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조각 直观—雕塑

손취展 / SUNZUI / 孙醉 / sculpture   2023_0105 ▶ 2023_0109

손취_혼합_구리 철망, 철조망_50×30×20cm_2023

초대일시 / 2023_100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코사 Gallery KOSA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0(관훈동 37번지) B1 Tel. +82.(0)2.720.9101 www.kosa08.com

손취의 '우공이산 愚公移山' - ⅰ. 프롤로그 ● 조각가 손취를 형용하는 데 있어'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성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는'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라는 뜻의 고사 성어로,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면 마침내 큰일을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빠른 속도에 취한, 그리고 유행의 시류를 쫓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손취의'느림'은 시대에 뒤떨어진'둔함'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그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이자, 모두가 속도에 매몰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택한 '처세술'이자'지혜'이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자신의 소설 「느림」에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나,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고 말했다. 손취의'더딤'은 결코 뒤처짐이 아닌,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그리고 현재의 삶에 집중하고 소중히 여기기 위해 스스로 택한 삶의 템포이다. ● 소위 동시대 미술에서는'관객과의 소통', '의미 있는 메시지 전달'등을 역설하는 반면, 손취의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이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이 정한 속도로 본인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걸어온 결과이다. 즉, 이러한 경향은 그의 작업이 사적 경험과 내면의 감정에서 기인했기 때문으로, 예술의 순수성을 지향하며 소통을 거부한 모더니스트들의 태도와는 차이가 있다. 개인적인 감정과 체험, 자질구레한 일상적 재료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작가의 사적 심상들이 전시장이라는 공적 공간에서 보여지며 자연스레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 한마디로, 손취는 소통을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작업이 뿜어내는'아우라(aura)'는 관객의 공감과 몰입을 충분히 이끌어낸다.

ⅱ. 비(非)재현·반(反)서사의 조각 ● 눈앞에 놓인 대상을 모방·재현하는 것은 미술의 오랜 임무로, 미술가들이 이와 같은 책임에서 벗어난 것은 고작 한 세기 반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파울 클레는"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 정의했는데, 이로써 시각적 가시성을 목표로 하는 예술의 규범적 네러티브가 종결되고 시각 너머의 의미를 추구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그 결과, 대상을 알아볼 수 없는 구체적 형상이 없는 이른바 추상(抽象) 미술이 등장하게 된다. ● 손취의 조각을 형식적 특징으로 분류한다면 분명 추상조각에 속한다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추상에 이른'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것이 재현의 점진적 해체를 통해 이룩한 20세기 서구사회의 산물인 추상미술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손취 작업에서의 추상성은 서구 고전주의 조각 전통의 특징인 서사성·재현성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서구 현대조각과 궤를 함께한다. 그러나 그가'비(非)재현적 조형언어'와'반서사(Anti-narrative)적 양식'을 취한 것은, 그것이 조각이란 예술 형식이 가장'능한','적합한' 역할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이다. 고전조각은 서사성을 전제로 하지만, 그 방식은 문자 서술만큼 정확하지도, 생동감이 넘치지도 않는다. 조각은 문자와 달리 확정적 표현을 경계해야 하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 즉 '예술은 모호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작가의 생각이다. ● 한마디로, 손취의 조각에 나타나는 형식적 추상성은 매체의 순수성을 추구한 20세기 초의 추상과 달리, 조각이 지닌 태생적 한계에 대한 자각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작가의 예술적 실천을 통해 이른 결과이다. 이로부터 비롯된 비재현·반서사적 특징을 전략 삼아, 작가는 모더니스트들이 끈질기게 추구했지만 끝끝내 파괴되었던'오리지널리티'신화의 부활을 꿈꾼다. 예술이 완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판명되었지만, 그는 이를 다시금 전복(顚覆) 시키기 위해 미술의 오랜 임무인'재현'과'서술'을 거부한다. 지금까지 조각은 모두의 서사를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었다면, 손취는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비서술적이고 비재현적인 조형언어로 정제(精製) 해 보여줌으로써 다시금'유일성'을 획득한다. ● "과거는 흔적을 남기지만, 그 흔적은 희미하다. 나는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을 잘 보여줄 수 있는'재료'에 의탁해 모호한 기억의 실체를 가시화 한다." (손취 인터뷰에서 발췌) ● 결과적으로 손취의 작업은 추상적이며 미니멀한 형식으로 보여지며, 작품의 서사성과 재현성은 제거된다. 이로 인해 관객과 작품 사이의 스토리텔링적 연결 또한 단절되며, 오롯이 자아의식의 각성과 성찰에 다다른다.

손취_재생_이쑤시개, 종이테이프_30×200×20cm_2022

ⅲ. 재료와 형식의 변주(變奏) ● 그렇다면, 재현과 서사라는 임무에서 벗어난 조각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각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손취가 택한 것은 조각을 이루는 재료의 물성과 의미에 대한 탐구이다. 재료 고유의 질감과 미감에 작가의 감정과 사상을 불어넣어, 재료의 물성으로 작가의 내면과 정신성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조각의 자질(資質) 이자 본연의 역할이다. 그리하여 손취의 조각에서는 '무엇을 표현하였는가?'보다'무엇으로 표현하였는가? 가 중요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전통조각과 달리'재료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다양한 재료가 지닌 물성과 질감, 그리고 이를 빌어 말하고자 하는 의미 사이의 관계성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미의 형태를 직조한다. ● 손취는 철망·와이어·이쑤시개와 같은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비(非)조각적이고 비(非)전통적인 재료들을 통상에서 벗어난 관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며, 본래 지니고 있던 물성을 초월하고 새로운 은유를 담는다. 예컨대 그가 자주 사용하는 철선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철망은 일상에서 주로'차단'을 위한 기능으로 쓰인다. 반면, 그의 작품에서 주목한 것은 철망이라는 재료가 지닌'투과성', 그로 인해 갖게 되는'폐쇄와 개방이 공존'하는 양가적 상태이다. 철망의 사이사이로 투과되는 빛으로 인해 생겨나는 가상의 공간, 그리고 이를 얽어 만든 입체의 조각이 차지하는 물리적 공간이 교차되며 몽롱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손취는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재료가 지닌 본연의 속성에 잠재된 미감(美感)과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 앞서 언급했듯, 적합한 재료의 선택에서 출발하는 그의 작업은, 가공하지 않은 재료 그대로의 아름다움, 즉 재료미 (材料美)를 돋보이게 하는 형식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그 결과로서 손취가 택한 방식은 바로'단일 유닛의 반복','일상적 오브제의 다른 재료로의 치환'이다. 그의 작업은 단순성·반복성·물성을 특성으로 절제된 형태 미학과 본질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의 미니멀리즘 작가들과 궤를 함께한다. 그러나 그들이 대량생산된 공업용 재료를 물성의 왜곡 없이 가공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를 작업의 소재로 가져다 쓴 것과 달리, 손취 작품 속의 모든 요소 하나하나는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된 것들이다. ● 먼 거리에서 감상할 때 포착되는 작품의 전체적 형태는 미니멀리즘 조각과 같은 군더더기 없는 정제된 형식적 극미(極微)를 보여준다. 그러나 근거리에서는 재료 본연의 아름다움과 공예미, 그리고 작가의 손결이 지나간 흔적과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간결함'은 과거 미니멀리스트들과 같이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표현을 최소화하여 도달한'결과'가 아닌, 작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지점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서 자연스레 도출된 형식적 특징이다. 이는 한마디로 재현과 서사를 포기한 손취의 조각이 새롭게 선택한 지향점, 즉 재료의 물성으로 자신의 내면과 정신성을 잘 드러내기 위해 택한'몰입을 위한 절제'로서의 단순함이다. 관객들의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오롯이 물성 자체가 지닌 재료미, 그리고 재료의 질감과 속성에 머무를 수 있도록 작가가 의도한 바이다.

손취_일념_구리 철망, 철조망_100×100×100cm_2023

「일념」 은 철망을 오리고 엮어 만든 20만 개에 달하는 땅콩 모양의 유닛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육면체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연질의 재료로 만들어진 하나하나의 요소들을 얼기설기 얽어 켜켜이 쌓아 만든 입체물로, 전통조각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덩어리감은 느껴지진 않지만, 덤불과 같이 가는 철사들로 연결되어 있어 보이는 것보다 강한 응집력으로 뭉쳐져 단단한 몸체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작가가 택한'땅콩'의 형상은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소환된 이미지이다. 그러나 무한 반복과 복제를 거쳐 육면체라는 기본적인 도형으로 회귀하며, 소재가 지닌 본래의 서술성은 제거되고 작가의 내밀한 정서적 경험이 축적된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 다른 한편, 손취의 작업에서는 일상적 오브제를 본래의 재료가 아닌 다른 재료로 치환 시키며 다소 비현실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예컨대 의자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반투명의 직물로 만들어져 기능적 측면에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에 가깝다. 의자라는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통상적 인식으로 보는 순간 걸터앉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지만, 이내 관객들은'이미지와 실체의 불일치'를 발견하고 곤혹과 당황감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겨나는데, 일상 속 사물에 대한 과거의 느낌과 현재의 인식이 겹치고 포개어지며 비현실감을 자아낸다. 재료의 물성에 시간성을 더해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일상 사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작가가 의도하는 바이다. 그 결과, 물질적으로 쓸모없는 그의 의자에 정신적 가치가 부여되며 쓸모 없음의 쓸모, 즉 '무용지용(無用之用)'에 이른다. 손취는 오브제가 지닌 본래의 물성과 사용법에서 벗어나'재료와 형태'·'물성과 질감'사이의 고의적 대립을 유발시키며 보는 이들의 사고를 이끈다.

ⅳ. 반복적 행위를 통한 물질의 정신화 ● 손취는 세속적 가치와 잣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에게 알맞은 속도로, 스스로가 감당할 만한 호흡을 유지해가며'꾸준함이 승리를 거둔다'는 이치를 몸소 증명해왔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철망·이쑤시개 등 쉽게 구할 수 있는 비조각적이고 가변적인 재료가 지닌 물성에 의탁해 자신의 감정과 정신성을 드러낸다. 그가 이 같은 일상과 밀착된, 손만 뻗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작업 방식, 그리고 이를 수행해 나가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 손취에게 있어 창작은 일상 그 자체이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호흡하고 음식을 섭취하고 수면을 취하는 것과 같이 매일매일 행하는 일상적인 행위이자 의식이다. 그래서 재료를 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물성 자체만이 아닌, 어떠한 시간과 장소, 상황에도 구애받지 않고 수행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여부이다. 불혹의 나이에도 달하지 않은 작가의 창작행위를'수행(修行)'이라 명명하는 것이 다소 거창한 수식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생존과 직결되지 않은 행동을 매일같이 빠짐없이 지속하기 위해서는 수행자에 버금가는 의지가 필요하다. ● 동양철학은 한마디로 도(道)를 체득·실천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지적 수련만으로도 가능하지만, 도를 얻기 위해서는 지적 수련과 행적(行的) 수련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동양적 관념이다. 다른 영역과 달리 자신만의 질서와 나름의 규율에 의해 작동하는 예술이라는 특수한 분야에서는 정신과 노동을 완전히 분리해낼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술창작은 특수한 미적 가치를 생산해 내는 육체적·정신적 노동이 결합된 창조적 노동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극단으로 치달으며 이 둘의 관계는'고결함과 하등함', '높고 낮음'으로 이분화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또다시 예술가들에게 육체와 정신의 사이를 오가며 빠르게 전환이 가능한'유연한 자세'를 요구한다. ● 미술사조로서의'개념미술(Conceptual Art)'은 일찍이 막을 내렸으나, 그 이후 등장한 미술은 숙명적으로 다소간(多少間) 개념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로 인해 동시대 작가들은'시각'과'사유'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난제를 떠안게 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 손취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속해온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과 정신성은 반복적 행위와 노동을 통해 가시화되며 실체를 갖는다. 즉, 그의 작업에서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분리되었던'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그리고 미술의 전통적 가치인 심미성과 동시대 미술에서 추구하는 이른바 개념과 의미 전달의 합일을 이룬다.

ⅴ. 에필로그 ● 손취는 세상 모든 만물은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 믿는다. 어리석은 노인이 끝끝내 큰 산을 옮겼듯, 아무리 위대한 업적도'하나의 몸짓'에서 비롯된다. 한국에 체류한 삼 년 이란 시간 동안, 그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업을 수행하였다. 지문이 닳도록 손끝을 비벼가며 엮어 만든 수 만개의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커다란 덩어리를 이룬 형상은, 내가 걸어온 모든 발자취가 모여 지금에 이르렀음을 상기시킨다. 손취의 작업은 단순 심미의 대상을 넘어, 그가 하루하루를 잘 살아낸 결과이자 흔적이다. 작가의'호흡'과 '정신'을 담은 '사유(思惟)'의 결과물로, 매일의 자신을 켜켜이 쌓아 만든 결실이다. 행위의'반복'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지속케 하는 힘을 지녔다. 이것이 바로 모두가 효율과 속도에 탐닉하는 지금, 손취의 작업이 갖는 의미이자 가치가 아닐까. ■ 조혜정

Vol.20230105e | 손취展 / SUNZUI / 孙醉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