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21_1112_금요일_06:00pm_중정홀
참여작가 / 서동균_주경_정점식_최근배_홍성문
관람시간 / 10:00am~12:00pm / 01: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한 방역실시(12:00pm~01:00pm)
대구문화예술회관 DAEGU ARTS CENTER 대구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Tel. +82.(0)53.606.6139 artcenter.daegu.go.kr
대구문화예술회관은 1981년 3월 건립 기본 계획 수립 후 1983년 8월 착공, 약 7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90년 5월에 공연관을, 1991년 10월에는 전시관을 개관하였다. 대구문화예술회관 전시관은 개관 이래 30년 동안 기획전시 및 대관전시를 포함하여 한해 평균 90여 회의 전시를 열며 지역의 대표 전시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왔으며, 지난 2014년에는 1종 미술관으로 등록하여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으로서 보다 전문적인 전시공간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 지난해 대구문화예술회관은 개관 3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예술회관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김인호의 회고전을 개최한 바 있다. 올해에는 전시관 개관 30주년을 맞이하여 지역미술의 역사를 정립하는 작고작가 특별전을 마련하였다. ● 대구문화예술회관은 지난 30년 동안 지역 작가들의 편에서 대구미술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들과 함께 대구미술의 역사를 정립하는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지역작가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시민들이 미술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주력해 온 대구문화예술회관은 앞으로의 30년을 준비하면서 그 역할과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해 나가고자 한다. ● 그런 의미를 담은 이번 전시에서는 대구미술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근·현대기 예술가들 중에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지역미술의 정신을 지키고, 지역의 후학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스승의 역할을 했던 '시대의 선구자들' 5인을 조명하고자 한다. ● 전시는 죽농 서동균, 태소 주경, 극재 정점식, 목랑 최근배, 이산 홍성문 등 서화, 서양화, 한국화, 조각의 분야별 선구자들의 시기별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들을 통해 대구미술을 이끈 예술가들의 족적과 그들이 후대에 남긴 가르침을 정리하고 기념한다.
죽농 서동균(1903-1978)은 18세에 석재 서병오의 문하에 들어가 서화를 배웠다. 1936년 스승의 타계 후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물려받아 운영하였으며, 광복 후 이를 영남서화회로 개칭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현대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서예가들을 배출했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경북여고, 신명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만년에는 대구대, 효성여대에 출강했다. 주경, 김창락, 변종하 등의 서양화가와 경북미술협회를 창립(1946)했고, 대구화우회 결성(1952)에도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죽농 선생의 만년의 수작들을 포함하여 30여 점의 서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지금의 영남화단이 있기까지는 근대 영남화단을 현대 영남화단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이끌어 온 죽농 서동균(竹儂 徐東均, 1902∼1978)의 역할이 컸다. 영남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 중에서 현재 영남 서화계를 이끄는 화맥의 연원은 서동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근대기 대구 서화계의 대표적 인물인 서병오가 설립한 교남시서화연구회로부터 이어져 온 대구화단의 서화 교류 및 교육을 위한 기관들의 연혁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서동균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갈고 닦았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문인화의 경지를 열었다. ● 서동균은 평생토록 서화를 연구하였으며, 끊임없는 노력으로 작품 세계를 향상시켜 나갔다. 서동균의 글씨는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서법을 곁들인 행서가 주류이며 사군자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특히 그의 묵매도는 강한 필치를 구사하여 굵은 줄기의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데, 완전히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한 상당한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서동균은 서병오로 대표되는 영남 서화의 맥을 이었으며,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화 세계를 이루었다. 서동균의 작품이 지금도 깊은 감동의 울림을 주는 것은 그의 작품 속에 작가로서의 진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화가로서의 서화에 대한 진지한 탐구심은 서화에 대한 이론(理論), 즉 '서화론(書畵論)'으로 발현된다. 서동균이 입론(立論)한 서화론은 작품으로 시각화되었다." - 김취정(고려대학교 강사, 서울대박물관 객원연구원)
태소 주경(1905-1979)은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한국의 서양화 1세대인 고희동과 이종우에게 데생 및 유화를 지도받았다. 그가 19세에 그린 그림인 「파란(1923)」은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화로 알려져 있다. 1928년 도일하여 동경의 가와바타미술학교와 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광복 후에는 대구에 정착하여 대구 미국공보원(USIS) 원장(1950), 국무총리 비서관(1954), 외무부장관 비서관(1955),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1955-1957), 한국미술협회 경상북도지부장(1962∼1971)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에는 경북미술학원을 설립하여 1979년 작고하기까지 지역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며 창작활동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 갤러리M에서 개최되었던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이후로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작품 20여 점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주경의 양식변화 속에서 추상의 시도가 지닌 의미는 우리 근대미술이 지닌 모순과 근대정신의 일면을 동시에 비춘다. 유럽의 추상주의 정신이 부정하고 극복하려고 했던 인습적인 회화 전통이 서양화 도입기의 우리 작가들에게는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고, 추상과 구상은 동시에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것이었다. 주경에게는 특정 양식에 대한 고집도 배타적 성향도 없었다. 양식은 필요에 따라 채택되는 것으로 생각한 그는 타자가 규정하는 편협한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 ● 주경은 1920년대에서부터 1970년대에 걸쳐 서양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받아들인 근대문명과 거기에 대응하는 의식의 변천을 진솔한 그림으로 남겨 놓아 근대미술사의 중요한 증인이자 개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들과 우리 근대 화단의 경과를 함께 놓고 화가의 의식이 노정된 좌표를 따라가 보는 일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 이경성은 주경에 대해 "자연의 객관적 진실을 외형적으로 추구하는 사실계의 화가"로 보고 "자연에 몰입하고 자연에 탐닉하는 자연주의가 주경 예술의 핵심"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주경은 자신의 조형관을 사물의 "진상"을 구해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진상이 자연의 외형적 진실을 이르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주관에 투영된 대상의 모습일 터인데, 단순히 사실적인 작업처럼 보이는 그의 정물들 가운데서도 초현실적인 느낌이나 상징주의적인 요소가 고독한 실험의 흔적들로 암시되고 있어 주경은 '사실성' 그 이상의 미학을 추구하는 작가임이 틀림없음을 깨닫는다. "진상"을 표현하겠다는 예술적 포부를 견지한 심미주의자로서 비타협적인 예술정신이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들과 함께 깊은 인상을 남겼다." - 김영동(미술평론가)
극재 정점식(1917-2009)은 경북 성주에서 출생하였고, 해성보통학교와 대성학원에서 수학했다. 1941년 만주로 건너가 하얼빈에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고, 1946년 귀국 후 경북 선산 오상중고등학교,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며, 1964년부터 계명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후 1984년 퇴임하였으며, 퇴임 후에도 명예교수로 후학 양성과 함께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대구미술가협회(1955), 신조회(1972) 등의 발족과 결성에 힘썼으며, 모던아트협회(1957-1960), 창작미술협회(1974-1995)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4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작품 20여 점을 통해 작가의 작업 전반에 걸친 변화와 창작에의 집념을 느껴볼 수 있다.
"우리나라 추상 미술사에서 정점식의 예술위상은 크게 두 가지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하나는 해방 후 30년 동안 국전 전성기 속에서 특히 초기 50년대에서는 완전히 사실적인 화풍이 지배했음에도 정점식은 대구라는 지역을 넘어 한국 추상화 1세대로서 한국 추상화 태동기부터 중앙 중심의 예술활동을 펼친 파이오니아적인 개척정신 소유자였던 점이다. 그만큼 한국 추상화의 진정한 개척자 중의 한사람이다. 둘째로 화풍에서 한국 추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 편승하거나 그들과 추상화의 역사적 궤도를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 개척으로 일관한 창작 자세 또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 정점식 화업의 절정기는 의외겠지만 대학 정년퇴임 후의 1980년대부터 노년기이다. 그는 곧잘 미술 이론면에서 서구미술을 언급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실제 그의 추상화풍 초기에서는 서양미술사 논리에 매몰되어 기계적이고 건축물 같은 냉엄한 이지적인 화면을 보이고 있지만, 만년으로 갈수록 그런 서구적인 이지성에서 탈각하여 드디어는 한국적인 정감성을 띤 친근감 있는 화면으로 환원된다. 거기에는 형체와 색조가 융합을 이루어 농익은 구수함과 토속적 야취함이 어우러진 조형세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묵필 같은 율동적 리듬감, 거기에다 토속적 깊이감과 야취함이야 말로 그의 회화세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 정점식 예술인생을 함축하는 키워드라면 극재(克哉)라는 그의 호에서 암시되듯이 야심의 투지력으로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란 점으로 모아진다.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을 창립하고 평생 모범적인 선임교수로서 주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첨단의 추상화라는 예술의 텃밭을 일구어나간 점, 그 얼마나 개척자적인 자세와 분투적인 노력이었을까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 이중희(한국근현대미술연구소장)
목랑 최근배(1910-1978)는 함경북도 명천에서 출생하여 1931년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 동경일본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 귀국(1936)하여 조선일보사 광고부에 입사(1937),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부, 동양화부에 총 3점을 입선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사의 폐간으로 퇴사하여 김천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탄금도」로 동양화 특선과 함께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해방 후 김천고등학교 교감, 김천여고, 문경고, 경북여고, 대구고, 영주여고 교장을 역임하며 교육활동에 힘썼다. 1965년 효성여대 생활미술과 교수로 취임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동시에 창작활동에도 매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초기 서양화 작품을 비롯해 동양화 기법의 인물, 정물, 풍경화까지 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의 근대기로 일컬어지는 시기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시기, 전후 복구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를 일관된 삶의 자세로 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시대적 불운 속에서 자의로 혹은 타의로 자신의 삶을 단절하는 많은 근대기의 화가들 가운데 삶의 기록들을 바쁘지 않게 차곡차곡 쌓아온 화가가 있다. 목랑(木朗) 최근배(1910-1978)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 아닐까! 목랑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본미술학교에서 유화와 일본화를 전공하여 두 분야에서 모두 훌륭한 성과를 낸 우리 근대기의 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근대기의 많지 않은 작가들이 일생을 두고 고민한 문제이겠지만 특히 목랑과 같이 지역의 화단을 중심으로 자신의 화법을 계발하고 동양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일생을 두고 작업한 작가는 드물다. ●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작가의 대열에 앞 다투어 거론되지는 않지만 그가 이룩한 성과는 적지 않다. 눈에 확연히 보이지는 않지만 일순간도 쉬지 않고 강을 따라 흘러 대해(大海)에 이르는 강물처럼 그의 작업에 대한 열정과 노력들은 쉬지 않고 이어져 마침내는 자신만의 대해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입상한 경력과 일본여성과의 결혼이 해방이후 화단으로부터 동떨어져 은둔의 시기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지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목랑의 일본화풍을 벗어나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는 소재의 현재성과 동서양화의 결합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낸다. 그의 전통적 기법의 재해석은 관념적, 이상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 풍경으로 이루어져 더욱더 값진 것이다. 그리고 사실주의 수묵채색화와 전통산수화와의 결합은 21세기 한국화단에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일 것이다." - 하정화(동양예술학 박사)
이산 홍성문(1930-2014)은 경북 김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54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그는 조각가 이전에 시인으로 먼저 문단에 등단하여 다수의 시집을 발간했고 1963년부터 1995년까지 30여 년간 대구교대, 효성여대,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창작과 동시에 후진을 양성하였다. 1965년 제14회 국전에서 「동양의 얼굴」로 입선한 이후 국전에서 세 차례의 특선(제21회, 제23회, 제24회)과 문화공보부장관상(제22회)을 수상했으며, 63미전, 이상회, 경북조각가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전시에서는 작가의 각 시기별 대표 작품 20여 점을 소개한다.
"1960년대의 대구 조각은 불모 상태였다. 1960~70년대 대구에 미술대학이 생기면서 조각이 확고한 미술의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지역에서 조각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홍성문이 최초였다. 그는 1969년 '이상회'를 창립하였고, 1980년에는 '경북조각회'를 창립하였다. 이전에는 '63미전'을 결성하여 처음으로 조각 작품을 선보였다. ● 홍성문 작가의 작업 주제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다양한 인체 포즈의 구상적 형상미와 단순화시킨 면(面)적 미의 추구를 통한 인간애와 사랑, 인간의 내면성과 존엄성을 표출하였다. 두 번째, 불사조, 새, 닭 등 조류를 매개로 한 선적 조형 연구, 그리고 달과 산, 나무, 구름 등 자연을 통한 인간과의 합일성과 무작위의 드로잉을 통한 선율과 매스, 개성적인 형태의 추구이다. 재료적 측면에서는 느티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를 활용한 목조에 천착하였는데, 작가는 "둥그런 안에서 하나의 인체를 캐낸다던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캐내고자 하는 그런 신념, 나무가 제일 다루기가 수월하고 시간이야 오래 걸리지만은 묘미가 있지요."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바 있다. ● 홍성문의 '서시(序詩)-생명의 그림자'를 보면 "시나 조각은 서로 다르면서도 매양 하나인 것이... 이정표도 없는 휘휘로운 길목마다 시를 그림자로 이끌고... 조각을 그림자로 이끌고... 네게로 뛰어와 말없이 지켜주던 그림자가 되었지."라고 읊고 있다. 즉 그는 평생 동안 시와 조각을 병행하면서 문학적 감성을 조각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 홍원기(대구교육대학교 교수)
이번 전시는 지역 미술을 형성하고 발전시키고자 했던 5인의 선구자들의 예술을 향한 꾸준한 노력과 창작의지를 느껴봄과 동시에, 지역작가와 함께 지역미술의 역사를 정립하는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의 지속적인 역할과 방향성을 모색해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 ■ 대구문화예술회관
Vol.20211121f | 시대의 선구자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