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오래된 우연 ● 두 사람은 아주 오래 같은 길을 걸어왔다. 대학의 같은 과에서 만난 이후 『대성리전』과 『바깥미술전』에 함께 참여했고, 중고등학교 교사의 길도 같이 걸었다. 50년 가까이가 훌쩍 흘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함께 전시한다는 데 새삼 무슨 보여주기 전략이나 목적성 있는 기획이 있겠는가. 나름 두 사람과 두 사람 작업 사이에서 친분을 쌓아왔다는 이유로 전시 서문을 부탁받았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이런 경우 조금은 난감해진다. 두 편의 다른 평론 글을 그저 나열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보아온 두 사람의 주된 작업은 자연 설치미술이었고, 지금의 전시는 갤러리에서 이루어지는 평면 회화이기에 더 그렇기도 하다. 더구나 전영희의 평면작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내심 걱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같은 길을 오래 걸어온 사람들은 바라보는 방향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그들은 걸음새만 다를 뿐 줄 곳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게다. 굳이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으려 해서가 아니라 작품은 물론 내게 전해주는 그들의 언어와 감성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 두 작가의 공통적 주제는 '사람들'이다. 대체로 옆으로 긴 화면 위에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강조나 긴장을 배제한 체 담담하게 나열된다. 마치 산수화를 감상하듯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나가야 할 듯하다. 임충재가 종이 찢기와 뿌리기의 우연성을 통해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군중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전영희는 매우 섬세하고 정직한 표현으로 특정한 삶의 단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 글을 쓰기 위해서는 간혹 불편한 질문도 하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어쨌든 전시란 '보여주기'인데 무얼 보여주려 하는지. 때론 매우 투쟁적으로 보이던 과거의 삶에 비추어 이 조용한 작품들은 은연중 도피의 흔적은 아닌지. 심지어 버리지 못한 습관의 연장은 아닌지. 평소 말이 적은 두 작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상투적 미끼를 던지고 말았다. 기실 그게 꼭 필요한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랬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았던 결국은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지금이 만들어졌듯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거라 생각해. 내 그림 속 인물들이 어떤 이념과 정체성을 가진 인간인지 잘 모르겠어. 그걸 모르면서 그림을 그려도 되는지 그게 부끄러워질 때도 있어. 그 인물들은 다 비슷한 세상 속 사람일 뿐이야. 너무도 솔직한 대답에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나도 공감한다. ● 사전에서 '우연偶然'을 찾아보았다. 우리는 필연과 우연을 매우 상반된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필연必然'은 인과적 법칙을 우리가 인식하는 경우에 성립하고, '우연偶然'은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두는 우리의 주관적 인식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과 태도의 차이일 따름인지도 모른다. '우偶'는 '짝'을, '연然'은 '까닭'을 의미한다. 모든 결과는 짝을 만나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삶은 만남이고, 만남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만남은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사건들 전체가 삶이 아닐까. '사람'과 '삶'이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만나며 우연을 이루어가고 있다. 굳이 큰 목소리로 필연을 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는 두 작가의 작품을 찬찬히 들여도 본다. ■ 김경서
사람들 사이에 문이 있다 ● 옆으로 긴 화면에 칠흑 같은 어두움, 또는 여명의 시간과 공간이 정박해 있다. 그리고 잘 알 수 없는 문양 같은 형상이 긴 화면을 가로지르며 점점이 옅은 빛을 수놓는다. 혹 밤하늘의 별이 아닐까 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사람의 형상인 듯도 하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인 듯도 하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였으리라 짐작되는 그 형상들은 흩뿌려진 먹과 물감의 중첩으로 애초의 예각이 온통 무너져있다. 무너지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거나 떠오른다. 조용히 반복되는 리듬만이 이 공간에 흐르는 듯하다. 화면 밖으로까지 이어지며 멈추지 않고 흐를 것 같다.
임충재의 작업 과정은 아이들의 미술 놀이를 연상하게 한다. 신문지를 손으로 잘게 찢어 사람, 또는 문의 모양을 만든다. 작품당 대략 100~300개 정도는 될 것 같다. 그리고는 이 조각들을 판화지 위에 늘어놓고 먹이나 물감을 분무기로 뿌린 뒤 이 조각들을 떼어내는 것으로 작품은 완성된다. 어쩌면 매우 단순한 작업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작가는 수없는 각성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기 마련이다. 형태가 틀리지 않았는지. 애초의 의도와 조형적 효과가 따로 노는 것은 아닌지. 너무 기계적이어서 주관적 감성을 해치지 않는지. 완성의 수준과 목표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스스로를 자책하며 수정을 거듭한다. 그렇게 하여 완성된 결과를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임충재는 이러한 상식에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단순하고 지난한 작업의 과정에 더 의미를 두는 것 같다. 찢고 뿌리는 과정,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손의 행위를 통해 놀이의 재미에 빠져든다. 작업 중의 그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다.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말한다. 놀이는 목적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로 완성된다. 놀이는 그 자체로 이미 본질적인 개념이고, 이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문화가 발현되는 것이라고.
임충재는 작업 과정에서 목적성이나 의도를 가능한 배제하고, 형상의 재현에도 거리를 둔다. 오히려 나의 손과 매질이 만나 빚어내는 다채로운 변화 안에 세계의 모든 것이 담길 것이라고 믿는다. 칠흑의 화면에 나타난 희미한 흔적들은 내 안의 자연이 놀이의 과정을 통해 드러난 세계 전체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을 뿐, 그가 찢어 낸 수백 개의 신문 조각에는 분명 그만큼 많은 세상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백 개의 이야기는 그의 손에 의해 찢기고 배열되는 무작위의 과정을 통해 사람 또는 문의 모양을 한 작은 조각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치환되거나 사라진다. 오늘 집으로 날아온 신문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규정지으려는 목소리들로 시끄럽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분명한 선을 그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세계일까. 세계가 요구하는 것을 단지 반복하는 것은 작가가 할 일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 같다. ● 젊은 시절 임충재는 전시를 통해 '있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하여 천착했고, '우연과 필연의 상보적 관계'를 주제로 졸업 작품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한지를 찢어 뿌리는 작업도 이때 시작됐다. 다분히 존재론적 고민들이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실재하는 것인가. 실재한다는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객관적 실재를 확신할 수 없다면 숱한 주장들도 허상일 터인데. 무엇을 주장하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세계는 단지 변화하고 있을 따름이리라.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변화의 한 지점을 잠시 잘라낸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 지점은 우리의 인식이 드나드는 문과도 같다. 문은 실재가 아니라 빈 공간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트인 곳'이다. 기실 그가 잘라놓은 신문 조각 형태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문이다. 사람과 문은 서로를 가능케 하는 동시적 존재이다. ■ 임충재
사람들이 걷거나 서성인다 ● 사람들이 걷고 있다. 횡단보도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어묵을 파는 좌판 옆으로, 사람들이 서성이거나 걷고 있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심하게 서로를 지나친다. 화면에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가 뒤로 돌아있다. 가끔 고개를 돌린 사람들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조차 드러나질 않는다. 화면은 좌우로 길고 그 길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횡렬을 지은 것처럼 걷고 있다. 어느 날인가 우리도 걸었을 익숙한 거리 풍경이다. 이 익숙한 장면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 그럼에도 묘하게 낯설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 이 장면들에는 주인공도 없고 뚜렷한 인격의 표현도 없으며 조형적 강조점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일반적인 그림이나 사진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차이로 다가온다. 마치 일기장과도 같이 담담하게 기술되었을 법한 재현적 풍경이지만, 문득 눈을 돌려 이 장면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눈치 채는 순간 어떤 낯섦을 체감하게 된다. 평범하면서 특별하다. ● 작가는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군중들의 물결 속에서 어떤 서사를 예감하고는 직감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심한 관찰자는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재빨리 이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았을 테고. 사람들의 정체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익명의 사람들이다. 집에 돌아온 그는 사진 속 피사체를 다시 들여다보다 어느 순간 그들이 들려주는 묵언의 이야기를 상상한다. 세브란스 병원 암 병동 앞, 서로 친분이 있는 듯한 일군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가운데 있는 여인이 걱정스런 몸짓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고, 몇몇 사람들은 그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무심히 걷는 듯 한 나머지 사람들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작가는 다시 이야기를 정리한다. 가운데 털모자를 쓰고 있는 여인의 남편이 암병원에 입원해 있고 지금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작가의 이야기는 여인 곁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이어진다. 코르덴 바지를 접어 입은 이유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대부분 사람은 핸드폰을 보고 있다. 추운 겨울 사당동 어느 거리,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좌판 주위에 움츠린 사람들이 서성이며 어묵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철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학생들의 몸짓과 표정에서 각기 다른 초조함을 본다. 그리고 쾌활한 몸짓을 하고 있는 연인의 걸음새에서도 그는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 이야기들이 또 궁금해진다. 때로 그는 걷는 사람들의 발 부분만을 트리밍 하여 화면에 담기도 한다. 발걸음의 품세만으로도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긴다. ● 필자는 오랫동안 「바깥미술회」를 통해 그의 작품을 보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탄성을 하며 그에게 말하곤 했다. 형님 작품은 한편의 시詩 같아요. 그의 설치작품에는 길게 쪼갠 대나무나 갈대 등이 주로 사용된다. 허공중에 무심코 그은 선묘처럼 물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바람의 흔들림에 제 몸을 맡기며 춤을 춘다. 작가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작품에 무엇인가를 담으려 하면 이내 맥이 풀리고 말아. 심지어 조금이라도 왜곡되는 것이 싫어 화면에 스케치할 때 먹지를 사용하여 형태를 옮기기도 하지. 그는 좀처럼 정직한 관찰자의 위치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또는 그래서, 그게 시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재현再現reappearance'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즉, 단순한 '외형의 시각적 유사성'이라는 축소된 해석이 그것이다. 그러나 거의 전 역사를 거쳐 미술사는 모든 미술 작품을 '재현'의 밖에 두지 않았다. 고대 동굴벽화도, 도식화된 중세 성당의 유리그림도, 심지어 몬드리안의 추상회화도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있다. 터럭 하나도 다르지 않게 그리려 했던 조선 시대 초상화도 외형의 유사성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계 내에 있는 어떤 존재를, 그 존재의 말씀을, 자연의 법칙을, 또는 인간의 정신을 '다시 드러내는' 것이 '재현'이다. 현대로 오며 그 반대편에(실은 한켠에) '표현表現representation' 개념이 큰 목소리로 등장한다. 그 지향적 차이를 모르는 바 아니나, 결코 '재현'이 '표현'의 하위에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어쩌면 '재현'의 의미를 폄훼하기 위한 모종의 예술 이데올로기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표현 없는 재현은 없다. ● 나무 패널 위에 한지를 바른 뒤 목공 본드와 도배 풀을 섞어 그 위에 칠한다. 연필로 스케치한 후 수채물감으로 채색한다. 때론 한지에 구김을 주어 세월의 흔적 같은 질감을 내기도 한다. 아크릴이나 유화 물감은 그 무거운 성질 때문에 내키지 않는단다. 그는 덧칠을 싫어한다. 매질의 두께는 자기주장이 강하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감춘다. 처음 마주했던 그때의 감흥과 촉감의 명징함이 희석되지 않을까 염려한다. 걷거나 서성이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삶을 상상하며 그림으로 다시 드러낸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림은 온 우주 안에서 그리워하는 어떤 순간을 하나의 공간 안에 정지시키는 일이 아닐까. 이 작가의 겸허한 관찰과 꼼꼼한 묘사는 어느 날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위한 한편의 시가 된다. ■ 전영희
Vol.20211202f | 임충재_전영희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