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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3_0308_수요일_04: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시각예술창작산실
관람료 / 6,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00pm / 월요일 휴관
사비나미술관 SAVINA Museum of Contemporary Art 서울 은평구 진관1로 93 Tel. +82.(0)2.736.4371 www.savinamuseum.com
카메라 나투라 Ⅱ: 강홍구의 사적이며 공적인 '신안' - 1. 출신 ● 위험한 일일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작은 것으로도 꼬투리를 잡아 구별 짓기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삐뚤어진 현상이 만연한 마당에 '출신'을 가지고 미술을 논한다면 말이다. 가령 작가의 성별을 굳이 밝혀서 작품성을 성적 편향(bias)으로 오염시키거나 특정 지역을 지목해서 작품에 반공이미지나 정치색을 덧칠하는 일, 특정 세대 ․ 미술대학 ․ 커뮤니티끼리 줄 세워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 우려되는 것이다. 물론 역으로 예술가의 사생활을 선정적으로 노출하고 각색해서 돈과 인기를 얻는 일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그 또한 문화 전반의 수준을 낮추고 미적 판단력을 어지럽힌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있다. 이해 당사자들은 이익을 얻을지 모르지만 공동체 전체로 보면 분명 위해한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못된 목적에서가 아니라 어떤 작가와 작품의 경우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출신을 근거로 비평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그/녀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지역 환경 및 경험 구조를 바탕으로 성장했는지가 그/녀의 예술 성과이자 독특성(singularity)의 원천이라면 '출신'은 중요한 비평 요소가 된다. 이 글에서 논할 작가 강홍구의 미술, 특히 그가 2005년부터 근 17년 간 꾸준히 작업해온 「신안」 시리즈가 바로 그 경우다. ● 강홍구는 1956년 전라남도 신안군 어의도 태생의 미술가다. 목포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어 귀향하기까지 몇 년을 제외하면, 신안의 바다와 섬을 터전으로 살았다. 그러다 6년의 섬학교 선생님 역할을 마무리하고, 뒤늦게 미대 입시를 치러 198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한다. 이후 같은 대학의 대학원 석사까지 마친 다음, 1992년 자신의 이름을 건 첫 개인전 『강홍구』를 열었다. 1999년 두 번째 개인전 『위치, 속물, 가짜』부터 주목할 신진작가로 부상했고, 그 후로는 큰 정체기 없이 다수의 개인전과 수많은 기획전을 통해 각 주제/지역으로 세분되는 시리즈 작업을 선보이며 오늘 한국의 대표적 중견미술가에 이르렀다. 강홍구는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사진/합성이 일상생활에서 희귀한 것이었음은 물론 미술계나 사진예술계 어디서도 논의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1990년대 중반부터 이미 그것을 중심 매체로 삼아 작업했다. 특히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사람들의 속물 기질과 삶의 문제적 국면들을 구체적 지역들(한강, 경기도 그린벨트, 김포, 은평...)을 탐사해 촬영하고 그것을 포토콜라주 기법을 써서 비판적으로 표현한 디지털사진 연작(「한강」, 「그린벨트」, 「오쇠리」, 「은평 뉴타운」...)이 주를 이뤘다. 그것이 오늘날 강홍구의 예술 정체성이 구축되는 데 이정표 역할을 했다.
2. 이력 ● 하지만 강홍구는 사진가는 아니다. 작가가 '회화' 전공 출신이라는 점도 이유지만, 작가가 내내 디지털 사진과 회화 실험을 병행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객관적인 이유다. 명시적으로 2012년 개인전『녹색연구』부터 강홍구는 자신의 출력사진 위에 물감으로 색채를 더하거나 형상을 그려 넣거나 추상적 붓질을 가한 '사진-회화' 작품들을 제시해왔다. 보수적 미술의 장르 규범도 아니고, 현대미술의 장르 일탈도 아닌 본인만의 시각이미지를 그렇게 구체화했다. 나는 이전의 글에서 강홍구의 이러한 미술을 작가가 발명해낸 하나의 "궤도", 회화와 사진이 "상호 중층결정 작용하는 평면"이라고 설명했다. ● 그리고 2022년 개인전 『신안 바다-뻘, 모래, 바람』에 대한 리뷰에서는 그가 신안을 담은 "사진-회화 타블로"를 제시했고, 그것은 "카메라 나투라(Camera Natura)"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고 썼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사진'을 기계장치이자 기술로서 '카메라 옵스큐라' 대신, 존재론적 욕망과 앎의 기호로서 '카메라 루시다'라고 명명했던 데 빗댄 것이다. 강홍구의 「신안」 연작이 작가의 생각과 말과 행위와 취향의 원천인 그의 고향, 그 바다와 뻘과 모래와 바람, 나아가 그의 자연(nature)을 표상하는 이미지 방(chamber)이기에 나는 그런 이름을 제안했다.
요컨대 강홍구 작가는 개인사로든 예술의 주제로든 자신의 본향인 신안을 떠났다가, 이십년쯤의 공백기를 거친 후 그곳에 다시 집중했다. "익숙한 낯설음"이 가득한 그 서쪽바다, 953곳의 무인도와 72곳의 유인도, 사람들과 생물들, 인공물과 자연생태계를 마주하고, 돌아다니고, 지켜보고, 생각에 잠기고...(그래서 만재도 해안에 들고나는 파도를 보며 소위 '물멍'을 하고)...사진 찍고, 그림 그려 세상에 제시한 것이다. 귀향은 아니다. 그는 그간 꽤 자주 신안을 찾았고 오래된 고향 집도 그대로 있으며, 나아가 자기 작업의 중심 지역으로 그곳을 마음 깊이 품었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단언한 상태로, 어쨌든 지금까지 방문이자 (무계획적이고 무의도적인) 탐사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창작에 중요한 모티프이긴 하지만 현실 삶의 공간으로서는 부정하고 싶은 것일까? 1984년 서울로 대학 진학하며 떠났고, 1992년 첫 개인전을 했으며,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신안」을 작업했으니, 따지자면 강홍구의 고향 신안이 '예술'로서 세상에 나오기까지 30~40년이 걸린 셈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강홍구는 '미술가'로서의 이력을 꾸준하고 나름 성공적으로 쌓아왔다. 여기서 잠깐, 예술가의 이력(career)이 회사원 같은 일반 직업인의 이력과는 다름을 강조하고 싶다. 예술가의 이력은 곧 '독립적인 의지로 지속해온 창작 정진(精進)'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렇기에 강홍구의 이력이 한편으로는 그만의 '사적 삶'이 이뤄져온 실체적 진실,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이라는 오래되고 보편적이지만 고도의 전문성과 독창성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쌓은 성과, 이렇게 사적인 차원과 공적인 차원의 교환과 융해의 결과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아닌 우리는 가볍게 몇 줄로 읽어 내리는 커리어지만 말이다. 특히 멀고 먼 서해의 작고 가난한 섬 출신인 강홍구가 취향의 정치학이 항상 날 서있고 세습된 문화자본에는 꽤나 관대한 한국 미술계 내부에서 꺾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일(미술은 물론 글쓰기)로써 우뚝 서 있는 점을 주목하자. 더 세부적으로는 그가 비판적 담론 해석과 시각적 리터러시를 촉발하는 작품부터 동시대 감성에 조응하는 자연생태 타블로까지 넓고 다양하게 시리즈 작업을 꾸려온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럼 이 예술가의 이력에 담긴 창작 의지와 스스로를 세우고 견인해온 질적 독특성/미적인 것의 스펙트럼 및 강도를 몇 줄의 팩트나 수량으로 평하는 일은 피하고 싶어질 것이다. 신안으로 귀향하지 않는/못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간단히 말할 일이 아니다.
3. 고향, 상실과 육화 ● 앞서 썼듯이 강홍구가 신안을 찾아 본격적으로 사진 찍은 시기는 중년에 이르렀을 때부터다. 그렇다면 청년기 이후 꽤나 긴 세월 동안 고향과 멀어져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사이 신안은 좋든 싫든 여러 면에서 변했고, 때문에 작가는 신안을 마주하고 "내 기억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 엄청난 틈이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썼다. 사실 그 틈은 시간의 간극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선 바다와 군도(群島)로 이뤄진 그 지역의 물리적 변화 ―어종 등 생태적 변화부터 지자체가 건설한 강렬한 색상의 다리 같은 사회 인프라스트럭처 변화까지, 무인도가 유인도가 되고, 유인도가 무인도가 되는 인간 현존의 변화까지― 가 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과 동궤로 강홍구가 섬을 떠난 후 다른 지역, 다른 환경, 다른 인식과 질서 속에서 형성한 지각경험의 변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국 그 둘이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강홍구'라는 주체가 '신안'이라는 대상 a를 욕망하지만 실패하고, 실패하지만 욕망하게 되는 환상의 순환구조에 가설된 허방(sunken place), 간극, 틈, 구멍이다. 강홍구가 다시 찾은 신안은 그렇게 작가의 심리 속에 기시감과 상실감, 욕망과 소외가 뒤범벅돼 움푹 팬/침몰한 구멍을 열었다. 반면 흥미롭게도 작가의 몸은 세월의 총량 차이를 무화시키고 신안의 생생한 실체를 다시금/그대로 경험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강홍구가 만재도의 물결을 보며 찍은 동영상 ―사실은 그 영상을 찍던 당시에는 의식하지 않고 사후 편집하며 들은 '소리'(파도소리는 물론 새소리)― 에 주목해 쓴 다음의 문장이 그 경험의 해묵은 깊이와 찐득한 관계성을 가늠하게 해준다. ● "그 소리는 뻘, 모래, 바위들의 촉감과 짭짤한 바닷물의 맛과 냄새, 내려 쬐는 여름 햇빛과 마찬가지로 내 몸에 배인 것이다. 이미 거의 60년 전 일인데 아직도 생생하다는 것은 기억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육화(incarnation)된 어떤 것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 '육화'라는 용어에는 종교적 의미가 강하기에 조금 부담스럽다. 또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가 사진의 기록과 비교하며 논파했듯 "기억의 기록에는 구멍이 많다. (...) 몇 년 정도는 가볍게 건너뛰며 (...) 대상의 어떤 부분을 억압, 왜곡, 강조"한다. 그렇기에 강홍구가 생각한 "육화된 어떤 것"이야말로 기억의 효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가가 위와 같은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정확하게 언제 무엇이 어떻게 얼마만큼 변했는지 분석하고 규정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분명 그러한 변화가 매순간의 현실이었을 "60년 전"의 과거와 현재를 맞대서 생각한다. 또 신안의 바닷물 한 방울, 모래 한 알, 미역 한 줄기, 갈매기의 짧은 울음소리...어느 것 하나 '바로 그때 그것'으로 특정할 수 없고 언제나 이미 변화하는 존재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텐데도, 60년 전의 그것들이 "몸에 배인 것", "육화된 어떤 것"이라고 썼다. 그만큼 산술적 시간의 경과를 넘어서고 객관적 실체와는 별개인 신안의 본질과 자신의 근원적 경험이 얽힌 관계를 (우연히, 갑자기) 자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인 작가뿐만 아니라 구경꾼 같은 우리 또한 육화된 과거 시간과 내 몸에 각인된 세계의 흔적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것 같지 않은가. 사실 우리 각자가 그런 것 한두 가지쯤은 마음에 품고 있다. 사랑했던 이의 프로필, 남겨진 옷에 배인 체취...혹은 언젠가 한참을 바라본 노을, 당시에는 전혀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정작 되돌아볼 때마다 마음이 저릿해지는 풍경...
4. 부정 시제의 신안 ● 프랑스어 '아오리스트(aoriste)'는 애초 고대 그리스어로 '시점을 특정하지 않은 과거 시제'(아니다+경계가 정해지지 않은)를 의미한다. 그 뜻을 살려 우리말로는 '부정(不定) 과거'라 번역하는데, 더러 '무정(無定) 시제'라는 번역어를 제안하기도 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바르트가 사진에 관한 일반 담론/이론 대신 독특한 사진론을 제시했다고 평하며, 근거로 그가 사진을 "부정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한 점을 들었다. 실제로 책에서 바르트는 초상사진 속 인물들을 지목하며 그 사람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사진의 능력과 그것을 보는 현재의 사람들에게 그 사진의 존재 시제가 특정되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논설했다. 몇 군데 인용하자면,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ész)가 찍은 "에르네스트(Ernest)" 초상은 "여전히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시공을 넘어선 사진의 그 "즉각적인 현전의 제공"에 누구든 놀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진은 언제나 지속되고 새로워지는 놀라움으로 나를 놀라게" 한다. 이상과 같은 바르트의 서술은 일견 주관적인 고백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사진(속 존재)의 지속성과 사진(을 보는 때와 사람에 따라 그 존재)의 새로워짐을 바르트 특유의 문장력으로 설명해낸 것에 다름 아니다. 바르트는 또 어느 '사진에 관한 대담'에서는 사진 찍힘이 "주체가 존재하는 한 순간이고, 그 순간은 흘러가버리기"에 사진을 "죽음과 연관해서 서술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바르트에게 그런 사진의 특성은 주체가 시간을 거슬러서 과거의 실존을 발견하고, 성찰하고, 글쓰기 하는 한 형식으로서 사진의 기호학을 뒷받침한다. 요컨대 사진은 과거의 한 순간을 이미지로 객관화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스어 부정 과거 시제처럼, 기계적 재현을 넘어 사적이고 주관적이며 정서적이거나 감각 지각적인 시공간의 두툼한 범위를 갖는다. ● 강홍구가 만재도 동영상에서 촬영 당시에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소리를 나중에 다시 보며 발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리고 60년이라는 공백을 뛰어넘어 자신의 유년기 신안과 중년이 넘은 미술가로서 작업한 신안 사이에 '육화된 것'이라는 의미를 가설한 점을 놓치지 말자. 나는 강홍구의 작가노트 중 그 대목을 읽으며, 앞서 설명한 바르트의 '부정 과거와 연관한 사진론'을 떠올렸다. 나아가 강홍구의 글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지속성과 변화, 사라짐/죽음의 불가역성과 불가해함, 고향을 잃어버림과 그것의 본질을 되찾음이 무채 썰 듯 잘려나갈 수 없는 세계의 진실, 신안에 대한 한 인간의 사적이며 공적인 덩어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사실 내가 자신의 약점을 가장 많이 노출하는 경우는 나의 '사적인 것'을 입 밖에 꺼내는 때"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의 『카메라 루시다』는 책에서 스스로 명시하듯 "나 자신을 사진적 '앎'의 척도"로 삼은 논설이며, 크라우스가 평가했듯 보편적 사진 담론이나 학술이론이 아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유품 속에서 뒤늦게 그 어머니의 유년시절 사진(「겨울정원」)을 발견한 후 사진의 존재론 혹은 존재론적 사진에 관해 쓴 글임을 책에서도 밝혔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최대의 약점을 딛고 시대를 뛰어넘는 사진적 앎을 제시한 셈이다. 1980년에 발표된 그의 사진론을 넘어설만한 글을 오늘에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 반증이다. ● 그럼 강홍구의 「신안」 작품들은 어떠한가? 우리가 이 글에서 논했듯이 강홍구의 신안은 사적인 것, 즉 출신 지역이고 멀어진 고향이고 상실한 시공간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명백히 대한민국의 한 지역이면서 강홍구 예술 작업의 원천이자 상실한 고향이 육화된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강홍구의 「신안」은 약점이라면 약점일 수 있는 사적 삶을 창작의 지평 위로 끌어올려 우리로 하여금 넓은 의미의 생(生)을 들여다보게 한, 우리시대 예술이라 해도 좋지 않겠는가. ■ 강수미
Vol.20230308c | 강홍구展 / KANGHONGGOO / 姜洪求 / photography.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