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올로기 Digiology

김수진展 / KIMSUJIN / 金水珍 / photography   2023_0106 ▶ 2023_0112 / 일요일 휴관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34×60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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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3_0106_금요일_06:3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에스제이 쿤스트할레 SJ Kunsthalle 서울 강남구 언주로148길 5 (논현동 97-22번지) Tel. 070.7733.1692 www.sjkunsthalle.com @sjkunsthalle

사진그림_사진을 take a picture한다는 것은 ● 김수진의 작업을 보면 "이것도 사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녀의 작업Digiolgy는 매우 사진적인 그림이다. '사진적'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은 정확히 그림도 아니면서 사진도 아닌 그 무엇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림의 대표 양식인 회화와 사진을 비교해보면 그 뜻이 명확해진다.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42×36cm_2020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52×78cm_2022

사진을 찍다. take a picture는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이미지를 가져오는 행위다. 이때 사진 picture는 회화 painting과 다르게 제작되는 이미지다. 사진은 원근법적 투시도법의 기하학적 수학의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카메라기계장치가 자동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 근대의 세계관이 정립한 이미지, 이 세계를 인식 판단하는 주체가 의식하는 그림 * 과 일치한다. 그것은 자동적이며 인식 판단의 주체가 그렇게 믿고 따르도록 하는 일종의 설정된 장치 프로그램과 같다. 마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 따라서 사진이 제아무리 현실 대상을 바탕으로 찍혀진 것이라 해도 사진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며 사진가의 자유로운 의식이 그려낸 자율적 그림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림이다. 그러나 회화는 누군가 그렸다는 그 행위의 흔적을 남긴다. 화가의 붓 터치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회화는painting이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화가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감각적으로 보는 것이다.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72×54cm_2020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72×54cm_2022

사진은 take이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것을 가져온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사진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내가 그 대상을 직접 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진은 분명 사진가의 주관적 선택과 카메라렌즈가 만든 이미지다. 그에 비해 회화는 화가의 육체와 정신이 그린 그림의 물리적 접촉의 흔적을 직접적으로 보기 때문에 화가의 존재감이 커진다. 회화는 이제까지 현실에 없었던 새로운 대상이자 화가를 대신한 것을 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진과 회화는 모두 만들어진 허구적인 그림 picture이지만, 그것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40×60cm_2020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21

우리는 왜 동일한 매체 그림의 형태를 두고 다르게 볼까? 사진(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 닮은 정도를 의식하면서 비교 판단의 대상이 된다. 판단을 결정하는 의식은 이미 결정된 프로그램처럼 작동한다. 의식이 판단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낯선 것이 된다. 알 수 없는 대상은 부정된다. 이때 의식은 결코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진가의 주관적 선택을 비판한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은 습관적으로 판단중지를 모르는 자동기계처럼 작동한다. 이 순간 사진가의 존재는 드러나지만, 사진도 화가처럼 사진가의 주관적 개입을 통해 선택되어 구성된 그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무의식처럼 우리의 의식이 반복적으로 판단중지를 모른 채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작용이다. 회화(그림)도 마찬가지다. 회화를 본다는 것은 작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이 아니다. 적어도 미학이론과 미술사의 지식이 없이는 동시대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회화작품을 보는 것은 정확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정보를 대입한 결과로 보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될 때 화가의 존재감은 오히려 사진처럼 사라지게 될 거고 결론적으로 회화 역시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작동프로그램에 의해서 자동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즉, 회화나 사진 모두 당대 지배이데올로기가 그려낸 그림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동안 미술사에서 거론된 수많은 사조와 양식의 변천사를 만든 것은 전적으로 이데올로기 작용이며, 자율적 작가주체의 창작품이 아니라면 과연 예술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는 작업이 바로 김수진의 Digiology 이다.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80×54cm_2021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20

김수진의 작업 과정을 따라가 보자 그녀는 자신이 촬영한 사진과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 이미지를 가져와(take) 포토샵프로그램 도구를 이용해 이미지를 변주한다. 그 결과 어떤 이미지는 추상회화를 보는 듯 원재료인 사진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디지털 사진의 픽셀과 인쇄 망점 같은 형태가 크게 확대되어 나타난다. 뒤샹의 레이디메이드처럼 가져온 사진이미지로부터 파생된 선과 색상은 프로그램 도구에 의해서 자동으로 변형된다. 이때 추상표현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포토샵 자동프로그램도구는 작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오토마티즘의 효과를 보여준다. 그 결과 구체적인 사진 도상이미지와 추상적 패턴을 한 화면에 동시에 나타낸다. 그러니까, 그녀의 작업은 마치 신표현주의 회화가 그렇듯이 구상의 서사와 추상의 감각을 동시에 구현한 화면을 구성한다. 어떤 경우에는 완전한 기하학적 추상 이미지와 3D 도구로 자동 형성된 옵티컬아트를 보는 듯, 하다가도 아톰 스파이더맨 등 기존의 이미지를 가져온 반복적 패턴의 팝아트와 뒤섞인다. 그야말로 이 모든 것이 현대미술사에 등장하는 레이디메이드를 가져온 뒤샹과 이후 잭슨 폴록으로 이어지는 추상표현주의와 이에 반발하고 등장한 팝아트, 작가주체를 의심하는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의 복잡한 사조를 동시에 보는 듯하다.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22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136×90cm_2021

이렇듯 김수진의 작업은 현대미술사조를 재료 삼아 뒤죽박죽 짬뽕이나 잡탕밥 같은 것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김수진의 Digiology 작업은 사진 같지 않은 그림처럼 보인다. 거기다가 현대미술사의 모든 장르의 양식을 닮아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이 회화가 될 수 없는 결정적 이유는 사진처럼 이미지를 가져와서 자동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추상적형태가 화가의 붓 터치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Digiology작업은 그린다는 행위의 흔적으로서 결과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이미지 앞에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처럼 착각한다.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21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22

그러나 역시 그녀의 작업과정은 사진적 행위의 결과물이다. 지각되는 것은 그림이지만, 작업과정의 결과는 사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진과 김수진 Digiology작업과정의 결정적 차이는 선택과 변형과정을 드러내는 것과 그것이 숨겨지는 것에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은 아니지만, 작업 과정에서 그녀 스스로도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예측불허의 자동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그녀는 놀라워하면서 그것을 즐기는 것 같다. 이과정은 선택된 사진 원재료의 이미지를 배치하는 것은 의도적이지만 자동프로그램 작동이 의도치 않게 그녀를 배재시킨다. 특히 추상적 형태는 그녀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닌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설정한 그림이다. 그 결과 일반적인 회화작업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사진의 장치프로그램으로 산출되는 과정과 김수진의 작업과정은 여기서 동일한 것이 된다. 반면에 선택된 사진이미지는 뒤샹의 레이드메이드처럼 제시되면서 작가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대상이 부각되면서 사진가의 존재감이 사라지지만 김수진의 Digiology작업에서는 작가가 선택한 사진이미지가 화가의 붓 터치처럼 오히려 작가의 존재감을 되살아나게 했다. 이들 사진은 거칠게 오려져 추상적 패턴의 이미지와 서로 충돌하면서 제각기 다른 인상을 주거나 때로는 조화롭기 까지 한데, 이는 현실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든다. 현실세계와 익숙한 사진들의 레퍼런스는 작가 개인의 사회적 관심사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여 어떤 메시지를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기학학적 추상의 반복패턴은 개인적 취향의 감각을 드러내면서 작품의 의미 따위에는 전혀 무관심 한 것처럼 보인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작가의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이것이 디지털 프로그램이 만든 자동생성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설명이 불가능한 선택된 사진그림처럼 보인다. 이것 또한 오해일 수 있다. 우리가 회화(그림)을 대하는 태도와 사진(그림)에 찍혀진 대상에 대한 그 익숙함의 여부에 따라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뒤틀린 감각은 바로 관객의 시선을 습관처럼 사로잡고 있는 무의식 즉, 이데올로기 작용 때문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50×75cm_2022
김수진_디지올로기 Digiology_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22

그럼으로 그녀의 작업은 사진도 아니고 회화도 아닌 적어도 그녀의 작업 앞에서 "이것이 사진이다. 회화다. 혹은 아니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나아가 특정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미학의 범주로 나눌 수 없으며, 오히려 그동안 특정 장르로 귀속시켜 이해하려고 했던 현대미술사의 모든 이론들을 무화시킨다. 비로소 그녀가 표제로 사용하는 Digiology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된다. Digiology는 digital 과 Ideology의 합성어다. 그녀가 만든 이 새로운 용어는 자신의 작업이 디지털 프로그램의 자동 생성 이미지이자 현대미술사의 모든 장르와 양식을 부적절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분류체계는 사실 모더니즘 미학의 순수미술(Fine Art)로 대변된 이데올로기의 작동임이었음을 포스트모던 이후 동시대 미술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를 때 그것을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사진은 사진가의 주관적 선택에 의해서 찍혀진 것으로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사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결정된 개념과 습관적으로 활용되는 측면에서만 그렇다. 김수진의 Digiology는 회화라는 그림도 사진 그림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이데올로기라는 필터에 의해 통과된 것으로 창작 주체로서 자율적인 작가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현대미술이 왜 사진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는지 또 사진은 왜 모더니즘 미학이데올로기에서 예술이 될 수 없었는지 그 의문이 자명해진다. 예술행위는 이렇게 앞서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규범화된 사례를 문제 삼는다. 이것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에 저항 하는 것이 아닐까. ■ 이영욱

* 이미지는 사진뿐 아니라 회화, 영상 그리고 상상의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를 우리말의 '그림'과 같은 포괄적 개념으로 상정하면, 사진과 회화는 모두 주체가 인식 판단하는 그 시대의 세계관 이미지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가 만든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동시대 미술의 경향은 주체가 인식 판단하는 이데올로기 작용을 성찰하는 작업들이 있다. 이런 현상에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사진이다.

Vol.20230106a | 김수진展 / KIMSUJIN / 金水珍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