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퍼포먼스 / 2023_0316_목요일_03:00pm
작가와의 대화 / 2023_0317_금요일_02:00pm
관람료 / 1,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 전시관람 사전예약
전남도립미술관 Jeonnam Museum of Art 전남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0 Tel. +82.(0)61.760.3242~3 artmuseum.jeonnam.go.kr
리처드 케네디 식의 '기적 만들기' 1) ● 거리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소리를 쏘아보는 것이다. 원점으로부터 떠난 소리가 막다른 끝에 부딪혀 돌아오는 시간을 재면 대상과 원점과의 사이가 계측된다. 어느 곳에서인가 소리를 끌어안지 못하고 튕겨낼 때, 그 필연적인 분리와 비수용의 조건 속에서 거리는 가늠된다. 리처드 케네디의 작업이 꼭 자신과 타자와의 거리를 재는 소리와 같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그가 떠나보낸 목소리는 먼 거리를 돌아 결국 다시금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반향이 된다. 2) ● 리처드 케네디는 음악, 공연, 회화, 영상, 조각에 이르기까지 여러 매체를 다루는 작가이다. 다양한 작품들 중 리처드 케네디만의 형식적 통일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매체별 제각각 성격이 다른 것은 물론 한 작품 내에서도 서로 다른 양식이 불쑥 솟아 나오기 때문이다. 표현주의적인가 하고 보면 개념적이고, 포스트모던(post-modern) 한가 하고 보면 프리미티브(primitive)한 식이다. 전형적인 회화인가 싶으면 한 단어 시(詩)로 이루어진 문자 언어가 개입하고, 라이브 퍼포먼스 성격이 강하다 싶으면 이를 캔버스와 영상 화면에 고정해버린다. 그의 작업에서는 각기 다른 예술 장르와 양식이 충돌하며 실험을 거듭하는데, 그 실험의 출발과 귀결은 '리처드 케네디'라는 사람의 인생 궤적과 포개진다. 작가는 이런 본인의 작업을 '오페라(Opera)'라고 부른다.
음악과 무용, 공연과 문학의 스토리텔링, 시각적인 무대미술과 의상이 모두 아우러진 종합예술이 오페라이기도 하지만, 케네디의 '오페라'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 충실한다. 바로 그 어원인 'opus'로 되돌아가 보는데, 라틴어에서 이 단어는 고된 노동을 일컫는다. 3) 본디 노동은 육체적이다. 분주히 손을 놀리고, 힘을 쓰고, 반복과 훈련을 거듭하여 결과물이 도출된다. 그에게 예술은 그런 것이다.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순수예술의 지향점 반대편에는 학대에 가까운 신체적 고통과 노력이 필요하다. 몸을 지닌다는 것은 적어도 육신이 차지하는 부피만큼 세상과 맞닿아 있으며, 외부와 관계를 맺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이 운명이 모두에게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누군가는 세상에 자신을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맞추는(fit in)' 데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기도 한다. 4) 소위 '주변부', '소수자'라고 분류되는 이들이다. 세상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사람들. 리처드 케네디는 자신의 오페라는 바로 이러한 퀴어(queer) 하고 소수자적인 존재를 담아내는 그릇이자 은유라고 설명한다. 5)
어린 시절부터 예술학교에서 '고급문화'로 분류되는 무용과 음악을 익힌 작가가 다음으로 향했던 곳은 뉴욕의 퀴어 클럽으로 또 다른 문화의 극점이다. 낮과 밤처럼 결코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지점을 오가며 케네디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현대 미술에서 다양한 매체를 동시에 사용하는 작가들은 여럿이지만, 대개의 작가는 '디렉팅(directing)'의 역할을 담당하지 다매체를 모두 다룰 줄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리처드 케네디는 작곡, 연주, 무용, 공연, 사진, 회화, 영상 등 여러 장르의 예술 활동을 몸소 섭렵하는데, 그에게 다매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직접 체득한 경험의 결과였다. 일례로, 이번 전시인 『에이시-듀시(Acey-Deucey)』에서 그는 오프닝 퍼포먼스(opening performance)로 「우유와 쿠키(Milk and Cookies)」를 선보였다. 공연 중 작가는 리코더(Recorder)를 꺼내들고 '아리랑'을 불었는데, 외국 작가가 한국에서 우리 민요를 부는 것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포즈였다. 입술의 한 쪽으로 비스듬히 피리를 물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그의 몸짓에는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저 악기를 다루어 보았는지, 얼마나 많은 관객 사이를 누볐는지 관록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술은 이념을 담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였고 세상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실질적인 몸이었다.
케네디의 작품에서는 실제로도 신체성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퍼포먼스와 영상에서 그의 '블랙 바디(black body)'가 직접 등장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회화 작업에서도 작가의 신체적 개입은 도드라진다. 얼핏 추상표현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회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형태의 순수성과 회화의 평면성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다. 캔버스에는 크게 붓을 휘두르고 문지르며 근육의 움직임이 쓸고 간 흔적이 두껍게 겹쳐져, 물감은 차라리 찐득하게 남아있는 체액과도 같아 보인다. 거기에 한 단어 또는 두세 단어로 이루어진 문구가 외마디 외침이자 단시(短詩)로 삽입되어 회화적 단일성을 깨트린다. 회화의 물질성과 인식의 비물질성은 한 폭의 캔버스 안에서 강렬하게 대립하며, 작품은 작가로부터 분리되기는커녕 작가의 목소리를 대신 발화(發話)한다. 그 목소리는 한편으로는 통시적으로 작가 자신의 지난 시간으로, 가족으로, 역사의 어느 지점으로, 보다 더 먼 과거의 자유를 찾아 헤맨 영혼으로 향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시적으로 지역, 성별, 계층, 커뮤니티 사이의 간극을 향한다. 리처드 케네디라는 인물을 축으로 돌아가는 진동 추처럼, 그가 던진 목소리는 시각/언어, 정신/육체, 개인/사회 등 양극으로 벌어진 세상의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어떻게 그가 형성되었는지, 그가 서있는 현 지점은 어떠한지에 대한 답을 구하며 세상의 깊이와 폭을 더듬어간다. 흑/백, 남/여, 선/악, 상/하, 승/패, 자아/타자, 지배/피지배, 중심/주변, 자연/인공, 물질/비물질, 영속성/순간성 등 이분법적 구분을 극명하게 드러낼수록 견고해 보이는 위계적 사회 권력과 의미 구조에 균열이 생긴다. 분절된 세상의 틈새마다 양가성과 다의성, 의외성이 솟아난다. 세상에서 '기적(miracle)'적인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세상의 틈에서 생겨날 것이다. 리처드 케네디의 근작 중에는 자신의 망친 그림을 잘라낸 후 그 조각을 씨실과 날실로 삼아 그물망에 엮어낸 작업이 있다. 이 직조(weaving) 작업에서처럼, 실패마저 성공으로 치환하는 창의적인 일은 촘촘한 조직망이나 완벽한 형상에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삐죽 튀어나온 캔버스 가닥에서, 느슨하게 늘어진 구멍에서부터 상상의 영역을 확보하며 이루어진다.
극단적으로 보일 만큼 상반되는 개념이 충돌하며 제3의 길을 모색하는 리처드 케네디의 접근 방식은 전시장의 공간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전시장을 검은 방/하얀 방/장밋빛 방으로 구분하여 직관적이면서도 함축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전달한다. 어둠을 지나 빛을 찾아 떠나는 여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흑백의 구분을 넘어 대안을 찾는 것 같은 드라마틱한 연출이다. 혹자는 묻는다. "흑과 백이 더해지면 회색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그러나 리처드 케네디의 작업은 흑과 백, 둘 중 어느 쪽이 우세하여 기울거나, 둘의 중간지점을 찾아 타협하기 위함이 아니다. 흑이면 흑, 백이면 백,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흑과 백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목소리까지도 탐색하는 일에 가깝다. 흑백을 지나 엉뚱하게도 장밋빛 방이 등장할 수도, 아니, 노란색이나 보라색 방이 등장할 수도 있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며, 리처드 케네디는 이런 기적을 만드는 마법사의 역할을 스스로 자처하는 것이다. 그 여정은 분리된 세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타인과 맞닥뜨리고, 그럼으로써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인정하고 다시 이어지고, 나를 성찰하는 과정이다. ●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돌아온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하이오(Ohio)에 대한 오마주, 에이시-듀시 게임을 하던 아버지, 학창 시절의 고통스러운 훈육, 밤 문화의 거리, 팬데믹 시기의 단절, ... 작가 자신이 지나온 삶이 이번 전시 곳곳에 녹아있다. 회고적이지만, 이 작업의 소재는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작가에게 돌아오고, 다시금 미래를 향한다.
"당신들 모두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 당신들 모두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 당신들 모두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 당신들 모두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 당신들 모두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 내 모든 것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 내 모든 것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 내 모든 것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 내 모든 것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 내 모든 것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 『에이시-듀시』 전시의 마지막 지점에 놓인 칠판에는 리처드 케네디가 퍼포먼스 「우유와 쿠키」의 마무리를 지으며 적은 문구가 쓰여있다. 이 구절처럼 작가는 우리에게 목소리를 건네며, 작가는 또다시 "나, 리처드 케네디!"라고 세상을 향하여 외친다. 그 목소리가 널리 퍼질 때까지, 다시금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이 모든 과정이 기적적이지 않은가, 아니, 삶 자체가 기적적이지 않냐는 작가의 말은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작가 본인 스스로에게 전하는 긍정의 기운이기도 할 것이다. 그 기적을 매일매일 스스로의 손으로 엮어간다. ■ 김소라
* 각주 1) 「기적을 만드는 중(Miracle W.I.P.)」은 전남도립미술관의 제작 지원으로 창작된 리처드 케네디의 2023년 신작 영상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2) 넌-바이너리(non-biranry)인 리처드 케네디를 대명사로 지칭할 때 영문 'they/their/them'로 표기한 반면, 이 글에서는 국문에서 3인칭을 가리키는 중성적 의미로 '그'라고 지칭하였다. 3) 작가 노트, 2023 4) 케네디의 회화 작품 「고개를 들어봐 캐시(Pop Your Head Cassie)」의 표면 한구석에는 'fit in'이라 구절이 쓰여있다. 'fit'과 'in', 서로 떨어진 두 단어는 'fit in', 'fit in', 'fitin'으로 읽힐 만큼 띄어쓰기의 거리를 줄여가다가 종국 'fitting'이 되어 만난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구절이지만, 필자에게는 주변을 맴돌던 '그/그것'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비록 위아래가 뒤바뀌어 거꾸로 쓰인 구절일지라도. 5) 작가 노트, op. cit.
Vol.20230316a | 리처드 케네디展 / Richard Kennedy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