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3기 입주작가 릴레이전 & 오픈스튜디오

The 13th Artists-in-Residence of Yeongcheon Art Studio Relay Exhibition - Open Studio   2021_1020 ▶ 2021_1219

문혜주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문혜주_이혁준展 / 2021_1020 ▶ 2021_1024 이원기_이정민展 / 2021_1103 ▶ 2021_1107 시원_신나운展 / 2021_1117 ▶ 2021_1121 정민영_한아름展 / 2021_1201 ▶ 2021_1205 김시원展 / 2021_1215 ▶ 2021_1219

주최,주관 / 영천시_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YEONGCHEON ART STUDIO 경북 영천시 왕평길 38 (교촌동 298-9번지) 1,2전시실 Tel. +82.(0)54.330.6062 www.yc.go.kr

문혜주_이혁준展 / 2021_1020 ▶ 2021_1024 깨진 금기, 탈주하는 형태 ● 도자 형식을 기본으로 여러 방법론을 접합하는 문혜주의 작업은 현대 속의 원시를 일깨운다. 도예라는 고풍스러운 분야를 전공한 작가는 도예가 현대성의 요구 또한 받음을 인식한다. 도예의 갱신을 위해 작가는 원시와 현대를 관통하는 보편성을 찾는다. 상품의 용기와 같은 현대 적 대상 속에도 깃든 영험한 기운들을 끌어내는 기법은 그러한 일회용 상품들은 물론 '예술'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방식이다. 작가는 무엇으로도 변형 가능한 흙덩이의 유연성을 살려 다른 재료와의 접합을 꾀한다. 이는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라 때로 사회적 울림을 가지는 메시지를 위한 것이다. 최근 도자 작업에서 구멍 밖으로 나온 털처럼 수북한 것들은 마치 구멍 난 용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질 같기도 하다. 유기체 자체가 일종의 그릇이다. 작가는 페브리즈 병, 케찹 병, 소주병 등 실제의 모델에 바탕 한 일상의 용기(容器)들에 [무복을 입은 토우]라는 제목을 붙였다. 주술은 원시시대의 감수성 및 제도지만, 그러한 사고가 인간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 현대의 상품은 물신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비슷비슷한 기능을 초월해서 큰 이득을 남길 수 있다. 이 작은 형태들을 큰 화분 형태를 배경으로 쏟아질 듯 배치된 하얀 병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기우제]라는 제목은 물이 쏟아지는 기물의 형태를 활용한다. 그것은 유사함을 기준으로 서로를 연관 짓는 원시적 사고를 화분이나 일회용기 등 현대적 사물의 조합을 통해 표현한다. 마을 입구의 큰 나무에 둘러쳐진 주술적 장치 대신에, 작가는 자연의 축소모델인 화분을 세팅한다. 작가는 최신 사물을 오래된 방식으로 만든다. 여성의 노동이자 예술인 뜨개질의 방식도 혼용된다. 작가는 요즘 작업에 활용하는 짧은 뜨기 기법이 도자의 코일링 기법과 유사하다고 본다. 한편 흙으로 빚을 때 나는 자신의 손자국을 다시 짓눌러 삭제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는 삶의 역설을 표현한다. 예술 또한 그렇다. 작가는 도예 작업이든 뜨개질이든 자신의 작업이 현대의 주요한 상품 유통의 회로에서는 벗어난 그림자 노동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 흙과 섬유로 표현된 대상은 유령처럼 하얗게 남겨진다. 하얀 색조에 간간이 끼어있는 붉은 색은 희생을 떠올린다. 그림자 노동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식 영역에서는 그러한 노동을 그림자화, 또는 유령화 함으로써 지배 질서를 원활하게 유지한다. 여성이자 작가인 문혜주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상징적 우주에 작품을 통해 도전한다. 작업을 열심히 할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작가는 사회적 쓸모란 무엇인가를 따져본다. 아직도 사회는 예술작품을 작가의 주관적 배설물이라고 보는 것일까. 객관적이고 쓸모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사회가 원하는 쓸모만 지향해도 망하는 판에 쓸모없음이라니, 예술가는 쓸모 있음과 없음에 사이에서 도박한다.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일회용기를 실제 크기와 형태 그대로 빚은 다음에 구멍을 뻥뻥 뚫어 이미 쓸모없어진 대상을 더욱 쓸모없게 만들고, 이러한 이중의 부정을 통해 생겨난 작품을 예술적 소통이라는 새로운 쓸모로 바꾸려 한다. ● 요즘 작업에서 기괴하게 변형되어 기능을 상실한 의자 또한 마찬가지 맥락이다. 물건은 늘 인간과 비유되곤 한다. 신체를 감싸는 구조인 의자는 특히 그러한데, 문혜주의 작업에서 의자 형식을 빌은 작업은 인간이라는 종의 결정적 기능인 생식 또한 변형시킨다. 굳이 생식이 있다면 그것은 유성생식이기 보다는 무성생식, 즉 분열이다. 특히 그림자가 본체를 잡아먹는 듯한 형태는 실체화되지 못한 나머지들의 가치 전도를 꾀한다. 의자가 사람은 물론 사회적 위치라는 상징을 생각할 때, 상징적 질서에 대한 작가의 불만 또한 반영되어 있다. 예술가 입장에서 사회가 지정해준 자리나 정체성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 작가가 구멍 난 병과 하수도 망을 같이 배치한 것은 생성된 것이 무엇이든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유약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허옇게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무엇인가 새겨지기 전, 또는 후를 말한다. 그런데 원래 그것이 일회용 상품의 용기라는 모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은 텅 비워진 셈이다. ● 출시된 상품이 자기를 구입해 달라고 요란하게 떠든다면, 정체불명의 이 하얀 용기들은 침묵한다. 또는 무의미한 소음이긴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백색소음이다. 몸통에 뚫린 구멍은 무엇인가 사용되었다는 표시인 펀칭을 떠올린다. 용기 자체가 몸과 비유된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보호되는 튼튼한 경계를 허물어버린 취약한 상태다. 동시에 이러한 상태는 살아있는 것의 특징인 안팎의 소통을 암시한다. 섬유를 이용하여 구멍 밖으로 흘러넘치는 듯한 액체를 암시한 것은 여러 겹의 의미를 내포한다. 생명은 닫혀있으면서도 열려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닫혀있다가 열리는 상태는 인류학이나 종교학에서 오염, 죽음, 열락, 확장, 금기 위반 등등으로 관념화되곤 한다. 굿같이 다른 차원과 접속하려는 행위의 절정에서 이처럼 존재의 경계를 넘어오는 것들은 극적 효과를 자아낸다. 문혜주의 작업은 경계를 넘나드는 근본적 체험을 도예나 현대적 사물(상품)로 표현한다. ● 도시 곳곳에 하수를 처리하는 빗물받이를 무속에 쓰이는 사물과 연결시킨 것은 원시와 현대 모두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성/ 속, 순수/ 오염 등의 구별을 비롯하여 명확히 구별되어야 할 경계에서 어중간하게 걸쳐 있다. 눈에 띄지 말아야할 비체(abject)는 종교적 신비와 숭고의 체험과도 공유된다. 경계를 유지해야 하는 조직은 이러한 위반의 상황을 금기시하기도 하고 신성시하기도 했다. 금기는 조직의 보호를 위한 것이지만, 어떤 금기도 완벽하게 지켜질 수 없다. 또한 어떤 조직이든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는 한 몸체에 공존하기 마련이다. 예술 또한 같은 방식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이 금기 위반을 상시화하면서 금기가 금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선정적인 사건으로 소비되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하수를 처리하는 빗물받이에 걸쳐 있는 선적 다발들은 망을 통과하지 못한 쓰레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모델은 무속적 도구에서 왔다. ● 현대에도 부족 생활을 하는 소수민족에서도 볼 수 있는 숱이 많은 술 형태의 사물은 탈혼망아에 이르게 하는 푸닥거리를 극적으로 표현하게 한다. 빗물받이 형태에 걸쳐 놓은 길쭉한 것들은 무신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유일신의 이미지와 상반된다. 자기가 믿는 것만을 강조하는 근본주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반목과 전쟁을 낳는 것은 무신도를 낳았던 다신교같은 다양한 중심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작가는 정전과 교리 중심의 지배적 종교 배후에 신비와 이단 등으로 분류되어왔던 종교적 체험에 주목한다. 이러한 흐름이 인간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성적 환몽을 꾸는 듯한 표정과 포즈를 한 성 테레사 수녀의 법열은 가장 유명한 예다. 하지만 세계를 뒤흔든 감염병 사태는 체액이 교환되는 이러한 원초적 체험을 다시금 금기시할 것이고 위반은 또 다른 차원에서 벌어질 것이다. 금기는 도자기처럼 깨지곤 한다. 문혜주의 작업은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를 다공질로 제작함으로서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 의자라는 도상도 마찬가지다. 명백히 인간을 떠올리는 의자는 기괴하게 변형되었다. 이번 전시에 붙인 부제인 [스펙타클 사이비 휴먼]은 깨져야 할 금기 중의 하나로 휴머니즘을 지목한다. 이미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인간이라는 유비를 벗어났지만, 여전히 인간은 문화적 관습의 기준으로 작동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진정한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유일신이 문제되었듯이, 그러한 유일신의 반영 상인 인간이 가부장적 남성이라는 점이 문제다. 더 정확히는 백인, 남성, 어른, 이성애자, 비장애인이다. 타자에 배타적인 주체-동일성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의식은 생산력과 기능만을 중시하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단기적 전망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키워드의 하나로 지목하는 '스펙터클'은 인간이라는 중심을 이미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스펙터클은 인간을 재료로 삼고 단순한 소비자의 역할에 머무르게 한다. 도자를 비롯한 예술적 작업은 하얀 도기들처럼 유령화되고 그림자화 되었지만, 작가는 이러한 주변적 위치에서 새로운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 ■ 이선영

이혁준_놀다_해변_디지털 프린트_19.5×19.5cm_2021_부분

논다는 행위에 대하여. ●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이 말을 심심치 않게 듣고 살아왔다. 격동의 근대 사회를 지나온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상 전 인류 사회에서 노동은 최근까지 개인의 삶과 가족에서부터 국가에 이르는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사회를 지탱해주는 매우 신성한 가치였다. 굳이 이념 시대의 가치와 철학을 거창하게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얼마 전까지 늘 생존을 위해 일하고 투쟁해 왔다. 이제는 기성세대임을 부인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 오랫동안 동참해왔던 이런 전 인류적 신념에, 아니 보편적 생각에 조금씩 변화의 틈이 느껴진다. ●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듯이 눈을 떠보니 세상이 변했다. 노동 중심의 삶을 살아온 세대에게 지금 이 시대는 무엇인가 이상하다. 여전히 노동의 가치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과 사회를 지탱해가는 중심적 행위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에 삶의 가치와 목적을 두려는 경향은 줄어들었고, 정반대의 사례들이 언제인가부터 당연한 우리 삶의 모습이 되었다. 베짱이의 노래는 시간을 갉아먹고 힘든 삶을 초래하는 나태함이 아닌 창의성과 발전의 상징이 되었다. 음악과 춤은 일반 대중뿐 아니라 국가지도자까지 나서서 찬양하는 대상이다. 쓸데없는 공상과 망상은 창조의 발판이 되었고, 배우와 가수는 시대를 이끌어가는 투사가 되었다. 음침한 유해시설로 치부되었던 오락실의 찬란한 화면들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승화하여 미래 지향적 산업 영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인구절벽으로 생존을 걱정하는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여흥과 관광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이제 놀고 쉬는 것이 우리 삶과 사회를 움직인다. 농부의 땀이, 사냥꾼의 화살이, 철도와 공장의 기계 소리가 그랬듯이. ● 전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준비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근거리에서 꾀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가끔 주제와 형식의 방향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때로는 동조하기도, 때로는 그의 생각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 그가 작업을 하는 과정은 예술의 범주에서 즐긴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경우 중 하나였다. 다소 의미 없어 보이는 집착을 부리기도 했고, 과정에서의 선택들이 특별한 사명감이나 의무감보다는 개인적 취향과 기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업에 기반을 둔 삶이 항상 즐거움과 자기만족으로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인가부터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여느 직장인들과 같이 적지 않은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했고, 이해하기 힘든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고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암이라는 삶의 고비를 마주했던 계기는 그에게 예술이라는 비노동적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놀아야 하는 기간을 선사했다. ●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을 넘어 '놀다'라는 행위와 시간에 대해 드러내는 작가의 작업을 결과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적지 않게 느슨해진 태도에서 과거만큼 치열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시점의 착오일지도 모른다. ● 예술은 오래전부터 잉여, 유희의 범주로 인식되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예술에 대한 관점이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양해진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예술, 놀이, 노동과 생산.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 내는 이 시대의 가치를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축적된 작업들이 가볍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경험과 시간에 근거하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오랜 시간의 파편적 이야기들이 뭉쳐져 나오는 형식의 힘이기도 하다. ● 이제는 소비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놀아야 함이 개인의 역할이자 사명이 되어가는 이 시대를 생각해 본다. ■ 박영미

이원기_빛이 깨진 흔적_리넨에 아크릴채색_244×122cm_2021

이원기_이정민展 / 2021_1103 ▶ 2021_1107 이것들은 불안에서 시작되었다. ● 인간과 불안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있기에, 사고하기에 불안한 감정을 느낀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불안을 인정하고 수용하는지,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지 그런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감정을 오롯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삶은 점점 고통 속 '절망'에 빠지게 되며, 끝내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발하게 된다.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은 쇠렌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의 저서이다. 여기서 말하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다. ● "절망은 죽음과 싸우면서도 죽을 수 없는, 죽을병에 사로잡힌 자의 상태와 비슷하다. 죽음이 희망이 될 정도로 위험이 클 때, 그 죽는다는 희망조차 없는 상태, 그것이 절망이다." ● 키르케고르는 스스로 내면의 병에 대해서 정확하게 진단하길 권한다. 육체의 아픔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보인다. 그래서 스스로 치료하고, 쉽게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병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런 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롯이 스스로 인정하고 감내해야 하기에 내면의 병이 어렵고 힘든 것이다. ● 이원기의 작업은 불안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20대 초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온전히 경험하면서 불안의 증상, 불면을 경험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면은 심해져, 이젠 불면증, 병증의 단계까지 넘어왔다. 그는 자신 내면에 있는 불안을 마주하기 시작하며 자기 내면과의 대화인 작업을 이어왔다. 작가에게 작품은 대화의 과정이 담긴 치유의 일기인 셈이다. 작가는 자신이 생활하는 주변 풍경인 '실제'와 자신 내면의 감정인 '심상'을 한 화면에 담아낸다. ● 「내가 가진 응어리(2017)」는 전면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고 움직이는 바람, 물결과 안개가 채워져 있다. 그 어지러운 이미지 사이에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검은색 알의 형태, 응어리가 존재한다. 작가의 오래된 생각과 감정,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은 시간이 지나 점차 쌓이고, 뭉쳐져 응어리가 되어버렸다. 부화하기 위해 알을 깨뜨리는 아기 새의 고통처럼 응어리를 깨기 위해선 그만큼 작가에게 아픔이 필요했을 것이다. 알이 깨지지 않으면 아기 새는 살 수 없다. ● 「흰 약의 부작용(2021)」은 눈 오는 어느 겨울밤이다. 짙고 어두운 풍경은 새하얀 눈에 묻혀버렸다. 작품은 어둡지만 빛나는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집합체이다. 테두리의 빨간색 프레임은 작가에게 경고를 의미한다. 작가의 불면은 약에 의해 괜찮아졌지만, 병증은 더 심해지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 경계가 모호한 눈 오는 어느 겨울밤의 느낌처럼 말이다. ● 「빛이 깨진 흔적(2021)」은 칠흑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바다의 풍경이다. 작가는 어두운 밤바다이지만 알록달록 화려한 물감으로 작품을 채운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밤바다도 시간이 지나거나, 아니면 시간을 되돌려 본다면 세상 어느 것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의 바다가 된다. 그 빛나는 시간은 힘든 어둠을 견딜 힘을 주는 것이다. ●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리고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 키르케고르는 절망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기회로 본다. 절망에 빠진 인간만이 진정 스스로 질문할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새로운 기회를 주기 때문에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만 긍정으로 해석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원기도 불안과 절망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작업으로 솔직하게 풀어낸다. 어떤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말이다. ■ 김아림

이정민_지원진 풀

우리의 밝은 미래와 함께하는 식물 ● 식물은 동물에 비해 수동적이라 생각된다. 이동할 수 없는 식물은 동물(動物)의 배경이 되어줄 따름이다. 그러나 식물도 바람이나 기타 외부의 요소에 의한 움직임이 아닌 내부의, 또는 미시적 움직임이 있다. 내외부적 요인의 움직임은 식물의 생존전략이다. 이정민이 여러 형식을 통해 다루는 주요 소재는 내부와 외부 모두를 아우르는 움직임 속의 식물이다. 외적일 뿐 아니라 내적인 과정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식물이 아니더라도 대상을 그저 작품으로 옮겨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대상은 그저 묵묵히 존재할 따름이며 침투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대상에 이미 존재하는 상투성을 걷어내고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비롯하여 이미 선점되어있는 의미를 거부했던 현대예술의 목표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드러내는데 사진은 회화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정민은 회화를 전공했지만, 사진(또는 사진적 과정)은 작업의 중요한 단계를 차지한다. 하지만 자연은 훌륭한 소재지만, 회화만이 가능한 깊이와 강도 또한 요구한다. ● 유화는 정밀한 회화적 재현에 유리한 매체지만, 재현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작가는 식물 추출물은 물론, 먹이나 수채화 등 이물감이 없는 안료를 선호하며, 그것들은 종이나 천 등을 만나서 스며들고 변화한다. 작가는 명확한 형태나 색채보다는 흔적들의 축적을 표현한다. 그래서 작품이 완성된 후에도 조금씩 상태가 변화하며, 이 또한 작품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물론 예술은 자연이 아니기에 무작정 변화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연적 안료를 화면에 안착시켜야 하는 과제도 있는 만큼, 이정민의 작업은 서정적 측면과 탐구적 측면이 공존한다. 얼마 전 시안미술관의 그룹전 [규약하는 사회] 전에 출품한 작품 [부드러운 속도](2021)는 자연의 비법이 가득 담긴 듯한 역작이다. 그 크기 때문에 마치 담벼락에 남아있는 넝쿨식물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은 패널을 연결시키면서 확장되는데, 동일한 크기의 패널을 이리저리 연결하는 다른 전시의 작품에서도 보인다. 하나로도 작품이 되면서 설치적인 단위로 이합집산하는 유연성이 있다. ● 물론 그것은 설치미술을 해야 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관찰한 자연의 다양한 면을 최대한 담기 위한 또 다른 선택이다. 자연은 총체적으로 재현될 수 없으며 시공간의 단면인 샘플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정사각형의 틀을 가지는 일련의 단위가 구성된 작품은 자연관찰자의 분석적 시점이 두드러진다. 시간을 축을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단면을 채집하고 채집된 것을 바탕으로 조형적 아이디어를 전개한다. 직접 수집하기도 하고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하여 수집하기도 한다. 사진은 회화와 경쟁하며 출발했던 당시에도 세계를 수집하는 기능으로 경쟁력을 확보했다. 작가는 오래된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수집한 식물의 씨앗 등을 모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씨앗에는 지금은 유예된 희망이 접혀있을 것이다. 작가는 방치된 재개발지의 우울한 풍경에서 길어 올린 얼마 전 개인전에 [우리의 밝은 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황량해 보이는 지방의 구도심에서 서식하는 식물들의 씨앗을 모은 작품은 되시작 하는 식물의 순환적 삶의 주기, 즉 희망을 말한다. ● 멀리서 본 풍경과 현미경적 관점이 공존하는 이정민의 작품은 예술적일 뿐 아니라 자연적 사회적 연구의 단초가 된다. 특히 재개발 지역처럼 강제로 자연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장소에서의 공공 작업들은 인간 문명을 장기적인 맥락에 재배치한다. 페허에 가까운 동네에서 발이나 빨래처럼 걸려 있는 설치 작품들은 사람 사는 흔적을 떠올리는 반가운 기표다. 이러한 공공 설치작업은 원래의 장소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이며, 재료나 소재도 친환경적이다. 인간이 그렇게만 살았어도 그토록 빨리 낡거나 쓰레기가 되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이정민의 작업은 정확한 자연적 형태를 품은 채 회화의 깊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기본바탕은 사진적 과정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옛 사진 기법이 총동원되는 고풍스러운 작업에서 '빛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진의 어원을 살린다. 거기에 빛과 밀접한 존재인 식물의 이미지와 그 추출물 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최대한 빛을 받기 위해 벽에 밀착하여 자라는 덩굴식물의 줄기는 그것들이 좀 더 많은 빛을 찾아 더듬어 나아간 궤적이 바로 형태가 된다. ● 수없이 그은 선으로 이루어진 추상화같은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다른 색조의 작품 [부드러운 속도 2]는 색감 때문인지 흐르는 물 같다. 물살에 몸을 맡기는 해초들의 모습도 연상된다. 그것은 자연이 멈춤 없이 흐른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혈맥과도 같은 흐름이 인공의 힘에 의해 막힐 때, 그리고 이러한 막힘이 쌓일 때 재앙이 발생할 것이다. 화장품이나 요리 등에 자기만의 비율로 자연을 갈아 넣는 방식이 있듯이, 먹과 식물 추출물 등을 활용해 만든 오묘한 색은 빛의 작용과 어우러지면서 종이 위에 자연스러운 식물의 궤적을 남긴다. 그리기 대신에 선택한 선 프린팅의 효과는 식물이 빛을 붙잡아 생태계의 필수요소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작가는 단지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자연의 방법 또한 참고한다. 브라운 계열의 색상은 약간 어두운 톤의 피부 아래 얽혀 있을 실핏줄도 연상시킨다. 색감은 다르지만 식물이 가지를 뻗어가며 자라는 모습은 물질과 에너지가 공간에 분배되는 패턴을 내포한다. ● 가지와 뿌리가 같은 형태인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은 강줄기나, 나무줄기, 옆맥, 동물의 혈관계와 신경계 등에서 발견되는 분지의 체계와 동형적 구조다. 작가는 자연의 외관이 아닌 구조와 운동을 표현한다. 프랙털 이론이 말하듯이, 분지의 체계는 식물과 동물, 소우주와 대우주의 세계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펼쳐지고 접혀지는 것이다. 이정민의 작업은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자연과 구조적 동형성을 가진다. 작품 [유연한 오늘]은 자연에서 출발하는 작업을 하면서 유지했던 감정적 기조가 유연함과 부드러움임을 암시한다. 그 반대는 경직됨과 딱딱함이다. 그것은 죽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연도 생산력의 수탈에 맡겨졌을 때 경직되고 딱딱해진다. 정사각형 패널을 정방형으로 배열한 작품은 초록 식물들이 결국은 갈색으로 변하면서 한해의 생애주기를 마치고 다음의 순환을 위해 준비함을 알려준다. 이정민의 작품에서는 브라운 계열의 색상이 식물의 여러 단계를 반영하는 촉감과 만나면서 다양한 뉘앙스로 변이를 거듭한다. ● 인간은 자연과 역사를 대조하면서 자연의 동일성만을 강조하지만, 자연 또한 차이로 가득하다. 채취한 식물을 직접 붙이기도 하고 식물의 색을 화면에 고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실험의 결과물은 자연과 근접해지려 한다. 작품 또한 자연처럼 시간의 흐름에 반응한다. 시간은 태어나 자라고 죽는 유기체의 생애를 지배하는 축이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변모지만, 죽음도 변모다. 식물이 이듬해에 당당히 부활한다면, 동물한테까지 이러한 주기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동물의 죽음은 식물과 달리, 그냥 끝으로 다가온다. 시안미술관 단체전과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열린 대전 전시의 부제인 [우리의 밝은 미래]는 코로나 국면과 연결 지어 희망을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늘 배반당하는 희망에 대한 역설적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우리의 밝은 미래'에 꼭 필요한 것이 식물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지구상에 생물이 가능하게 한 것도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물의 느린 삶을 인간의 것으로 하기에는 문명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 작가의 자연 관찰과 연구에 의하면 식물도 삶의 전략이 있으며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동물과 달리 최소한의 에너지 소비로 삶을 영위하는 경제적 시스템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로 다가온다. 대전의 전시에서도 선보인 [부드러운 속도] 시리즈는 어슷한 전시장 벽면에 맞춘 유연한 모습이다. 그것은 자연처럼 당면한 상황을 저항으로 여기지 않고 역이용하거나 굴곡 면을 따라간다. 사회 속에서 생존이라는 화두는 비참한 느낌까지 들지만, 자연에서 살아있는 것, 살아남은 것은 그자체가 경이롭다. 작가로서의 이정민은 예술적 방식으로 그러한 경이로움을 표현한다. 작가가 잡초를 비롯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식물을 애호하는 것은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다. [버려진 녹색]이라는 제목은 식물이 녹색으로 보이는 이유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과 관련된다. 그것은 식물에 포함된 광합성 색소인 엽록소가 녹색광을 반사하고 다른 색의 빛은 모두 흡수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작가는 녹색 잎들에서 버려야 분명해지는 역설을 본다. 하지만 녹색 자연도 곧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 예술은 자연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초록보다는 초록 이후의 색이 더 지배적이다. 이정민의 작업은 다양한 톤의 브라운으로 풍부하다. 가을이 되면 녹색 엽록소는 파괴되고 다른 색들이 드러난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여름의 엽록소는 열과 빛에 파괴되지만 꾸준히 대체된다고 말한다. 가을에는 새로운 엽록소가 생산되지 않고 그래서 항상 잎새 속에 있었으면서도 엽록소의 강한 녹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른 색이 드러나게 된다. 원래 있었던 색이 녹색에 가려진 채 있다가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것이다. 자연에는 자리바꿈이 일어날 뿐, 완전한 소멸이나 창조는 없다. 매해 다시 태어나는 식물은 그러한 자연의 진실을 알려준다. 자연에 대한 미시적 거시적 연구가 축적된 이정민의 작업에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이 가득하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며, 그 자연은 인생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공이 쌓인 것이기에 그러하다. 자연으로부터 출발하는 작품들은 생태학적 비전이 심미적 활동과 만날 때 서로를 상승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이선영

시원_Excalibur_종이에 연필_31.8×23cm_2021

시원_신나운展 / 2021_1117 ▶ 2021_1121 시원의 의심 ● 동양화는 여전히 유효한가? 지난 여름 나는 여러 바다를 다녀올 수 있었다. 여름의 시작에 서쪽으로, 여름의 절정에 동쪽으로, 여름의 끝자락에 남쪽으로. 바다로 떠남은 지금 여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떠난 해변에서 맞이한 희뿌연 시간의 결은 저기 어딘가에 있을, 내 눈으로는 잡히지 않기에 결코 알 수 없을 시간의 문을 열어주었다. ● 옛 화가들은 걸었다. 걸으면서 보고, 보면서 살피며, 그 생김새를 마음의 상으로 담았다. 이러한 의식의 끝에 붓을 든다. 보는 시각은 때마다 다르니 그 마음의 변화 또한 지구의 섭리이고 우주의 기운이리라. ● 시원은 매일 아침 작업실에 도착해 제일 먼저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외부의 시선과 소음으로부터 단절된 자기만의 세계로. 20세기 초 여성들에게 필요했던 자기만의 방처럼, 전쟁 후 부르주아 현대인에게 필요했던 소라 고둥처럼, 21세기 효율성과 가성비의 한국 사회에서 시원은 침낭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의식을 치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기"는 시원의 작업의 시작임과 동시에 창작의 근원이 된다. 프랑스어에 덤불학교(l'école buissonière)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학교에 가지 않고 덤불 속에 들어가 시간을 보낸다는 뜻으로 한국어로 무단결석을 뜻한다. 프랑스에서 덤불학교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써 부재의 철학, 그리고 제자리를 벗어남으로써 가능한 명상과 창조의 공간을 은유 한다. 그러나 후퇴를 허용하지 않고 실패를 용서하지 않는 한국 사회는 실험의 무모함과 상상의 쓸모 없음을 터부시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처벌할뿐더러, 오히려 객관적인 숫자와 적절한 역할 수행만을 요구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성장한 예술가는 강둑을 하염없이 걸으며 사고에 몸을 맞길 수도, 소라 고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마음을 다스리지도, 옛 화가들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의 변화를 따를 겨를도, 그에 따르는 지구의 섭리와 우주의 기운을 맞이할 겨를도 없다. 계속해서 과정의 성과를 증명하기에 급급하니, 서양 예술이 논하는 무용의 쾌락은 한낮 신기루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기"라는 작가의 선언은 세상의 심판을 향한 노(NO)일 것이다. 비행사 1호의 그림을 모자로 밖에 볼 수 없는 어른들을 위해 다시 그려야 했던 비행사 2호의 그림, 보아뱀이 삼킨 코끼리를 놓고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비밀을 말해줄게. 아주 간단해.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회적으로 허락된 규칙과 가치 외에는 모두 시답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면서 지리나 역사, 수학이나 공부하라는 한국사회에서 시원은 침낭 속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노(NO)를 준비한다. 침낭을 뒤집어 쓴 형상의 작가, 눈만 빠끔 내비친 작가, 그리고 침낭을 휘감고 뒤뚱뒤뚱 기어가는 작가, 달팽이가 남긴 흔적처럼 소라고둥을 업고, 작가는 소리 없이 한발자국 한발자국 상하좌우로 이동한다. "그러나 누가 뭐래건 나는 누워서 열심히 사는 중이야." 그리고 시원은 우리의 삶 속에 수없이 삭제되고 유보되는 것들에게 다가가 속삭인다. 차곡차곡 쌓인 재고박스에게 "수고 했어" 빈 생수병에게 "다시 만나", 그리고 견에 물을 분사하고 주름을 펴고 밀가루 풀을 바르고 밀착시키며 곧 다가올 선이 나아가야 할 공간을 준비한다. ● 전통적으로 한국화는 실경(實景)과 진경(眞景)을 구분했으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실경의 형태와 진경의 형상을 한 화폭 위에서 자기만의 관념(觀念)으로 펼쳐나가는 등 다양한 접근과 해석이 가능해진다. 전통적으로 구분했던 먹과 색채, 먹의 번짐과 번지지 않음, 공간의 여백과 수묵조형과 같은 이분법적 논리가 서로를 배척하기 보다는 그 양의성(兩意性)의 생명력으로 화합한다. ● 시원은 드로잉과 견, 분채, 아교, 먹 등을 사용하는 전통매체를 다룬다. 드로잉은 사고의 기록을 그리고 전통매체는 효율성과 가성비의 사회를 향한 저항의 수행방식으로 작동되는데. 침낭 속에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넒은 여백 안에 세밀하게 그려나가는 시원의 드로잉은 간결한 메시지와 함께 꼭 필요한 만큼의 공간을 대상에게 부여한다. 서양미술로 분류되는 드로잉의 과정을 동양화의 사색과 여백의 미로 접근하면서, 시원의 드로잉은 하나의 작품으로 온전하다. 한편 시원은 "예민한 견 위에 수번의 아교 포수를 포함한 전처리 과정을 거치고, 먹을 갈고, 안료를 개어 아교와 섞어 물감을 만들고, 먹과 안료를 천천히 이염하는 행위의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그의 사고의 궤적을 옮겨올 수 있는 근본 지평을 마련한다.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전통매체의 반복 행위 속에 일어나는 작가를 둘러싼 시간의 이동, 대기의 변화, 사고의 순환 그리고 세상을 향한 언어들은 꽉 찬 비어있음으로 원초적 혹은 순수 공간을 구축한다. 시원의 드로잉과 전통매체는 여백과 세밀한 묘사, 공간을 열어가는 선의 움직임과 선이 만들어가는 공간의 열림과 같은 조형적 형식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제적 내용에서도 흥미로운데, 시원은 결코 세상을 향한 특유의 저항정신과 날 선 위트를 놓지 않는다. ● 성경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선한 자와 악한자를 구분하여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랜 시간 나태한 동물로 죄와 악을 상징했던 염소는 왼쪽의 자리에. 근면 성실한 동물로 선과 덕을 상징했던 양은 오른쪽의 자리에. 시원의 드로잉은 나태한 염소의 옷을 집에 걸어두고, 입어보고, 거울에 비춰보는 드로잉 연작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모두 염소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던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음에도, 우리가 살아가고 사회는 생산과 비-생산, 효율과 비-효율과 같은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하루하루 죄책감을 이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그래서 때로는 값싸게 대량판매 되는 양의 옷을 구입해 근면성실(ㄱㅁㅅㅅ)한 척 살아보기도 하고… 인류의 발전과 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전구(여기서는 시원의 작업실을 밝히는 형광등)을 나태한 염소의 두개골 사이에 꽂으며, 밤을 밝혀 야간 노동을 가능하게 하고 인류가 더 빠르게 더 많이 일할 수 있도록 공헌한 과학의 발전과 이에 순응하는 인류의 성실함과 선함을 의심한다. ● 포스트 미디엄과 테크놀로지를 논하고, 구상과 추상, 평면과 입체, 조각과 설치를 구분하는 오늘날, 전통매체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그 시의성 마저 떨어지는듯하다. 그러나 바로 시의성에 대한 질문과 함께 현대와 전통매체를 다시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우리 사회 전반의 흐름 속에서 양의성에 도달하기 위한 옛 화가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그렇지만 다르게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것은 기술이 아닌 태도에서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 145장의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누우면 보이는 풍경(2021)」은 침낭 속에 들어가 보이는 실경, 즉 침낭의 지퍼 사이로 새나오는 형광불빛에서 시작해 점차적으로 어둠을 인식하고 의식의 세계가 빛으로 도달하는 진경의 순간 너머 관념의 공간을 담는다. 침낭의 안쪽 지퍼에서 눈감음의 감각으로 그리고 인식의 흐름과 반짝임의 순간으로 무시간을 향한 이동의 속도는 시계를 발명하기 이전의 무한의 세계로, 전구가 발견되기 이전의 어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시원의 의식은 무(蕪, nothing)에서 공(空, void)으로 다가가는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145장의 장대한 여정이 펼쳐지는 긴 복도의 끝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145장의 종이를 픽셀의 면으로 압축한 1분 3초의 영상이 상영되는데, 폭염 속에 켜진 전시장의 에어컨과 관람객의 움직임을 홀로 견뎌야 하는 145장의 종이들과 안전한 디지털의 세계에서 보호받고 있는 픽셀들의 상이한 운명 속에서 다시금 시원의 묵도와 저항이라는 양 날의 끝을 발견한다. ● 어쩌면 동양화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나의 질문이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오히려 한국의 전통매체는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현재와 관계하고 있는지 그 시의성을 연구하며, 전통매체를 바라보는 고루한 시각의 전환이 필요한 듯 하다. 비효율적이고 가성비 떨어질 것만 같은 드로잉과 한국의 전통매체를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효율성과 가성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반문하는 시원의 의심은 유효하다. 그의 의심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눈으로는 잡히지 않기에 펼칠 수 있는 무한의 공간에 흩어진 크고 작은 신호를 들을 수 있게 한다. 사회가 종용하는 옳고 그름, 화폭의 전체와 모퉁이, 조형의 균형과 균열, 수동과 기계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동시에 이들의 화합과 공생을 추구하는 시원에게 있어 "예술가가 하는 예술노동이란 개인의 가치를 규격화하여 재단하는 사회 속 조건화된 물음에 반문하는 것" 일 뿐이다. ■ 배은아

신나운_Dual Accumulation_부분

냅킨을 주요 재료로 입체를 만드는 연작의 일환으로 냅킨을 이어붙여 확장된 냅킨을 만들었고 이를 기본 유닛으로 평면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세 작품은 모두 다양한 형태, 텍스처, 크기를 탐구에 관한 것이고, 빠르게 만든 작품부터 정교하게 만든 작품까지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고민의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전시 공간에 설치하면서 작품과 공간 간의 관계를 실험해 볼 예정입니다. ● 영천에 오기 전에 낱장의 냅킨으로 천천히 만들던 작품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누적과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냅킨이 쌓여 추상적이고 유기적인 형태, 결, 층을 만들어내고 작품들이 모여 살아있고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 신나운

정민영_The Hidden Dimension_ 그물망, 다이크로익 필름, 연무기, 바이노럴 비트 음향_700×1400cm_2021

정민영_한아름展 / 2021_1201 ▶ 2021_1205 visual artist 정민영 작가 비평: 시안미술관 출품작을 중심으로-확장된 감각과 경험, 새롭게 직조된 사이를 보다 ● 물리적 힘과 방향에 의한 관람자의 선택과 감각으로 생성된 이미지는 관람자 스스로가 만든 자신만의 고유함을 지닌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제시한 이미지와 공간 사이에서 서성이지만 이내 경험을 동반한 감각의 확장을 통한 사유의 세계로 자릴 옮기고, 어느덧 각인된 기억과 경험의 층위를 헤집으며 예술과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 그런데 이때 관람객은 단지 무언가를 획득하는데 소비되지 않는다. 일정한 무대 위에서의 행위와 경험, 상호성을 통한 소통은 그 자체로 존재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작가에 의해 설계된 공간은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상을 평범하게 소비하는 것 같으나, 실은 그 또한 존재성에 관한 자문으로 가득 차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다.1) 이는 정민영 작업에 숨겨진 현사실적인 내용이며, 작가와 관람객 모두 공유하는 존재의식의 연장이랄 수 있다. ● 정민영의 작업에서 예술언어는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이미지, 문자 등의 예술적 소재를 넘어 무언가를 공유하기 위한 도구이며, 방식이자 작품이다. 그렇게 하여 드러난 작품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공간 또는 경험한 공간, 불특정 참여자들과의 '관계적 상호작용'에 방점을 둔 결과물이다. 그의 이미지와 문자, 설치라는 형식, 리서치 등의 연구과정을 모두 조합하면 '나'의 존재를 규정짓는 의미들을 조립, 집약하고 조각된 공간을 통해 타자에 의해 내가 덧대어진 문장이 됨을 알 수 있다. ● 이때 눈에 띄는 것은 작가가 의도한 이미지가 '경험의 틀' 안에서 완성되길 바란다는 점이다. 얼마 전 영천창작스튜디오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의 경우가 그렇다. 당시 그는 빛이 투영되는 아크릴 소재를 사용한 작업을 천장부터 길게 늘어뜨린 형식으로 선보였는데, 이는 작품을 보는 관람객들이 보다 자유롭고 제한 없는 시점에서 느끼거나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 이미지에 변화를 주거나 스스로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개념은 단순한 사물과의 단편적 호흡을 이탈한다. 무엇이 존재이고 존재로부터 존재성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를 콕 집어 언급하진 않음에도 일련의 작업을 통해 현실을 토대로 한 존재와 타자에 대한 관심이 배어있음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존재와 타자는 작품을 매개로 한 상호성을 거쳐 감각적 경험에 이르고, 이 감각적 경험은 무의식의 체계로 진입한 채 시각 이상의 무게로 남는다. ● 지난 7월부터 8월까지 진행된 시안미술관에서의 전시 '2nd STUDIO Labeling Society-규약 하는 사회'는 공간과 장소, 감각의 영역으로 확장된 타자를 적극 소환하며 그것에 자발적으로 귀 기울임으로써 스스로 존재하는 방식을 찾아내도록 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사례로 꼽힌다.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그의 다이크로익(DICHROIC) 필름을 입힌 아크릴 작업이나 문자가 조합된 원형의 설치작업, 그리고 공중에 떠있듯 매달린 거대한 사진작업만 따지자면 이미지에 대한 기존 개념에 장르의 경계가 와해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 특히 시안미술관에 펼쳐놓은 작업들은 예술을 통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단계를 지나 조형방식의 변화 혹은 전환의 방법을 보여준다. 또한 공간과 시간의 층위 역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이때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실제화 한다. 오랜 시간 시간에 대해 연구해온 작가에게 조형은 실제화를 위한 부수적 도구일 뿐이며 시공을 정당화하는 주체는 그곳에 그가 존재했던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그의 공간 내 똬리 튼 사물(작품)과 장소, 공간 등은 서로에게 얽히고설켜 관계될 수밖에 없다. ● 정민영 작업에서 시간은 기억의 지평선을 넘어서며 '삶'을 소환해 공간에 안착시키는 장치이다. 필름의 특성상 때론 상상의 환류로 자리하나, 그에겐 기존 사진 속 경험(과거의 작업들)을 끌어내어 고착시키는 매체인 건 사실이다. 이밖에도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공간과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지닌다.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중첩지대를 제시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을 설정하고 규명한다. ■ 홍경한

* 각주 1) 그로 인해 평범함은 특별해지고, 특별해진 우리의 삶은 존재의 의미에 보다 깊게 다가서게 된다.

한아름_Networ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7×145.5cm_2021

흐름, 느리고 무한한 ● 한아름의 그림은 우리를 만화경처럼 새로운 시각 경험으로 이끈다. 작품은 몇 가지 색으로 이루어지는 구도로 아름답게 완성된다. 하지만 그 정경이 뭘 뜻하는지 가늠하긴 쉽지 않다. 대개 이런 그림 앞에서 관객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가지는 그림에 배열된 색과 선과 면에 홀려서 주목하긴 하는데, 서사가 드러나지 않는 알쏭달쏭함 앞에 인내심을 잃고 자리를 금방 뜨는 쪽이다. 다른 경우는 작가가 닦아놓은 도상의 자취를 따라 미로를 헤매듯 그림에 빠지는 쪽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어디까지나 실물을 보고 판단한 일이긴 하지만, 이건 두 패로 갈라진 반응을 통해 성격 진단을 하는 식의 구분이 아니다. 한 사람이 어떤 날엔 이럴 수도, 다음 날엔 저럴 수도 있다. 현대 미술은 살롱 시대를 지나며 작품 앞에 서서 매혹당하는 관객이란 상황이 당연한 듯 굳어졌다. 그게 다 판타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 예술은 판타지와 가깝고, 현실은 그 환상과 허구와 거리를 둔다. 내 생각에, 현실에 가장 근접한 추상적 묘사는 통계다. 이 예술의 장력을 측정하는 통계학이 재미없을 수가 없다. 한아름의 그림은 환상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그걸 보는 관찰자들의 태도는 객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 기댓값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둘로 분할된 집단 태도다. 나는 한아름 작가의 회화와 유사한 형식을 가진 작품을 줄곧 지켜봐 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나는 모더니즘 미술 자체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작가와 주변의 언술을 보고 듣는 일에 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작가 한아름에 관해서도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 확실히 숫기 없이 여린 작가의 품성 때문에, 그가 설명하는 세계관은 투명하다. 어떤 화가가 이전 회화 시기의 선구자들이 미처 끝내지 못했다는 점‧선‧면‧색 조형 실험을 잇겠다고 자처하는 태도가 한아름의 그림에는 안 보인다. 자신들 작업이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공동 이익에 이바지한다는 명분과도 멀찌감치 있다. 또 그런 자의식 과잉의 예술가들이 부담스럽다는 청년 세대의 정서 표출도 여기에는 없다. 그래서 실망스러워야 하나. 그럴 리가. ● 한아름의 작업은 지금 단계에서 이런저런 선언적 가치보다 본인에게 더 절실한 무엇을 담고 있다. 그게 뭔가 하면, 자기 치유다. 우리는 안다. 사실 치유니 뭐니 하는 것도 낡은 기성품 같은 언술이다. 그렇긴 한데 자기 치유란 말을 드러낸 것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며, 이런 나에게 그는 작업의 동기만을 소심하게 전했을 뿐이다. 그림에는 뾰족한 모서리를 가진 낱개들이 공간을 떠다닌다. 오랜 시간 동안 풍화작용을 거친 돌은 그렇지 않다. 날이 선 가상체는 그만큼 최근까지 받은 인위적인 충돌이 있었다는 암시다. 그게 일터나 학교일 수도 있고, 집이거나, 미술계일 수도, 아니면 그것들이 서로 얽혀 부딪힌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한 자아가 사회 속 인간관계에서 손상당한 모양새가 스스로 찔러대는 자학적 태도처럼 보인다. ● 그림을 좀 더 살펴보면, 전체는 하나의 망처럼 엮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건 바로 작가가 학창 시절에 청바지 천의 올이 나간 모습에서 시작한 도상의 증거다. 천의 촘촘한 짜임이 곧 인간관계라면, 그 결속이 영원하리란 보장은 없다. 날카로운 입방체들은 실을 끊는 주변의 무자비함이며, 이 환경에서 자아는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힘들었다. 상처 입은 인격과 그걸 위협하는 인자들 모두 몇 가지 색으로 쌓은 층위로 그려졌다. 일종의 옵티컬 아트로 볼 수 있는 한아름의 회화는 색의 층으로 역동감과 착시감을 연출한다. 낱낱의 도형과 면들은 색과 빛을 품으며, 상처 입은 자의식 또한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삼각형은 색의 층을 쌓아 중심은 하얗고 밝은 색조로 영광과 힘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백색의 톤은 공허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많은 그림을 통해 그는 화면 속 한 부분에 자유로운 여지를 간신히 마련해 놓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본인의 작업에서 위안을 받는 피신처이다. 이런 지점을 포함한 공간 유희를 그림 속에서 찾는 재미가 하나의 감상법이다. ● 이번 전시에 공개된 여러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정서적 폭력의 상징체들을 아름다움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구성체는, 심지어 작품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의 시점까지도 어떠한 관성에 유도되는 움직임의 법칙에 지배당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느리지만, 쉼 없이 반복되며 개별 작품을 넘어서 이 화가의 작품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축에 이끌린 상황이다. 작가 본안에게 이러한 묘사는 암호화된 이력이자 위안거리가 될지언정 그 순수한 조형의 공간을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스스로 깨달았다는 물증이다. ■ 윤규홍

김시원_이웃과 하는 대화에서 느끼는 느낌 The Feeling of Having Conversation with My Neighbor_ 캔버스에 유채_122×111cm_2021

김시원展 / 2021_1215 ▶ 2021_1219 감각의 구도자, 김시원 "감각과 감각 : 살아있는 상태로 전진하다"展에 부쳐 ● 사람들은 항상 감정을 느낀다. 일상은 희로애락,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겁다. 평온함 속에서도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은 항상 나의 옆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폴론의 후예들은 감정을 거세하려고 한다. 감정은 번뇌로, 칠정(七情)으로, '대중의 기질'로 귀납되며 통제된다. 반면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자들, 즉 예술가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번뇌를 없앤 부처에게 미소를 주고, 결혼을 거부한 여왕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 감정은 감각기관에서 자극을 받으며 발생한다. 감각이 예민할수록 감정은 풍부해지며, 풍부한 감정 상태는 예술가에게 다양한 동기를 제공한다. 따라서 감각은 예술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이다. 한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면, 예술가는 "나는 감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번 "감각과 감각 : 살아있는 상태로 전진하다" 전시의 작가 김시원은 감각과 존재,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감정을 찾으려 한다. 순수한 감각은 무엇이며, 감각하는 자아의 존재양식은 어떠한지를 탐색한다. ● 2014년부터 활동을 시작할 때 작가가 원하는 자리에 이러한 물음표가 찍힌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런던에서 작가 활동을 했던 그는 신표현주의적 회화, 개념예술, 추상 회화, 퍼포먼스, 미니멀리즘 등 다양한 예술 사조를 실험한다. 'Not To Know Where To Hide'(2014)는 한 평 남짓한 공간을 세 분면으로 구획하고 구조를 전도(顚倒)한 개념예술 작품이다. 도상과 상징을 활용하여 각 분면을 영역화하고 텍스트는 그 영역을 흘러간다. 율동적이고 유희적인 텍스트는 타자로부터 시선을 받고 침대 아래로 수줍게 숨는다. "아스팔트에 끼여 기형적으로 성장하지만 예쁜 열매도 맺는 식물" 연작(2014)이나 '정답 His Answer'(2014)에서도 억압하는 공간 속에서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식물로 자아와 타자의 투쟁을 대유한다. ● 이렇듯 그의 초기 작품은 다양한 예술실험을 통해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타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타자는 콘크리트 같이 단단하고 억압적인 환경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 김시원 작가의 모더니즘적 시도는 2018년부터 화폭으로 자리를 옮기고 동적 추상과 신표현주의적 기법으로 수렴된다. 자아와 환경이라는 이항대립에서 벗어나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 붓질하고 글씨를 덧입히기 시작한다. '나'의 존재는 내밀해진다. 종전 시기의 자아는 '나' 그 자체를 의미했지만, 이제는 '어떤 상태의 나'로 표상한다. 그리고 그 표상의 과정도 그려낸다. '욕망의 분출'(2018), '갇혀있는 감각과 욕망의 소용돌이'(2018),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향하는 문'(2020)은 '내'가 느끼는 감각, 감정, 욕망의 불꽃을 중력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동적인 붓질의 총체다. 이러한 붓질은 칸딘스키의 음악적인 곡선도 아니며, 잭슨 폴록의 우연한 점선도 아니다. 감각, 감정, 욕망이 표출되는 것에 집중한 의식의 흐름이다. '보호된 상태에서 변화하는 사고체계'(2020), '새로운 사고체계로 변형되는 과정'(2020)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도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의식에 맡긴 글씨와 그림은 정연하게 배치되었다기보다 혼란스럽게 삽입되어 있다. 자칫 완성도에 위해를 끼칠 요소들을 주저함 없이 화폭에 옮겨 놓는 행위에서 쉬운 길 보다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 올해 발표되는 작품들은 그의 새로운 여정을 보여준다. 초기의 작업과 2018년의 변화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로 작업을 종합한다. 2018년부터 3년간의 경험은 작가에게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계기가 된다. '내'가 '나'이기 위한 순수한 것은 무엇인가. 그 결정체를 찾기 위해서는 '나의 작업'은 외부의 맥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자를 상정한 작업은, 감각의 피사체를 찾기 위한 발상은 오히려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과정을 방해하는 착안이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내면에 집중하고 추상을 선택한다. ● 작가에게 있어서 내면은 단지 의식과 정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뜻한다. 신체는 감각, 감정, 욕망의 연장이다. 신체의 감각기관은 자극을 수용하고, 그 자극으로부터 감정이 발현된다. 과거 억압하는 타자를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면, 이제는 그 자극의 수용체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체가 타자를 내면에 길들이기 바란다. '속이 뻥'(2021), '숨통이 텄다'(2021)는 감정을 내장의 상태로 표현한다. ● 그는 순수한 내면을 찾기 위해서 추상의 전략을 도입한다. 여러 추상의 기법 중에서도 해체와 단순화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기호학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선택한다. 관습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순수한 감정을 의식에서 추출하여 자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감각의 외현화" 연작(2021)이 그러하다. ● '외현화(外現化)'는 내면을 외부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자아의 정체성을 이루는 의식에서 감정을 유도하고, 그 감정을 신체로 감각하려는 것이 '감각의 외현화'라 할 수 있다. 신체의 감각을 통해 감정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해체하고, 기호화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개의 선과 단순한 색만이 필요하다. ● 그의 도전은 무모해보이기도 한다. 이명(耳鳴)처럼 감정의 잡음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순수한 감정을 의식에서 추출할 수 있을까. 순수한 감정의 뼈에 끈적이며 붙어있는 관습적 감정의 신경과 살을 발골(拔骨)할 수 있을까. 심지어 순수한 감정이 존재할까. ● 하지만, 예술가는 세계관을 형성하는 자이지, 진리를 완성하는 존재가 아니다. 진리를 좇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교류하면서 그것을 확장·변형한다. 작가가 감각을 섬세하게 만들어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은 예술 활동의 보편적 과정이며, 그 보편성은 작품의 의미를 구축한다. 비록 그가 감각을 100%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감정을 잡음과 관습에서 완벽하게 추출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작가는 신체의 화덕에 풀무질하고 감각을 벼리는 과정을 통해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 자기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구도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것이라 믿는다. ● 누구도 존재의 끝과 목적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하느님의 손은 그 비밀을 감춘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또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오류들처럼 우리는 그 비밀을 더듬어 찾고, 움켜쥐고, 놓아주고, 버티고, 움직이고, 그 안에 머물며, 걱정할 뿐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제3권 13장 ■ 박거일

Vol.20200420d |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 릴레이전 & 오픈스튜디오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