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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시담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시간을 담다 A moment in time 서울 중구 삼일대로8길 20-1 1층 Tel. +82.(0)10.8895.3368 blog.naver.com/missgray
버려져진듯 낡고 오래된 자연의 흔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여정을 느끼다. ■ 성기안
성기안의 표상적 공간 ● 판화의 프로세스를 구성하는 레이어는 판과 잉크와 종이다. 원형상이 새겨진 판이라는 레이어에 잉크를 묻혀잉크의 층이라는 레이어를 만든 다음 이를 종이 위에 눌러 이미지의 레이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인판화의 프로세스다. 여기서 플라톤의 주장한 이데아와 현상의 관계를 판화의 프로세스에 대입해 본다면 이데아는 판에, 현상은 판의 상이 전사된 종이에 비유할 수가 있다. ● 잉크의 색상, 종이의 지질, 프레스기의 컨디션 등에 따라 종이 위에 상이 전사된 결과물인 '현상'은 어느 정도의 변덕을 허용하지만 그 현상의 근원이자 기억의 원형인 이데아로서의 판은 항구불변해야 한다. 다른 말로단단해야(solid) 한다. 솔리드(solid)하다 함은 고전적인 기하학의 세계처럼 처음이 곧 끝이 되어버리는 경지 즉, 시작과 끝 사이에 더 이상의 시간도 사건도 이 개입할 여지를 일체 불허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판화의이상(理想)은 판에 조형의 이름으로 새겨진 기억의 원형을 첫 프린팅과 마지막 프린팅이 일관되게 한 치의어긋남 없이 무한반복적으로 재현함을 지향한다.
성기안이 주력하는 판종은 드라이 포인트다. 드라이 포인트의 판의 재료로는 동판, 아연판, 아크릴 판 등이있다. 이 중에서 동판이 가장 단단한 물성을 지녔다. 성기안은 드라이 포인트 판으로 동판을 사용한다. 동판으로 구현되는 판법으로는 직접묘화법에 드라이 포인트, 인그레이빙, 메조틴트 등이 있고 부식에 의한 간접묘화법에 에칭, 아쿠아틴트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드라이 포인트의 판이 판으로서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에 가장 취약하다. 드라이 포인트의 경우 판 위에 니들이나 포인트로 골을 파나갈 때 '버'(burr 거스러미)가돋아나는데 이 '버'는 프린팅을 거듭함에 따라 마멸된다. 인그레이빙의 경우 '버'를 스크레이퍼로 제거해버리지만 드라이 포인트에서는 '버'가 표현의 중요한 요소로 참여하기에 그대로 두는 게 일반적이다. ● 기본적으로 드라이 포인트는 오목판에 속한다. 오목판은 니들이나 포인트로 파여진 판의 '릿지'(ridge 고랑) 속에 담긴 잉크가 종이에 프린팅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드라이 포인트의 경우 잉크가 '릿지' 속에만 담기는게 아니라 '버'에도 담긴다. 밭에다 고랑을 파면 고랑(ridge)이 파인 만큼 이랑(burr)이 밀려 올라오는 것처럼 '버'는 내부가 파올려져 외부로 밀려나온 상태에 다름 아니다. 원래는 내부였다가 외부가 되어버린'버'에도 잉크가 담겨 이 부분의 잉크도 함께 종이에 프린팅된다.
니들이나 포인트의 운용 각도에 따라 '버'가 돋아나서 구부러지는 각도가 달라진다. 니들과 포인트의 운용 각도가 둔각일수록 '버'의 한쪽 이랑이 더 높아져서 물감이 번지는 효과가 커지며 화면은 다른 판화기법에서는보기 힘든 부드러운 표정을 갖게 된다. 부드럽다는 건 곧잘 대상의 애매모호함으로 연결된다. 그 애매모호함은 주체와 객체, 관자와 대상을 엄격하게 분별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 객체를 주체의 연민이 덮고 있어주객이 혼연일체가 되는 양상을 이끈다. 애매모호함은 성기안의 조형문법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니들이나 포인트의 운용방식에 따라 반듯하고 엄정한 선에서 부드럽고 관용적인 선까지 다항산 선을 표현할수 있는 드라이 포인트만의 매력적인 조형능력에 '버'의 역할이 크다. 그런데 '버'는 판을 찍어나갈수록 마멸되어 가다가 필경은 소멸되고 만다. 소멸되는 과정에서 프린팅된 이미지의 표정도 조금씩 달라진다. 무한반복적으로 기억의 재생을 가능케 하는 단단한 판이 아니다. 판이 애초에 지녔던 기억의 원형은 프린팅이 거듭될수록 점점 흐려지고 왜곡된다. 필경에는 애초의 기억이 애매모호한 상태로 된다. 성기안은 드라이 포인트의 판이 가진 물리적인 취약함이 야기하는 애매모호함을 작품 속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로 잘 살려내고있다. 그 애매모호함은 사물과 사건의 있음과 없음 사이, 생성과 소멸 사이의 어슴푸레한 상태를 과장과 변형없이 드러내게 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다.
작가 성기안에게 던져진 삶의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은 그가 태어나 자란 김포 문수산이라는 장소성이다. 김포 문수산과 강화도 사이에는 좁은 바다가 있고 바다를 향해 갯벌이 펼쳐져 있다. 바다라고 했으되동쪽에서 서해를 향해 흘러오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류가 바다와 만나는 기수(汽水)지역이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인지라 기수지역의 공간적 좌표를 결정하는 그라운드는 상류 혹은 하류로 수시로 이동한다. 갯벌은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완충지대다. 평평한 수면의 바다도, 단단한 물성의 육지도 아닌 지점이다. 하루에 몇 번씩 일어나는 조수간만에 의해 지형이 변화하고 생명체 또한 전혀 다른 형태의 활동을 보인다. 그라운드의 등질성(等質性)은 보장되지 않는다. ● 문수산에서 한강을 거슬러 동진(東進)하다 보면 '전류'(轉流) 포구가 나타난다. 만조와 간조에 따라 하루에네 번 수류(水流)의 역전이 일어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만조 때는 바다의 물이 강의 상류를 차올라감에따라 강물 또한 하류에서 상류로 흐른다. 어떤 때는 상류와 하류의 세력이 맞부딪혀 마치 물의 흐름이 정지한듯이 보이는 정조(錠潮) 현상도 나타난다. 강물의 등향성(等向性)에 분열이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그라운드는 상수적인 조건인데 갯벌과 전류의 환경에서는 그라운드 자체가 변수적인 조건을 가진다. 하루에도 몇 번 그라운드 즉, 판의 변형과 전복이 일어나는 셈이다. ● 이런 환경은 그가 택한 미술장르인 판화적 세계를 많이 닮아 있다. 갯벌이라는 그라운드로서의 판은 생성태를 잠복시켰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한다. 갯벌에 물이 들어왔다가 빠지면 거기엔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담긴다. 그 야트막한 물을 헤집고 망둥어, 게, 조개류, 갯지렁이 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존재를 현상적으로 또가시적으로 드러낸다. 마치 밀물이 갯벌을 덮어나가듯 오목판의 동판에 롤러로 잉크를 채웠을 때는 안 보이던 이미지들이 썰물로 물이 빠지듯 잉크를 닦아내면 고랑과 이랑 속의 잉크에 의해 이미지가 채워지는 것과흡사하다.
바다 수면의 높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에선 상당한 편차의 고저로 시시각각 변화한다. 바다는현상을 수심 속에 숨긴다. 바닷물이 빠져 나간만큼 현상은 드러난다. 수면은 현상과 본질의 등고선(等高線)이다. 바다가 높낮이를 달리함에 따라 현상을 받치고 있는 그라운드의 영역과 위상 또한 달라진다. ● 변화무쌍한 그라운드 혹은 액상(리퀴드)의 물렁한 그라운드를 살아가는 이는 항구불변의 그라운드에 대한신뢰를 가진 평야, 산악 등 여타 지역의 사람들과는 변별되는 세계관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건 항구불변의 본질에 대한 신뢰보다는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변화무쌍한 현상에 대한 다정다감의 세계관이다.
"만약 자연 속에 고체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면 기하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푸앵카레) 푸앵카레는'기하학적 공간'에 대척하는 개념으로 '표상적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표상적 공간은 등질적이지도 등향적이지도 않고, 3차원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통합성을 가진 공간이다."(푸앵카레) 갯벌, 조수간만이 심한 바다, 역류하는 강물 등 시시각각 좌표계 자체가 변화하는 액상적(리퀴드) 그라운드는 산악이나 벌판처럼 좌표계의 명징함과 항구불변성을 가진 등질성, 등향성의 고체적(솔리드) 그라운드에 대척한다. 액상적 그라운드는 기하학적 공간이라기보다는 표상적 공간에 더 가깝다. ● 성기안에게는 그런 표상적 공간의 감각에 맞는 미술의 주제가 일단은 갯벌이고 판화의 판종이 드라이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가 끈질기게 촬영을 계속하고 있는, 마을주민들이 다 철거해버린 달동네 백사마을이나 희망촌 역시 정신적으로는 고체적 그라운드가 무너져버렸다는 점에서 동일한 주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작품 '여정3'(드라이포인트)과 '여정6'(리도그라피)에서 보이듯 언제 물이 들어 올지, 언제 물이 빠져나갈지도 모르는 갯벌의 낡은 폐선 혹은 한때는 배를 고정시키는 볼라드였을 삭아버린 부목(腐木) 위에 홀로 서 있는 물새의 쓸쓸한 모습은 있음에서 필경 없음으로 가야만 하는 현상계의 숙명과 상징으로 보인다. 작품 '여정5'(드라이 포인트)는 한때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을 공원과 사람들이 따뜻한 온기가 얹혔던 장의자가 잡초처럼 자라난 갈대숲 속에 방치되어 풍화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모두가 시간 속에서 소멸되어가는 존재의무상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 '여정'(드라이 포인트) 역시 한때는 산등성이를 덮었을 나무들이 밑동만 남기고 잘린채 서서히 풍화되어 소멸을 기다리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성기안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액상적이거나 과거에는 고체적이었다 할지라도 이미 고체적 단단함을 상실한 채 풍화를 기다리는 푸석푸석한 연질의 사물들이다.
"표상적 공간은 시각공간, 촉각공간, 운동공간의 세 측면을 가진 공간인데 이 중에서 운동공간은 근육감각이야기하는 것이다."(나카무라 유지로) 성기안은 표상적 공간이 담아야 할 시각공간, 촉각공간, 운동공간을 모두 의식하고 있다. 시각공간은 그의 기억과 눈과 카메라가 담은 이미지의 공간이다. 촉각공간은 드라이 포인트를 할 때 '버'의 상태를 확인하기 동원되는 손가락 끝이 감지해나가는 공간이다. 근육감각이 이끄는 운동공간은 완강한 물성의 동판과 그의 니들 혹은 포인트가 겨루는 데서 돋아나는 공간이다. ● 흔히 판화를 판, 부식액, 프레스기 등이 동원되는 간접표현의 예술이라 한다. 간접표현일수록 작품의 제작과정은 작가의 신체성에서 멀어진다. 전체적인 프로세스로 보자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판과 작가의 신체만을 두고 볼 때 사정은 달라진다. 동판은 매우 완강한 재료다. 거기에 니들이나 포인트로 이미지의 고랑을 파내는 일은 상당한 집중력과 힘을 요한다. 또 '버'가 생기면 그 '버'의 구부러진 각도를 손가락 끝으로 만져가며 나중에 어떤 효과가 나올지를 촉감으로 확인해나가야 한다. 오감 가운데서도 시각이나 청각 등 근거리 감각보다는 촉각 등 근거리 감각이 더 많이 동원될 때 신체성이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동판 드라이 포인트는 판 제작에 있어 어느 장르보다 신체성이 더 적극적으로 동원되는 미술장르라 할 수 있다.
설령 판화제작의 맨 마지막 단계에서 얇은 막의 잉크 레이어에 얹힌 이미지만이 종이 위에 스민다 할지라도동판과 니들이 마주치는 지점에서는 짐승이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발톱으로 단단한 흙을 파내려가는 것에다를 바가 없는 절박한 신체성이 요구된다. 표현의 간접성과 신체의 직접성이 어느 지점에서 균형과 조화를이루는지를 관찰하는 것도 성기안의 작품에 대한 이해방식의 하나다. ● 성기안은 소멸되어 가는 것 혹은 '없음으로 있음'에 대한 주제를 견지해왔다. 주제는 그렇지만 그의 표상적공간의 작업은 '있음으로 있음'의 작품들로 빛날 것이다. ■ 황인
Vol.20220407d | 성기안展 / SUNGKIAN / 成基安 / printing.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