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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화요일 휴관
포네티브 스페이스 PONETIVE SPACE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34 Tel. +82.(0)31.949.8056 www.ponetive.co.kr
최갑연 개인전 『널 아일랜드 (Null Island). 인간 마음, 인공 마음』 展에 부치는 글 ● 최갑연 작가의 아틀리에에 처음 들어서자 눈에 들어온 건 갈색과 푸른색의 향연이 펼쳐진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유화작품들이었다. 두 대조적인 색감이 두터운 마띠에르 질감으로 울퉁불퉁 튀어나와 마치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주거니 받거니 밀고 당기는 대화를 나누는 듯도 했다. 색들이 꿈틀거리는 그림 속 작가의 붓질은 확신에 차 있었고 나는 그 속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해 작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따뜻한 차를 끓여주며 소박하게 미소짓던 작가의 표정은 전시 제목인 "널 아일랜드"에 대해 묻자 이내 진지해졌다.
널 아일랜드 ● "널 아일랜드"(Null Island)의 Null은 독일어로 제로, 0을 뜻한다. 이름이 암시하듯 '널 아일랜드'는 실제 존재하는 섬이 아니라 경도 0°과 위도 0°이 만나는 지구상의 한 점을 가리킨다. 즉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본초 자오선과 지구의 중심을 통과하는 적도가 교차하는 한 '점'이며, 지도상으로는 서아프리카 해안의 기니만에서 600킬로 떨어진 대서양에 위치한 가상의 섬이다. 현재 해당 지점에는 소울(Soul, 영혼)이라는 별명을 지닌 부표가 떠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 뼘의 땅도 존재하지 않는 이 가상의 섬에 지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황당한 이야기 속의 '방문'은 발리나 제주 등 물리적 섬의 방문이 아니라 데이터를 통한 방문을 의미한다. 즉 특정 지역을 찾기 위해 컴퓨터에 해당 지역 이름을 입력하면 지도가 화면에 뜨는데 이때 컴퓨터가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지오코딩' 프로그램을 통한 경도와 위도의 숫자이며, 좌표값을 반환하기 어려운 경우 기본값이 0°N 0°E로 되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널 아일랜드를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에 오가는 데이터량을 생각할 때 그 수가 어마어마할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널 아일랜드는 적도와 본초 자오선이 만나는 (0,0)의 지점으로 실제로는 '값'이 없는 가상의 Null 데이터를 의미한다. 지오코드 맵(Geocode Map)상에 존재하는 이 '섬'은 우리 시대의 빅 데이터가 만들어 낸 산물로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현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조회되는 온라인 좌표상의 섬 (Null island)이다. 데이터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 '자각하는' 시점에 이른다면, 널 아일랜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또 다른 현실'이 될 것이다." ● 작가에게 '널 아일랜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또 다른 현실"을 여는 포털(portal)로서의 의미가 크다. 즉 보이는 현실 이면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데이터가 오가는 가상의 현실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널 아일랜드'는 작가의 작업에 차용되고 있다. 그 가상의 현실은 오늘날 컴퓨터 그래픽이나 디지털 미디어, 홀로그램 등의 기술을 통해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등으로 가시화되고 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실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경험하며 디지털의 '또 다른 현실'을 지각한다. '널 아일랜드'는 그러한 최첨단 기술이 만들어낸 또 다른 가상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개념이다.
고목 : 자연 ● 그런데 작가의 그림을 보면 최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먼 듯한 '고목'이 추상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마치 화석화된 고고학적 유물의 잔재처럼도 보이고, 죽은 고목이 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괴생명체의 형상처럼도 보인다. '고목'(枯木)은 말 그대로 죽은 나무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고목은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어린 시절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개이다. 수분이 다 고갈되어 말라 비틀어진 나무의 잔해이지만 작가에게는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madeleine) 비스킷처럼 과거의 향수를 느끼고 시간의 기억을 되찾는 촉매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연과 기술의 변증법 ● 자연이 생성과 소멸의 영원회귀를 반복하듯이 작가는 소멸한 생명체인 고목에서 또 다른 생성을 꿈꾼다. 이 생성이 일어나는 자리가 '널 아일랜드'로 상징되는 가상의 현실이다. 이를 작가는 고목의 유화작품이 디지털화되는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우선 고목이 그려진 유화작품을 이미지 파일(JPG)로 디지털화하고 이를 다시 영상 프로그램에 넣는데, 이때 작가는 영상 속에서 죽은 고목이 꿈틀거리며 다시 살아나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디지털이 만들어내는 환상적 이미지의 물결이 다 타버린 죽은 고목에 숨결을 불어넣는 듯한 경험이다. 이는 마치 가상 현실(VR)의 공간에서 죽은 연인이나 가족을 다시 만나는 신비한 경험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디지털 공간 속에서 고목은 기계의 수혈을 받아 다시 꿈틀거리는 괴생명체로 부활하고 기계적 이미지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이미지는 다시 '메탈 프린트'라는 새로운 매체로 옮겨진다. 최작가에게 '메탈 프린트'는 '자연'과 '기술'의 결합을 대변하는 매체이다. 자연을 상징하는 고목의 유화작품이 영상 프로그램에서 디지털화되어 기계적 이미지로 재생산되고, 이것이 다시 '메탈'이라는 재료에 프린트됨으로써 자연과 기술의 결합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고목이라는 하나의 공통 소재가 유화, 디지털, 메탈 프린트의 세 가지 다양한 매체로 옮겨지며 이미지의 변증법적 순환이 일어난다. 유화작품이 정(正)이라면, 이것이 디지털화된 기계적 이미지는 반(半)이고, 이것이 다시 메탈에 인쇄되는 것은 합(合)이다. 헤겔 철학의 논리적 전개방식인 정-반-합의 원리가 딱 맞아 떨어지는 최작가의 작품 과정에서 우리는 무한히 산출되는 기계의 이미지를 통해 자연과 기술, 과거와 현재가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순환하는 시각적 증거(evidence)를 보게 된다.
기술과의 공존-미래 ● 작가에게 고목으로 상징되는 자연, 자연의 영원회귀하는 순리는 마음의 고향이자 삶에 안정감을 주는 뿌리이고 원천이다. 그러나 기술의 세계는 불안하다.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그것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온한 일상에 어떤 위협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작가는 이 불안 때문에 오래 쉬었던 작업을 재개했다고 말한다. 기술은 이미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진화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다양하게 개발되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은 이미 인간의 능력치를 훌쩍 뛰어넘어 무섭게 진화하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스마트폰과 그 속에서 매일 만나는 수많은 데이터는 무의식중에 우리의 정신을 어디론가 이끌어간다. 혹자는, 그래도 기계인데 인간만 하겠느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낙관론에 기대지만 이 역시 순식간에 전복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렇게 '인공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을 능가하며 멈추지 않는 열차처럼 폭주한다. 작가는 이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연 뒤에 숨지 않는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기술을 긍정하고 공존, 상생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최작가의 작업은 '생존 미술'이며 동시에 기술의 발전 앞에서 엄습해오는 실존적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해가는 수단이다. 이 극복의 과정에서 '널 아일랜드'는 작가가 선택한 기술과 공존하는 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또 다른 현실의 문(門)이자 기술이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에 대한 상징(symbol)이다.
점(點)으로부터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부력의 원리를 이용해 하나의 '점'이 지구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소위 아르키메데스의 점(Archimedean Point)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어왔다. 최작가가 지향하는 '인간 마음'과 '인공 마음'의 결합도 사실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이 우리의 미래라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유화, 디지털, 메탈 프린트의 작업을 오가며, 자연과 기술을 부단히 종합하고 제3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고 있디. 필자는 그 우직한 믿음 때문에 작가의 다음 작품이 더욱 기대된다. 지금도 하루하루 진화하는 가상 현실의 세계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작가가 어떻게 수용하고 내면화하여 미래의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할지 무척 궁금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하나의 '점'으로 표시되는 '널 아일랜드'가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되어 전 지구를 들어 올리는 상상을 해보며 작가가 그리는, 기술과 공존하는 미래가 '또 다른 현실'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제시되길 힘껏 응원해본다. (2023년 1월 31일) ■ 신사빈
Vol.20230311d | 최갑연展 / CHOIGABEON / 崔甲年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