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만남 / 2023_0322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 류신정_서현규_우재오_최수남
협력기획 / 이윤희(미술평론가) 기획 / 봉산문화회관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봉산문화회관 BONGSAN CULTURAL CENTER 대구 중구 봉산문화길 77 2,3층 1~3전시실 Tel. +82.(0)53.661.3500 www.jung.daegu.kr/bongsanart
'다름'과 '차이'를 상징하는 "GAP(갭)"은 프로젝트명 Glassbox Artist Project를 일컫는 명칭이며 봉산문화회관 공모프로그램인 "유리상자-아트스타" 참여작가를 재조명하기 위해 매년 기획되고 있다. 유리상자 출신 작가의 성장과 변화, 그리고 같은 주제 아래 협업과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장소 특정 공간인 유리상자에서 구현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작품세계를 담아보려는 시도이다. 또한 작가발굴에만 그치지 않고 지속적 모니터링으로 공모 출신 작가들의 향후 활동을 점검하고 지원하려는 봉산문화회관의 의지가 함축된 전시로 지역 미술의 발전적 모델이 될 수 있도록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올해로 12번째를 맞이하는 이번 전시에는 외부 협력기획자로 다수의 국공립 미술관의 학예실장을 역임하고 현재 후진양성과 평론가로 활동 중인 이윤희 선생님을 초대하였다. 전시 주제 및 참여작가 선정에 관한 협의를 통해 "유리상자-아트스타"에 소개되었던 86팀 중 류신정, 서현규, 우재오, 최수남 4명의 작가를 최종 선정하고, 주제에 대한 개별 작가들의 개념과 창작품을 자유롭게 선보일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 이윤희 협력기획자는 "우리는 장례식장의 절차화된 과정을 지나 순식간에 존재하던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사라지는 과정을 거친다. 인간이 직접 겪지 않고, 확립된 절차를 통해 정해진 만큼 사유하고 정해진 만큼 슬픔의 시간을 가지며, 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지는 것이 실제 인간 죽음의 과정이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불확실한 죽음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란 주제로 제안하였다. 우리는 가족, 친구 등 중요한 사람의 죽음을 생각할 때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으며, 이런 감정들은 불쾌하고 힘든 일로 되도록 피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이란 끝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진실 또한 어렵고 불편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사회에서는 죽음의 세계가 현실 세계의 삶과 점차 동떨어지게 되면서, 상업화된 장례 내용이나 현대인의 생활상과 흡사한 자동화된 장례 절차를 접하면서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변화된 자세와 관점을 한 번쯤은 반추하게 된다는 점은 협력기획자가 제안한 주제의 배경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 미술에서 죽음은 주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양한 작가들에게서 표현되어왔다. 죽음의 현실적 고통, 삶과 죽음의 경계, 삶의 단순함과 죽음의 예측 불가능함 등 수많은 예술가의 생각과 경험이 담긴 감정들을 인간 내면 어두운 끝에서 직면하며 나타냈다. 예술가들에게 죽음은 인간 삶의 한정성을 상기시키고, 불확실성으로 인해 두려움을 보여주는 영감이기에 슬픔과 절망을 전달하는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종종 새로운 시작과 변화 그리고 희망을 나타내기도 한다. ● 그래서 이번 전시는 죽음의 고통이나 절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함을 인식하고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최근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인해 소중한 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묵도한 우리는 생명의 가치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비록 지역, 문화, 종교, 연령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죽음의 불확실성, 공포, 불평등, 현실성 등을 지켜보며 터부시되던 죽음을 점차 열린 마음으로 나누는 문화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 우리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시각적 이야기를 전시에서 이렇게 나누어 보았다. 1전시실에 보여주는 최수남 작가는 '탄화되는 인간'이란 설치작업에서 삶을 바라보는 긍정적 태도로, 우재오 작가는 미래에서 과거를 소환하는 체험과 죽음에 대한 'Essence' 사진 이미지로 인식론적 치유를, 2전시실의 서현규 작가가 '교량'의 기계적 조형성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잇는 영적 세계를 결부한 시각적 퍼포먼스로, 3전시실의 류신정 작가는 '유유 항성(悠悠 恒星)'이란 설치작업으로 거대한 우주 속 인간의 삶은 극히 일부분이란 점을 인식되도록 표현했다. 이런 작가 개개인의 경험과 사유가 자연의 순환 속에 순응하는 거시적인 삶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빛나는 인간의 자아실현, 사랑과 관계, 도덕적 가치, 문화와 창작활동 등 미시적인 삶의 소중함까지 함께 보여주고자 하였다. ● 이번 전시로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깊은 주제인 죽음에 대해 개방적으로 대면하면서 서로의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우리의 아픈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보고자 한다. 삶과 맞닿아 있는 죽음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기보다는 "삶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죽음에서 그 존재를 의식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라는 헤겔의 말처럼, 궁극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찾고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전달코자 하는 것이다. ■ 조동오 작가로 데뷔 이후 줄곧 죽음에 천착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YBA(Young British Artist)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던 데미안 허스트(Demian Hirst)이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 속에서 그의 작품은 볼 때마다 싫증을 내게 된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 이런 삐딱한 대답을 던져 주고 싶다.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Love of God)」(2007) 역시 나에게 여러모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작품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이 작품은 18세기의 해골을 플래티넘으로 주물을 떠 그 위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촘촘하게 박아 넣은 다음, 원래의 해골에서 누런 치아들을 떼어서 백금/다이아몬드 해골에 붙여놓았다. 이 작품은 단 1초 만에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단 1초 만에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대단한 능력은 있다. 다이아몬드와 해골이라니, 의미는 너무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과거 서양미술사에서 몇 세기에 걸쳐 유행을 탔던 바니타스(Vanitas)의 단골 소재 '해골'과 '보석'을 이용해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더 강력하게 담은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센세이션을 일으켜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다. 해골 이전에는 모든 동물들을 반으로 잘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넣고, 갈라진 생명체의 사이에 관객들이 모여들게 한 바 있다. 어미소와 송아지를 함께 놓기도 하고(제목이 무려 「엄마와 아이」이다), 동물을 가로로 잘랐다 세로로 잘랐다 변화를 주었다. 사람의 사체를 구할 수 있었으면 사람도 그의 포름알데히드 수조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 보존되어있는 생물들의 갈라진 이면을 보고, 당연히 우리를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죽은 채로 전시되는 생명들의 의미에 대해 묻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일종의 정신적 폭력이 아닌가 싶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관객들에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줄 수 있게 하는 소재일 뿐 아닌가, 미술사에서 그러한 이미지들을 쏙쏙 빼서 잘도 값비싼 제품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 하지만 데미안 허스트와 같은 방식으로 삶과 죽음이 다루어져서는 별 새로운 의미를 남기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허스트가 말하는 죽음 앞에서 삶이 허무하다는 것, 생명의 본질 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하는 것은 그냥 되돌이표에 따라 부르는 뱅뱅 도는 노래일 뿐이다. 생명이 태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길은 인간이건 동물이건 풀 한 포기이건 간에 오롯이 혼자 겪어야 하는 일이다. 누구와 손잡고 가는 죽음을 택한들, 순간의 재난에 많은 생명이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개개인의 죽음은 한 길이다. ● 최수남의 「Carbonizing Human」(2023), 즉 '탄화되는 인간'이라는 설치 작품에서는 제각기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는 검은 인간 좌상이 등장한다. 작가가 제목에서 명시한 것처럼 일종의 유기화합물인 우리는 결국 탄소가 되어 지구에 남을 것이다. 검고 검은 인체의 색은 모든 유기체들을 태우면 마지막에 남는 숯검댕이를 연상시킨다. 주어진 시간만큼을 태우고 꺼져 가는 것이 모든 생명의 운명이라는 자명한 진실에 더하여, 이 형상들은 각자의 탄화되어가는 시간을 개별적으로 견디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여겨, 선선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무섭고 두려운 미지의 죽음이 아니라 모든 에너지를 미련 없이 다 태우고 기꺼이 사라지는 생명"을 형상화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 최수남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한정된 시간, 그 과정으로서의 죽음이 부각되는 것은 회화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간은 의미를 만들어간다」(2022)에서 화면에 빼곡하게 들어찬 인간 형상의 얼굴은 시계처럼 시침과 분침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눈과 코의 음영인 것 같기도 하면서 시침과 분침 같기도 한 모습은 얼핏 유머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몸속에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함을 담은 것 같기도 하다. ●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어제 있었던 것이 오늘은 없고, 오늘 없었던 것이 내일 생겨나리라. 개미들이 제 몸보다 큰 잎 조각을 들고 나르고, 시멘트 사이 갈라진 틈으로 어느새 풀이 자라 꽃을 피우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의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바쁘게 죽어간다. 우재오의 「Lotus」(2022) 연작은 어느 하루 늦은 밤 마주친 장면에 사로잡혀 몇 시간 동안 촬영한 사진들이다. 그는 이 연꽃들을 촬영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가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같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고작 일주일 만에 모든 것은 달라졌다. 또한 그는 바나나, 아보카도, 귤, 가지 등의 남은 먹을거리가 점점 단단하고 까만 화석처럼 쪼그라드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의 「Witness of Time」에서는 그 과실들이 탐스러운 생기가 빠지고 서서히 검은색이 올라오며 버썩 말라비틀어져가는 과정의 끝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 모습은 모든 생명의 끝에 다가온다. 적어도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식물,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들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그렇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덩굴에 얽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장면에서도 그는 마치 목을 맨 사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슬픔을 본다. 「Layers of Movement」에서는 그처럼 덩굴에 매어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겪는 시간의 흐름을 촘촘히 출력한 종이들의 흔들림으로 재생하였다. 이 작품은 한눈에 일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관객이 작품을 따라 걸으면서 만들어내는 작은 공기의 흐름이 종이에 흔들리는 움직임으로 반영될 때 완성된다. ● 우재오의 「WAS」(2011)는 놀랍게도 12년 전에 이미 만들어놓았던 자신의 관이다.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실제 화장장에서 사용하는 관의 모습 그대로이다. '있었다'라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작품의 제목은, 어느 미래에 자신은 과거형이 될 것이라는 필연성을 뜻한다. 관을 직접 보는 것은 섬뜩한 경험이다. 그러나 "들어가 보면 생각보다 마음이 편하다"라는 작가의 말을 들으니 몸에 꼭 맞는 나무상자에 들어가는 것은 다시 어머니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퇴행의 경험일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노년이 퇴행에 퇴행을 거듭하는 일이기에, 종국에 나 있을 곳이 이처럼 정해져 있다면 어쩐지 안심이 될 것 같기도 하다. ● 서현규의 「2023 Connection no.1」(2023)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교량의 형상을 4미터가 넘는 길이로 만든 것이다. 그는 이전의 작품에서도 '건축적'이라 부를 수 있는 조각 작품을 보여주었고 대체로 작은 단위의 모듈을 이용하여 형상을 이루어가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금빛 다리는 그야말로 황금다리처럼 보이지만 실제 재료는 골드 스테인레스이다. 작가는 다리를 이것과 저것을 잇는 기본 형태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를테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잇는 '사이'의 세계가 어쩌면 다리와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난간도 없는 금빛 다리를 걷는 기분을 상상해본다. 양쪽에 다리를 버티며 우뚝 서 있는 두 기둥이 튼튼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쪽과 저쪽의 견고함에 비해 다리는 얇고 단조롭고 위험하다. 전시 공간 전체를 비추는 영상의 흐름이 다리 위의 시간이 영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마치 탄생과 죽음 사이, 위태롭게 지나가는 삶의 시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문득 정신이 들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가야할 곳을 바라본다. ●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면적의 '텅 빈' 우주를 일주일간 촬영한 결과 수천 개의 은하와 별들이 관측되었다는 사실은 경악스럽다. 우리는 그 셀 수 없는 우주의 별들 가운데 하나인, 푸른 별 지구에서 살고 있는 생명이며, 나의 전 생애는 우주의 시간 속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류신정의 「유유 항성(悠悠 恒星)」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제각기 다른 시공간의 궤도를 가진 별들"의 모습이다. '멀고 먼 곳에서 늘 빛나는 별'이라는 뜻의 「유유 항성」은 시각의 영역을 매크로하게, 혹은 마이크로하게 상상의 영역으로 뒤바꾼다. 죽으면 별이 된다는 옛사람들의 믿음처럼, 수많은 생명들이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다가, 생명의 안쪽에 있는 작은 세포들이 각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빛이 일어나고 꺼지는 과정은 공기를 들숨으로 들이마시고 날숨으로 뱉는 과정과 비슷하다. 류신정이 빛을 사용하는 방식은 인간의 지각을 시험에 들게 하거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적인 리듬을 고수한다. 곧 폭발할 것 같은 빛이 아니고, 초조하게 눈을 어지럽히는 빛도 아니고,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천천히 빛을 잃더라도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리듬으로 말이다. ● 만물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그리스인들은 최초의 미술을 낭만적인 연인의 슬픈 사연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다음날이면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떠날 연인과의 마지막 밤, 모닥불 옆에 기대 잠든 남성의 옆모습 그림자를 따라 그린 그림이 최초의 미술이라는 것이다. 내일은 여기 없을 것이지만, 그 흔적을 남긴다는 것, 어쩌면 모든 초상화와 풍경화가 그런 의미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이미 낡아버려, 사랑에 평생을 거는 일은 없고, 노인의 지혜를 존경하는 일도 없이, 현재, 오직 현재의 기쁨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왔다. 미술작품도 그러한 동향에 발맞추어, 온갖 철학을 갖다 붙여도 결국 장식적인 가치이거나 환금성 있는 투자가치로 부풀어 있다. 그런 가운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작품들이 있다.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인간사의 뚜렷한 순간, 순식간에 삭제되고 마는 그 순간들을 깊이 사유하는 작품들이 있어, 그들 앞에서 나와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 이윤희
□ 1전시실: 최수남 '말하지 않는 것'이란 주제가 힘겹게 지나온 부정적인 나의 정서를 떠오르게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자기 비하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이것을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날들을..."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믿어주게 되어 행복하다. ● 작업 속에 좌상은 지금에서 도망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의 모습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10개의 탄화되는 인간(carbonizing human/생명활동을 위한 비축한 에너지를 태워 삶을 이어가는 인간을 표현)의 삶에서 느끼는 결핍과 압박감을 끈으로 표현하였다. 끈은 누가 묶은 것이 아니라 자의 혹은 타의로 선택된 결과물이다. 역설적이게도 끈의 묶임 속에 평화와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자발적 구속 상태로 표현된 군상은 답답하게 묶여진 상태가 아닌 삶을 대하는 긍정적인 태도의 표현이다. 벗어진 허물이 낱낱이 하얗게 드러나는 순간의 인간과 함께 11개의 입체물을 설치하면서 무섭고 두려운 미지의 죽음이 아니라 모든 에너지를 미련 없이 다 태우고 기꺼이 사라지는 생명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 최수남
□ 1전시실: 우재오 "어쩌면 나는 언제나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그 순간, 경험에 대해서. 12년 전에 만들었던 노란색 관은 앞으로 과거가 될 나의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또한 유리상자에서 전시한 나무뿌리는 이후 이사한 곳 마당에 자리를 잡아 두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부지불식의 순간을 지금 목도하며 살고 있다. 제주에서 마주한 그 죽음의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나무뿌리 안에서는 부단한 움직임으로 생명과 죽음은 서로 자리를 바꿔가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모두 사그라진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 우재오
□ 2전시실: 서현규 교량(橋梁), 즉 다리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여 사람이나 차량이 건널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산과 산을 연결할 수도 있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거나, 저승과 이승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의 역할도 한다. 이렇듯 작품에서 교량이 가지는 의미는 구조적인 형태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혹은 가상의 공간과의 연결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교량은 현대 건축 및 토목 분야에서 시대의 최고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건축구조물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러한 현대적인 교량을 구조적으로 재해석하여 본인만의 기계미학의 조형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 골드 스테인리스 미러 재질로 제작한 이번 작품은 황금이라는 영원 불변성과 장식성, 그리고 고귀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고,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영상을 통해 스테인리스 미러에 반사되는 빛이 공간에 투사되어 나타나는 변화와 시간성을 나타내어 확장된 전시 공간으로 인식되도록 노력하였다. ■ 서현규
□ 3전시실: 류신정 자연과 인간, 자연과 도시, 자연과 문명을 주제화하고 자연 이미지를 통하여 현실적인 공간에 비현실적인 일련의 상황들을 대입하여 이미지를 패턴화하고 흐름의 형상을 조형적으로 표현해서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고자 한다. ● 역사와 문화, 생명과 죽음, 관계와 정서 속에 진실하지 않음이 진실을 사라지게 하고 소외되는 현실에 대해, 나는 거슬러 수 없는 거대한 자연 속에 우리 모두는 생(生)의 흐름(유유 悠悠)이며, 그 속에 스스로 빛나는 별(항성 恒星)이라는 것을, 이번 작품으로 함께 호흡하고 싶다. ■ 류신정
Vol.20230322c | 말하지 않는 것-2023GAP(GlassBox Artist Project)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