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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다래 홈페이지_www.daraebaek.com 인스타그램_@daraebaek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재)울산문화재단 『2022 청년예술인 지원』선정展
후원 / 울산광역시_(재)울산문화재단
관람시간 / 01:00pm~07:00pm
갤러리 월 Gallery Wall 울산시 중구 중앙길 158 (옥교동 231-2번지) 2층
미디어 에세이로 풀어낸 아티스트의 삶 ● 시각예술 작업을 한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잠재된 작업의 연장선일 것이다. 그런 작가가 이번에는 에세이와 같은 글도 하나 보내줬다. 전시장에서 작품들과 함께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문단별로 잘라서 분산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글 모음은 매우 진솔하고 술술 읽혀서 그 자체로 서문의 기능을 충분히 다 하고 있다. 여기서 '에세이와 같은 글'이라고 한 것은 동시에 그것이 에세이라는 장르 자체보다 중요한 작가 노트로서 기능하는 바를 보호 혹은 구분하기 위함이다. 올 한 해의 작업을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 '괴물 투수'에 반영해 설명한 글에 작가는 "괴물 투수에게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로 휴식을 주는 이미지를 선물하고 싶었다."고 술회해놓았는데, 그 바로 앞 단락에 써놓은 "괴물 투수가 던지는 변칙적인 삶에 훈련되지 못한 아마추어 타자인 우리가 프로처럼 대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특히 인상적이다.
우리는 아마추어이자 프로이다. 직업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작가가 아니더라도 일과 여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많다. 게으른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반대로 성실한 사람은 쉬기 위해 애쓴다. 작가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종 읽힌다. 실은 최근 '미디어 에세이', '영상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어떤 클립들을 보았는데, 작품이라고 하기엔 밈meme에 가까워 실망스러웠던 것이 백다래의 작업을 통해 후련하게 해소되었다. 하지만 밈도 원래는 우리가 잘 아는 "SNS 등에서 유행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복제되는 짤방 혹은 패러디물을 이르는 말"보다는 학술적인 개념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역작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만들어 낸 용어로, "자기복제자는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기생하는 것과 같이 문화의 전달에도 복제 역할을 하는 중간 매개물이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정보의 양식·유형·요소가 바로 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백다래의 이번 작업은 밈의 본래적 의미인 '자기 보존적' 작업이고 좀 더 찬양적으로 말하자면 작가의 이데아적 모방과 재현인 '미메시스'의 실천이다. 힘을 뺐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나는 지금 여기」라는 타이틀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프로페셔널한 미디어 에세이인 것이다. 자신의 일과 일상을 넘어 여가와 같은 시간 조차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사람 같다. 예컨대 아버지와 함께 울산 어느 해수욕장에서 자유롭게 발자국을 남기며 프레임 안팎을 드나드는 영상도, 캐주얼하지만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에세이적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물거품'이라 하면 부정적인 것, 실패를 떠올리지만 작가는 그것을 전복시킨다. "내 발자국이 모래에 들어간 것, 파도가 치고 그 모래가 다시 쓸려가서 삶의 일부가 되는 것, 바다처럼. 내가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거지, 없어졌다고 보기엔 애매한 것 같다. 나는 영상으로 기록하기도 했고."라던 인터뷰에서의 말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라지는 현상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흔적', 즉 있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백다래의 이러한 태도는 그야말로 실존이 실종된 이 시대에 분명 어떤 울림을 준다.
마지막으로, 작가노트에 나온 회심의 선언 "어차피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기억이라면 아름다운 형태가 조금 더 즐거울 것 같다."를 지지하기 위해 강수미 평론가가 웹진 『arte365』에 기고한 '현대미술의 역할 - 우리는 사회 속에서 함께 사는 존재다.'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미술이 우리 삶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미학적 유희, 심리적 치유, 또는 문화 예술적 성숙 등의 답을 내놓는다. 모두 맞는 얘기다."로 시작하는 이 칼럼은 앤디 워홀과 수잔 레이시 사례를 소개하며 더욱 섬세해진다. 워홀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되 사실은 그 순응적 행태조차 향유의 준비가 되지 않은 감상자에 대한 차별이자 저항을 하기도 했으며, 공공미술가 수잔 레이시가 연출한 퍼포먼스 「크리스털 퀼트Crystal Quilt」는 예쁘지도 않고 잘 그리거나 잘 만들어 그대로 보존된 작품도 아니지만 그녀가 주창한 '새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의 상징이 되어 계속 회자되고 우리 의식과 감수성 안으로 스며들어와 사회적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글을 읽으며, 백다래 작가의 작업이 앞으로도 순수성, 대중성, 전문성을 모두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포스트모던 아트씬에 만연한 '지금-여기'의 기계적 차용이 아닌,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며 그조차, 또는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고유의 권한 아래 만들어지는 행위들임을 메시지화한다.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맥루언의 말처럼 백다래는 그 자체로 미디어이자 메시지가 되고자 한다. 앞으로 아티스트로서 어떤 것을 포기하듯 포기하지 않을 것인지, 어떤 것을 예쁘지 않은 듯 예쁘게 해낼 건지, 어떤 것을 편집하지 않은 듯 편집할지 예상할 수 없다. 작가에겐 자신의 작업이 괴물 투수겠지만 우리에겐 작가 역시 괴물 투수 같은 존재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괜찮다. 백작가가 풀어놓았듯, "삶은 항상 아슬아슬하며 버겁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능숙해지"기 때문이다. ■ 배민영
Vol.20221203j | 백다래展 / BAEKDARAE / 白다래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