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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미 블로그_blog.naver.com/jongmeele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재)고양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미술관 Goyang Oulim Nuri Arts Center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어울림로 33 Tel. +82.(0)31.960.9730 www.artgy.or.kr blog.naver.com/goyangculture
먼지: 간신히 존재하며, 우리를 무한으로 여는 것들을 위하여 - 먼지란 무엇인가(먼지, 뭐지?) ● —무와 무한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언뜻 생각하면 둘은 정반대의 극인 것처럼 보인다. 무는 극소 이하이고 무한은 극대 이상이니까 말이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먼지'라고 부르는 것은 무와 무한 양쪽에 한발씩 걸치고 있다. 먼지는 무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존재자이다. 우리가 무언가가 먼지가 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전에 그것이 가졌던 모든 속성들, 특성들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이것이 먼지가 되든, 저것이 먼지가 되든, 일단 먼지로 화(化)한 다음엔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먼지로 화한다'는 것은 개별성과 존재자성을 잃고 그냥 있음(being as such), 그저 간신히 있음(bare being, mere being)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며, "돌아간다"는 한국어 표현이 가리키는 관용적 의미, 즉 죽어서 흩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종미 작가는 그런 식의 부정적 용법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심지어 그런 용법을 거슬러 먼지를 다룬다.
그렇다고 이 작가가 먼지에 '긍정적인' 의미 부여를 시도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그는, 전시회의 표제와 달리, 먼지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으며, 먼지가 일부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먼지를 '대상'으로 한 작품들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미술 작품들에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이렇게 말해두면 좋을 것 같다. "이 전시는 먼지를 사유하고 있다." 먼지를 통해, 먼지가 되어가면서, 먼지로 되어가는 것들에 관해 사유하기. 혹은 이렇게 말해보자. 이종미 작가는 언어의 껍질을 부수어 거기서 흘러나온 이미지로 사유하고, 사물을 깨물어 거기서 흘러나온 이미지의 즙을 흩뿌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관객은 이 사유를 따라가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작가가 던진 것이 아닐지라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먼지화하는 것이 무화(無化)하는 것이고, 죽어 흩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무한이 되는 것일 수 있는가, 유한한 존재자를 넘어 무한과 영원에 이르는 길이 어떻게 먼지에 의해, 먼지를 통해, 열릴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종미의 먼지 작품들에 주어진 물음도 이와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작가가 이 작품들을 통해 그 물음을 충분히 의식했는지,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놨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만약 납득할 만한 답이 제시된다면,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 그런 길을 보는 눈이 트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물음은 이 전시회의 화두(話頭)인 '먼지'와 관련해서 핵심적이다. 그리고 그 화두를 통해 이종미의 작품들이 갖는 존재론적―역사적 의의를 해명해보려는 이 평론의 시도에 있어서도 골간을 이루는 물음이다. (이하 중략) ■ 한보희
자매와 잔인한 말이 오고 갔다. 그 과정에서 죽겠다고 스스로 칼을 들이댔는데 우리 다툼을 말리느라 실제 칼날을 겁 없이 붙든 이는 엄마였다. 엄마의 손바닥은 칼날을 쥔 손아귀의 압력으로 몹시 상했다. 겁쟁이인 것이 공포스러운 아픔의 배역을 엄마에게 넘겨줌으로써 드러나 버렸다. 아니었다면 벌떡 일어나 꿈을 중지시켰을 것이다. ● '먼지'는 폐허인 듯, 을 상기시키고 통증을 일으킨다. 어지러워진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불에 탄 건물 잔해를 주시하려 할 필요는 없다. 통증을 염두에 두고 일상의 속도를 지연할 필요도 없다. 잔잔한 호수는 누군가로부터 일으켜질 파문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흐르진 않는다. 그게 바로 '자연自然'이다. ● '먼지'는 삶의 시공간을 거쳐 모든 것일 수 있는 추상어인 반면 배타적으로 오직 나의 것인 고유 명사이기도 하다. ● 근육으로 겹겹이 싸인 몸이 온도를 높여 기억을 녹여내는 찰나의 순간. 마치 죽음 같을 죽음을 '죽음 1'이라는 연극의 배역으로 심장 가까이 받아들인. 바르르 떨리는 먼지는 이 순간 찰나刹那라는 관용어와 다른 시간에 머문다. 이를 '언뜻'으로 구분해본다. '언뜻'은 먼 우주로부터 날아 들어온 먼지를 상상하는 이중의 심리적 흐름을 인식할 때이고 이중의 시간이 서로 반사면을 비추며 나를 자극할 때이다. ● 떨어져 내리는 시간-들에 되비쳐진 이름 없는 명사들은 시간도 공간도 아니다. 물질도 비물질도 아니다. 나의 몸을 뚫고서 정신을 출입하는 외부이기 때문이다. ■ 이종미
Vol.20211130j | 이종미展 / LEEJONGMEE / 李鐘美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