 빛이 투과하며 회화 표면 너머의 실제 공간까지 투영함으로써 바로크 회화가 일루전으로만 보여주었던 열린 공간을 실제로 포함하게 된다.
그의 여러 작품 시리즈 중 중추 역할을 하는 「바벨」은 이름 자체에서 이미 수많은 것들을 암시한다. 작가의 지적 사유의 세계를 관통하는 후기구조주의를 반영하듯, 그것은 회화의 질서와 단일성, 구조화된 언어적 의미, 통제하는 자로서 화가의 주체에서 한발 벗어나 자유로운 혼돈을 추구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닐면 위에 무채색의 물감을 도포한 후 그 위에 탈라탄 메쉬를 덧대고 그 위에 다시 접착제를 섞은 물감을 더해 말린 후 가장 아래의 비닐면을 떼어내는 작업을 방향을 달리하며 (상하좌우는 물론 앞뒤로) 반복한다. 그 과정의 결과는 작가가 완벽히 통제할 수 없는 지질학적 퇴적물이다. 그 위에 이미 자른다는 행위에서 표면을 파괴한 바 있는 콜라주를 덧대고 자유로운 기호의 드로잉을 더하면 박막의 적층, 가벼움의 두께(aerial depth)라는 고유의 조형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잭슨 폴록의 드리핑에도 견주어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제스처의 중첩은 비선형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라 우리를 신비한 수수께끼의 세계로 이끈다. 그것은 또한 작가의 다이어그램 분석에 의하면 예측할 수 없는 기억의 요구에 따라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 을 다시 복원하듯) 여러 갈래의 새로운 시리즈를 낳는다. 그 가운데 「양면 (Bi-Face)」은 작가의 작업 동선에 관객인 우리도 동참하여 회화의 뒷면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고 「PL (빛의 힘)」은 물감이 묻지 않은 투명한 평면으로 스며들어 온 빛의 효과를 극대화한 듯 강렬한 컬러로 시각적 즐거움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피카소로부터 회화의 분석적인 틀을 전수받았다면 본느프와는 마티스로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한 영감을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티스의 부조 시리즈인 뒷모습 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본느프와는 평생을 마티스에 대한 헌정인 듯, 컬러와 콜라주로 뒷모습을 작업하고 있다. 개인의 정체성이 제거된 뒷모습은 그가 추상으로부터 구상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재들처럼 변형의 잠재성을 함축한 상상의 인물을 구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컴포지션」은 화가로서 본느프와가 누릴 수 있는 시공간적, 지적, 유희적 자유를 극대화한 작업이다. 이젤 회화 이전의 프레스코화로 회귀한 듯, 건축 벽면에 콜라주 조각들을 직접 적용하는 이 작업은 고대의 두루마리나 영화의 필름 릴처럼 시간과 이야기를 원하는 대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컴포지션의 중의적인 뜻처럼 화면의 구성에서부터 글 짓기, 음악의 작곡, 연극의 연출이 동시에 진행되는 듯 여러 장르의 작업이 어우러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도(Ludo)'라고 칭한 중심 모티브들이 기억과 감각의 시퀀스를 형성하며 덧대어져 나가는데 그 움직임은 '유희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보에 다름아니다. ■ 아뜰리에 에르메스
Vol.20230324f | 크리스티앙 본느프와展 / Christian Bonnefoi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