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의 낮과 밤

전기숙展 / JEONGISUK / 全基淑 / painting   2021_1017 ▶ 2021_1112

전기숙_불타는 밤, 붉은 얼굴. 불멍, 너멍 Nocturnal landscape6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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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숙 블로그_https://jeongisuk.tistory.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제주특별자치도_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돌담갤러리 DOLDAM GALLERY 제주도 제주시 중앙로 58 하나은행 금융센터지점 B1 Tel. +82.(0)64.757.2171

작은 섬에서 찾은 대자연 - 잔상(殘像)에서 심상(心像)으로 ● 화가의 작업실은 우도 섬 한복판에 있다. 우도창작센터에 초대받은 방이다. 시원하게 뚫린 삼면 창밖으로 수평선과 섬의 끝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이 저물 무렵이면 멀리 불빛을 반짝이며 고기잡이배들이 밤샘 작업을 준비한다. 별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히고 흰 구름은 산홋빛으로 붉게 물든다. 그 사이 허공은 선녀들이 둘렀을 법한 청옥빛 옷자락이다. 창턱 밑에서는 검붉은 돌담을 따라 거센 비바람을 이겨낸 덤불과 풀들이 밤새 또다시 불어닥칠 바람에 한바탕 떨며 울어댈 채비를 한다. ● 그렇게 풍경이 비치는 창가에 앉은 화가는 영락없이 15세기 피렌체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초상화의 주인공 같아 보였다. 화가들이 반세기 넘게 그려댄 귀부인의 초상이다. 그 뒤쪽 창 너머로 실개천이 구비 치고 단풍나무 사이로 밭들이 이어지는 마을이 엿보이는 초상이다. 우도의 배경은 중세의 배경보다 그윽한 맛은 덜해도 어지간히 신선하다. ● 작업실 벽면에는 크기가 다른 화폭들이 걸려 있었다. 유화 작품들이다. 대부분 화가가 주로 밤중에 그렸다는 야경이다. 화면 구석에서 날아드는 탐조등 불빛을 맞은 조랑말은 언뜻 위태롭고 불안해 보인다. 유유하게 들판을 가로지르는 덩치 큰 말은 우도의 풍경에 환상을 더한다. 파도가 둑 위로 넘실대는 낮은 언덕 위의 집들도 흔들리며 폭풍의 위력을 암시한다. 어둠 속에서 땅콩 잎을 태우며 화염을 지켜보는 사내의 옆모습에 스산한 밤공기도 더욱 움츠린다. ● 해 질 무렵의 화려한 색채도 검은 암초 사이로 치솟는 물거품도 화폭을 적신다. 까마귀 떼를 부르고 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오도록, 따뜻한 불가로 몰려든 주변의 이미지를 떡처럼 주무르는 마녀처럼 화가는 좁은 작업실 안으로 창밖의 이미지들을 불러 모았다.

전기숙_꿈꾸는 밤 Nocturnal landscape2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0
전기숙_멀리서 밤안개가 몰려온다 Nocturnal landscape1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20
전기숙_어둠속으로 Nocturnal landscape9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0
전기숙_주술사의 밤 Nocturnal landscape4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20

우도는 하늘과 바다가 서로 가까이 접하고 있어 자연의 변덕이 잦아 울긋불긋하기 일쑤다. 먼 옛날부터 일기가 예민한 이런 바닷가에서 예언가와 길흉과 운명을 점치는 많은 신화가 쏟아졌다. 낮과 밤이 겹치며 교대하는 시간마다 스펙트럼의 광채로 눈부신 섬 주변의 환경은 영감이 풍부한 예술가들의 상상과 정념을 물씬 흔들어대었다. ● 화가는 우도에서 '말테우리' 생활을 체험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창작공간 지원정책의 취지를 이해하는 작가들도 역사를 되새기는 커다란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그 지역의 생활 현장에 뛰어들면서 그곳 사람들조차 모르던 수수께끼를 찾아내는 작가는 흔치 않을 듯하다.

전기숙_그녀의 정원 Nocturnal landscape13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21
전기숙_검은 융단 바다 Nocturnal landscape7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20
전기숙_한 여름 밤, 섬의 오로라 Nocturnal landscape3_캔버스에 유채_ 80×80cm_2020
전기숙_너의 등대 Nocturnal landscape5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20

화가는 주어진 장소의 은밀한 매력을 모두 자기 것으로 삼겠다며 언덕 위로 말과 함께 거닐 때마다 거대한 자연에 얼마나 감탄했을까! 맞은편으로 성산일출봉과 또 다른 방향으로 오름들이 포진한 뒤쪽으로 한라산이 있다면 그 반대편은 망망대해다. 작은 섬 언덕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넓은 하늘과 바다와 땅이다. 거창하고 멋져 보이는 대도시에서 잘 보이지 않는 맑고 넓은 하늘과 바다가 이곳에서는 후련해할 만한 절경을 떠받친다. ● 히스클리프가 울먹이며 방황했던 '폭풍의 언덕'처럼 비통한 사랑을 숨기고 있을 듯한 무대는 아니다. 어쨌든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 할 만한 곳이다. ● 화가는 낮에 해안의 오솔길과 풀밭에서 목동이 되어 말들과 어울리다가 밤에는 화가로 변신해 낮에 눈여겨 두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그렸던 모양이다. 방울만 한 말의 넓은 시야보다 더 드넓은 내면의 심연을 떠돌아다니면서 마치 초혼(招魂) 의식을 치르듯 기억 저편에 도사린 유령들을 차례로 불러내지 않았을까? 밤마다 화폭 앞에서 미의 신께 바치는 자신만의 희생제를 벌이곤 했을 듯하다. 자기 자신의 기억을 제물로 바치면서…… ● 화가가 다정하게 이름을 지어준 망아지와 말 또 말테우리 동료들과 어울리던 소중한 시간을 되새기는 작업이다. 구경꾼도 변죽을 울리는 동반자도 없다. 오직 홀로 허깨비 같은 이미지들과 신명을 내는 한밤중의 축제일뿐이다. 자신이 들고 있는 붓 한 자루와 물감만으로 이미지의 세계와 일대일로 결투를 벌이면서 수많은 노획물을 화폭 구석구석에 쌓아 올리는 시간이다.

전기숙_점점 사라지는 시간 Nocturnal landscape12_캔버스에 유채_45×45cm_2020
전기숙_어둠속으로 사라진 얼굴 Nocturnal landscape11_캔버스에 유채_50×72cm_2020
전기숙_텅 빈 달 Nocturnal landscape8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20

화가가 그렇게 그려낸 작품이야말로 화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말 없는 스승 아닐까? 화가가 그려낸 이미지처럼 거리낌 없이 화가를 질책하고 다그치는 상대가 어디 있을까? 화가가 그려낸 이미지처럼 화가를 두둔하고 뜨겁게 공감하면서 화가를 이따금 절정의 도취에 빠트리는 상대가 또 있을까? ● 아무튼 화가는 정말로 말과 더불어 깊은 밤에 무엇을 그리고 싶어 했을까? 말은 핑계였을 뿐 다른 그 무엇을 그리려고 했을까? 구경꾼인 우리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화가만이 아는 공상의 세계일 테지만 혹시 화가 자신조차 모를 세계가 아니었을까? 그려져 화폭 위에 나타난 것만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것, 붓질을 끝낸 순간 화가의 심정과 머릿속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떠나버린 그런 것이었을까? 희미하고 가물가물한 것의 또렷함, 가까운 듯 먼 것의 애틋함이다. 화가의 붓질은 단순히 망설이는 손놀림이 아니다, 애무하듯 아직 때가 아니니 조금 더 기다리도록 천천히 깊은숨을 내쉴 때까지 자제하고 참고 기다리는 손놀림이다. ● 이렇게 그린 작품들은 그전 여러 해 동안 '론도' 풍의 연작에서 단색조로 반복하던 필치와 무척 달라진 수법을 따랐다. 현악기의 현을 끊어버리고 북채를 잡고 북을 두드리기 시작한 듯 갑자기 거칠고 어둡고 짙은 색채로 돌아섰다. 급변한 동기는 한둘이 아니겠지만 둔한 사람이 아니라면 낯선 섬으로 건너와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의욕에 넘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인 화가는 "그림은 언제나 풍경에 못 미친다"라며 아쉬워한다. 놀라운 성찰이다. 예술가들은 대체로 자기도취가 유난스러운 편이라 겸손한 예술가를 본다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문 미덕이다. "자연보다 내 작품을 보라!"고 큰소리치는 화가들은 흔하지만. ■ 정진국

전기숙_안개속에 혼자, 톨칸이 Your wind1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1
전기숙_몰테우리 Your wind3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21

우도의 밤-야행성 풍경 - 풍경들의 '의인화'이다.  ● 우도 곳곳을 다니며 마주한 풍경, 그 중에서도 밤풍경들은 특별하다. 낮시간 동안 밀려다니는 관광객들을 돌려보내고 해가 저물어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풍경들. 슬쩍 다가가보면, 생명을 가진 그 밤풍경들은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어둠속에서 옅은 빛을 발하는 야행성이 된다. 밤 산책길에 나선 나 또한 그 풍경들 속의 일부가 되어 어둠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면, 야행성 풍경들은 낯선 듯 쳐다보며 나에게 조용한 말을 건넨다. 풍경을 만났을 때 그 첫인상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 풍경들을 마주했던 나의 상황과 기억들을 같이 끄집어내어, 우도의 바람을 닮은 거칠고 가벼우며, 빠른 붓질로 그림에 쏟아냈다. 그러면 내가 그린 그 야행성 풍경은, 풍경들이 나를 쳐다보던 시선과, 풍경을 만났던 나의 시선이 하나가 되어 그림으로 되었다.  

전기숙_무지개가 뜬 날 Your wind5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1

우도의 낮 - 너와 함께 바람 속을 달렸단다, 너의 바람이 나에게도 왔었단다 ● 300년전, 아무도 살지 않고 풀과 곤충들, 오직 작은 생명들만이 우도의 주인이었을 그 때. 처음 우도봉에 네 발을 디뎠을 말들을 떠올려본다. 두려움 가득한 모습으로, 살이 찢어질 듯 매섭고 짠 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탐색했을 그 큰 눈망울들. 공포와 호기심이 뒤섞인 채 갈기가 휘날리도록 뛰어다니며 땅의 기운을 느꼈을 그 때의 거친 호흡. 들썩이는 콧망울 사이로 거칠게 뿜어져 나왔을 말들의 그 호흡이 바람을 타고 지금 내 숨으로도 들어올까. 추운 겨울 바람을 몰아내고 봄에 태어난 새끼말들이 처음 맞이하는 가을 날, 시원한 바람에 신이 나서 하늘을 향해 뒷발질을 하는 그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전기숙_바람을 타고Your wind7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1
전기숙_멀리서 너를 Your wind2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1

우도의 시작 같은 생명, 우도봉우리. ● 우도에 도착해서 처음 우도봉으로 산책을 갔을 때 너른 들판에 무리 짓고 있는 말들을 보며, 새학기에 처음 만난 친구처럼 먼저 가서 친해지고 싶었다. 그들과 친해져서 밥도 주고 같이 놀며 우도봉을 뛰어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말을 키우고 관리하는 몰테우리들과 친구가 되었다. 말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하면서 말 타는 법도 배우고, 말들의 몸짓과 언어를 이해하고 조련하는 법도 배웠다. 그러다가 나는 딴 사람이 되었다. 멀대처럼 솟아오른 고층 빌딩과 도로 위를 시끄럽게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미술을 위한 미술을 생각하던 가냘픈 도시인의 삶을 살던 내가. 그랬던 내가 이제는 우도의 몰테우리가 되었다. 날씨가 맑은 날,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 작업실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바다와 초원이 있는 우도봉에서 거친 바람을 맞으며 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름 없는 말들에겐 이름을 지어주었다. 먹을 풀이 없어지면 같이 걱정했고, 그들이 아프면 내 마음도 아팠다. 가을 날 밭사이에서 말들이 좋아하는 우도땅콩잎을 보면 신이 나서 주워담고, 멀리 마실 나간 새끼가 안 보여 울부짖으면 나도 함께 새끼를 찾아 풀섶을 헤매었다. 그렇게 말들을 키우며 이제 나는 말들의 어미가 되었다. 봄에 새로 태어난 새끼말들은 다 내 새끼가 되었다. 우도로 작업실을 옮겨온 후, 몇 달 동안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 고민이 많았다. 낯선 우도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말들처럼, 새롭게. 복잡한 치장은 다 걷어내고 생존키트 같은 최소한의 도구들로 담백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는 우도라는 땅의 오래된 주인이자, 내가 정말 사랑하는 말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싶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 내가 아니면 그려지지 않을 그것들. 그것들을 정성스럽고 신나게 그린다면. 그러면 회화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전기숙_푸드덕 Your wind4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21

우도의 낮과 밤 ●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도시에 살면서 회화 작업을 해왔던 나는, 울릉도에서 한달 동안 생활했던 경험을 시작으로 섬에서의 삶에 매료되었고, 2020년부터 "섬 속의 섬, 우도"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2년 가까이 우도에 생활하면서, 도시에서 섬으로 이동한 거리만큼 생활 환경의 변화도 컸는데, 도시인들의 예민한 신경다발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단순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힘을 만났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우도 주민들의 명료한 삶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나 또한 점점 우도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내 작업의 오랜 소재였던, 도시인들의 복잡 미묘한 기록이나, 기억의 미세한 오류, 불확실성에 대한 고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가버렸다. 숨막히게 거센 바람과 파도, 계절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생명들, 자연과 서로 원하는 것을 조화롭게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우도 주민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며, 내 작업에도 이런 우도의 풍경들을 담기 시작했다. 특히 우도의 밤풍경은 주민들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관심 받지 못하고, 짧은 낮시간 동안 섬을 점령하다가 해가지면 섬을 떠나버리는 관광객들에겐 허락되지 않는 장면들이다. 이러한 우도의 숨겨진 밤풍경과 거친 바다의 모습, 우도 주민들의 특별한 생업의 모습 등등 우도에 직접 거주하며 관찰했던 아름다운 모습들을 우도의 거친 바람을 닮은 붓질을 통한 회화작업으로 진행중이다. 2020년에는, 주로 밤풍경들을 채집하여 '야행성 풍경'이라는 시리즈로 12점의 회화를 제작하였다. 2021년 현재에는 말을 타고, 기르며, 관리하는 우도의 몰테우리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너의 바람이 나에게도 왔었단다'라는 시리즈로 낮의 풍경을 회화 작업으로 제작 중이다. 두 시리즈가 묶여서 '우도의 낮과 밤'이 완성된다. ■ 전기숙

Vol.20211018c | 전기숙展 / JEONGISUK / 全基淑 / painting

2025/01/01-03/30