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어디든

더원미술세계 2023년 1월호   January Vol.9

더원미술세계 THEONE ART WORLD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24 4층 Tel. 070.4289.3397 theoneartworld.kr

그곳이 어디든 ● 동굴처럼 어둡고 스산한 공간에 빛줄기가 쏟아진다. 도정기 계가 놓여있던 공간에 들어서면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나무, 강의 풍경이 네모난 상자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레이어드된 이미지들은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고 깊은 잔상을 남긴다. 쌀을 도정하던 기계가 뽑혀나 간 회색 기둥 위에는 이제 투명 아크릴판에 새겨진 시가 자 란다. 밤하늘의 초승달처럼 가늘고 고운 글씨체로 쓰여진 시 들을 시공간을 관통하는 빛처럼 마음을 뒤흔든다. 시간의 흐 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처럼 이곳에 있는 작품들은 보는 각도와 심상에 따라 달리 보인다. 블랙홀 같았던 그 공 간에서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 럼 느껴진다. 10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제 수탈의 슬픈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공간 에 새겨진 거친 시간의 흔적들은 작품과 어우러지며 또 다른 무늬를 새긴다. 관람객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마음속 상흔 과 희로애락의 풍경도 고스란히 묻어나 새로운 이야기로 피 어난다. 작품들을 둘러보고 건물을 나올 땐 블랙홀이었던 어 둠의 공간이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으로 바뀌어 환한 빛을 밝혀준다. 조덕현 작가의 개인전 《108 and: 어둠과 빛, 바람 과 비의 서사》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재생 공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지역, 가상공간에서 진행되는 전시 의 흐름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사실 장소 특정적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오래 전이다. 10여 년 전 4·3사건 당시 초토화되어 마을이 사라져버린 제주 노 형동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개발 전까지 허허벌판으로 남았 던 그 장소가 개발 이후 8차선 도로가 뚫리고 서울 강남 중 심가에서 보던 호텔이나 건물들이 즐비한 곳으로 바뀐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거리에 들어선 대형마트와 영화관은 그 내부 구조도 서울과 비슷했으며 아파트나 빌딩 이름도 같아 서 기시감이 들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비단 제주에 국 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 된 지 오래다. 실제로 장소 특정적 미술은 이처럼 도시의 외관이 천편일률 적이 되고 지역적 정체성의 차이가 소멸해가는 근본적 변화 의 시기에 급증했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온라인 등 가상 공간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전시도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동시대 미술 담론은 여전히 장소 특정성의 역사적, 이론적 토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장소적 특징이 잘 드 러난 전시(작품)의 예술적 가치와 정체성, 정치적 효력 등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틀은 확정되지 않은 채 혼란스러운 상 태로 남아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장소성이 돋보이는 전시 들을 기존의 '장소 특정적 미술'로 한정하는 것은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코로나19 이후 미술전시가 갤러리에서 벗어나 특색 있는 외부 공간이나 가상공간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지금이 그동안의 장소 특정적 미술을 짚어볼 시점인 듯하다. 또한 최근 진행 중인 장소성이 강화된 전시를 통해 그 이후,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이번 호에서는 '그곳이 어디든'이라는 주제로 최근 장소성이 돋보 이는 전시의 흐름을 살펴본다. 첫 번째는 임근준 미술평론가 의 글을 통해 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술의 시간과 장소는 어 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본다. 두 번째는 서울의 지역적 특색을 살리고 600년의 역사성을 재해석해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을 설계한 조경찬 건축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도시와 건축, 미술 과 공간의 예술적 가치를 조명해본다. 세 번째는 버려지거 나 방치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가는 공간을 재생해 그곳 과 잘 어우러지는 특색있는 전시를 선보이고 있는 미술관(전 시공간)을 소개한다. 또 광주교도소라는 장소가 온·오프라인 전시를 통해 어떻게 예술작품으로 거듭났는지 살펴본다. 네 번째는 코로나19 이후 지역의 의미와 미술이 바라보는 주변 부 현상을 깊이 있게 고찰하고, 신-가상-생태계를 내세워 동 시대의 정치, 문화, 사회적 이슈를 IT기술과 예술의 만남을 통해 들여다보는 이색 전시들을 소개한다. 이제 더 이상 화 이트 큐브 안에 머물지 않는 미술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진 장소, 일상성이 공존하는 공간, 미지의 가상공간에서 다 채롭게 펼쳐진다. 시공간을 초월해 미술을 향유하고 싶다면, 다양한 전시를 통해 공간이 들려주는 특별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그곳이 어디든 떠나보자. ■ 김수은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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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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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028   ARTIST OF THE MONTH         민병도_유희하는 붓길로 펼쳐놓은 만고강산 / 김수은 036   제여란_신화가 그대를 저버린다 해도 상관없다 / 이도준 042   남화연_가브리엘, 화성에서의 계시 / 전세운 048   헬가스텐첼_익숙함에 위트 한 스푼! / 전세운

SPECIAL FE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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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054   그곳이 어디든 / 김수은 056   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술의 시간과 장소는 변화했는가? / 임근준 062   조경찬_맥락을 떠나 실재하는 공간은 없다 / 이도준 068   다시 태어난 공간 그리고 기억 / 김수은 076   가득 찬, 그러나 텅 빈 장소 / 전세운

SPACE 086   춘포도정공장 & 오스갤러리 기억이 소생하는 시의 집 / 김수은

ARTISTS TODAY

ARTISTS TODAY 092   문서진_순수한 열정에서 영원으로 / 김수은

ART WORLD 098   NY_《Meret Oppenheim: My Exhibition》, 《Just Above Midtown: Changing Spaces》 / 민소정 102   JAPAN_미야타 요시히로 개인전《Breathing time of Planets》 / 미야타 테츠야 106   INDONESIA_데비 링가 개인전 《Aperture》 / 피르다 아멜리아

SERIAL

SERIAL 111   정해광의 아프리카 미술과 문화⓷         팅가팅가 116   이은화의 유럽미술관 산책⓽         곡물저장소에서 현대미술의 전당으로_부르스 드 코메르스

TOPIC

TOPIC 122   2022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 / 김주영·이도준

EXHIBITION 126   REVIEW 140   REPORT 144   PREVIEW

146   NEWS 148   BOOK 149   POSTSCRIPT 150   SUBSCRIPTION

Vol.20230101d | 그곳이 어디든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