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본 사업은 성남문화재단 2021 청년예술창작소 청년예술프로젝트 운영 지원금으로 추진됩니다.
주최,후원 / 성남문화재단_청년예술창작소 주관,기획 / 덤불
관람시간 / 01:00pm~08:00pm
애프터선데이클럽 after sunday club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149번길 5 진구네식당 B1 @aftersundayclub
땅 딛고 헤엄치기 ● 실존적인 불안을 견디는 데에서 나아가, 각자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기로 결심한 세 사람. 팀 덤불이 함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땅'이다. 이들이 땅과 관계 맺는 방식은 '죽이기, 고르기, 키우기'라는 순환적인 행위로 함축되는데, 이번 전시는 확장된 시공간 속에 자신을 열어 놓음으로써 비좁은 자아의 영역을 벗어나려는 시도다. ● 고대의 의례는 후대의 필요에 맞게 변조되면서 맥을 잇는다. 김미루의 유화에서 나타나는 장면들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 여성들이 행했던 의례를 연상시킨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농경 의례를 도시에 맞게 변형한 '테스모포리아Thesmophoria'와 '아도니아Adonia'가 열렸다. 테스모포리아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기리기 위한 봄 축제로, 땅을 파서 만든 구덩이에 죽인 돼지를 묻음으로써 땅에 거름을 주는 의례였다. 여성들은 사흘 동안 단식하며 금욕했고, 차가운 땅에 몸을 웅크린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딸 페르세포네를 묻은 데메테르의 슬픔을 기억하는 몸짓이었다. 1) 한편, 아도니아는 여성들을 즐겁게 할 줄 알았던 아도니스 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례였다. 매년 7월, 여성들은 양상추를 키우다가 일부러 말라 죽게 했는데, 젊은 신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그들은 슬퍼하는 대신에 마음껏 마시며 놀았고, 향료로 몸을 데우며 평소에는 억압됐던 여성의 성욕을 찬양했다. 2) 한쪽은 육체의 차가움을, 다른 쪽은 뜨거움을 활용하여 죽음을 기렸는데, 김미루가 그린 장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두 축제가 함께 되살아난다. 둥근 낫으로 연둣빛 풀을 베어내려는 그림에서는, 때 이른 죽음-수확을 기념하는 열띤 육체들이 둘러 앉아 있다. 그중 낫을 쥔 사람을 클로즈업한 장면에서는 풀 대신 잘린 팔 한쪽이 손에 들려 있는데, 희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는 듯 숙연한 분위기다. 저 뒤편에는 은쟁반을 들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인다. 그는 땅에 줄 거름을 방금 넘겨 받은 것 같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누군가 등을 땅에 바짝 붙인 채 널브러져 있다. 식어가는 몸 주위로 검게 변한 흙이 시간의 경과를 보여준다. 이렇게 동시 다발적으로 존재하는 장면에서 김미루가 불러내는 의례의 핵심은 '치유'다.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축제는 '억압받는 자들'이 겪는 모욕과 고통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꿔준다.' 그림 속 인물들은 단순히 '희생자'로 머물지 않는다. 때론 '능동적인 행위자'로 변모하며, 3) 사회가 규정한 정체성을 거부한 채 머리가 잘린 모습으로 출현한다. ● 김예솔은 원목을 깎아 만든 목판에 흑연을 발라 반복적으로 찍어내면서, 조부모와 부모, 자신으로 이어지는 세대의 흐름을 은유적으로 조망한다. 그가 판에 새겨 넣은 이미지는 젖, 꽃받침, 마트료시카 인형이다. 이 세 가지 모티프는 공통적으로 세대 간의 연결을 나타낸다. 각 세대를 구분하는 표시를 인지하면서도, 가시적인 것 이면에 흐르는 연속성을 포착하기. 이 까다로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선택된 것은 생명을 먹여 살리고 지탱하는 요소, 반복을 통해 동일성과 차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기다란 종이에 일렬로 찍어낸 문양은 보는 방향에 따라 점차 흐려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진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한 선명도와 함께 이미지의 윤곽도 달라지는데, 동일한 판에서 태어난 것이라도 완전히 같은 이미지는 단 한 쌍도 나오지 않는다. 눌러 찍을 때마다 판에 묻은 가루가 움직이는 정도와 판에 압력을 가하는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예솔의 작업이 드러내는 진실은, 우리가 "과거로 뻗어 있는 거대한 무언가에, 말 그대로 인류의 시초에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생명 흐름의 원천은 아니지만 부모를 매개로 그 흐름에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4)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대물림 되는 것 중에는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섞여 있는데, 양자를 분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씨를 뿌리기 전에 땅을 고르듯이, 내가 성장할 바탕을 파악하고 골라내는 일이 자유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 신혜승은 그간 겪어온 뿌리 뽑힘의 고충을 "요동치는 땅, 그 위를 부유하는 나"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동질감을 느끼는 존재인 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하고, 자신과 할아버지 사이의 시차와 심리적 거리를 사운드로 표현한다. 매일 새벽 4시, 괘종시계 소리에 맞춰 기도를 올렸던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그때의 시간 감각을 지금, 여기에 생생히 불러온다. 그는 할아버지의 수행적인 태도에 관심을 가지는데, 땅을 딛지 못해서 겪는 불안과 고독을 할아버지도 똑같이 느꼈던 건 아닐지, 그래서 그렇게 기도하며 현재를 다져갔던 것일지 추측한다. 땅이 요동친다고 느끼는 사람은, 계속 살아가기 위해 종교적 에너지의 근원인 '대양적 느낌oceanic feeling'에 몸을 맡길 수 있는데, 할아버지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느낌은 '영원의 감각이자 무한하고 한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느낌'으로, 자아가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되기 전에 느꼈던 '우주와의 유대감'을 가리킨다. 5) ● 자신의 근원을 찾아 떠난 여정에서, 세 작가는 자기를 넘어서는 차원과 맞닥뜨린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묻는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질문이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그 질문의 가치가 퇴색될 리 없다. 낡고 진부한 것은 그 질문에 답해온 방식들이다. 덤불의 도전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런 관습에 몸을 맡기지 않고 직접 물음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은 굉장히 고되고 끝이 안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미루, 김예솔, 신혜승은 서로의 맥락을 이어 함께 타고 오르는 길을 택했고, 각자는 물론 팀의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 이 모든 여정이 『땅, 땅, 땅』 전시라는 새로운 땅을 일구었다. 이제는 그 땅을 딛고 더 많은 이와 함께할 때다. ■ 홍예지
* 각주 1) 리처드 세넷, 『살과 돌: 서양 문명에서의 육체와 도시』, 임동근 옮김, 문학동네, 2021, pp. 81-83 2) ibid., pp. 86-88 3) ibid., p. 95 4) 마크 월린,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정지인 옮김, 푸른숲, 2016, pp. 106-107 5)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성해영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p. 50; p.55
땅 묻기: 묻어 놓은 질문으로 묻습니다. ● "우리는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우리이기 앞서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자신 있게 우리를 우리라고 칭합니다. 우리가 모두 땅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까닭일까요. 당신과 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자신이 무엇보다 특별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싶어 하는 것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땅에서 내가 왔고, 주변의 모든 것이 왔다는 것을 은연중에 아는 까닭일까요. ● 결국 우리 각각이 이 땅의 한 줌 어치 단편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라는 것은 당신과 저를 포함한 협소한 단편들의 결집일 것입니다. 그래서, 찍는 순간 분리되어 원본에 자리 잡지 못하고 변주된 단편들과 그 원본은 땅에서 출발하여 땅을 닮았지만, 생성과 동시에 원본에서 탈출한 우리의 서사를 밝힙니다.
"우리는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내던져진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땅에서 태어나 땅 밖으로 던져진 우리는, 땅으로 향하는 길을 잃었습니다. 땅으로 가지 못하는 이에게 눈과 귀와 코는 오해와 불통을 만들기 때문에 혼란만 줄 뿐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는 자에게 입은 자신을 탐욕과 절규로 몰아넣기에 불필요합니다. ● 그래서 식물은 눈과 귀와 코와 입이 없나 봅니다. 땅으로 모든 감각을 내립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모든 생명력을 다집니다. 밖을 향하던 모든 감각은 자신과 근원으로 돌아옵니다. 아직 그렇지 못한 우리는 식물을 좇습니다. 땅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 벌거벗은 인간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그 표지를 낫으로 쫓습니다.
"우리는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뿌리내린 자와 뿌리내리지 못한 자의 간극은 쉬이 극복되지 않습니다. 땅에 닿지 못한 지금, 자신의 단편에서 땅으로 돌아간 할아버지의 단편을 짚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르겠습니다. 땅에서 던져져 땅 위에 자리 잡지 못했지만 지금은 땅으로 돌아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한 단편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 땅에 발 디디지 못한 단편과 땅으로 돌아간 단편 사이에서, 우두커니 맴돕니다. 땅의 진동처럼 느슨하게 울리는 단편들. 그 안에서 어느 한편에도 쉽사리 다가가기 힘든 우리. 끝내, 감각과 생각과 감정은 공간을 자유롭게 배회하며 각각의 방식으로 질문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했던 질문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 정봉주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았다. 너는 어디서 왔니, 우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 이번 전시 '땅, 땅, 땅'에서 팀 덤불은 성남청년예술창작소가 주최한 '청년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해 2번의 과정 전시를 거쳐 발전시킨 최종 결과를 선보인다. 처음 세 작가는 현시대에서 달라져 가는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가정을 세웠다. 인간은 태초에 식물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2번의 과정전시를 거치며 그들은 식물에서 그것이 자라난 땅, 근원으로 시선을 옮긴다. 각자의 땅에 묻힌 것들을 들여다보고 대화하고 다시 덮어내며 세 사람은 현재라는 대지를 딛고 선다. ■ 팀 덤불
내게 이미지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던 건 한 영상이 내 안에 돌처럼 가라앉은 뒤부터였다. 영상 속에서 한 소년이 다른 곤충을 먹고 있는 사마귀를 손바닥 위에 올려둔 채 유심히 관찰한다. 타오르는 듯한 형광 연두빛의 몸, 머리가 사라진 몸,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투명한 시선. 여기서 하나의 답을 찾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먹고 먹힘으로써 생명에 참여하는 존재들, 그것을 에너지의 순환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으로 회귀할 수 있다면,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 김미루
길게 늘어진 종이 위로 이미지들이 연속된다. 하나의 나무 판으로부터 나온 이미지들은 각자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으로써 세로 혹 가로 열에 나열되어 있다. ● 나의 감각들은 이전 존재들로부터 내게로 도달하였다. 그들과 나는 분리되어 있으나, 연결되게 느껴진다면 내가 가진 이 감각들은 나로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까. 흔적들은 생성되고 있는가 소멸되고 있는가? ■ 김예솔
요동치는 땅, 그 위를 부유하는 나. ● 떠난 그에게서 느껴지는 나의 존재는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새벽 4시에 울리는 네 번의 종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그의 소리는 바깥소리와 함께 울리며 나를 바닥에서 띄워 올린다. 그 순간의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나는 땅에 딛지 못하고 부유한다. 그 어스름한 새벽녘, 시간과 함께 떠도는 나는 이 공간 속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 신혜승
Vol.20211105c | 땅 죽이기, 땅 키우기, 땅 고르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